4화 라이프 포스 베슬 형성
시스템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내 생존까지 들먹여댔다.
잠시 내가 에너지가 부족해서 죽을 상황이었나 착각할 정도로 애타는 메세지였다.
만난 지는 얼마 안됐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시스템 메세지만 놓고 따져봐도 시스템은 내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안될 놈 같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데 소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그녀와 난 꽤 먼 거리였다.
하지만 마치 손으로 그녀가 가방 안에 숨긴 마력로라는 걸 잡은 것처럼 그 두근거림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졌을 때.
살인마 소녀가 날 죽이러 다가올 때.
이 황량한 세상에 내던져진 이후 내게 희망은 없었다.
하지만 소녀가 다가오며 그녀 품에 안긴 박동을 느낀 순간,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본능적인 희망을 느꼈다.
'저게 있으면 나도 살 수 있어!'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한 건, 호흡과 혈액 운행을 돕는 생명유지장치의 부재와 복부의 관통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본능은 소녀의 마력로만 확보하면 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단지 그 물건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을 뿐인데, 삶의 희망을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확신인 것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고 들은 모든 정보들이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건 마력로군?"
난 담담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당신에게 원한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어요."
하지만 소녀는 칼조차 뽑지 않고 내 죽음을 선언했다.
자신의 물건을 노리는 추적자들에겐 상소리도 마다않던 소녀였다.
하지만 무력한 내게 존대하는 걸 보니,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거기서 희망을 보았다.
난 절망하는 대신 필요한 정보부터 조합해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갈구하는 마력로.
스무 명의 추적자들이 소녀와의 안면을 몰수하고 탐낼만큼 비싼 물건.
소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물건.
그리고 쓰레기 매립지.
정보는 충분했다.
"마력로. 귀한 물건이지. 그런데 그 물건의 주인은 왜 그런 보물을 쓰레기 더미에 버렸을까?"
담담한 표정으로 내 목을 짓밟으려던 소녀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녀의 몸짓 언어가 내게 확신을 줬다.
내가 살아날 기회는 거기에 있다고!
"네 가방에서 새어나오는 마력이 느껴지지 않나?"
"마력이 느껴진다고?"
소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아직 가동하지도 않았는데, 에너지가 밖으로 새어나오다니... 차폐가 안됐어. 설계에 이상이 있었는지 아니면 제작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함품이야."
"쓰레기장에 버려진 고철 주제에 초소형마력로에 대해 뭘 안다고 제 멋대로 지껄이는 거지? 이런 물건을 구경해 본 적도 없을텐데?"
그녀는 같잖다는 태도로 날 매도했다.
하지만 은연 중에 자신의 가방을 움켜쥐는 걸 보니, 초소형마력로라는 물건이 내 말대로 결함품이 아닌지에 대해 걱정하는 게 틀림없었다.
"결함품이 아니라면 왜 그렇게 귀한 물건이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졌겠어? 원주인은 그 마력로가 결함품이란 걸 알고 버린 거야."
반박하려던 소녀는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더, 더 가까이 와봐! 그럼 어디가 잘못된 건 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본능을 참지 못하고 말한 순간, 그녀는 한걸음 물러나버렸다.
그녀의 시선이 날 훑는 게 느껴졌다.
사지를 잃은 몸.
하복부에 박힌 철조각.
목 뒤를 물들이는 핏물.
호흡조차 힘겨워하는 컨디션.
그녀의 눈에서 경계하는 기색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이게 결함품인지 구분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C 구역에 있는 연구소를 찾아가야 할 거야."
난 데니스와 브래드가 언급한 C 구역이란 지역을 언급해봤다.
병원을 출입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 사회.
시경찰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3등 시민에 대한 정보는 내 말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마력로 전문가를 찾아서 그에게 물어봐. 그럼 내 말이 사실이란 걸 알 수 있을 거야."
난 빨강머리 소녀의 안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피며 주사위를 던졌다.
"설마 당신이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마력로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겠지?"
"콜록!"
소녀의 질문에 대답하려는데, 기침과 함께 피거품이 솟구쳤다.
하지만 이미 쇠약해진 난 피거품을 뱉어낼 힘이 없었다.
내가 토해낸 핏물에 질식하려는데, 소녀가 다급한 표정으로 날 옆으로 눕히더니 내 입에서 핏물을 긁어내 기도를 확보해줬다.
"후... 다른 대안이 없으면, 내가 죽기 전에 내게 맡겨보든가..."
그녀는 더이상 내 출신을 묻지도 날 죽이려들지도 않았다.
그 행동만봐도 그녀에게 믿고 마력로를 감정받을만한 어른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어디가 잘못된 물건인지 알 수 있는 거 맞아요?"
그녀는 여전히 날 의심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존대하는 걸 보니 내 말을 아예 무시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 멀어. 내 눈으로 봐야겠어."
테리는 내 말을 듣고 흔들리고 있었다.
하나뿐인 눈으로도 그녀가 흔들린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매립지를 둘러보고 다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가방에서 달걀만 한 금속덩어리를 꺼냈다.
마력로라고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조금 큰 쇠구슬일뿐이었다.
하지만 테리가 내 눈앞에 그 쇠구슬을 들이민 순간!
그 안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마력회로가 느껴졌다.
< 새로운 [마력회로]를 발견하셨습니다. >
< [마력회로 설계도]를 저장하시겠습니까? >
내가 마력회로를 느끼는 순간, 시스템은 내 눈앞에 내가 느낀 마력회로를 3차원 형태로 구현시켜서 보여줬다.
'저장한다.'
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상태임에도 새로운 기계공학에 대한 간절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설계도를 저장하라고 지시했다.
그건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시스템이 띄워준 기하학적인 3차원 회로도를 본 순간 더 크게 확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내가 좀 더 크게 보고싶다고 느낀 순간, 시스템은 원형 마력회로를 확대해서 보여줬다.
난 회로를 확대하고나서야 거슬리는 부분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마력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아야할 마력회로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
"마력회로? 혹시 마법식을 얘기하는 거에요?"
"이걸 마법식이라고 부르나? 끊어진 부분이 없는 걸 보면, 제작단계의 불량은 아닌 것 같아. 설계부터 잘못한 불량품이겠지."
난 마력회로 아니, 테리가 말한 '마법식'을 어떻게 고쳐야 차폐기능을 살릴 수 있을지 본능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마법식에 대해 배운 적은 없지만,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도 메카닉 직업의 스킬에 포함된 능력인가?'
난 너무 많아서 스킬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메카닉 직업의 스킬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마법식을 고칠 방법을 알리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아, 안돼! 마력로가 없으면 배틀슈트는...!"
테리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은 사람처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배틀슈트?"
내가 처음 듣는 단어에 눈을 빛내자, 그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피범벅이 된 내 모습을 보자, 경계심은 곧바로 사그라들어버렸다.
"당신, 마력로 전문가라고 했죠? 어떻게 결함을 고칠 방법이 없겠어요? 내겐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이런 물건을 다시 구할 기회는 없을 거라고요!"
배틀슈트라는 단어가 잠시 내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건 아주 순간에 불과했다.
내 모든 관심은 제 할말만 하는 테리 대신 초소형마력로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동시키면 폭발하고 말 거야.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작은 금속 안에 이런 거대한 에너지원을 가둬 둔 거지?"
그 순간, 난 내가 죽을 고비에 처했다는 것도 잊을만큼 방금 처음 접한 초소형마력로라는 발전기의 내부구조가 궁금했다.
내가 자신이 원하는 해답을 내놓지 않고 헛소리만하자, 테리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가 쥐고 있던 초소형마력로가 내 가슴에 닿아버렸다.
그 순간!
어렴풋이 느껴지던 초소형마력로 내부구조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니... 이건 느껴지는 게 아니라... 연결되고 있어!'
난 테리를 만나기 전부터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만큼 쇠약해져있었다.
반대로 초소형마력로는?
'힘이 넘쳐서 문제였지.'
작동시키는 순간 넘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폭발할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작동시키지 않는다면?
마력이 새어나가다 어느 순간 모든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나처럼 초소형마력로도 죽을 운명이란 뜻이다.
주체는 다르지만 둘 다 힘을 잃고 죽는다는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갈 운명이었다.
'생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겠지.'
그 순간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힘이 부족하고 마력로는 용기가 불완전하다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완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완전한 용기를 만들고 그 안에 생명과 에너지를 가두면 죽음을 유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정을 세우자마자, 필요한 준비물들이 내 감각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죽어서 사방에 널부러진 스물한 구의 사이보그들.
삶과 죽음.
육신과 영혼.
유기체와 기계.
나와 초소형마력로를 하나로 이어줄 재료는 그곳에 모두 모여있었다.
< [라이프 포스 베슬]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냈습니다. >
< 영원한 삶을 위해 [라이프 포스 베슬]을 형성하시겠습니까? >
시스템은 내가 깨달음을 정리하기를 기다렸다는듯 그렇게 물어왔다.
'라이프 포스 베슬?'
그건 익숙한 단어였다.
네크로맨서가 리치가 되기 위해 만드는 생명과 영혼 그리고 마력을 담은 금고가 바로 라이프 포스 베슬이었기 때문이다.
리치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생명이 경각에 달한 지금, 난 뭐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형성하겠다.'
내가 대답한 순간, 마력로의 마력이 나에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어!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초소형마력로를 가슴에 품은 내가 공중으로 부유하자, 놀란 테리가 칼부터 뽑아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사방에 널부러져있던 시신들이 내게 날아왔다.
< [라이프 포스 베슬] 형성을 위해 필요한 재료를 확보합니다. >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시신들을 본능적으로 피해낸 테리.
그 덕분에 그녀는 내 몸 주변에서 산산히 분해되는 사이보그들을 코앞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 삶과 죽음, 마력과 생명력, 기계와 생물의 결합에 대한 깨달음이 [라이프 포스 베슬]의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
달걀만 한 마력로가 스무 구에 달하는 반인반기계의 몸과 흩어지려던 영혼까지 흡수한 건 순식간이었다.
그때, 테리가 찬란하게 빛나는 초소형마력로를 가로채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마력로는 반물질 상태로 변한 후였다.
< 데스로드의 고유권능 [혼돈의 별]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
< 메카닉의 레전드 스킬 [마력로연구]의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
< 깨달음을 융합합니다. >
< 서로 다른 계열의 깨달음의 융합으로 라이프 포스 베슬이 강제로 진화됩니다. >
< 삶과 죽음, 마력과 생명력, 기계와 생물을 융합하는 [반물질 코어]를 구축했습니다. >
테리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어느새 코어로 변한 마력로는 내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코어가 내 가슴을 통과해 심장과 결합하는 순간이었다.
생명유지장치가 뽑혀나간 숨골과 철조각에 관통당한 복부의 출혈이 멈췄다.
< 새로운 [동력원]을 확보했습니다. >
< 호흡기와 순환계를 재구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