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출신
"누가 쫓아오는지 확인하는거에요. 여기선 발소리가 크게 울려서 같은 길을 뱅뱅 돌면 기척을 숨기기 어렵거든요."
확실히 폭주족 놈들이 뒤쫓아온다면 빠르게 알아챌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오토바이와 연결된 놈들의 체형구조를 생각해보면 하수구 입구를 통과할 수는 있을 지부터 고민해봐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테리가 정확히 어떤 추적자를 경계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보면 보물창고라도 찾아가는 줄 알겠군."
난 그녀를 다시 떠봤지만 테리는 내 말에 대답해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 후로도 10분 넘게 어둡고 복잡한 하수구 길을 걷다가 우리가 내려왔던 하수구 입구로 돌아와 사다리 아랫부분을 발로 밀었다.
그러자, 벽이 일그러지더니 어두운 천막으로 변해버렸다.
"카모플라쥬였어?"
깜짝 놀라서 물었더니, 테리가 아니라 시스템이 대답해왔다.
< 상당한 수준의 [위장기술]을 발견했습니다. >
< 해당기술을 분석하려면 위장장막에 접촉해주셔야 합니다. >
놈은 내게 손이 없다는 걸 잊어버렸는지, 불가능한 요구를 해왔다.
'이 자식이 사람을 놀리나?'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테리가 차가운 경고로 대답했다.
"쉿!"
상상하지도 못했던 곳에 위장장막을 치고 은신처를 꾸민 빨강머리 소녀의 대담함은 놀라웠다.
그녀가 위장천막을 걷고 숨겨진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에야 비밀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를 반긴 건,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무인경비로봇이었다.
로봇은 레이저를 쏴서 테리의 신원을 확인한 후에야 물었다.
- 주인님. 뒤에 매고 오신 남성은 아군입니까?
"쥬드, 물러나."
하지만 테리는 로봇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명령했다.
그러자 로봇이 총구를 내리고 복도 옆으로 물러섰다.
질문을 무시하고 명령한다.
그게 로봇과 테리 사이에 정해진 약속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테리가 일행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밝혔다면 난 벌집이 됐을 것이다.
"독특한 암구호로군."
"비꼬는 건가요?"
"비꼬긴, 고전적인 방식이라 신기하다는 뜻이었어. 카모플라쥬로 위장한 은신처에 암구호를 사용한 보안체계라니 이색적이야."
"난 사이보그가 아니고, 디지털 통신을 이용한 보안시스템은 해킹당할 가능성이 높잖아요?"
테리는 내가 이 세계의 보안시스템에 대해 정통한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21세기 군대를 경험한 내겐 첨단 위장기술과 구식 보안체계의 언밸런스가 흥미롭기만했다.
< 훌륭한 AI입니다. >
< 무인경비로봇을 흡수해서 AI를 업그레이드 하시겠습니까? >
'시끄러워!'
< 해당 개체를 흡수하면 중기관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 기동력을 상실하신 사용자님께 중기관총은 상당한 공격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
시스템은 어지간히도 무인경비로봇의 AI가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얌전히 좀 있자. 지금은 그렇게 날뛸 때가 아니야!'
테리의 오해와 내 연기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줄도 모르는 멍청한 시스템을 나무라는 데, 내 뒤에 있던 문이 닫혔다.
그러자 하수구에 마련한 은신처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공기가 맑아졌다.
"난 먼저 씻고 올테니까 일단 쉬고 있어요."
테리는 날 소파에 내려놓고 욕실로 사라져버렸다.
순간 그녀의 달큰한 좀비향기가 옅어지자, 조금은 서운한 감정까지 들었다.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 위에 놓인 빨간 사과를 보니, 여기가 하수구에 조성된 은신처인지 도심 속 오피스텔인지 구분이 가지않을 정도였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하수구 안에 이런 은신처를 마련하고 상하수도 시설과 전력까지 끌어오다니, 재주가 좋은 녀석이야.'
내심 테리의 수완에 놀라고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제야 내 상황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분명 난 내 방에서 게임을 하려고 마우스를 연타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눈을 깜빡인 기억과 쓰레기 매립지에서 눈을 뜬 기억 사이엔 아무런 잡음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이질적인 두 기억이 붙어있었다.
두 기억 사이의 격차는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시스템, 내가 매립지에서 깨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사지와 안구에 해당하는 의체를 빼앗기셨습니다. >
'아니, 그 전의 상황을 묻는 거 잖아. 그 약탈자놈들을 만나기 전에, 내 몸이 왜 이런 사이보그로 변한 거냐고!'
< 제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최초의 기록은 약탈자들이 기계의수를 탈취하는 순간부터입니다. >
< 해당 영상을 띄워드리겠습니다. >
시스템은 기계안을 잃어버리기 전에 녹화한 영상을 보여줬다.
브래드와 데니스란 스캐빈저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동영상과 로그 등 시스템이 저장한 모든 자료를 뒤져봐도 그 이전의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시스템도 나처럼 그 전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와 시스템 모두 그 시점에 갑자기 탄생한 것처럼!
난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의 격차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일단 내가 놓인 상황부터 정리해보기로 했다.
중무장한 사이보그가 쓰레기장을 뒤지는 세상.
중화기로 무장한 로봇이 집을 지키는 세상.
그것만봐도 내가 떨어진 세상이 근미래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가까운 미래라고 하기엔 로봇공학이 너무 발달하긴 했지. 마력이란 에너지의 존재도 이질적이야. 미래로 시간여행한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이동해버린 건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건 시스템도 마찬가지였다.
<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
아무리 고민해봐도 왜 중세판타지 게임을 하려다가 이런 암울한 미래에 내던져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명확한 현실이란 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증거가 내 가슴에서 약동하고 있었으니까!
- [반물질 코어]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코어에서 생산된 오묘한 마력이 개량된 동맥을 따라 질주했다.
삶과 죽음, 마력과 영혼, 기계와 생명을 아우르는 마력이 동맥에서 모세혈관까지 뻗어나가며 내 몸을 강건하게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력은 내가 눈치채지도 못한 상처를 회복시키고 죽음의 기운은 흡수해서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그 영향은 단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뿐만 아니라 기계장치인 전뇌와 팔다리의 접합부까지 이어졌다.
< 마력의 순환으로 에너지 효율이 1% 올라갔습니다. >
< 마력의 순환으로 전뇌의 연산능력이 3% 상승하였습니다. >
시스템의 메세지가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육체뿐만 아니라 기계에도 도움이 되는 기운이 바로 내 마력인 것이다.
팔다리에 기계의체를 달았을 때, 어떤 효과를 보일 지 기대가 돼서 미칠 지경이었다.
마력이 순환하며 전신에서 모아온 노폐물과 독소는 정맥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모여 반물질 코어의 연료로 쓰였다.
독소와 노폐물이 반물질 상태인 마력 융합로 안에서 반응하자, 미약하나마 마력이 점차 더 강해져가는 걸 느꼈다.
'시야가 좀... 또렷해진 것 같은데?'
< 0.6이었던 시력이 1.1로 상승하셨습니다. >
'그런 건 내가 알아차리기 전에 먼저 알려줘야하는 거 아니야?'
< 본 시스템은 사용자님의 생존가능성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으며... >
'이 뻔뻔한 새끼!'
내가 가진 거라곤 도움은 안되는 데, 뻔뻔하고 욕심만 많은 시스템과 점차 또렷해지는 오른쪽 시야뿐이었다.
하지만 남은 몸 만큼은 운동선수 못지 않은 활력이 맴돌았다.
모두 코어의 도움덕분이었다.
'고작 몇 시간만에 몰라보게 건강해졌어.'
내 몸이 변화한 시간을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빠른 변화였다.
그건 단지 리치가 만든다는 불사의 단초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네크로맨시와 메카닉의 융합.
난 한동안 내 심장의 활동을 관찰하고 나서야 내가 진정한 의미의 메카닉 네크로맨서가 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로드의 고유권능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거야?'
<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모든 주문이 소실됐습니다. >
시스템은 속 터지는 대답만 내놓았다.
'데스로드의 고유권능은 고사하더라도 메카닉의 레전드 등급 스킬들만 온전히 가지고 있었어도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텐데...'
처치불가의 갓급 보스몬스터 데스로드의 직업과 드워프 전용직업인 메카닉을 골랐던 게 지금의 나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전하게 능력이 전승돼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가 플레이하려던 게임은 중세 판타지 배경이었다고!'
하지만 내가 내던져진 세상은, 사이버펑크에 아포칼립스까지 버무려진 지옥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현실에 한숨을 내쉬는데, 샤워가운을 걸친 테리가 욕실에서 나왔다.
***
욕실에서 나오는데, 거실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하수구 안에 조성하긴 했지만, F 구역에서 이만한 집을 찾아보긴 어려워.'
인테리어만 보고 한숨 쉴만큼 엉망인 집은 아니라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남자의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한숨은 테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F 구역 물정을 잘 모르시는 것 같던데, 혹시 스트리트 출신이신가요?"
이미 남자의 계급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테리는 조금은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말았다.
"내가 이런 꼴을 하고 할 말은 아니지만... 스트리트 출신이냐고 묻다니 그건 좀 불쾌하군."
남자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테리는 아차 싶었다.
"아, 아니. 당신을 무시하려던 의도는 없었어요."
다급히 변명을 내놨지만, 그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C 구역에서도 시의회의 허가를 받은 소수의 연구시설과 병원만 입주할 수 있는 스트리트 출신이냐는 질문이 그렇게 치욕적이었나?'
테리는 도대체 남자가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
'기계의체를 다 잃은 몸이긴해도 마법까지 보여줬는데 길거리 출신이냐고?'
불쾌하지만 이 도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난 함부로 구라를 칠 수가 없었다.
말 한 마디만 엇나가도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내 눈치를 보던 테리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그녀는 사정하듯 말했다.
그런 태도만 보면 날 무시하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길거리 출신이냐고 물었던 건지 궁금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기계의체는 마력운행을 방해한다고 알고 있었어요. 헌터들이 강화시술은 받아도 사이보그가 되지 않는 이유가 마력 운행을 저해하기 때문이라고 들었거든요."
테리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한번 내 눈치를 살폈다.
기계로 개조한 몸이 마력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강화시술?'
폭주족 놈이 테리에게 언급했던 단어였다.
그게 뭔지 궁금했다.
더불어 왜 마력운행을 방해한다는 기계의체가 내 몸 안에선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않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이미 은연 중에 마법사라고 밝힌 내가 마력운행과 관련된 상식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뽀록날까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 코어가 특이하기 때문일까?'
이 세계의 마법 수준이 어느 정도일 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차라리 중세판타지 세계였다면?
'리치가 있다고 가정하고 구라를 풀어볼텐데, 여긴 사이버펑크잖아!'
온갖 잡것이 뒤섞인 세상이라 함부로 구라를 칠 수도 없는 상황이란 뜻이다.
난 테리가 알아서 답을 찾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게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