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배틀슈트
그게 나에 대한 궁금증인지 마법사란 존재에 대한 호기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러날 길이 보이질 않았다.
"기계가 마력운용에 방해가 된다고?"
"상식이잖아요. 마력운용에 방해가 될까봐 강화시술도 마다하는 사람들이 마법사들인데, 사이보그라니...!"
내가 포기하고 묻는 순간, 테리는 기다렸다는듯이 자기가 아는 상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강화시술이란 게 네 몸에서 나는 좀비냄새와 관련이 있는 시술인가?"
그 순간, 벌떡 일어나 거리를 벌린 테리는 칼을 뽑으려는듯 허리춤을 더듬었다.
하지만 숏소드는 이미 허리띠와 함께 벗어둔 모양인지 그녀의 손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내 몸에서 좀비냄새가 난다고요?"
"아주 진하게 나더군. 그 냄새가 강화시술이란 것과 관련있는 거 맞지?"
하지만 테리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 동안 그녀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불신.
의혹.
'두려움?'
온갖 부정적인 감정 끝을 장식한 건 두려움이었다.
"A 구역에 사는 귀족들 중에 오직 인간의 피만이 좀비에게 빼앗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극단주의자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아직 내게 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의 온도는 얼음처럼 차가울 뿐이었다.
한순간에 내 목을 짓밟아죽이려 했던 소녀로 돌아온 테리의 모습에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당황한 티조차 낼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날 극단주의자라고 오해한 그녀의 추측에 확신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날 죽여야하는 이유인가?"
"시치미 떼지 말아요!"
테리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치자, 콘크리트 천장이 열리며 중기관총 여덟 정이 날 겨누었다.
그리고 테리 옆엔 어느새 숏소드를 가져온 무인경비로봇이 도착해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강화시술을 받은 헌터에게서 좀비 냄새가 난다고 매도하는 사람은 순수인간주의자들뿐이죠."
"내가 순수인간주의자냐고 묻는 건가? 아니면 그렇다고 확신하고 죽이기 전에, 내가 네 죄책감을 덜어줄 대답을 해주길 바라는 건가?"
< 위험! 적대적 [공격시스템]에 노출되셨습니다. >
< 적대적인 화망이 구축됐습니다. >
< 현재 사용자님의 신체능력으로는 피할 수 없습니다. >
<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
시스템은 위험을 경고하며 내 시야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내 판단도 시스템과 같았다.
어딜 봐도 중기관총의 사선에서 벗어날 방법 따위는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위협적인 건 중기관총 따위가 아니라 초진동소드를 뽑아든 테리였다.
"내가 강화시술을 받은 네게 적대적인 존재라고 판단해놓고 뭘 망설이는 거지?"
난 블러핑을 택했다.
사실 그 방법 외엔 사용할 수 있는 패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흡수해버린 마력로가 아까운가? 아니면 내가 죽기 전에 지금 이 상황을 시경찰에 신고할까봐 겁이 나서 망설이는 건가?"
난 통신기능을 가진 좌측 기계안을 약탈당한 후였다.
하지만 내가 사이보그 사체 수십 구를 흡수하는 걸 본 테리라면 내가 통신기능을 회복했다고 착각할 여지는 있다고 판단했다.
"내가 몸을 회복했을 때, 시경찰에 신고했다면 네가 내게 칼을 겨눌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테리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그녀의 초진동소드에서 터져나왔다.
이이잉! 하고 울부짖는 진동음은 내 목덜미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테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보니 희망이 보였다.
"그럼... 해명해보세요."
"뭘 해명하라는 건지 모르겠군."
난 당당하다는듯 고개를 쳐들며 테리의 눈을 직시했다.
"네 몸에서 나는 좀비냄새나 저 금고 속에서 풍기는 진한 마그니움 향기를 맡지 못한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라는 건가?"
난 테리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시스템이 가로채버렸다.
< 마... 마그니움! >
< 마그니움은 훌륭한 소재입니다. >
< 최대한 많은 양의 마그니움을 확보해주십시오. >
< 전뇌의 안전과 사용자님의 내구도를 높이는 게 생존기간을 높이는 길입니다. >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시스템 메세지의 속도만 봐도 놈이 얼마나 흥분한 지 느낄 수 있었다.
테리는 시스템보다 한발 늦게 반응했다.
"마, 마그니움 향기라고요?"
난 마그니움 향기란 말에 흔들리는 테리를 보고 강수를 뒀다.
"날 모욕할 생각이라면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차라리 죽여라!"
***
"날 모욕할 생각이라면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차라리 죽여라!"
남자는 칼날을 마주하자 오히려 더 대담해졌다.
녹색빛으로 빛나는 남자의 외눈과 당당한 태도는 테리가 한번도 마주해본 적 없는 귀족적인 태도였다.
'목숨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그녀는 이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귀족들에 대한 허무맹랑한 얘기들이야 그녀도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의 행태는 술주정뱅이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무시해왔었다.
그러나 녹안의 남자의 말과 행동은 자신이 술주정으로만 치부했던 말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의 귀족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마그니움 향기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왜 이런 사소한 일까지 해명해야하는지 모르겠군."
"내겐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니까 해명해주셔야겠어요!"
"칼부터 치우고 말하지."
녹안의 남자는 오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분명 그는 소파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엔 높은 단상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테리는 초진동소드의 작동을 멈추고 칼날을 집어넣은 후에야 남자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에 숨겨둔 금고에서 장비부터 확인했지?"
"그, 금고를 왜 욕실에 숨겨두겠어요?"
테리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녹안의 남자는 이미 모든 걸 꿰뚫어본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욕실에 숨긴 것도 모자라 샤워기까지 틀어서 내 눈과 귀 모두를 속여야할만큼 귀한 물건은 뭘까 생각해봤어."
남자가 말을 이어나갈수록 테리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
그녀는 남자의 말을 아니, 그의 사고를 멈추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네가 그토록 원했던 초소형마력로와 관련된 장비겠지. 그 정도로 강력한 동력원이 필요한 장비가 뭐가 있을까? 전에 네가 언급했던 배틀슈트 정도면 아귀가 맞아떨어질 것 같더군."
그 순간 테리는 자기도 모르게 초진동소드의 손잡이를 잡고 말았다.
'이 남자...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남자는 테리의 손이 하얗게 변할만큼 긴장했다는 걸 보고도 눈 한번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할 지까지 확신하지 않고는 취하지 못할 태도였다.
남자의 그런 태도는 테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녀조차도 지금 그를 베어야할 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배틀슈트란 물건에서 어찌나 진한 마그니움 향기가 풍겨나오는 지 내가 맡고 싶지 않은데도 맡을 수 밖에 없었어."
남자의 말은 앞뒤가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테리에겐 금속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믿기가 어려웠다.
'소파에 앉아서 욕실 안을 훔쳐본 건가?'
차라리 그가 투시마법을 이용해 자신이 욕실에서 뭘하는지 꿰뚫어봤다는 가정이 더 그럴듯해보일 정도였다.
"이 방을 자욱하게 채워서 어지러울 정도의 향기인데, 네가 못 맡는다는 게 더 이상하군."
"투시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고요?"
테리는 그렇게 물어놓고도 이상하게 그가 금속의 향기를 맡았다는 말에 마음이 기울었다.
근거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사이보그 주제에 중규모 마법을 주문도 없이 사용했던 그라면 상식을 벗어난 능력을 한두 개 더 가졌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금속뿐만 아니라 강화시술자까지 냄새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
"투시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고요?"
빨강머리 소녀는 여전히 날 의심하듯 물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에선 경계심이 상당히 사그라들어 있었다.
'마그니움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넘어오겠어.'
난 곧장 테이블 아래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욕실 금고에선 아주 진한 마그니움 향기만 풍겨오는 걸 보니, 크레딧 코인은 모두 이 아래 금고에 숨겨둔 모양이군? 가만 보자... 한 4천 개 이상은 되겠군. 코인 하나에 백 크레딧이니까 사십만 크레딧쯤 되려나?"
"어, 어떻게...!"
내가 테이블 아래 숨겨둔 금고에 얼마를 숨겨놨는 지까지 마치 열어본 것처럼 얘기하자, 눈을 찢어져라 부릅 뜬 테리가 다급히 무인경비로봇을 조작했다.
그러자 무인경비로봇이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건 거실 소파에 누워 생각에 잠긴 내 모습이었다.
테리는 숨겨놓은 CCTV로 촬영한 영상을 빨리감기까지해서 살펴보고 나서야 내가 움직이거나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다는 걸 확신한 모양이었다.
"그, 금속을 냄새로 구분한다는 건 믿겠어요. 하지만 좀비냄새로 강화시술자를 구분한다는 건..."
"믿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아니, 어...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죠?"
"그냥 냄새가 나는 걸 어떻게 설명하라는 건지 모르겠군."
테리에겐 둘러댔지만, 사실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 [분자구조연구](레전드)
그건 드워프 종족 직업인 메카닉의 레전드 스킬이었다.
냄새를 맡으면 금속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 특이해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은 스킬 중 하나였다.
문제는 '냄새를 맡으면'에 있었다.
'저렇게 멀리 떨어져있는데 음식도 아니고 금속 냄새를 이렇게 멀리서까지 구분할 수 있다고?'
그건 드워프 종족의 특성인지 아니면 내가 스킬설명도 읽지 않고 스킬레벨을 255까지 올린 다른 스킬의 효과인지는 이제와선 알 방법이 없었다.
"귀족들 중엔 혈통에 따라 기이한 능력을 깨우친 자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런 능력은 처음 들어봐요."
테리는 이미 날 귀족으로 확신하는듯 했다.
하지만 난 굳이 나서서 그녀의 오해를 풀어주지 않았다.
"네게 악한 마음을 품었다면 네가 손 써볼 틈도 주지 않았을 거야. 이제 인정하겠지?"
"좀비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인정해야겠죠."
"그럼 내게 칼을 들이댄 행동에 대한 사과가 필요할 것 같은데?"
"사과할게요."
"말로만 하는 사과만큼 의미없는 것도 없지."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거죠?"
"보다시피 난 몸을 잃었어."
"당신 마음에 찰 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생활할 수준의 의체라면 내가 사과의 의미로 마련해줄 수 있어요."
"아니. 내게 필요한 건 저 배틀슈트야."
"뭐라고요?"
"저 배틀슈트 정도면 잠시나마 내 의체를 대신할 수 있겠어."
"안돼요! 저건 절대로 줄 수 없어요."
테리의 반응은 예상대로 격렬했다.
"달라는 게 아니야. 한달만 빌리지. 그럼 배틀슈트에 마력로까지 고쳐서 돌려줄게."
하지만 이미 약점을 내게 노출한 이상 그녀가 내 요구를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테리, 잘 생각해봐. 내가 멀쩡한 마력로를 구해준다고해도 네가 혼자 배틀슈트를 수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믿고 마력로와 배틀슈트를 맡길만 한 엔지니어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