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전쟁병기
정곡을 찔린 테리의 표정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도시 최외곽인 F 구역에서도 하수구에 숨어사는 하층민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가의 배틀슈트를 정상적으로 수리할 엔지니어와 인연이 있을 리가 없다는 가정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잘 생각해봐. 나 같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또 있을지."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내가 쳐놓은 덫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배틀슈트를 고칠 수 있다는 말, 사실이죠?"
"못 믿겠다면 눈앞에서 보여주지."
"지금 당장요?"
"미룰 이유가 없잖아?"
내가 비밀금고를 숨겨둔 욕실을 턱으로 가리키자, 그녀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날 안아들었다.
그 순간 얼굴에 닿는 뭉클함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테리는 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테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날 욕실로 데려가더니, 샤워기를 틀었다.
그리곤 욕조 옆 타일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밀었다.
그러자, 욕조가 옆으로 밀려나더니 그 옆에 숨겨둔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 대량의 [마그니움]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
< 마그니움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해주십시오! >
그 순간 시스템이 메세지를 띄워올렸다.
마그니움을 향한 시스템의 갈구는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테리가 금고를 열자, 검은 바탕에 금색 선으로 장식된 배틀수트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가슴 부분이 뭔가에 관통당해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나있었을 뿐 다른 부분은 새 제품이라고 우겨도 믿을만큼 깨끗한 모습이었다.
< 동력원을 소실한 [강화복]을 탐지해냈습니다! >
< 더 자세한 분석을 위해 접촉해주십시오. >
시스템은 이번에도 한발 늦게 소란을 떨어댔다.
아무래도 가슴에 난 구멍때문에 사용자를 잃고 배틀슈트의 동력이었던 초소형마력로까지 소실된 것 같았다.
난 시스템 메세지를 무시하고 가슴부분에 '에이드릭 테크놀로지'라는 로고가 적힌 배틀슈트의 전면부를 살펴보았다.
'이런 문자는 처음 보는데 내가 어떻게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거지?'
< 해당 정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
그때 테리가 네게 물었다.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아서."
난 급한 마음에 내가 마지막으로 플레이했던 프리스트 캐릭터의 이름을 말해버렸다.
"아서? 질서왕 아서할 때 그 아서?"
"질서왕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서야. 네 이름은 아니까 이제 그만 날 배틀슈트 위에 내려놓지?"
"당신이 대단한 마법사란 건 알지만, 이건 헌터 전용 슈트에요. 함부로 착용했다간 당신 몸이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요."
"걱정은 접어두고 날 믿어봐."
"동력원을 소실한 상태니까 상관없겠죠."
가까이서 보고나서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맡아본 적 없을 정도로 진한 마그니움 향기였다.
< 엄청난 수준의 마그니움 합금 비율입니다! >
마그니움의 향기를 맡은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또 호들갑 떨기는!'
내가 나무라자 시스템이 더 빠른 속도로 메세지를 띄우기 시작했다.
< 엄청난 규모입니다! >
< 이 배틀슈트는 무려 15% 이상이 마그니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 매립지에서 흡수하신 마그니움을 다 합쳐도 이 배틀슈트의 손가락 세 개에 들어있는 마그니움 함량을 넘지 못합니다. >
난 시스템이 메세지를 띄우기 전부터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진한 마그니움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그 양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배틀슈트의 내부구조와 슈트를 이루는 합금비율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메카닉 직업의 레전드 스킬들을 탐닉할 때 봤던 '분자구조연구'라는 스킬의 효과가 틀림없었다.
< 에이드릭 사의 복제 금지 보안시스템이 해제됐습니다. >
< 연상하신 [배틀슈트의 설계도]를 분석합니다. >
< 에이드릭 6세대 모델 MK-15. >
< 마그니움나이트 - 15% 합금 버전. >
.
.
.
< 에이드릭 사의 배틀슈트 모델명 MK-15의 설계도를 획득했습니다. >
< [배틀슈트 MK-15의 설계도]를 저장하시겠습니까? >
셀 수 없이 많은 정보를 쏟아낸 끝에, 시스템은 MK-15의 설계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저장한다.'
쓰레기 매립지에서 테리의 손에 죽은 사이보그들은 주로 두개골이나 척추 일부에만 소량의 마그니움을 합금했었다.
하지만 테리의 배틀슈트엔 적어도 15% 이상의 마그니움이 뒤섞여 있었다.
내가 거기까지 파악한 순간, 테리가 날 배틀슈트의 가슴 부분에 내려놓았다.
난 배틀슈트와 접촉하자마자 배틀슈트의 운영시스템과 연결됐다.
그 순간 배틀슈트가 전면을 열고 날 가슴에 품었다.
눈앞으로 종이처럼 접혔던 배틀슈트 전면부가 펼쳐지며 나를 감싸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마력을 내뿜자, 배틀슈트는 나와 접촉한 모든 면으로 내 마력을 게걸스럽게 받아들였다.
처음 접하는 에너지원일텐데 거부반응조차 없었다.
< [반물질 코어]의 마력이 배틀슈트에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
< 설계도에 따라 마력 공급로를 재생성합니다. >
< 코어의 특성에 따라 한차원 높은 에너지 공급로가 생성됩니다. >
< 반물질 코어의 마력적합도 150%. >
< 코어가 스스로 최적의 마력 수준으로 제어합니다! >
'이게 코어의 능력인가!'
기계장치라면 내 코어에서 생산한 마력에 저항할 수 없을 거라는 짐작이 증명된 셈이었다.
배틀슈트의 운영시스템은 마력을 공급받자마자 자가점검에 들어갔다.
- 에이드릭 사의 강화시스템을 구매해주신 고객 님 감사합니다.
- 본 기종은 491일 22시간 16분 53초만에 재가동됐습니다.
- 2주 이상 가동을 멈춘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 매뉴얼에 따라 시스템 세부점검을 실시합니다.
- 동력원이 파괴됐습니다.
- 호환가능한 대체 마력로를 연결해주십시오.
- 외부장갑 손실률 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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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동력을 확보하자마자 운영시스템이 알아서 배틀슈트의 상태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의 높은 과학기술 수준에 감동하고 있었다.
그건 잠시나마 좀비에 대한 갈증마저 잊어버릴만큼 놀라운 첨단과학기술의 산물이었다.
- 즉시 운용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판단됩니다.
- 가까운 에이드릭 사의 정비소를 방문해주십시오.
- 사용자 확인.
- 로그 확인 결과.
- 최종 사용자 마크 비로드 님의 사망기록이 확인되었습니다.
- 대좀비 전투에 관한 법률 11조 7항에 의거하여 에이드릭 사의 고객센터에 구조를 요청해 마크 비로드 님의 시신을 안전하게 회수하겠습니다.
하지만 마음놓고 미래의 과학기술에 감동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 사용자에 의해 인가되지 않은 통신 프로세스 발견 >
< 사용자 보호를 위해 임시로 차단 했습니다. >
< 배틀슈트의 비인가 통신을 허가하시겠습니까? >
"불허한다!"
내가 명령하길 기다렸다는듯 시스템 메세지가 연이어 올라왔다.
< 사용자님의 명령에 따라 배틀슈트의 외부통신권한을 박탈합니다. >
< 사용자님께 위협이 될만한 매뉴얼 32가지를 차단했습니다. >
< 배틀슈트의 제어권한을 탈취했습니다. >
< 배틀슈트의 AI를 흡수해도 되겠습니까? >
시스템은 삼일 굶은 사람처럼 배틀슈트의 AI를 제압한 후 포식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승인한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시작합니다. >
< 약 3분 14초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
내가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업그레이드 소요시간을 바라보았다.
"뭐에요? 무슨 일이에요?"
하지만 시스템메세지를 듣지 못한 테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어디서 주운 물건이야?"
"그야..."
"대좀비 전투에 관한 법률은 또 뭐야?"
"설마 배틀슈트가 시경찰에 신고한 건 아니겠죠?"
테리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욕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왔을 땐, 이미 완전무장을 갖추고 배낭까지 맨 상태였다.
"당장 이곳을 이탈해야해요."
"잠깐..."
"사냥 중에 사망한 헌터의 배틀슈트를 훔쳤다는 죄를 뒤짚어 쓰지 않으려면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요!"
"이 은신처를 버려야한다고?"
"시경찰한테 사살되는 것보다는 그게 나아요!"
테리는 내 몸을 들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난 배틀슈트와 연결된 상태라 그녀가 안간힘을 써도 배틀슈트를 벗겨내지는 못했다.
"구조요청을 보내기 전에 외부통신권한을 박탈했어."
"네? 아니, 아무리 마법사라도 전투보조시스템의 외부통신권한을 어떻게 박탈할 수 있죠? 그건 제작사의 운영팀이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어렵지는 않던데?"
난 테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업그레이드를 완료한 시스템의 보고 메세지가 끝도 없이 올라왔다.
<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완료했습니다. >
< 사용자님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
< 배틀슈트에서 흡수한 [전투보조시스템]의 권한을 재설정합니다. >
< 최고명령권자를 에이드릭사와 시경찰에서 사용자님으로 재설정했습니다. >
< 비상상황에 따른 보고체계에서 최종 관리자를 시경찰과 제작사인 에이드릭 사에서 사용자님으로 변경했습니다. >
< 자폭과 비상탈출 등 불필요한 매뉴얼은 삭제했습니다. >
시스템 메세지만 읽어도 놈이 얼마나 신났는지 그 감정이 느껴지는 듯 했다.
< 본 모델의 합금강도는 마그니움나이트 함유량 3%를 초과했기 때문에 산업용 로봇의 규격을 넘어섰습니다. >
< MK-15의 마그니움나이트 함유량은 15%를 초과했습니다. >
< 전쟁병기 기준인 마그니움나이트 함유량 10%를 초과했기 때문에 전쟁병기로 분류됩니다. >
'어느 정도길래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 사이보그 리키의 두개골을 형성했던 합금보다 107배 이상 단단한 수준입니다. >
'리키? 그게 누구였지?'
그 순간, 눈앞에 매립지에서 테리와 함께 나뒹굴었던 남성의 영상이 펼쳐졌다.
시스템은 테리가 천천히 칼을 뽑는 머리에 외곽선을 두르고 '리키'라는 이름을 띄우며 시스템 메세지를 띄웠다.
< 눈 앞의 여성이 사용자님 앞에서 처음 살해한 스캐빈저입니다. >
난 그제야 리키란 인물이 누구였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 그뿐만이 아닙니다. 배틀슈트는 테리 양이 보유한 검의 초진동기능을 사용해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습니다. >
'초진동소드는 합금을 두부처럼 가르던데?'
< 이 배틀슈트는 초진동소드가 아니라 체인소드로 수천 번 내려쳐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내구도를 가졌습니다. >
시스템은 새로운 몸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배틀슈트도 뭔가에 관통당했군.'
그 흥분을 내가 깨버렸다.
< 미상의 공격으로 동력원이 파괴된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
그 순간, 시스템 메세지가 평소와 같은 딱딱함을 되찾았다.
쓰레기장이나 뒤지는 스캐빈저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한 배틀슈트도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 순간, 배틀슈트에서 마그니움만을 추출하면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반 합금강을 강화할 땐, 마그니움만 한 소재가 없다.
하지만 마그니움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강의 금속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그니움을 추출할 지 고민하는데, 배틀슈트의 기능들이 내 머리 속에 촤르륵 하고 펼쳐졌다.
그리고 그 중 한 줄이 내 뇌리를 때렸다.
< 본 기종의 [전투보조시스템]은 내장된 인공근육을 이용해 사용자의 신체능력을 최대 6배까지 증강시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
< 3단계 강화시술을 받지 않은 인간의 육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
< 경고! 현재 사용자님의 신체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량입니다. >
< 작동을 강행할 경우 내부장기가 파열될 위험이 있습니다. >
< 사용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