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의체
'6배?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지?'
< 3초 안에 시속 360킬로미터로 가속할 수 있는 출력입니다. >
< 이는 6톤까지 들어올릴 수 있는 출력입니다. >
하지만 난 시스템이 배틀슈트의 데이터베이스에서 해당 정보를 찾아내기 전에 그게 배틀슈트의 한계가 아니란 걸 알아내버렸다.
'3단계 강화시술을 받은 헌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신체능력을 보조한다? 그럼 최대출력은 얼마야?'
< 착용자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론적으로 3초 안에 시속 1천 킬로미터까지 가속할 수 있습니다. >
< 또한 설계 상 최대 출력을 발휘하면 40톤의 무게까지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
그건 비행기보다 빠른 속도였다.
문제는 배틀슈트의 한계는 고사하고 권장사항인 3단계 강화시술을 받은 헌터보다도 약한 내 몸에 있었다.
'100미터를 6초에 주파하는 헌터들이나 입으라고 만든 물건을 이 허약한 몸으로 사용했다간 내 몸이 먼저 부서지고 말거야.'
그게 문제였다.
배틀슈트의 성능은 아름답기 그지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 몸이 견뎌내질 못할 것이다.
그 순간, 밖에서 배틀슈트를 두드리는 테리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진한 좀비 향기는 그윽하게 날 유혹했다.
현대보다 수 세기는 앞선 문명이 두려워하는 좀비.
그리고 그 좀비의 힘을 빌려 강해진 강화인간.
그 순간, 쓰레기 매립지에서 테리가 순간가속했던 기억이 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건 탐나는 신체능력이었다.
< 강화인간을 흡수해서 신체능력을 보강하시겠습니까? >
하지만 그 순간 올라온 시스템 메세지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산 사람을 산 채로 흡수해서 내 몸을 강화하라고?'
< 테리 양이 인간에 더 가까운 건 사실입니다. >
<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입니다. >
< 그녀의 14%는 좀비란 점을 감안해주십시오. >
시스템은 망설일 가치도 없다는듯이 말했다.
'테리의 몸에서 좀비인자를 추출해서 내 몸을 강화해야한다?'
< 정확합니다. >
문제는 그런 사고방식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두 개로 나눠진 사고.
시스템의 요구에 수긍하는 정신과 인간을 산 채로 잡아먹자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
그 냉정한 사고 덕분에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날 이곳에 내던진 존재가 내 몸은 제멋대로 바꿨을지 몰라도 내 생각까지 지배하게 내버려두고 싶지가 않았다.
'그건 내가 아니다. 흡수안은 거부하겠다.'
그건 오기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시스템은 내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 사용자님의 명령에 따라 배틀슈트를 재구성해 사용자님의 육체를 보완하겠습니다. >
< 레전드 등급 스킬 [소재공학]을 이용해 배틀슈트에 함유된 마그니움나이트를 추출합니다. >
< 레전드 등급 스킬 [마장기 개조]를 이용해 추출한 마그니움나이트로 사용자님의 두개골과 척추 및 갈비뼈를 재구성합니다. >
< 모든 골격계를 재구성하기엔 마그니움나이트가 모자랍니다. >
'내부장기를 보호하는 게 최우선이야.'
< 레전드 등급 스킬 [소재공학]과 [분자구조연구]를 사용합니다. >
< 마그니움나이트를 추출하고 배틀슈트에 남은 금속 텅스텐, 티타늄, 니켈, 알루미늄 등을 조합해 가장 높은 내구도의 합금강 구조를 산출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
< 마그니움나이트가 아닌 금속을 합금하여 순수 마그니움나이트 강도의 7% 수준의 내구력을 갖는 새로운 합금 [TTNA-207]의 합금비율을 발견했습니다. >
< 이는 마그니움나이트 9% 함량의 합금강과 비견되는 수준입니다. >
< 이는 방위산업규격의 신소재입니다. >
< 마그니움나이트 함유량 10% 수준의 내구력에 미달하였기 때문에 전쟁병기 규격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
< 새로운 합금비율 [TTNA-207의 합금비율]을 저장하시겠습니까? >
'저장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마그니움이 3% 함유된 합금이 산업용의 규격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마그니움을 단 1그램도 넣지 않고 마그니움나이트를 9% 넣은 합금과 비견될만 한 합금비율을 발견했다?
'이건 외부로 유출하지 않아야겠어. 시스템, 보안에 신경쓰도록.'
< 사용자님의 명령에 따라 [TTNA-207의 합금비율]을 최고기밀등급으로 상향조정합니다. >
< TTNA-207 합금강으로 남은 골격계를 구성해도 되겠습니까? >
'허가한다.'
은회색 합금이 내 팔다리를 구성한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 레전드 등급 스킬 [마장기 개조]를 사용해 배틀슈트의 인공근육으로 전신근육을 재구축해도 되겠습니까?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뼈대만 구성됐던 팔다리가 은빛 근육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 배틀슈트에서 절연성과 내화력이 높은 도료를 발견했습니다. >
< 레전드 등급 스킬 [소재공학]을 사용해 배틀슈트의 도료를 연구합니다. >
< 기존의 도료에 스텔스 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 배합구조를 발견했습니다. >
< 새로운 [스텔스 기능 도료 배합비율]을 저장하시겠습니까? >
< 스텔스 기능이 추가된 도료로 피부를 구성하시겠습니까?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도료가 인공근육 위로 도포되었다.
"아, 아아!"
배틀슈트가 내 몸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본 테리는 연신 안타까운 신음만 토해낼 뿐이었다.
배틀슈트를 내 몸으로 재구성하는 시간은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난 망연자실한 테리를 내버려두고 두 발로 일어났다.
몇시간 동안 팔다리를 잃어버렸었다.
그리고 내가 새로 얻은 몸은 기계의체였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 부자연스러움 따윈 느낄 수 없었다.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때리는 차가운 물줄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건 잃어버린 내 손으로 느끼던 촉각보다 더 선명한 감각이었다.
< 레전드 등급 스킬 [마력로연구]와 [마장기개조]를 사용합니다. >
< 의체화된 신체와 사용자님의 코어가 완벽하게 연결됐습니다. >
고개를 돌려보니 전신거울이 내 몸을 비추고 있었다.
내 몸은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검은 광택을 내는 도료로 뒤덮여 있었다.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얼굴은 청소년의 것이었다.
녹색눈과 밝은 금발.
배틀슈트의 카메라를 따라 만든 검은 왼쪽 눈은 내가 두번 눈을 깜빡이자, 오른쪽 눈과 똑같은 초록빛을 띄었다.
"이 몸은 어느 정도 성능을 가진거지?"
< 100미터를 6초 안에 주파하실 수 있는 몸입니다. >
"원본 배틀슈트에 비하면 볼품없는 수준이군."
딱 테리와 같은 3단계 강화시술자와 같은 운동능력이었다.
'사람 몸인 테리보다야 튼튼하겠지만...'
내부장기의 안전을 최우선시해서 재구성하지 않았다면 훨씬 강력한 출력을 낼 수도 있었다는 미련이 잠시 날 괴롭혔다.
< 사용자님의 생존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해 육체를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습니다! >
< 강한 개체의 좀비를 포획해주십시오. >
< 강화시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
그때, 내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이글대는 눈으로 날 노려보는 사람은 테리였다.
"분명 배틀슈트를 고칠 수 있는 지 보여주겠다고 했잖아요? 왜 내 눈에는 당신이 의체화한 걸로 보일까요?"
"한달만 빌리겠다고 했잖아. 한달 뒤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배틀슈트로 돌려놓을게."
테리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며 거울을 보고 눈을 깜빡이자, 검은 광택을 내던 의체가 한순간에 살색을 되찾았다.
겉보기엔 의체화한 사이보그라는 걸 알아보기 힘들만큼 정교한 모습이었다.
"아!"
묘한 신음을 듣고 돌아보니, 동공이 살짝 풀린 테리가 달라진 내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결국 그녀의 눈이 멈춘 곳은 내 눈이었다.
어색한 미소가 감도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나서야 내가 발가벗은 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내 몸에 맞는 옷이 있나?"
"그, 그게... 차, 찾아볼게요."
테리는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옷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거울에 비친 내 몸은 인상적이었다.
큰 키에 마른 몸 그리고 그 위를 뒤덮은 잔근육들.
'이게 말로만 듣던 모델핏인가?'
난 내 새로운 몸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 충분한 인공근육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
< 배틀슈트의 데이터베이스엔 인공근육에 대한 정보가 누락되어있었습니다. >
< 배틀슈트 착용자가 접근할 수 없는 고급기밀로 판단됩니다. >
< 더 많은 인공근육을 확보해 연구해야합니다. >
하지만 시스템은 마른 근육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워.'
< 앞으로도 사용자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
시스템을 격려하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라이더자켓과 쌍을 이루는 가죽바지를 들고 눈을 피하는 테리가 보였다.
"아서 씨에게 맞을만 한 옷은 이것뿐이에요."
입어보니 품이 좀 남긴 했지만 길이는 딱 맞았다.
하지만 거울을 보니, 옷 태가 살아있었다.
"남자친구 옷인가? 내가 허락없이 빌려입어도 되겠어?"
"나, 남자친구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별 생각없이 물었는데, 테리는 억울하다는듯 콧소리까지 내며 부정해왔다.
"그래? 꽤 비싸보이는 옷인데?"
"비싼 옷인데, 폭주족 놈들은 자켓만 사려고 들어서 보관 중이었어요."
난 그제야 그녀가 쓰레기 매립지에서 수거한 옷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긴 그 놈들한테 바지는 필요 없었겠군."
무슨 이유때문인지 내가 옷을 입은 후에도 테리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난 그녀가 가져다준 워커까지 신고 소녀에게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을 해야 빚을 갚을 수 있을 지 알아보러 가볼까?"
"준비하고 올테니까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며 무장을 재정비하는데, 쥬드가 다가왔다.
- 주인님, 아서 씨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뜻이야?"
- 고장나긴 했지만, 저 정도로 멀쩡한 배틀슈트의 가치는 4억 크레딧에 달합니다.
-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맡기기엔 너무 값비싼 물건입니다.
- 아서 씨가 배틀슈트를 가지고 도망가버린다면...
쥬드의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달아올랐던 피가 급격하게 식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고민해봐도 달라질 건 없었다.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
- 그럼 지금이라도 배틀슈트를 회수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도박하지 않으면 온전한 배틀슈트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 아서 씨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 그를 믿을 수 있을 지 판단한 수 없습니다.
"이 바닥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때 쥬드의 팬이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를 믿고 배틀슈트를 맡기는 게 옳은 일인지 연산하는 것이다.
"능력은 있는 사람이야. 고장난 배틀슈트를 한달 빌려주는 대가로 온전한 배틀슈트를 얻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할만 하지 않아?"
- 주인님의 예상대로만 흘러간다면, 한 달 후엔 용병단 입단테스트에도 응시해볼 수 있겠군요.
"그건 시작에 불과해!"
솔직히 용병단에서 명성을 날리고 시경찰에 지원한다는 꿈은 지금까지는 멀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의문의 마법사 아서가 신뢰를 지켜준다면?
'꿈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야!'
***
- 아서 님 이름으로 1천 크레딧이 입금되었습니다.
- 1천 크레딧을 지불하여 5등 시민등록증을 발급받으시겠습니까?
"발급받겠다."
ATM기계처럼 생긴 출장사무소에 천 크레딧을 제출하자, 5등 시민등록증이 발급됐다.
- 시민등록증을 분실하실 경우, 천 크레딧의 벌금이 부과되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천 크레딧이면 F 구역 사람들이 5개월은 놀고 먹을 수 있는 돈이에요."
"이것도 달아두지."
테리는 수억 크레딧에 달한다는 마력로와 배틀슈트를 넘기고도 천 크레딧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4등 시민증을 받으려면 얼마를 내야하지?"
- 10만 크레딧을 지불하시면 4등 시민증과 D 구역 주거권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시정부의 출장사무소 AI의 대답을 듣고보니 테리에 관한 의문이 생겼다.
'금고에 40만 크레딧을 숨겨놓고 왜 F 구역의 하수구에 숨어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