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첫날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좀비인자 수집으로 하지."
"그 건은 암셀 연구소에서 네크로맨서님이 직접 참관하실 예정이야. 자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
"그것도 제가 보증할게요. 적어도 3단계 강화시술자 이상이에요."
"테리, 오늘 보증을 너무 남발하는 거 아니야? 이거 일 틀어지면 뒷감당할 수 있겠어?"
"그럴 일 없겠지만, 만약 사고가 나면... 제가 책임질게요."
테리는 그윽한 눈빛으로 날 한번 바라보더니, 크릭을 안심시켰다.
"쳇! 일단 알았네."
그는 매대의 디바이스를 몇번 터치하더니 마이크를 입 앞으로 이동시켰다.
"릴, 누굴 노리는 지는 알겠는데 이쪽 분이 암셀 연구소의 임무를 받아버렸어."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젠장! 도망친 스캐빈저들이 우리 정보를 갱단조직에 팔았나봐요."
테리는 하얀 대머리의 남자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중세 기사의 갑옷을 떠올릴만큼 거창한 갑옷.
그 안을 가득 채운 전기선과 튜브들.
그의 몸에서 기계로 개조하지 않은 부분은 광대부터 정수리까지의 피부뿐이었다.
"테리, 저 자는 누구지?"
"베놈 펜스의 지부장 중 한 명이에요."
"지부장? 대단한 사람인가?"
"F-8 구역의 상업지구는 그가 관장하고 있죠."
테리가 남자의 정체에 대해 설명해준 순간이었다.
저절로 닫히는 문 너머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이보그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완전무장한 모습이었다.
"크릭. 내가 찍은 먹이감이요. 사람 하나 구하겠다고 암셀 연구소의 이름을 파는 건 아니겠지?"
릴이란 놈은 매대의 철창에 쾅! 쾅! 하는 충격음이 들릴 정도로 이마를 거칠게 처박으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인중과 턱까지 회색빛 금속으로 개조한 모습이라 두렵다기보다는 괴기스러웠다.
그 모습을 본 크릭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못 믿겠으면 자네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방금 전에 이 사람, 5등 시민 아서가 의뢰를 접수했다는 문자를 보냈다는 거."
그가 매대를 톡톡 두드리자, 천장이 열리더니 펄스건 여섯 대가 사이보그 릴을 겨눴다.
"자네 몸이 합금덩어리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이 철창도 사유재산이니 그만 부딪히고 이만 꺼져주겠나?"
정수리 양옆에 다섯 개 씩 총 열 개의 레이저센서를 번뜩인 사이보그 릴은 말 없이 크릭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천장에 매달린 펄스건에서 우웅! 하는 충전음이 들렸다.
"크릭, 당신은 적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그건 나도 모르던 재능이군."
끝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크릭을 본 사이보그 릴은 쿵쿵 거친 발소리를 내며 가게를 나가버렸다.
"저치들도 바보는 아니야."
크릭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암셀 연구소의 이름으로 벌 수 있는 시간은 며칠 안될 거란 거 알아두라고."
"기억하지."
호텔카트에 아치스의 전뇌와 오른팔만 싣고 나왔을 땐 이미 베놈 펜스 놈들은 모두 사라진 후였다.
***
우린 곧장, 테리의 은신처로 돌아왔다.
의체를 얻고는 처음 들어가는 길이라 위장장막을 쓰다듬어 그 구조를 살필 수 있었다.
앞장 선 테리는 뭐가 그리 급한 지, 문부터 닫아서 위장장막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때 테리가 물었다.
"제가 먼저 씻어도 될까요?"
"피곤하면 그렇게 해."
테리는 잠시 내 눈을 지그시 올려다보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전뇌 복원을 시작해라.'
< 전뇌에 접촉해주십시오. >
< 복원을 시작합니다. >
< 남은 시간 6시간 41분 07초. >
30분 정도 지났을 때, 하얀 샤워가운을 걸친 테리가 욕실에서 나왔다.
촉촉히 젖은 머릿카락을 틀어올리고 하얀 수건으로 감싸 유난히 하얀 목선이 도드라져보였다.
"씻으실 거에요?"
"그래. 나도 씻지."
난 그녀가 건넨 목욕용품을 가지고 욕실로 향했다.
'의체를 구성했던 곳에서 샤워라니... 감회가 새롭군.'
< 사용자님의 의체는 완벽한 방수기능을 보유했습니다. >
< 수심 8천 미터까지는 방수방압이 가능한 설계구조입니다. >
'하수구에 숨긴 은신처에서 샴푸라니... 테리도 여자였군.'
난 시스템의 자기자랑을 들으며 몸 구석구석을 씻었다.
'이대로 의체로 사는 수밖에 없나?'
< 관련자료 검색을 위해 온라인 접속을 허가하시겠습니까? >
'허가한다.'
< 볼드윈 메딕스 사에서는 사이보그의 신체를 바이오기술로 복원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 볼드윈 메딕스 사의 분점은 C 구역 중심인 스트리트에 위치해있습니다. >
< 홍보용 카탈로그에 나온 비용을 기준으로 계산한 결과, 사용자님의 신체복구에 필요한 금액은 125억 크레딧입니다. >
'C 구역에 출입하려면 3등시민이 돼야겠군?'
< 그렇습니다. >
'그래, 언제까지 남의 집에 얹혀살 수도 없겠지.'
온전한 인간의 몸을 되찾는 것부터 테리에게 빚을 갚고 나만의 집을 얻는 것까지.
'하루에도 몇번 씩 습격을 걱정해야하는 F 구역에 숨어살고 싶지도 않아.'
모두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일들이었다.
'일단 빚부터 갚고 그 다음은... 집이다.'
125억 크레딧을 모으는 것보다는 4등 시민이 돼서 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그놈... 베놈 펜스의 릴이라고 했었나?'
< 베놈 펜스의 지부장 릴입니다. >
< 이 팔미라 시의 F 구역은 총 12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
< 이 곳은 그 중 8번째인 F-8 구역입니다. >
< 온라인 검색 결과, 릴은 F-8 구역의 베놈 펜스 간부 중 서열 3위라는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
그때, 크릭에게 맞서던 놈의 과격한 모습을 떠올랐다.
그건 굶주린 야수의 눈빛이었다.
'쉽게 포기할 놈처럼 보이지는 않더군. 그놈도 처리해야겠지'
난 릴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계획을 세우며 샤워를 마쳤다.
"시설이 낡아서 씻기 불편하셨죠?"
샤워를 끝내고 나와보니, 테리가 욕실 앞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내가 씻고 나오길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귀족이라 대접하는 건가?'
그녀가 건네준 수건으로 머리를 닦는데, 테리가 침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자리 준비해놨어요."
그녀가 이끄는대로 들어가보니, 퀸사이즈 침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여긴 테리 침실이잖아. 내가 여기서 자도 괜찮겠어?"
"그, 그럼요."
테리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떨렸다.
'역시 귀족이라고 대접해주는 거였군.'
귀족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받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았다.
난 태연함을 가장하며 테리의 침대에 누웠다.
샤워를 끝낸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볼에 홍조가 가시지 않은 테리가 보였다.
"테리가 소파에서 자려는 거야? 불편하지 않겠어?"
난 멀뚱멀뚱 서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네...? 아! 괘, 괜찮아요. 그... 그럼 주무세요."
테리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당황한 모습으로 침실을 나섰다.
"하아...!"
문을 닫은 테리가 문에 기대 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침실이 하나뿐이란 사실이 부끄러웠던 건가?'
< 테리 양의 체온이 높습니다. >
난 테리의 불안한 숨소리와 유난히 크게 쿵쾅거리는 그녀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밖에 없었다.
'오감이 너무 선명해져서 불편하군.'
***
날 깨운 건 고소한 향기였다.
눈을 떠보니 테이블에 차려진 요리가 날 반겼다.
"이게 다 뭐야?"
"닭고기스튜에요."
"아니,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
"장벽 밖으로 나가시려면 속이 든든해야하지 않겠어요?"
"그럼 잘 먹을게."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테리는 내 옆에 물컵까지 놓아주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 주인님, 식사 맛있게 하십쇼!
그 순간, 아치스의 전뇌에서 망령의 외침이 들려왔다.
< 전뇌 복원을 완료했습니다. >
< 봉인도구의 성능이 향상되어 망령 아치스가 깨어납니다. >
< [전뇌 임플란트 LC-300의 설계도]를 저장하시겠습니까? >
< [뉴로모픽칩 NS-059의 설계도]를 저장하시겠습니까? >
'앞으로 설계도는 자동저장하도록.'
난 식사를 마치고 말했다.
"쥬드, 뉴로모픽칩 설계도를 보내줄테니 통신망 열어."
- 주인님, 아서 씨의 데이터를 수신해도 되겠습니까?
"수신해."
테리는 옆으로 다가온 쥬드의 머리에 숨겨진 키패드를 조작했다.
그러자 우리 눈앞에 뉴로모픽칩 NS-059의 설계도가 펼쳐졌다.
"5천만 크레딧 짜리야."
"저, 정말 망가진 칩에서 설계도를 추출하신 거에요?"
"너도 예상했을텐데?"
"아, 아서 씨의 능력이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죠. 하지만 고작 하룻밤만에 뉴로모픽칩의 설계도를 얻으실 줄은...!"
테리는 홀로그램을 터치하던 손을 떨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대기업 산하의 연구소에서도 하룻밤만에 칩을 복원하고 설계도 추출까지 할 수는 없을 거에요!"
< 테리 양에게 맡기기엔 너무 가치가 높은 설계도입니다. >
< 그녀는 스캐빈저 출신입니다. >
< 테리 양의 행동분석 결과를 연산합니다. >
< 도주확률 33%! >
'5천만 크레딧을 가지고 도망치면 난 배틀슈트를 갚을 필요가 없잖아? 그럼 더 좋지.'
< 합리적인 선택이십니다. >
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테리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난 장벽 밖으로 나가야하니까, 테리가 나 대신 5천만 크레딧을 받아와."
"오천만 크레딧을 받아오는 일을 제게 맡기시겠다고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 한 배를 탄 거 아니었나?"
그러자 테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리고 이 물건들도 구매해 와."
난 테리의 경비로봇 쥬드에게 물품리스트를 보냈다.
"텅스텐, 티타늄, 알루미늄... 소듐 이온 베터리까지? 이걸로 대체 뭘 만드시려는거죠?"
"릴을 처리할 계획이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테리는 약간 고민인 듯 한 표정을 보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오늘은 매립지에는 나가지 마."
"왜죠?"
테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5천만 크레딧짜리 일이 있는데 굳이 하루 천 크레딧도 못버는 매립지에 가서 릴한테 잡힐 이유는 없잖아?"
"그렇긴 하죠."
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아지트는 안전 하지?"
"몇년간 들킨 적은 없어요, 아마 안전할거에요."
나는 장비를 챙기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지. 조심히 있어."
***
F-8 구역 22번 게이트.
엘레베이터 앞엔 셀 수도 없이 많은 인원들이 몰려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이보그들과 화물차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외출목적은?"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2.5미터 높이의 외골격갑옷을 입은 장벽방어군 병사가 내게 물었다.
"암셀연구소의 의뢰로 좀비인자 수집을 위해 나가는 길입니다."
"통과!"
병사는 다른 사람들에겐 꼬치꼬치 캐묻던 것과 달리 곧바로 통과시켜줬다.
"기다리지말고 바로 내려보내! 암셀연구소 의뢰야!"
내가 엘리베이터에 타자 병사가 소리쳤다.
그러자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지상에 도착했을 땐 70초 정도 내려온 후였다.
"빨리 빨리 내립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장벽방어군 병사들이 탑승자들을 닥달해댔다.
내려서 돌아보니 매끈한 장벽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 장벽의 높이는 439 미터입니다. >
'팔미라 시 안에서 봤을 땐 30층 아파트 수준이었는데, 밖에서 보니 훨씬 높군.'
< 대 좀비 방어전을 위해 고원을 구축하고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한 것 같습니다. >
난 그제야 이 도시가 좀비를 얼마나 두려워하는 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아래에서 시민들이 생활하는 높이까지 올라가려면 300미터도 넘게 올라가야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삐빅! 하고 수신음이 들렸다.
< 암셀연구소로부터 정보가 수신되었습니다. >
< 헌팅그룹이 위치한 에어로트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