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음모
2미터가 넘는 거구가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걸어들어왔다.
레슬리는 자기 키만한 더플백을 매고 있었다.
특이한 건 후드티 밖으로 드러난 그의 목과 왼손이었다.
하얀 갑각으로 뒤덮인 피부는 인간의 피부라고 보긴 어려웠다.
레슬리는 자신의 위치와 지도 상에 표시된 점이 일치하는 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더플백을 내려놓았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후드를 벗자, 광대뼈가 피부 밖으로 돌출된 괴이한 얼굴이 세상에 드러나버렸다.
창백한 회색 피부와 붉은 눈동자의 주인은 더블백에서 꺼낸 소형로켓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거치대를 설치하기 전에 주변부터 살폈다.
'다행히 스토커 새끼들이 붙진 않았군.'
자신을 미행한 좀비가 없다는 걸 확인한 레슬리는 거치대를 설치하고 로켓 상단의 혈액상태부터 살폈다.
달콤한 인간의 핏물은 여전히 신선함을 자랑했다.
완전히 밀폐돼서 냄새가 날 리가 없는데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그 순간, 레슬리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흡혈에 대한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피는 얼마든 지 마실 수 있어.'
가까스로 흡혈본능을 억누른 레슬리는 아직 갑각화되지 않은 오른손으로 헝겁을 꺼내들었다.
윤활유를 바르고 다시 로켓을 닦아 혹시 모를 혈향을 지워냈다.
'이 고생을 했는데, 저쪽에서 잔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되는 거지?'
잠시 쓸데없는 상념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 문제는 칠마회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지.'
레슬리는 혈액의 밀봉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무전기를 들었다.
"42포인트 설치 완료했습니다."
- 레슬리, 네 기준 북서쪽 3킬로미터 부근에 소형좀비군집이 파악됐다.
- 동쪽으로 은밀하게 이동해라.
"정확한 합류지점은 어딥니까?"
- 1차 합류지점은 H 마트다.
"확인했습니다."
레슬리는 무전기의 베터리를 빼고 42포인트를 이탈했다.
***
우리가 1차 교전예상지역에 도착한 건 점심무렵이었다.
에디 겔로가 선택한 교전지는 유틀란트 시가 망하기 전엔 시민광장으로 쓰였다는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도로의 요철이 너무 심해서 바퀴달린 일반 차량으로는 이동이 불가능해보일 정도였다.
- 용병팀 진형을 이탈합니다.
- 아서 씨, 우리가 유인해온 좀비들 중에 스프린터만 처리해주세요.
"확인했습니다."
에디 겔로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도로를 따라 사라져버렸다.
문제는 다른 세 용병들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는 점이었다.
< 용병들의 기동이 매우 은밀합니다. >
<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속도를 늦춘 것으로 파악됩니다. >
< 칼슨 용병단의 행동양식을 기록합니다. >
시스템은 에디와 다른 용병들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주변환경의 변화나 용병들의 움직임 따위에 관심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 뉴로모픽칩의 설계도를 토대로 스켈레톤의 [데스소울]을 개선하셨습니다. >
< 스켈레톤의 지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됩니다. >
< 명령하지 않아도 주인과 자기자신을 보호할 사고능력을 갖췄습니다. >
< 초소형마력로의 설계도를 토대로 스켈레톤의 [데스소울]을 개선합니다. >
< 스켈레톤의 최대 죽음의 기운 저장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합니다. >
< 네크로맨서의 마력충전 없이 6시간이상 전투가 가능해졌습니다. >
< 배틀슈트의 통신모듈과 전투보조시스템을 토대로 스켈레톤의 전술지능을 개선합니다. >
< 스켈레톤이 레어 등급 스킬 [군체정신]을 얻습니다. >
< 전투상황에서 스켈레톤들의 정신이 하나로 모여 더 전술적인 사고가 가능해집니다. >
< 사용자님이 개선한 스켈레톤이 커먼 등급의 한계를 돌파했습니다. >
< [스켈레톤 소환] 주문이 언커먼 등급 [스켈레톤 워리어 소환] 주문으로 업그레이드됐습니다. >
< 놀라운 업적입니다! >
'이 정도로는 2레벨 좀비랑 맞서기도 어려울 거야.'
2레벨 좀비 스프린터는 인간보다 무거운 주제에 무려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힘도 좋고 무게도 더 나가며 속도도 빠르다?
스켈레톤과 붙여보지 않아도 결과는 자명했다.
< 개선된 스켈레톤을 토대로 스프린터와 교전을 시뮬레이션 합니다. >
< 결과가 도출됐습니다. >
< 스켈레톤과 스프린터의 교전비는 6:1입니다. >
'6대 1로 싸우면 승률이 50%다?'
< 정확히는 51%로 우세합니다. >
세 시간 동안 개선했지만, 스켈레톤의 한계는 너무 명확했다.
좀비세상이 된 이 땅에서 네크로맨서들이 언데드를 버리고 강화시술에 전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였다.
- 교전계획에 따라 지뢰를 매설합니다.
에어로트럭의 관리시스템이 갑자기 사방에 사출구를 열며 안내음을 내보냈다.
그와 동시에 슈슈슈슉! 하며 두꺼운 접시모양의 지뢰가 사방으로 발사됐다.
'살포형 지뢰인가?'
< 이지스시스템으로부터 관련정보를 수신했습니다. >
< 지금 사출한 지뢰는 대좀비전용 지뢰로 액화질소가 내장된 버전입니다. >
'저만한 크기에 많은 액화질소를 담을 순 없을테니, 기동력을 저하시키기 위함인가?'
< 맞습니다. >
< 고레벨 좀비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이 몰려드는 1레벨 좀비 '스토커'를 저지하기 위한 지뢰입니다. >
잡초와 폐차들 사이로 날아간 지뢰는 천여발이 넘는 것 같았다.
그때 용병 프랭크의 통신이 귓가에 울렸다.
- 아서 씨! 스프린터 37 마리 유인해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지스 시스템이 프랭크가 달려오는 방향과 스프린터들을 화면에 표시해줬다.
- 용병이 지뢰선을 넘은 후에 사격해주시기 바랍니다.
- 스프린터가 지뢰를 밟기 전에 무력화시켜주십시오.
이지스시스템이 안내하는 순간, 좌측 교차로에 프랭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땅을 박찰 때마다 퍼버벅하고 삭은 도로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왁!"
"구우와악!"
프랭크가 7미터 넓이의 지뢰지대를 뛰어넘는 순간 스프린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주인님, 저 잡놈들을 쓸어버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헤비머신건과 일체화된 아치스가 공격명령을 요청해왔다.
'허가한다.'
난 소음마법이 제대로 펼쳐진 걸 확인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드르륵! 하는 격발음과 짜라랑! 하는 탄피 떨어지는 소리가 조종석에 울려퍼졌다.
< 모든 스프린터를 처지했습니다. >
< 1차 교전을 평가합니다. >
< 55발을 발사해서 37 마리의 스프린터를 처치했습니다. >
< 명중률 67%! >
< 오발 2건이 확인됐습니다. >
'오발?'
스켈레톤 소환 주문을 손보던 내 신경을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다.
< 레이쓰 헤비머신건 아치스는 스프린터 두 마리의 머리를 날려버렸습니다. >
- 주, 주인님.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 다음 번엔 더 정확한 사격으로 주인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처참한 결과에 아치스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애원할 때였다.
- 아서 씨! 아주 좋았어!
스프린터들이 모두 쓰러지자, 지뢰선 밖으로 달려나간 프랭크는 좀비들을 확인하더니 날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
- 서른 마리가 넘는데도 이 정도 정확도라니, 자넨 타고난 명사수야!
"유인해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으하하! 이 사람, 사회생활 할 줄 아는군. 이 정도 실력이면 지뢰소모 없이 복귀할지도 모르겠어!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스프린터의 목을 수확했다.
프랭크가 35마리의 머리를 냉동고에 넣기가 무섭게 에디와 빅터가 통신이 날아왔다.
- 아서 씨, 59마리 유인해왔습니다.
- 아... 팀장이 먼저 도착했군. 그럼 난 한바퀴 더 돌고 오겠네.
빅터는 한번에 많은 스프린터를 상대해야하는 날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방향이 다르니까 동시에 오셔도 무방합니다."
- 팀장, 어떻게 할까?
- 아서 씨가 감당가능하다면 동시에 진입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지뢰를 밟기 전에 처리해주세요.
그와 동시에 북쪽과 동쪽의 도로에서 두 용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두 사람이 지뢰선을 넘는 걸 확인한 후에 사격을 허가했다.
그와 동시에 드르르륵! 하는 격발음이 울렸다.
< 모든 스프린터를 처지했습니다. >
< 2차 교전을 평가합니다. >
< 139발을 발사해서 102 마리의 스프린터를 처치했습니다. >
< 명중률 73%! >
- 주인님, 이번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내가 아치스를 칭찬하는 데, 에디가 말했다.
- 각자 스토커 도달예상시간 보고해주세요.
- 27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 41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프랭크와 빅터의 보고가 이어지고나서야 에디는 안심한 듯 내게 말했다.
- 아서 씨가 잘해줘서 한 사이클 더 뛰고 이동해도 될 것 같습니다.
스프린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스토커가 도착하기 전에 스프린터만 유인해서 처리하고 이동할 계획인 것 같았다.
- 다른 건 몰라도 지뢰를 하나도 안 터트리다니, 돌아가서 이 얘기를 하면 다른 놈들이 배 아파 죽으려고 할 걸?
프랭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뢰를 터트리지 않은 게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 대단하지! 이 지뢰가 한 발에 1천 크레딧짜리잖아? 스프린터를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지뢰 소모가 많으면 말짱 헛일이야!
- 정말 미쳤어! 이런 사냥효율이라니... 아서 씨, 혹시 용병단에는 관심없나? 칼슨 용병단이면...
빅터는 날 용병단에 끌어들이고 싶은 지 은근슬쩍 밑밥을 깔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지미의 통신이 그의 영업을 가로막았다.
- 팀장, 49마리 유인했어! 거긴 준비 됐나?
- 아서 씨, 바로 진입시켜도 되겠습니까?
에디 겔로는 지미의 통신에 대답하는 대신 날 보며 물었다.
"문제없습니다."
- 진입하세요.
교차로를 지나 이미 스프린터들의 목을 모두 수확하고 기다리는 동료들을 본 지미는 잠시 움찔했다.
- 지뢰선 안에는 전투흔적도 없네?
- 잔말 말고, 빨리 달려!
프랭크의 잔소리를 듣고 지미가 지뢰선을 넘자, 다시 한번 드르륵! 하고 격발음이 터져나왔다.
< 모든 스프린터를 처지했습니다. >
< 3차 교전을 평가합...
기분 좋게 시스템 메세지를 읽으려는데 갑자기 삐이익! 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 이게 무슨 소리지?
- 팀장, 저길 봐!
빅터가 폐건물 너머로 솟구치는 붉은 로켓을 가리킨 순간이었다.
퍽! 하는 미약한 폭발음과 함께 허공에 빨간 안개가 흩뿌려졌다.
- 주인님, 저건...!
아치스가 보고하려는데 삐비비비빅! 하는 소음이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피다! 저건 사람의 피입니다!"
난 빨간 안개를 보는 순간 그게 인간의 피라는 걸 직감하고 소리쳐 알렸다.
- 티, 팀장! 이건 함정이야!
- 이런 미친! 저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유틀란트의 모든 좀비들이 몰려올거야!
- 팀장, 당장 이탈해야합니다!
용병들은 사방에서 연이어 터지는 피안개를 보고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운전석을 박차고 나온 스톨즈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에디를 추궁했다.
"로켓으로 피를 뿌려? 이건 미리 준비하지 않고는 시행할 수 없는 계획이야!"
-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교전예정지에 대한 정보는 나도 오늘 새벽에서야 받았어. 네가 아니면 누가 우릴 이런 함정에 빠트릴 수 있지?"
- 스톨즈님. 레이더를 보십시오.
난 에디의 말을 듣고 홀로그램 지도부터 살펴봤다.
그곳엔 초록색 점 여섯개를 중심으로 13개에 이르는 붉은 점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 1만 마리 이상의 좀비집단이 사용자님을 목표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 최대한 빠르게 현재 위치를 이탈해주십시오. >
문제는 우리가 유틀란트 시티로 들어온 방향에 5개의 붉은 점이 집중되어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이건...!"
- 제가 스톨즈님을 함정에 빠트리고 도망갈 계획이었다면, 퇴로를 제 손으로 막는 미친 짓을 했겠습니까?
눈앞에 띄운 홀로그램 지도로 상황을 파악한 스톨즈는 에디의 질문에 반박하지 못했다.
- 스톨즈님을 처리하면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굽니까?
"제...니퍼! 그년이야!"
- 제니퍼면 암셀연구소 후계자 중 한 명이잖아?
- 젠장, 네크로맨서들의 권력다툼에 끼어든 거야?
- 팀장! 우리가 죽더라도 이 사실은 팔미라 시에 보고해야 합니다.
- 빅터 말이 맞아. 팀장, 그래야 칼슨 단장이 우리 복수를 해주던 시경찰에 고발하던 할 거 아니야?
-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우린 10만 마리가 넘는 좀비들에게 둘러싸였다고!
이성을 잃은 용병 지미의 통신 뒤로 에디 겔로의 대답이 이어졌다.
- 로켓이 터진 순간부터 계속 구조요청을 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런 답신이 없어요.
"통신망 교란입니까?"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