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좀비장갑
전면에 떠 있는 대형스크린을 본 크라이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 절멸의 발렌틴...!"
그가 말한 순간 대형스크린 우측에 나열된 일곱 개의 마이크 중 7번 마이크가 번뜩였다.
- 아직... '그' 학파라고 부르긴 이르다.
- 마계어로 이루어진 주문을 읊는 학파가 발렌틴 학파 말고 또 있나?
스크린 우측에 나열된 7개의 마이크 중 3번과 6번 마이크가 번뜩였다.
그 모습을 본 크라이머는 하나의 영상을 공유 채널에 띄웠다.
그러자 디스플레이에 한 남자가 스켈레톤 무리를 일으키는 영상이 재생됐다.
아서였다.
아서가 입을 떼자 인간은 따라할 수 없는 발음이 흘러나왔다.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언어였다.
왜 자신이 그런 기분을 느끼는 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인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 발음을 듣는 것만으로!
그때 2번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
- 눈으로 보아도 읽을 수 없고, 들어도 외울 수 없다.
그러자 4번 마이크에도 불이 들어왔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 전승과 맞아 떨어지는군.
- 마계어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고대어인 것은 확실하다.
- 발렌틴이라면...
5번과 6번 마이크에 연이어 불이 들어온 순간, 3번 마이크에 불이 들어오며 6번 마이크의 말을 잘라버렸다.
- 잠깐! 그가 원시 네크로맨서에 가깝다는건 인정하지! 하지만 [절멸의 발렌틴]에 리빙아머를 입히는 주문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어!
단 하나의 영상에 칠마회 전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스크린은 좀비떼를 학살하는 아머드 스켈레톤들을 비추고 있었다.
"세상에 죽은 자를 수십 마리씩 일으키는 네크로맨서가... 그 발렌틴 외에 또 있나?
그때 1번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
- 아니. 수십이 아니다. 수백이다. 적어도 이백 마리는 넘어보이더군.
- 한 명이 이백 구를 일으키다니...
- 저 주문이 팔미라 시의 네크로맨서들에게 전해지면, 그들은 자체 무력을 보유하게 돼.
- 그러면 앞으로 우리와 손 잡을 이유가 사라질 지도 모르겠군.
4번 마이크가 말하자, 보이스룸이 한순간에 침묵으로 물들었다.
하나의 의뢰에 불과했던 문제가 칠마회 전체의 존립에 영향을 키칠 안건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 칠마(七魔) 크라이머, 머슬을 깨워라!
침묵을 깬 건 1번 마이크였다.
"머슬은 진화 중입니다. 대장벽전투에 써먹어야할 놈을 여기서 소모해버리면..."
- 저 자가 살아서 팔미라 시로 돌아가면 암셀연구소 독점납품 건만 어그러지는 게 아니야!
- 네크로맨서들과의 연계가 깨지게되면 무슨 수로 우리의 도시를 건설할 생각이냐!
3번과 5번 마이크 아니, 삼마(三魔)와 오마(五魔)의 주장은 날카로웠다.
"저자에게 유인하겠습니다."
- 칠마. 칠마회는 너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
1번 마이크가 번쩍이자, 다른 마인들이 하나같이 소리쳤다.
- 마인의 도시를 건설하는 그날까지!
- 마인의 도시를 건설하는 그날까지!
****
1레벨 좀비 스토커의 어깨를 짓밟고 날아온 스프린터가 아머드 스켈레톤의 주먹 한방에 박살이 나버렸다.
산산히 부서져 비산하는 스프린터의 뇌수와 해골조각.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무력한 몸.
그렇게 쌓인 좀비의 시체가 천 구가 넘어가고 있었다.
스프린터를 압도하는 무력의 아머드 스켈레톤 250마리.
녀석들을 보니 남은 3천 마리 정도의 좀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됐다!'
난 쩔뚝거리며 에어로트럭으로 향했다.
유리창을 두드리던 좀비를 아머드 스켈레톤으로 처리하자, 스톨즈가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서님! 이제 살았습니다."
난 갑자기 내게 존대하는 스톨즈의 태도변화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담담한 표정을 연기하며 물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운전석 에어백 덕에 저만 괜찮은것 같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쇼."
스톨즈는 처참한 꼴이 된 용병들에게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스톨즈 님이 운전이 가능한 몸이라니 다행입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긴 했지만, 빨리 이 미친 도시를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그, 그럴 수 있을까요?"
"에어로트럭만 일으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하긴 저... 스켈레톤 수백 마리면 충분히 가능하겠습니다"
스톨즈는 아머드 스켈레톤을 보고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스톨즈님은 지금처럼 에어로트럭 안에 숨어있는게 좋겠습니다. 부상자 수습은 제가 하죠"
내가 좀비떼에 파묻힌 빅터와 에어로트럭에 깔린 에디 겔로 팀장의 상태를 살피려던 때였다.
- 주인님. 이 놈들이 흘린 죽음의 기운을 흡수해도 되겠습니까?
저 혼자 허공에 떠오른 채, 내 뒤를 따르던 레이쓰 헤비머신건 아치스가 죽어자빠진 좀비들의 시신을 보며 물었다.
돌아보니 죽은 좀비들의 시신에서 검은 연기가 몽글몽글 올라오고 있었다.
'넌 이미 모든 기능을 해금했잖아?'
- 조금만 더 흡수하면 뭔가... 뭔가 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치스는 뭔가에 홀린듯한 표정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그 순간, 산처럼 쌓인 좀비들의 시신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불꽃도 일지 않고 검은 재가 되어가는 시신들.
그리고 그 위로 피어오른 죽음의 기운.
아치스를 중심으로 폭풍처럼 몰려드는 그 기운을 본 순간, 어떤 상념이 내 뇌리를 스쳤다.
죽음의 기운을 흡수해 본래 능력을 되찾아가는 레이쓰 헤비머신건 아치스의 모습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나는 왜 안돼?'
하찮은 망령따위도 할 수 있는 일을 데스로드 직업을 선택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에 의문을 느꼈다.
그러자 눈앞에 세계의 진리가 드러났다.
< [죽음의 기운]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집니다. >
< 사령술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작은 가능성을 강제로 발현시킵니다. >
< 레어 등급 스킬 [에너지 드레인] 주문을 습득하셨습니다. >
시스템 메세지가 올라왔을 땐, 이미 죽음의 기운이 폭포수처럼 내게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 폭발적으로 흡수한 죽음의 기운을 반물질 코어가 마력으로 전환합니다. >
< 풍족한 마력 공급으로 신체가 급속회복을 시작합니다. >
< 파열된 간이 완전 회복되셨습니다. >
< 복강 내 출혈이 멎었습니다. >
< 탈구된 왼쪽 어깨가 제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
< 골절된 우측 고관절이 접합됐습니다. >
< 완전회복에 성공하셨습니다. >
끔찍한 고통이 사라진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 주인님...!
문제는 죽음의 기운을 흡수할 생각에 희희낙락했던 아치스가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이 돼버렸다는 점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삐이이익!
내 뒤의 빌딩 옥상부근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유틀란트 시 도심 부근으로 미사일이 발사돼버렸다.
하얀 꼬리를 남기고 사라지는 미사일을 보고 어리둥절한 순간 저 멀리서 쿠궁! 하는 낮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뭐야? 누가 발사한 거지?"
내가 의문을 품은 순간, 아머드 스켈레톤 한 기가 빌딩 외벽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채 중간을 오르기도 전에 새로운 미사일이 발사돼버렸다.
쿠왕! 하는 두번째 폭발음은 처음보다 크게 들렸다.
처음보다 우리에게서 가까운 곳에서 폭발했다는 증거였다.
마치 여기 있으니 이리 모이라는 듯 점차 가까워지는 폭발음이 가리키는 건 명확했다.
'좀비들을 이쪽으로 유인하고 있어. 당장 막아!'
그 순간 20여 기의 아머드 스켈레톤들이 빌딩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번째 미사일 역시 빌딩을 오르는 아머드 스켈레톤을 기다려주지 않고 발사되고 말았다.
꽈광! 하는 굉음이 터진 건 내가 타고 온 에어로트럭이 우회전했던 사거리였다.
하얀연기를 뚫고 나온 건, 4미터 크기의 괴물이었다.
괴물은 마치 거대한 근육 덩어리 위에 뼈갑옷을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에는 붉게 빛나는 눈과 볼근육 일부만 드러났고 갈비뼈와 어깨, 팔꿈치, 무릎뼈가 유난히 크게 튀어나와있었다.
< 경고! 3레벨 좀비입니다. >
< 외형적 특징을 분석합니다. >
< 4레벨로 성장하기 직전의 성체입니다. >
< 배틀슈트에 기록된 통계에 따르면 20mm 탄으로 저지할 수 없는 수준의 좀비입니다. >
< 위험! 3레벨 좀비를 처치하기엔 공격능력이 부족합니다. >
< 아머드 스켈레톤으로 시간을 버신 후 퇴각에 전념해주시길 바랍니다. >
시스템은 당장 퇴각하라고 조언해왔다.
하지만 그땐 이미 괴물이 질주하기 시작한 후였다.
놈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콰과과광! 하며 낡은 도로와 좀비들이 함께 터져나갔다.
걸어다니는 폭탄 같은 놈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한 순간이었다.
3레벨 좀비가 갑자기 땅을 딛으며 주저앉더니 꽝! 하는 굉음만 남기고 점프해버렸다.
가벼운 발돋움으로 빌딩 10층 높이만큼 날아오른 놈은 나를 향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때, 미사일을 막기 위해 빌딩을 올랐던 아머드 스켈레톤들이 놈을 향해 점프하는 모습이 보였다.
반은 허공을 갈랐지만, 반은 놈의 팔다리를 부여잡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놈은 좀비와 혈투를 벌이는 아머드 스켈레톤들 중심에 떨어져내리고 말았다.
3레벨 좀비와 함께 떨어져내린 아머드 스켈레톤 다섯 마리가 놈에게 깔려 한순간에 박살이 나버렸다.
그와 동시에 아머드 스켈레톤을 이루었던 죽음의 기운이 내 코어로 빨려들어왔다.
< 평균속도 시속 501킬로미터. >
< 무게 3.7톤. >
< 4단계 강화시술자 없이는 상대할 수 없는 레벨입니다. >
< 즉시 퇴각... >
시스템이 야단을 쳐댔다.
하지만 난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아머드 스켈레톤 수십 마리가 팔다리에 올라탔는데도 힘든 기색도 없이 아머드 스켈레톤들을 뿌리치는 3레벨 좀비.
'좀비가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도 있는 거였어?'
3단계 강화시술자만큼이나 빠른 2레벨 좀비 스프린터를 봤을 땐, 신기한 정도였다.
하지만 3레벨 좀비를 본 순간 좀비에 대한 관념이 깨져나가버렸다.
'아름답군.'
놈은 언데드가 가야할 진화의 방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2레벨 좀비 스프린터를 한방에 무력화시켰던 아머드 스켈레톤의 주먹이었다.
하지만 3레벨 좀비의 외골격에는 흠집조차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근육과 단단한 외골격이라...'
아머드 스켈레톤의 갑옷도 튼튼하긴 했다.
3레벨 좀비의 외골격을 수 없이 두드리고도 조금 찌그러지는 정도에 그쳤으니까!
하지만 '엄청난 근육'을 대신할 힘이 부족했다.
'어떻게하면 부족한 힘을 보충할 수 있을까?'
그때 3레벨 좀비와 아머드 스켈레톤들의 싸움에 휘말려 피곤죽이 된 좀비들의 시신이 내 눈에 들어왔다.
'3레벨 좀비와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힘을 보충할 방법은 있겠어.'
내가 상상한 순간 본 아머 주문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아머드 스켈레톤 한 마리가 내 눈앞으로 날아왔다.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던 스프린터의 시신이 불타오르고 그 뼈마디가 아머드 스켈레톤에게 입혀졌다.
썩은 살점과 핏물이 불타올라 죽음의 기운으로 변하고 그 검은 연기가 본아머를 강화한 순간 주문이 완성되려 했다.
하지만 내가 거부했다.
< 사령술에 관한 불가사의한 재능이 주문을 강제로 연장합니다. >
< 언커먼 등급 스킬 [언데드 개조]를 사용합니다. >
그 대신 사방에 흩뿌려진 좀비의 근육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놈들의 뼈와 장기에 붙어있던 근육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찢어져 나왔다.
허공을 날아온 근육조각들은 본 아머 위에 붙더니 서로 엮이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외골격 위를 뒤덮은 한겹의 근육.
그건 다비드상을 연상케할만큼 균형의 미를 살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난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더 많은 근육. 더 큰 힘!'
본 아머를 뒤덮은 근육이 두터워질수록 더 많은 죽음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 커먼 등급 스킬 [본 아머] 주문이 강제로 진화합니다. >
< 레어 등급 스킬 [좀비장갑] 주문을 창안하셨습니다. >
< 경이로운 업적! 네크로맨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 한 주문입니다! >
마침내 완성된 근육은 마치 보디빌더를 연상케하는 근육괴물의 모습이었다.
키는 2.4미터에 달했고 좀비장갑의 무게만 족히 130킬로그램 이상 나갈 것 같았다.
'자, 얼마나 강해졌는 지 한번 실험해볼까?'
그 순간, 팡! 하는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좀비장갑을 걸친 아머드 스켈레톤이 3레벨 좀비를 향해 튀어나갔다.
그러자 아머드 스켈레톤의 발에 밀린 아스팔트가 포크레인으로 내려찍은 것처럼 푹 파여버렸다.
좀비장갑을 걸치기 전과는 명확히 다른 속도였다.
하지만 총알처럼 튀어나간 아머드 스켈레톤이 3레벨 좀비의 정강이를 때린 순간이었다.
뻑! 하는 타격음과 함께 놈의 정강이 외골격이 금이 가버렸다.
겨우 한방이었다.
하지만 한방에 부서진 건 3레벨 좀비의 외골격뿐만이 아니었다.
< [좀비장갑]의 손상율 12%. >
< 추가적인 전투를 위해 정비가 필요한 수준입니다. >
놈의 정강이 외골격을 때린 아머드 스켈레톤의 오른손부터 어깨까지의 좀비장갑이 터져나가버렸다.
오른팔에서 남은 건 반파된 본 아머와 얼마 남지 않은 좀비근육들뿐이었다.
'수복되라!'
내가 명령한 순간, 주변에 널부러진 좀비 사체에서 뼈와 근육 그리고 죽음의 기운이 좀비장갑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난 좀비장갑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아머드 스켈레톤을 불러들였다.
'한 기로 안되면 열 기, 백 기로 상대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