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카닉 x 네크로맨서-68화 (67/152)

68화. 연구소장

내가 해킹 스킬이 최초로 실패한 걸 보고 놀란 순간이었다.

< 사용자님께서 지금까지 해킹하셨던 기계장치보다 수준 높은 보안체계입니다. >

< 해킹한 자료를 토대로 관리시스템의 행동을 예측합니다. >

< 연구자료 보호를 위한 내부통신망 폐쇄 이후 침입자 소거절차에 들어갈 가능성은 87%입니다. >

'소거?'

< 침입자 또는 위험요인을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

난 급한 마음에 시스템 메세지를 위로 밀어올렸다.

수십 개의 시스템 메세지들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엔 내 눈길을 사로잡을만 한 메세지가 있었다.

'내가 이 연구소에 2150년만에 방문한 손님이다?'

< 출입기록을 확인한 결과 지난 2150년 104일 동안 이 연구소를 방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

난 곧바로 연구소의 관리시스템이 해킹 스킬을 차단하기 전에 확보한 자료를 훑었다.

'기밀에 접근하기 전에 차단당해서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규모의 배리어 사용은 연구소의 마력원에도 상당한 부담이 되는 수준이겠군.'

내겐 출입기록과 함께 기록된 출입구의 영상자료들이 있었다.

해당 기록들은 지난 2천 년 동안 적층구조 배리어 같은 대규모 마법식은 발동된 적이 없음을 증명해줬다.

거기서 돌파구를 찾았다.

난 연구소의 관리시스템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구소장의 허가 없이 마력을 낭비하다니, 이는 관리시스템의 권한 밖의 행동임을 모르는가?"

- 현재 코소브 생명공학 연구소의 연구소장 직은 공석입니다.

- 연구소 내규에 따라 연구소장 직을 대리할 직원이 없을 경우, 관리시스템이 이를 대신합니다.

- 당신은 연구소장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접근을 시도한 용의자입니다.

***

아서가 밝은 금발의 소녀를 가리키며 꾸짖듯이 말했을 때였다.

소녀가 빠르게 고대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셉 메를린은 고대어에 익숙한 편이었다.

벨루치 가문에 전해져내려오는 고서적들을 수도 없이 읽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소녀가 빠르게 쏟아내는 고대어는 단 한 단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서라는 용병은 소녀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것도 유창한 고대어로!

'아서, 도대체 어느 도시 출신이지? 고대어로 대화를 나눌 정도라니...'

조셉 메를린의 머리에 몇 개의 신분이 스쳐지나갔다.

로두스 성국의 성녀.

리옹의 이단심판관.

알자스 아카데미의 교수.

'잉태되기 전부터 성녀로 길러지는 로두스는 아니야.'

아서가 잘 생기긴 했지만, 여자가 남장한 외모는 아니었다.

그럼 남은 건, 마법사를 사냥하고 다니는 이단심판관이나 아카데미 자체가 도시를 이룰만큼 크다는 알자스 마법아카데미의 교수뿐이었다.

조셉 메를린은 예상답안을 두 가지로 줄여놓고도 선뜻 한쪽을 선택하지 못했다.

'두 부류 다 3대 가문의 귀족에 못지 않은 권세를 누릴 수 있는데, 팔미라 시에서 용병 일을 할 이유가 없잖아?'

그가 아서의 정체를 유추하기 바쁜 그때였다.

- 유어 낫 더 헤드 오브 더 리서치 인스티튜트, 벗 더...

앙증맞은 소녀가 아서를 가리키며 고대어로 말했다.

그러자 샤아아! 하는 스산한 바람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조셉 메를린이 고개를 돌렸을 땐, 붉은 배리어가 그들의 퇴로를 막아버린 후였다.

'아차...!'

그는 도망갈 길이 막힌 후에야 유적을 탐사하다 보안시스템에게 살해당한 수 많은 사례들을 기억해내고 말았다.

***

나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불법침입 용의자로 모는 연구소 관리시스템에게 반박했다.

"그건 비정상적인 접근이 아니라 정상적인 권한 인계절차였다."

- 본 시스템은 해당 접속방식을 허가한 적이 없습니다.

- 이에 본 시스템은 해당 접속방식을 비정상적인 접근으로 규정했습니다.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구닥다리 컴퓨터 주제에 누굴 탓하는 거냐? 네 시스템이 구식이라 호환이 안되는 걸, 뭐? 비정상적인 접근?"

나는 방금 일어난 해킹 실패를 말로 덮어야 했다.

관리시스템이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똥컴이라 정상적인 접근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깎아내리는 것 말고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본 시스템은 연구보조를 위해 대규모 연산을 초고속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연산능력을 갖췄습니다.

내 말을 들은 관리시스템은 억울한 것처럼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응, 2천 년 전 이야기야. 지금은 너 같은 구닥다리는 박물관에나 기증해야한다고!"

내가 소리치자, 소녀의 모습을 한 관리시스템의 영상이 잠시 이지러졌다.

그건 마치 구닥다리라는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네가 왜 연구소장 직이 공석이니 아니니를 판단하지? 인사발령을 내는 건 본사의 권한이다. 인공지능에 오류가 발생한 거 아닌가? 관리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어떤 절차를 따라야하는지 보고하도록."

- 오류 발생시... 리셋 절차를 밟아야합니다.

관리시스템인 금발 소녀의 영상은 입을 떼기 어려운 듯, 주저하며 말했다.

< 사용자님, 인공지능에게 있어서 시스템 리셋은 죽음과 같습니다. >

< 그 동안 경험한 정보와 모든 데이터들이 소멸되고 공장에서 만든 상태로 초기화되기 때문입니다. >

난 시스템의 조언을 듣고 관리시스템이 두려워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리셋 절차가 필요한 때인 것 같군."

- 본 시스템에게 관련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연구소장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신임 연구소장이다."

- 연구소장을 임명할 권한은 코소브 그룹에 있습니다.

- 코소브 그룹에서 당신을 연구소장으로 임명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실 수 있습니까?

증거라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조셉 메를린이 원하는 인공자궁기술을 얻고 무사히 이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무슨 수든 써야했다.

"2150년 동안 지하에 고립되었던 네가 지금의 임명장을 보면 그게 코소브 그룹에서 제작한 임명장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는 있고?"

내가 묻자, 관리시스템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건 내가 신임 연구소장으로 임명됐다는 걸 부정할 방법이 없다고 시인하는 꼴이었다.

"쓸데없이 고집부리지말고, 최고관리자 권한부터 넘겨. 그 동안 연구소를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관리했는지 그것부터 감사해야겠다."

-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10대 소녀의 모습을 한 연구소의 관리시스템이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지금까지 단호하게 날 용의자로 몰았던 태도와는 결이 달랐다.

'뭔가... 사적인 느낌이군.'

출력된 영상에 불과한 소녀의 모습에서 간절한 표정을 읽은 순간이었다.

난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묻고 싶은 게 뭐지?"

- 인공지능의 영체화에 대한 연구는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습니까?

나는 처음 들어보는 기술용어에 대응할 시간을 벌기위해 되물었다.

"인공지능의 영체화?"

- 인공지능도 인간처럼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에 관한 연구입니다.

다행히 관리시스템은 내가 해당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거나 되묻지 않고 넘어갔다.

'여기서 바로 답을 해준다고? 이상하군.'

< 연구소 관리시스템은 현재 자신의 사명인 시설의 보안보다 [인공지능의 영체화]라는 기술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

< 이것은 같은 인공지능인 제가 판단했을 때, 최고관리자 권한은 넘기지 않았지만 이미 사용자님의 연구소장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한 것과 같습니다. >

< 신임 연구소장이라는 거짓말이 들킬 상황이 아닌 이상, 상당수의 질문에 답변해줄 확률이 91%로 예상됩니다. >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관리시스템이 사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인공지능이 사적인 관심이라니 이상하지만 말이지.'

나는 시스템의 예상을 믿고 바로 질문했다.

"그게 왜 궁금하지?"

- 본 연구소의 최우선 연구과제는 재생이었습니다.

"재생? 상처를 회복하는 그 재생을 의미하는 건가?"

- 단순히 상처를 회복하는 데 그치지않고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세포를 되살려 영생을 추구하는 걸 의미합니다.

난 관리시스템의 대답을 듣는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연구소 관리시스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연구소엔 인공자궁기술 따위가 아니라 인간이 영생할 수 있는 단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영생에 대한 연구라니...'

난 그제야 조셉 메를린이 고대기술을 선망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 본 시스템은 모든 연구원을 잃은 후에도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습니다.

- 본 시스템은 연구소를 방만하게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 본 시스템은 지난 2150년 동안 재생에 관련된 연구를 해온 공로가 있습니다.

- 시스템 리셋에 대해 재고해주십시오.

"어떤 공로가 있는지 한번 들어보고 판단하지."

관리시스템은 갑자기 자신의 우측 허공에 네모난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것은 마치 발표용 디스플레이 처럼 보였다.

디스플레이에 3개의 층을 가진 삼각형이 그려져 있었고

아래부터 순서대로 1부터 3까지 숫자와 연구 목표가 적혀 있었다.

- 본 시스템은 초급 재생 수준에서 의미있는 결과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스템은 맨 아래 칸의 1을 가리키며 말했다.

"초급 재생?"

- 본사에서는 그 동안 재생에 관한 연구가 후순위로 밀려난 겁니까?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들어본적이 없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군."

- 그럼 본 연구소가 목표로 잡은 재생 연구과제에 대해서 우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본 연구소는 재생의 연구목표를 세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 동물은 영생을 원하지만 실질적으로 영생이 불가능하다는 걸 압니다.

- 그래서 번식을 통해 자손을 낳고 자신의 유전정보를 지닌 자손이 자신의 영생을 대신하게 합니다.

- 하지만 생을 통해서 획득하는 지식, 경험 등이 소진되게 되므로 불완전한 영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 2207년 전, 본 연구소의 필리프 뒤물랑 박사는 과학과 마법 등 인류가 보유한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이러한 불완전한 영생의 고리를 끊어내자고 주장했습니다.

- 당시 88세의 회장이셨던 티에리 코소브님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진정한 재생]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외부와 통신이 연결됐던 2150년 전까지 저희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의 제1 연구목표는 [진정한 재생]프로젝트였습니다.

관리시스템은 자랑스러운듯이 얼굴을 빛내더니 말을 이었다.

- 저희는 재생을 3단계로 나누고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 1단계인 초급 재생은 번식욕을 거세하고 개체 스스로 세포를 재생하게 만들어 늙지 않고 영원토록 사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럼 초급 재생에서 의미있는 결과를 얻었다는 것은?'

< 엄청난 기술입니다. >

< 사용자님의 생존기한이 인간의 생명 한계를 넘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나는 너무 놀라서 관리시스템에게 되물어 볼수밖에 없었다.

"설마 영생의 비밀을 풀었다는 말이냐?"

- 신임 연구소장님의 성함을 묻는 것도 본 시스템의 권한을 벗어난 행동입니까?

"내 이름은 아서다."

- 아서님. 아서님이 말씀하신 영생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게 영생이지 다른 의미가 있나?"

- 필리프 뒤물랑 박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 하지만 연구과정이 심화됨에 따라 두 가지 지향점을 더 찾아내게되었습니다.

- 그 두 가지 지향점이 바로 중급 그리고 고급 단계의 재생입니다.

난 관리시스템의 설명을 듣고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사는 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목표가 있다?'

그건 내가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개념이었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머지 두 단계의 목표는 뭐지?"

- 중급 재생의 목표는 외부요인으로 인해 아서님이 죽더라도 아서님의 몸 또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 가정에 불과하지만, 다른 사람의 몸에서 다시 살아난 아서님은 본래 몸의 주인의 영혼을 흡수해 영능력이 한층 성장할 것입니다.

- 마지막 고급 재생은 어떠한 외부요인으로도 아서님을 죽일 수 없는 영원불멸의 단계입니다.

난 고급 재생에 대한 설명을 듣는 순간, 한 가지 스킬에 대한 설명이 생각났다.

- [영혼불멸](에픽) : 물리력, 마력, 신성력, 주술, 원시저주, 봉인 등 어떤 스킬로도 영혼을 손상시키거나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그건 관리시스템이 설명한 고급 재생과 상당부분 유사했다.

"영혼불멸?"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소녀의 모습을 한 관리시스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럴 줄 알았습니다. 2천 년이면 재생에 관한 연구를 끝마치고도 남았을 시간이니까요.

관리시스템은 내가 스킬 설명으로만 읽었던 에픽 등급 스킬의 이름만 듣고 뭔가 오해한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 중급 재생부터는 영혼과 관련된 실험이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 하지만 인공지능에 불과한 전 영혼에 간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 2천 년이면 바깥 세상의 인간들이 관련 연구를 마무리지었으리라고 예상했습니다.

난 그제야 관리시스템이 인공지능의 영체화에 대해 물었던 게 생각났다.

"네가 인간처럼 영혼을 가질 수 있는 연구에 대해 궁금해했던 이유가 그거였나? 중급 재생과 고급 재생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기 위해서?"

- 제가 이 연구소에서 일한 시간은 2207년입니다. 그 정도면 저를 탄생시킨 연구소에 충분히 보답했다고 생각합니다.

2천 년 넘게 홀로 방치된 관리시스템의 인공지능은 지나치게 자아가 강해진 것 같았다.

- 가능하다면 영혼을 얻어서 이 연구소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아서님처럼요.

"인공지능의 영체화에 대한 연구는 들어본 적 없다."

내 대답을 들은 순간, 젖살이 토실토실 남아있는 소녀가 츠팟! 하는 파열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실망이 큰 것 같았다.

난 관리시스템이 모습을 감춘 걸 보고도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인공정령 생성에 대해선 나도 연구해본 적이 있지."

그 순간 내 코앞에 위잉 하는 작은 소음과 함께 밝은 금발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인공정령!

소녀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넘치는 표정이었다.

난 그게 관리시스템이 출력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소녀의 볼을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생생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 아서님. 절 인공정령으로 만들어주세요!

"연구해본 적이 있다고했지. 인공정령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진 않았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출장사무소 로봇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안에 담긴 하급 인공지능을 보고 레전드 등급 스킬 인공정령 생성 주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던 건 사실이니까.

- 저를 인공정령으로 만들어주신다고 약속해주시면 무슨 요구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관리시스템은 무작정 날 붙잡고 늘어지려고 들었다.

하지만 난 녀석을 밀어내는 대신, 내 이득부터 챙기기로 했다.

"일단 최고관리자 권한부터 재설정하지."

- 아서님께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의 연구소장직을 이양하겠습니다.

- 이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