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분신
시스템 메세지가 올라왔을 땐, 이미 반경 30미터 크기의 붉은색 배리어가 아군 기체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이 빛으로 가득차버렸다.
***
머리에서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망치에 맞기라도 한 것 같이 아프고 어지러웠다.
"으윽...!"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를 흔들자 두통이 더 심해졌다.
그 끔찍한 고통에 잠시 멈칫한 순간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조종석 유리창.
그 너머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후두둑! 텅! 하는 소음과 함께 산산조각 난 뼈와 쇳조각들이 비처럼 떨어져내렸다.
< [적층구조 배리어]를 사용하셨습니다. >
< [쇼크웨이브]의 폭발여파로 [적층구조 배리어]가 붕괴되었습니다. >
< 사용자님이 탑승하신 사일런스스톰 기체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
< 기관포 7문이 부분 기화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
< 기관포 4문의 포신에서 균열을 발견했습니다. >
< 사용불가능한 수준입니다. >
< 현재 사용가능한 30mm 기관포는 우측 어깨 상단의 1문뿐입니다. >
< 초고온 폭발에 휘말린 결과, 13%의 장갑이 손실됐습니다. >
< 세부점검을 실시합니다. >
< 소형핵융합로 7기 이상 없음. >
< 비행기능 정상. >
< 충격으로 인한 반고리관 이상으로 어지러움이 발생합니다. >
< 반고리관 복구까지 22초 남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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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크웨이브]가 불러온 초고온 폭발과 충격파로 인해 발생한 피해규모를 계산합니다. >
<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착용하지 않은 43기의 워리어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
<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착용하지 않은 워리어 중 파괴되지 않은 기체는 7기입니다. >
시스템의 처참한 보고를 듣는데, 어느덧 어지럼증이 가라앉았다.
그 순간,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건 죽음의 기운이었다.
죽음의 기운은 딱 사람 키 높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신체를 잃은 아머드 스켈레톤 워리어들이 반물질 코어를 소비해 영혼과 육신을 복구합니다. >
그 순간 비처럼 떨어져내리는 뼛조각과 마그니움 합금 조각들이 검은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파괴된 워리어들은 그 조각들을 모아 뼈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 상당부분의 신체가 초고온 폭발에 휘말려 기화되었습니다. >
< 신체를 복구할 재료가 부족합니다. >
난 시스템 메세지를 읽고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붉은 모래사막 곳곳에 파묻힌 사일런스스톰과 검은 배틀슈트들이 보였다.
< 초고온 폭발의 여파로 사일런스스톰 2, 4, 5 호기가 반파되었습니다. >
그때 사막모래 속에 엉덩이만 남기고 파묻힌 사일런스스톰 한 기가 들썩였다.
곧이어 사일런스스톰이 돌아누웠다.
반쯤 파괴된 사일런스스톰 조종석에서 나온 건 데스윙이었다.
- 주군,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으니 주변부터 살펴라."
내가 명령하자 초록빛 플라즈마 날개를 펼친 데스윙이 투쾅! 하는 공기 터지는 소음만 남기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데스윙의 몸에 붙어있던 유리조각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3레벨 엘리트 좀비 크랩이 만든 초고온 폭발에 사막모래가 녹아 유리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 크랩을 발견했습니다.
데스윙은 대답과 함께 하나의 영상을 정신파로 보내왔다.
그건 10미터 깊이의 크레이터에 목까지 파묻힌 크랩의 모습이었다.
그 중심은 마그마로 변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의 모래는 고온에 녹아 유리로 변해 형형색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유리화된 넓이만 반경 50미터는 되어보였다.
- 아직 소멸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목이 기괴하게 꺾인 채 마그마 속에 빠져있는 크랩의 모습을 본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목이 왜 뒤틀려있지?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능력을 펼친 건가?'
< 통합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쇼크웨이브]는 4레벨 이상의 좀비가 발현하는 특이능력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
< 3레벨 엘리트에 불과한 크랩이 사용하기엔 버거운 능력으로 보입니다. >
난 시스템 메세지를 읽고나서야 크랩이 화를 참지 못하고 미친 짓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목이 꺽인 크랩은 제 머리를 붙잡고 제 위치로 돌려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놈의 양팔은 어깨 근처에서 사라져버린 상황이라 꺾인 목을 바로잡아줄 수가 없었다.
'저 상태로는 쇼크웨이브를 다시 사용할 순 없겠군.'
그때 데스윙이 또 다른 영상을 정신파로 보내왔다.
- 남은 카라페이스는 1만 마리 이하로 추정됩니다.
7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치 쓰레기처럼 쌓여있는 카라페이스들의 사체가 보였다.
사체더미에 파묻힌 카라페이스 중엔 움직일 수 있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폭발의 영향이 거기까지 미쳤는지 중심을 제대로 잡고 일어서는 놈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 비교적 멀쩡한 카라페이스들이 시체더미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 폭발반경 밖에 있던 카라페이스들입니다. >
우리를 따라 달려오던 카라페이스들은 긴 대열을 이루었었다.
그리고 사체더미에 고개를 쳐박고 동족의 살로 배를 채우는 놈들은 후미에서 따라오던 놈들인 것 같았다.
"재료가 부족해보이지는 않는군. 엘리트 본 아머"
내가 손짓하자 사체더미에서 노출된 카라페이스의 갑각들이 나노단위로 분해되어 날아오기 시작했다.
< 레어 등급 스킬 [엘리트 본 아머]를 사용하셨습니다. >
< 언커먼 등급 스킬 [언데드 개조]를 사용하셨습니다. >
난 데스소울을 이룬 아머드 스켈레톤 워리어들에게 더 단단한 소재를 선물해줬다.
초고온 폭발에 기화해버린 17% 수준의 마그니움 합금 장갑 대신 마그니움 함유량 37% 수준의 방어력을 지닌 뼈를 선물해준 것이다.
'가서 아군을 구해라.'
나는 살아남은 워리어들에게 교신이 닿지 않는 테리와 조셉 메를린 그리고 다른 아군 언데드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죽었더라도 이런 사막에 버려두고 갈 순 없지.'
내가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점차 굳어가는 마그마 늪에서 발버둥치는 크랩이 보였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었다.
"저 놈의 목은 얼마쯤하지?"
- 통합 데이터베이스 검색결과, 연구소에 따라 다르지만 800억 크레딧 이상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데스윙, 저 놈 목부터 따와라."
내가 명령하자 데스윙이 초록빛 플라즈마 날개를 펼쳤다.
그와 동시에 플라즈마 날개에 닿자마자 폭발한 공기가 펑! 하고 폭발했다.
데스윙은 마치 타락천사 같은 모습으로 크랩 앞에 내려섰다.
유리질로 굳어가던 마그마가 데스윙의 뜨거운 열기에 닿자 플라즈마의 뜨거운 열기에 다시 붉게 녹아내렸다.
- 크아악!
그 모습을 본 크랩이 포악을 떨어댔다.
하지만 양팔을 잃고 마그마에서 허우적대는 놈이 할 수 있는 반항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꼴을 본 데스윙이 오른팔을 휘두르자, 초록빛 플라즈마 날개가 크랩의 목을 수확하려 했다.
그 순간, 바닥에 녹아있는 유리질의 용암이 3미터 굵기의 거대한 팔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마치 용암으로 이루어진 거인의 팔 같았다.
'저게 뭐지?'
크랩의 목을 자르려던 데스윙의 플라즈마 날개가 거인의 팔에 닿자, 화아아악! 하는 요란한 소음이 터져나왔다.
팔뚝 두께만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마그마 팔이 데스윙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기화하는 소리였다.
그때 마그마 표면이 스피커처럼 일렁이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 필멸자여, 과한 욕심이다.
그건 마치 산이 짓누르는듯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꽈광!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반경 100미터 안의 모래가 3미터 깊이로 내려앉아버렸다.
모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데스윙 모두 갑자기 우리를 짓누르는 무게를 못 이기고 모래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쿵! 하는 충격음이 울렸다.
방금 전까지는 폭신한 모래였었다.
하지만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자 쇳덩이보다 딱딱한 바닥이 된 상태였다.
유적 근처에 존재하며 엘리트 좀비를 보호하기 위해 나온 거인의 팔.
단지 목소리만으로 마치 산악에 짓눌린 듯한 압력을 전하는 존재.
나는 용병협회에서 봤던 이번 의뢰의 특이사항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마운틴 퀸인가?"
내가 묻는 순간, 데스윙의 화염날개를 막아냈던 마그마 팔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팔에서 머리, 몸통, 다리가 동시에 돋아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마그마를 끌어모아 만든 유리질의 팔과 달리 놈의 다른 신체는 붉은 사막모래로 이루어져있었다.
문제는 그 크기였다.
무려 2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모래거인.
좀비의 몸이 아닌 걸 보면 분신인 모양이었다.
'5레벨 좀비는 분신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건가?'
그때였다.
머릿 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후웁~ 묘한 향기를 풍기는 녀석이군... 네크로맨서인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붉은 모래거인이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건 어떤 특정한 언어가 아니라 정신에 곧바로 내려꽂히는 사념파였다.
문제는 그 사념파가 전해질 때마다 내가 받는 중력이 폭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적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사념파를 이용해 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
< 사용자님을 짓누르는 무게는 중력 300배입니다. >
<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 A-100W 모델은 이론 상 1,000배의 중력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
< 하지만 착용자가 버틸 수 있는 압력은 425배가 한계입니다. >
그건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입고도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이었다.
'5레벨이라지만... 좀비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좀비와도 다른 존재였다.
< 통합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정보입니다. >
- 저 또... 한 마... 운틴 퀸의 분... 신을 만난 건... 처음입니다.
시스템과 데스윙이 차례로 대답했다.
데스윙 또한 나처럼 엄청난 중력을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난 곧바로 주문부터 외웠다.
"마... 력 차폐... 결... 계!"
놈은 바닥에 쳐박힌 우리들이 우스워보였는지, 내가 주문을 외우는 것도 막지 않았다.
그러자 내 코앞에 나타난 붉은 마력입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법진을 구축해버렸다.
그 순간 반경 1미터 크기의 결계가 구축됐다.
난 그제야 온몸이 짜부라들어버릴 것 같은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모래바닥을 짚은 채, 일어나려고 애쓰는 데스윙의 모습이 보였다.
그 또한 수백 배에 달하는 중력을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마력차폐결계!"
내가 다시 한번 주문을 외우자, 붉은 결계가 데스윙을 감싸안았다.
그 순간 거대한 모래주먹이 날아와 데스윙을 때려버렸다.
퍽! 하는 충돌음이 들렸다.
모래거인의 주먹에 맞은 데스윙은 바닥과 부딪힐 때마다 까가강! 하는 쇳소리를 내며 3미터 높이의 모래벽까지 날아가버렸다.
- 감히 칼미카야 사막에서 내 아이를 괴롭히다니... 육편으로 만들어 내 아이들에게 던져주마!
모래거인은 높게 치켜든 발로 나를 짓밟으려고 들었다.
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력차폐결계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꿈쩍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주문을 외울 수 밖에 없었다.
"적층구조 배리어!"
그 순간 내 앞에 두께가 무려 3미터에 달하는 빨간 격자구조 배리어가 반구형으로 펼쳐졌다.
< [드레이크 헤츨링 하트]의 잔여마력이 9%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
시스템 메세지가 올라온 순간, 붉은색 배리어가 놈의 거대한 발바닥에 짓밟혀 박살나는 모습이 보였다.
난 곧바로 몸을 띄운 채, 배틀슈트에 내장된 비행술식을 최대출력으로 끌어올렸다.
모래거인의 발이 바닥을 때린 순간, 꽈광! 하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가까스로 놈의 발바닥을 피한 내게 마운틴 퀸의 분신이 손가락질을 해댔다.
- 버러지 같군.
마운틴 퀸의 분신, 모래거인은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그리곤 다른 발을 들어올리며 선언하듯 말했다.
- 아직도 과거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네크로맨서여, 새 시대의 주인이 네 마지막 길을 인도해주마!
내가 마운틴 퀸의 일격을 맞고 이대로 죽는가 하고 생각을 할 때였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마운틴 퀸의 상체가 박살나 모래로 와해되어 버렸다.
난 엄청난 충격의 여파에 휩쓸려 모래사막을 몇바퀴나 뒹굴고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엄청난 물리력을 가진 무언가가 날아와 마운틴 퀸의 모래몸과 충돌한 것 같았다.
날아온 방향은 팔미라 쪽이었다.
난 모래더미로 변한 마운틴 퀸의 몸 반대편을 바라봤다.
그곳엔 H자의 쇳덩어리가 처박혀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 통합 데이터베이스 검색 결과입니다. >
< 팔미라 시 장벽에 설치됨 대괴수 방어무기 라이트닝캐논 L-051로 파악됩니다. >
< 라이트닝캐논 L-051은 초장거리 사격에 특화한 레일건입니다. >
< 팔미라 시의 영역은 대괴수 방어무기의 사거리까지 인정됩니다. >
< 그외의 지역은 기간트와 골렘이 출격해서 영공을 확보할 수 있으나 상시 장악이 어려우므로 [중간지역]으로 간주됩니다. >
한쪽 귀에서 삐이~ 하는 이명이 날 괴롭히는데 상공 50미터 높이에서 스피커 소리가 울렸다.
- 마운틴 퀸! 이 사막이 모두 네 년의 구역이 아니라는 것을 잊었느냐? 이 구역은 팔미라 시의 영역이다!
모래더미로 변해버린 마운틴 퀸의 분신을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건, 6미터에 달하는 하늘색 로봇이었다.
로봇은 마운틴 퀸의 분신인 모래거인이 모래더미로 변했는데도 오른손에 장착한 포신을 거두지 않았다.
'처음 보는 로봇이군. 워머신보다는 크고, 막스 벡허의 골렘보다는 작군.'
내가 처음 보는 로봇의 정체가 뭔지 의아해 하고 있을 때였다.
모래더미가 다시 모래거인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 칼미카야 사막은 내 영토다!
그 순간 로봇 아래에서 길다란 모래줄기가 뻗어올라가 그를 사로잡으려고 들었다.
그때 로봇의 어깨에서 붉은 빛이 번뜩였다.
그 붉은 빛에 맞은 모래줄기는 허공에서 붉은 유리물로 녹아내려버렸다.
그건 고출력의 레이저빔이었다.
- 난 팔미라 동부방어군 소속 기간트워리어, 안톤 레이치 중위다.
- 당장 공격행위를 중단하고 네 영토로 돌아가라!
- 그렇지 않으면 팔미라 시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고 말살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