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탈출
'네크로맨서가 자기만의 던전을 소유할 수 있다면, 인공정령이 자신의 연구소를 갖는 것도 가능해야지.'
난 곧바로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의 관리자 권한을 사용했다.
그러자 내 눈앞에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의 홀로그램 설계도가 펼쳐졌다.
< 지하 12층, 지상 6층 규모의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의 면적은 사용자님이 D-135 구역 공장지대에 확보하신 물류창고보다 211배 넓습니다. >
'연구소를 아공간으로 만든다면... 이런 식으로 마법진을 그리면 될 것 같군.'
내가 상상한 순간 아공간 마법진이 홀로그램 설계도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 연구소를 아공간화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2레벨 엘리트 좀비 카라페이스를 기준으로 계산합니다. >
< 아공간 형성에 필요한 자원은 7,527구의 시체와 영혼입니다. >
'아공간을 품은 인공정령을 만들려면...?'
난 실시간으로 금발소녀를 표시한 홀로그램 위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관리시스템을 인공정령으로 만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연구소를 품어야했기 때문에 계산이 조금 복잡했다.
내가 계산을 마친 순간이었다.
< 아공간을 품은 인공정령 생성으로 필요한 자원이 늘어났습니다. >
< 연구정령 생성에 필요한 자원은 카라페이스 15,507구의 사체와 영혼입니다. >
< 연구정령을 생성하시겠습니까? >
'생성한다!'
그 순간 텔레포트 포탈을 통해 빨려들어온 카라페이스의 시체들이 포탈 바로 앞에 구축된 대형마법진을 만나 분자단위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분해된 사체는 사일런스스톰 창틀을 밟고 선 관리시스템 영상과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 건물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 어, 어... 어! 연구소장님!
관리시스템은 그 변화에 적잖게 놀란 모양이었다.
< 카라페이스의 시체 519구를 확보했습니다. >
< 카라페이스의 시체 906구를 확보... >
하지만 염력마법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은 카라페이스의 시체뿐이라 관리시스템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줄 겨를이 없었다.
난 텔레포트 포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죽음의 기운이 뿜어져나가 텔레포트 포탈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는 텔레포트 포탈이 비추지 않는 곳까지 뻗어나갔다.
죽음의 기운은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그 기운을 통해 무언가를 만질 수도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죽음의 기운을 통해 보고 듣고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감각기관이랑 다를 바가 없겠는데?'
내가 만들어 낸 죽음의 기운의 효용성에 다시 한번 놀랄 때였다.
사체더미 위를 넉 놓고 맴도는 카라페이스의 영혼들이 보였다.
그들은 내가 뿜어낸 죽음의 기운을 보더니 무슨 향기라도 맡았는지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구의 영혼들이 모여들었을 때였다.
끝이 없는 실타래를 풀듯 풀려나간 죽음의 기운이 하늘을 가득 매우고 말았다.
"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아, 이리와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라!"
내가 소리치자, 허공을 가득 메웠던 죽음의 기운이 한순간에 검은 그물이되어 카라페이스들의 영혼을 덮쳐버렸다.
- 끄아악!
내가 뿜어낸 죽음의 기운에 닿자, 카라페이스의 망령들이 힘 없이 텔레포트 포탈을 향해 빨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망령따위가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그 순간 내 뇌리에서 죽음의 기운을 이용해 망령들을 수확하는 마법식이 정립됐다.
< 사령술에 관한 재능이 빛을 발합니다. >
< 유니크 등급 스킬 [영혼수확]을 습득했습니다. >
'이 마법식을 이용하면 죽음의 기운을 내가 직접 조종할 필요도 없겠군.'
내가 붉은 마력입자로 영혼수확 마법식을 만들자, 셀 수 없이 많은 망령들이 텔레포트 포탈을 지나 대형마법진을 통과했다.
그 순간 연구정령 생성마법진을 통과한 망령들의 영혼도 분자단위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희끄무레한 망령의 조각들 또한 관리시스템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1만 구가 넘는 카라페이스의 사체와 영혼들이 관리시스템과 연구소에 빨려들어가기까지는 고작 숨 서너 번 쉴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 연구정령 형성에 필요한 자원 확보를 마쳤습니다. >
< 사용자님이 만드신 [연구정령 생성] 마법진에 따르면 [아공간] 형성을 위해 대형마력로 12기를 반물질 코어로 형성해야합니다. >
< 이대로 연구정령 생성을 진행하시겠습니까? >
시스템은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를 지탱해온 대형마력로의 모습을 내 시야에 띄워주며 물었다.
그건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가 지난 2천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내가 아까운 마음을 힘겹게 다스리려는데 시스템이 경고메세지를 띄웠다.
< 주의! 대량의 마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
'형성한다!'
난 눈을 질끈 감고 연구정령 생성마법진을 향해 붉은 마력입자를 쏘아보냈다.
< [드레이크 헤츨링 하트]의 잔여마력이 16%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
연구정령 생성마법진은 내 심장의 마력을 80% 이상 잡아먹은 후에야 빛나기 시작했다.
연구소 건물과 금발소녀의 모습을 한 관리시스템 또한 연구정령 생성마법진과 함께 빛났다.
빛은 짧은 순간 눈이 부셔서 마주보기 어려울 정도로 밝아졌다.
너무 밝은 빛이라 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그 순간, 츠팟! 하는 짧은 소음이 발생했다.
"연구소장님!"
내가 그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난 연구소 건물이 있었던 18층 높이의 지하 공동 바닥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눈앞엔 밝은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소녀가 커다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관리시스템?"
소녀는 지금까지 봐온 금발소녀 영상과 판박이였다.
하지만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이마를 대는 소녀는 허상이 아니었다.
그 따뜻한 감촉에 나도 놀라고 말았다.
"연구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이젠 샤를이라고 불러주세요."
신기한 마음에 샤를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왼쪽 시야를 가득 채운 시스템 메세지가 보였다.
< [연구정령 샤를] 생성에 성공하셨습니다. >
< [연구정령 샤를]은 아공간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를 품고 있습니다. >
< [연구정령 샤를]은 전투보다 연구분야에 특화된 인공정령입니다. >
< [연구정령 샤를]의 전투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전투에 투입하시겠습니까? >
'이 지하 공동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마음 편하게 테스트까지 할 수는 없다.'
눈앞에 텔레포트 포탈이 보였다.
'만오천 구가 넘는 시체를 흡수했는데, 아직도 산처럼 쌓여있군.'
그 너머로 보이는 카라페이스들은 동족의 시체를 탐닉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 보였다.
놈들과 싸우게 만들어보면 샤를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자원을 흡수했으니, 어느 정도 전투력을 지녔는지 궁금하긴 하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모래거인의 관심이라도 끌면 곤란한 건 우리였다.
그 과정에서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를 품고 있는 샤를을 잃게 된다면 그건 천문학적인 손해였다.
내가 고개를 젓는데, 내 영안에 거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카라페이스의 영혼들이었다.
놈들은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카라페이스의 영혼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날 공격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놈들은 텔레포트 포탈을 넘어오자마자 통로 천장을 향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어디서 이만한 흡인력이 발생하는거지?'
연구정령 생성마법진은 이미 제 역할을 다 하고 사라진 후였다.
이런 흡인력이 발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였다.
< 지하를 지탱하던 연구소 건물 증발로 조성된 지하동굴에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
< 붕괴 위험에 대비해주십시오! >
구구궁! 하는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난 시스템 메세지를 읽고 곧바로 지상으로 향하는 텔레포트 포탈을 열었다.
***
그 시각 지상, 수송차량 짐칸 안.
지하에서 솟구친 카라페이스들의 영혼이 하얀 알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스프린터의 시체를 포식하고 진화단계에 접어든 워리어들의 고치가 카라페이스의 영혼을 흡수하고 표면이 매끈한 하얀 알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때 콰직! 하는 소음이 짐칸 안에 울려퍼졌다.
영혼을 흡수하던 한 알의 껍질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가 사라진 위치에서 서쪽 10킬로미터 지점.
그곳은 이미 거센 모래폭풍이 장악한 상황이었다.
'마운틴 퀸 이 놈... 썬더 캐논을 피하려고 모래폭풍을 일으키다니!'
기간트워리어 안톤 레이치 중위는 하늘과 땅을 모두 뒤덮어버린 붉은 모래폭풍을 보곤 눈쌀을 찌푸렸다.
"오퍼레이터, 상공 1천 미터까지 올라왔지만 아직도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 오큘러스 시스템도 놈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벽 방어군 소속 기간트들의 전투를 돕는 오큘러스 시스템도 알아낼 수 없다면?
마운틴 퀸의 위치를 파악할 방법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란 건가? 이대로 내빼라고?"
- 교범에 따르면 그 방법뿐입니다. 모래거인에게 유리한 전장에서 싸워줄 필요는 없잖습니까?
"팔미라 시의 영역을 침범한 놈을 이대로 놓아주라니...!"
안톤 레이치 중위가 계기판을 내려치려고 할 때였다.
멀리서 구구궁!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뭐지?"
- 미약한 지진파를 감지했습니다.
"지진파?"
안톤 레이치 중위가 되묻는데, 모래폭풍이 힘을 잃고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 모래거인을 찾았습니다! 중위님 위를 보십시오!
오퍼레이터의 경고를 접한 순간이었다.
조종석 위쪽의 디스플레이에 그를 향해 떨어져내리는 모래거인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관측된 바로는 마운틴 퀸의 분신인 모래거인이 비행할 수 있다는 정보는 없었다.
'모래형태로 흩어져서 모래폭풍을 타고 날아오른 건가? 제 몸을 마음대로 흩었다 응집할 수 있는 상대는 정말 까다롭군.'
모래폭풍이 사라져서 시야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크게 당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지진파가 발생하고 모래폭풍이 잦아든 게 안톤에겐 기회로 작용하고 말았다.
"멍청한 자식, 감히 하늘에서 날 상대하려고 들어?"
안톤 레이치 중위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왼쪽 허벅지 옆에 설치된 투명한 수정에 손을 얹었다.
- 중위님, 빔소드는 안됩니다!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하지만 그땐 이미 안톤이 조종하는 기간트 케일룸이 허리춤에서 웬 손잡이 하나를 꺼내든 후였다.
기간트 케일룸이 오른손을 휘젓자 거대한 포신이 가방처럼 등 뒤로 이동했다.
기간트가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하늘을 향해 휘두른 순간이었다.
손잡이에서 하늘색 빛이 치솟아올랐다.
5미터 길이의 빛줄기는 엄청난 마력파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기간트 케일룸의 머리를 내리찍으려던 모래거인의 발바닥과 우웅! 하고 울리는 빔소드가 만났다.
꽈르릉! 하는 폭음과 함께 모래거인의 오른쪽 다리가 힘 없이 터져나가버렸다.
빔소드가 베고 지나간 발바닥에서 허벅지까지는 한순간에 용암으로 변해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때 모래거인의 고관절 부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노란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뭐랬어? 빔소드를 쓰면 놈의 핵을 찾을 수 있다니까?"
기간트 케일룸과 마운틴 퀸의 분신이 상공 1천 미터 높이에서 싸울 때, 딱딱하게 굳은 유리 웅덩이 중심에 아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크르르르!
아치스는 자신을 보고 으르렁거리는 크랩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정신파를 보냈다.
- 주인님, 잡았습니다!
***
워리어들이 모래 속에 파묻힌 수송차량과 사일런스스톰을 꺼낸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불쑥 아치스가 나타났다.
아머드 소울리퍼 아치스는 쿵! 하고 크랩을 모래 위에 던져버렸다.
< 경고! 3레벨 엘리트 좀비 크랩을 데리고 이동하실 경우, 마운틴 퀸에게 추적당할 수 있습니다. >
난 원래 텔레포트 포탈을 이용해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스템 메세지를 읽고보니, 크랩이 내 손안에 있는 한 언제든 모래거인이 불쑥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귀한 재료는 산 채로 잡아가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텐데... 그럼 추적당할테니 어쩔 수 없군. 데스윙!"
내가 데스윙을 부르자, 데스윙이 초록빛 화염날개를 펼쳐보였다.
그가 크랩의 목을 자르려는 순간이었다.
"연구소장님! 제 연구소에 가두면 마운틴 퀸도 이... 생체병기를 추적하지 못할 겁니다."
연구정령 샤를이 오른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마치 초등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발표하는듯한 모습이었다.
'아공간에 넣는다고?'
마운틴 퀸이 내가 만든 이면의 세계인 아공간의 좌표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마운틴 퀸이 공간마법에 그 정도로 조예가 깊었다면 기간트가 공간을 넘어오지도 못했을테니까.
"흠... 가능하겠는데?"
"미상의 생체병기 1개체를 수납할까요?"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연구정령 샤를이 크랩의 머리에 손을 댔다.
그러자 크랩이 투명해지더니 스팟! 하는 소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때 서쪽 하늘에서 꽈르릉! 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모래사막이 뒤흔들렸다.
- 주군, 놈들입니다.
크랩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화염날개를 없앤 데스윙이 내 앞에 홀로그램 영상을 펼쳐보였다.
그건 지도였다.
팔미라 시와 우리 사이에서 싸우는 기간트와 모래거인이 작게 표시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반대쪽인 동남쪽 방향이었다.
"이건 뭐지?"
- 대규모의 좀비집단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마운틴 퀸의 부하들 같습니다.
총 여섯 무리의 좀비집단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더는 지체하면 안되겠군."
난 곧바로 붉은 마력입자로 텔레포트 마법식을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