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언브레이커블
"아서 님, 5천억 크레딧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잠시 본사에 문의하고와도 될까요?"
"그러시죠."
조지 스톤 과장은 내 대답을 듣고나서야 연구실 구석으로 향했다.
"예, 예. 그 부분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곧이어 조지 스톤 과장은 누구와 통화하는지 연구실 구석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혀댔다.
통화는 채 5분도 되지 않아서 끝났다.
다시 돌아온 조지 스톤 과장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아보였다.
"5천억 크레딧에 크랩과 그로 인해 발생할 공헌도까지 교환하는 걸 허락받았습니다."
5천억 크레딧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 짧은 통화만으로 받아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젠장,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 알았으면 더 크게 부를 걸 그랬군.'
하지만 이미 거래가 성사된 후라 무를 수도 없었다.
그렇게 흔들기엔 밀러 그룹은 너무 크고 강했다.
"대표님께서 직접 내려오시겠답니다."
"5천억 크레딧도 그 자리에서 받을 수 있는 거겠죠?"
"아서 님은 계좌가 없으실테니, 마그니움 주괴로 가져오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 됐다.
사실 기간트워리어들이나 입는 배틀슈트를 만들려면 가장 중요한 재료가 마그니움이었다.
배틀슈트 제작비 30억 중 70% 이상이 마그니움 구입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5천억 크레딧이면 고치화한 워리어들의 배틀슈트를 미리 맞춰둬도 3천억 크레딧 가까이 남겠군.'
< 모든 워리어에게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맞춰주더라도 마그니움 2.79톤이 남습니다. >
'그 정도 규모면...'
돈이 부족해서 손대지 못했던 사일런스스톰 경량화를 시도해볼 수도 있었다.
< 사일런스스톰 한 기의 골격과 장갑을 순수 마그니움으로 무장할 수 있는 양입니다. >
< 현재 TTNA-207합금을 기반으로 제작한 사일런스스톰 기체의 무게는 10.5톤입니다. >
< 이는 탄약을 제외한 무게입니다. >
< 사일런스스톰은 기체 무게가 6.3톤인 아이언스톰보다 66% 이상 무겁습니다. >
사일런스 스톰은 무게가 무거워서 속도가 느리고 에너지 소모가 컸다.
이 상태로는 운동속도가 느려 사격용으로 쓸수밖에 없었다.
< 반면 빌헬름 머테리얼 사의 티타늄 기반 합금강 T507로 만든 아이언스톰의 기체는 마그니움 함유량 6% 수준의 합금과 비견되는 강도를 자랑합니다. >
< 사일런스스톰을 구성한 TTNA-207합금은 T507합금보다 50% 이상 강한 내구력을 지녔습니다. >
하지만 장점이었던 강한 내구력도 크랩의 쇼크웨이브 앞에서는 힘 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앞으로 크랩보다 더 강한 적을 상대하게 된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마그니움이라면?'
< 마그니움 2.79톤으로 사일런스스톰을 재무장할 경우, 현재 사일런스스톰보다 11배 이상 강한 내구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
< 또한 10.5톤인 현재 사일런스스톰의 무게를 3.82톤까지 낮출 수 있습니다. >
< 30mm 기관포탄 1만 발을 탑재할 경우, 무게는 6.82톤입니다. >
'가볍고 튼튼한 마그니움으로 골격과 장갑을 교체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군.'
그건 순수 마그니움으로 만든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입은 워리어들이 이미 증명해줬었다.
'심지어 테리도 멀쩡한 모습이었지.'
순수 마그니움으로 만든 배틀슈트를 입은 테리는 쇼크웨이브에 휘말리고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배틀슈트를 입지 못한 워리어들은 대부분이 산산조각나버렸다.
반물질 코어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5천억 크레딧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 님?"
돌아보니, 조지 스톤 과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거래를 엎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어쨋든 내겐 24개의 복제배아도 있는데, 5천억 크레딧에 못 넘길 이유는 없지.'
난 아쉬운 마음을 털어버리고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그대로 거래하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 밀러쉴더스도 아서님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겁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음... 20분 정도면 도착하실 겁니다."
***
20분 뒤.
위이잉! 하는 엔진음과 함께 연구실을 뒤덮었던 합금벽이 해제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수송차량이 들어왔던 문으로 에어로트럭 3대가 들어왔다.
첫번째 에어로트럭 짐칸에서 내린 건, 헬멧을 해제한 배틀슈트 차림의 용병 20명이었다.
< 3단계 강화시술자를 상회하는 좀비 악취를 발견했습니다. >
< 해당 인물의 체취와 좀비의 악취의 유사도는 22.5%입니다. >
< 주의! 4단계 강화시술자로 추측됩니다. >
시스템은 20명의 용병 중 한 사람의 배틀슈트에 외곽선을 빨간색으로 표시해서 다른 용병과 구분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는 키가 180센치미터 정도로 다른 용병에 비해 키도 크지 않고 근육도 우람한 편은 아니었다.
평범한 회색눈에 하얀 피부를 지닌 남자는 반백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모습이었다.
올백 머리는 무언가에 의해 뜯겨져나간 왼쪽 귀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 모습만큼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때 반백의 중년남자가 두번째 에어로트럭의 조수석을 열었다.
거기서 내린 사람은 놀랍게도 검은 머리에 갈색눈을 지닌 동양인이었다.
"대표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려운 걸음하시게 해서 정말 면목 없습니다."
조지 스톤 과장은 30대 초반의 동양인 남자에게 허리를 구십도 이상 숙여가며 굽실거렸다.
'성이 밀러라서 백인인줄 알았는데 순수한 동양인처럼 생겼잖아?'
- 밀러쉴더스의 대표 윌리엄 밀러입니다.
- 저스틴 밀러 회장의 손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유력한 후계자 후보는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데스윙과 제니퍼가 연이어 정신파를 보내왔다.
'밀러쉴더스는 밀러 그룹의 주력사업이 아닌가보군?'
<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결과입니다. >
< 밀러 그룹의 핵심사업은 밀러 파워 사에서 생산하는 기간트용 소형마력로 사업입니다. >
< 밀러 그룹의 핵심 계열사들 역시 소형마력로와 관련된 분야에 분포되어있습니다. >
< 하지만 밀러 쉴더스는 단순히 용병을 고용하고 공헌도를 수집하는 용도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밀러 그룹의 20여 개의 계열사 중 17위에 해당한다고 알려져있습니다. >
내가 시스템 메세지를 읽고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조지 스톤 과장이 날 윌리엄 밀러에게 소개했다.
"이, 이쪽은 이번에 크랩을 생포해온 용병으로 아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윌리엄을 만난 이후 고개를 똑바로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밀러나 그의 수행원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 이번에 고생했다고 들었네."
윌리엄 밀러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네."
내가 손을 마주잡자, 그는 고개만 한번 끄덕이곤 크랩이 실린 수송차량으로 향했다.
그 뒤로 백발의 의사가운을 입은 노인이 따라붙었다.
"짐머 박사, 어떤가?"
윌리엄 밀러가 묻는 순간, 짐머 박사라고 불린 노인의 안경에서 붉은 레이저가 뻗어나와 크랩을 훑었다.
"체중이 4톤에 불과합니다."
"4톤? 갑각까지 합쳐서 7톤은 된다고 들었는데?"
"현장에서 사살한 놈은 그 정도일 겁니다. 자네, 이 놈을 생포한 지 얼마나 됐나? 그 동안 뭘 먹였지?"
윌리엄 밀러가 묻자, 짐머 박사가 다시 내게 물었다.
"지난 26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이지 않았습니다. 잡자마자 마취해버렸죠."
"마취하기 전엔 양팔이 날아갈 정도로 부상이 심했었고?"
짐머 박사는 어깨 바로 아랫부분에서 사라진 크랩의 상처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네."
"그럼 설명이 되겠군요."
"무슨 뜻이야?"
짐머 박사의 말을 들은 윌리엄 밀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좀비는 쉴 새 없이 시체를 먹어치워야 정상적인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 시라도 먹는 걸 멈추면 몸무게가 급감하죠. 그런데 이런 부상까지 입었다면..."
"몸안의 부상을 회복하는 데 많은 열량을 소비했다? 체중이 3톤이나 날아갈만큼?"
"그런 것 같습니다."
짐머 박사의 대답을 들은 윌리엄 밀러는 그제야 수긍하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놈들... 아는 척만 하지 제대로 아는 건 하나도 없군.'
< 연구정령 샤를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기아로 인한 근육손실은 370킬로그램에 불과합니다. >
< 나머지 3톤 이상의 생체조직은 배아복제와 유전자 지도작성, 근육의 탄성실험, 소화능력실험 등 연구정령 샤를이 선택한 연구과제들에 사용되었습니다. >
그 모습을 본 난 속으로 코웃음칠 수밖에 없었다.
- 밀러 그룹이 좀비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서 차라리 잘됐습니다. C 구역에 자리잡은 네크로맨서 학파 출신이 봤다면 단번에 실험의 흔적을 발견했을 겁니다.
제니퍼는 안도한 듯한 정신파를 보내왔다.
연구정령 샤를이 복제배아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얻기위해 크랩의 몸에 손을 댔던 게 걸릴까봐 걱정됐던 모양이었다.
그때 시스템이 표시해줬었던 밀러 쉴더스의 4단계 강화시술자가 크랩의 허리 밑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무게가 4톤에 달하는 크랩을 한손으로 들어올려버렸다.
'응?'
그건 놀라운 장면이었다.
3단계 강화시술자가 보급형 배틀슈트의 도움을 받으면 6톤까지 들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반백의 4단계 강화시술자는 4톤 무게의 크랩을 들어올리는 데 무슨 젓가락 들어올리는 듯 태연한 표정이란 게 문제였다.
그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 저, 저 자는... 폴리지 용병단을 이끌었던 언브레이커블, 클린트 폴리지입니다!
그때, 데스윙의 다급한 정신파가 전해져왔다.
'언브레이커블?'
- 4단계 강화시술자들은 그들이 지닌 특이능력이나 활약에 따라 이명이 붙습니다. 언브레이커블도 그 이명 중 하나인 것 같군요.
제니퍼는 언브레이커블에 대해 잘 모르는 투였다.
- 이미 10년 전에 자취를 감춰서 은퇴했다고 알려진 용병입니다. 10년 전만해도 차기 5단계 강화시술에 적합한 인물로 꼽히기도 했었는데, 윌리엄 대표의 개인호위로 활동하고 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네가 놀랄만큼 대단한 인물인가?'
- 4단계 강화시술자의 특이능력은 각 기업의 기밀로 관리되기 때문에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현역 시절에 맨몸으로 150톤의 무게를 들어올렸다는 얘기는 아직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150톤? 인간이 150톤을 들어올렸다고?'
- 4단계 강화시술자를 인간이란 범주에 넣어도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라고 생각합니다.
- 시정부와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강화시술의 비밀을 풀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3단계 강화시술자는 일개 용병에 불과하지만, 4단계에 오르면... 인간을 뛰어넘은 무언가가 되니까요.
데스윙이 말하자, 제니퍼가 설명을 보탰다.
난 제니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입은 워리어들도 100톤은 못 들텐데... 살아있는 인간이 맨몸으로 150톤을 들었다니 정말 대단하군.'
<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착용한 아머드 스켈레톤 워리어는 73톤까지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
시스템 메세지가 맞다면, 언브레이커블은 배틀슈트를 착용하지 않은 맨몸으로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입은 내 언데드보다 2배 이상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4단계 강화시술자가 죽으면 그 시체를 꼭... 손에 넣어야겠어.'
언브레이커블의 시체만 있으면 레전드 등급을 넘어선 언데드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에어로트럭에 크랩을 실은 윌리엄 밀러와 짐머 박사가 차에 오르려고 했다.
난 짐머 박사에게 말했다.
"저 마취제로 재울 수 있는 시간은 34분 밖에 안 남았습니다."
"걱정해줘서 고맙네. 여기서부턴 우리가 맡지."
짐머 박사는 내 어깨를 두드리곤 에어로트럭에 올랐다.
에어로트럭 세 대가 연구실을 떠난 후에야 조지 스톤 과장이 땀이 흥건한 이마를 닦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크랩이 실려있던 내 수송차량을 가리키며 말했다.
"5천억 크레딧. 직접 확인해보시겠습니까?"
그곳엔 검은 마그니움 주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돈 세는 걸 마다할 순 없죠."
심플하지만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
40분 뒤, B-49구역 융복합연구단지의 한 연구소.
- 크아아악!
순수 마그니움 형틀에 구속당한 채 두 눈만 내놓은 크랩이 울부짖었다.
그러자 성인남성 허벅지 굵기의 검은 철창이 우웅! 하고 울렸다.
그곳은 순수 마그니움으로 특수제작된 감옥이었다.
형틀이나 철창뿐만 아니라 바닥과 천장 등 벽까지 순수 마그니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설계 단계부터 인간이 아닌 괴물을 가둬두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윌리엄 밀러 대표는 화내긴 커녕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짐머 박사, 이 정도면 샘플을 만들 수 있겠지?"
"확실히... 3레벨 좀비 머슬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군요."
짐머 박사가 쓸데없는 감상 따위만 늘어놓자, 윌리엄 밀러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샘플! 특이능력자 양산프로젝트의 샘플을 만들 수 있겠냐고 물었네."
"대표님, 여러 차례 설명드렸지만 이 실험에서 확언해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과가 나온 후에야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겠죠."
5천억 크레딧을 회삿돈이 아니라 윌리엄 밀러의 사비로 투자하도록 종용한 장본인이 바로 짐머 박사였다.
하지만 막상 5천억 크레딧을 투자하고나니, 속 터지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여기 들어간 돈이 얼만지 몰라서 그래?"
윌리엄 밀러는 크랩과 크랩을 가둔 마그니움 감옥을 가리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알죠. 알다마다요.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어제보다 한발 더 가까워졌다는 겁니다."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결과를 내놓아야할 거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늦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짐머 박사는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난 짐머 박사만 믿고 가지."
윌리엄 밀러는 고개숙인 짐머 박사의 어깨를 두드리고 연구소를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후에도 짐머 박사는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 후 고개 든 짐머 박사의 눈은 며칠 굶은 맹수처럼 형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네가 보채지 않아도 최선을 다 할 거다. 그리고... 그 과육은 내가 차지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