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레트로바이러스
D-2구역 암셀연구소.
게릭슨은 복합쇼핑몰만큼이나 큰 건물 앞에 에어로트럭을 세웠다.
문이 열리고 데스윙과 제니퍼가 먼저 내려 주변을 살폈다.
내가 따라내려 둘러보니 암셀연구소 건물이 한 블럭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까마득한 높이의 암셀연구소 건물 입구엔 이미 엘리엇 암셀과 스톨즈 그리고 배틀슈트 차림의 용병 100여 명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날 찾아올 땐, 홀몸이더니 이번엔 보안에 상당히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아서님, 저희 암셀연구소를 방문해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엘리엇 암셀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자, 스톨즈와 백여 명의 용병들까지 후창하며 허리를 숙였다.
"이... 이게...?"
그때 내 뒤에 내린 조셉 메를린이 그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히는지 버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건물 앞에 세워진 거대한 바위에 '암셀연구소'라고 음각된 글씨와 엘리엇 암셀 그리고 나를 번갈아보며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
"이... 이게...?"
엘리엇 암셀이 낯선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갈색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귀공자 스타일의 20대 남자였다.
그때 엘리엇 암셀의 뇌리에 한 기업의 비사를 다뤘던 찌라시 한장이 스쳐지나갔다.
- 알렉스 메를린 회장, 막내아들을 버리고 후계구도 명확히 해.
귀공자 스타일의 남자는 분명 그 찌라시에 등장했던 알렉스 메를린 회장의 여섯째 아들과 닮아있었다.
"혹시, 메를린 그룹의 자제분 아니십니까?"
엘리엇 암셀은 아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맞습니다. 서로 인사하시죠. 이쪽은 암셀학파의 학파장이신 엘리엇 암셀님이시고..."
"처음 뵙겠습니다. 조셉 메를린입니다."
아서가 말 끝을 흐리며 푸른 눈의 젊은이를 돌아보자,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엘리엇 암셀은 당황한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이젠 후계자로 자리매김한 스톨즈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놀란 모습이었다.
"아서님, 설마 오늘 강화시술에 참관한다는 사람이 메를린 그룹의 자제분이었습니까?"
"네."
"아서님... 이번 강화시술은 비밀리에 준비하라고 하셔서 암셀연구소 내에서도 극비리에 마련한 자리입니다. 메를린 그룹이면 귀족에 한발 걸친 자들인데, 사령술의 비의를 보여줘도 괜찮겠습니까?"
아서의 대답을 들은 스톨즈는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염려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스톨즈는 귀족에게 이번 시술이 누출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엘리엇 암셀도 스톨즈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일할 사람 중 하나니, 그런 걱정은 하지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아서는 별 일 아니라는듯 말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엘리엇 암셀은 해머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번 시술에 대한 정보가 유출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후였다.
엘리엇 암셀은 발렌틴 학파가 도대체 어디서 마법과 기계공학을 얻었는지 줄곳 의문이었다.
분명 팔미라 시나 다른 도시에 발렌틴 학파를 돕는 조력자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 어느 도시에서 얻었는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메를린 그룹이 발렌틴 학파의 지파였군... 그럼 모든 퍼즐이 맞춰져!'
지난번 강화시술에서 보여준 강화시술에 대한 엄청난 이해도도 바이오 기업으로 이름 높은 메를린 바이오 사의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했다면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엇 암셀은 아서를 만나기 전까지 발렌틴 학파가 망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를 알아갈수록 현재 어둠 속에 숨어있는 발렌틴 학파가 네크로폴리스의 주인이었던 시절의 발렌틴 학파보다 더 거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지난번 강화시술에서 보여준 성과만 놓고 봐도 네크로맨서 학회를 뒤흔들만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3레벨 엘리트 좀비 크랩을 생포했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그건 일개 용병단이 이룩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아서의 뒤에서 엄청난 세력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설명할 수 없는 업적인 것이다.
'강화시술을 한 단계 이상 끌어올릴만 한 재능도 모자라, 4단계 강화시술자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만 한 무력까지 갖췄어. 그런데... 팔미라 시에 이미 메를린 그룹이란 세력까지 심어뒀다?'
엘리엇 암셀은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발렌틴 학파의 저력에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수족 중에 하나일 뿐이다?'
아서는 이후에 다른 부하들을 암셀학파에 보낼 일이 있을까 싶어서 한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엘리엇 암셀은 발렌틴 학파의 명성과 아서가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과 인맥을 토대로 엉뚱한 오해를 하고 만 것이다.
'발렌틴 학파가 팔미라 시에 심어둔 세력이 과연 메를린 그룹 뿐일까?'
엘리엇 암셀은 발렌틴 학파가 팔미라 시에 진출하기위해 도대체 언제부터 공을 들인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엘리엇 암셀은 갑자기 무슨 생각에 빠진 것처럼 넋을 놓았다.
그 덕분에 손 하나가 허공에 어색하게 멈춰 있었다.
악수를 청한 조셉 메를린의 손이었다.
"엘리엇 씨?"
"아, 실례했습니다."
엘리엇 암셀은 내 목소리를 듣고나서야 조셉 메를린의 손을 맞잡았다.
"바로 시술실로 모시겠습니다."
엘리엇 암셀은 우리를 암셀연구소 지하 7층으로 이끌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지하주차장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차된 차량이 한 대도 없었다.
"듀라한, 강화시술 세팅!"
엘리엇 암셀이 말하자,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 암셀님, 현재 강화시술 참여인원은 7인입니다.
- 이대로 강화시술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진행한다."
엘리엇 암셀이 기계음에 대답하자, 엘리베이터와 계단 그리고 지하통로에 철제방화벽이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바닥과 벽면, 천장이 뒤집혔다.
한순간에 지하주차장이 순백의 수술실로 변해버린 것이다.
'강화시술을 진행했다는 사실조차 숨길 생각이군.'
지하 7층의 비밀수술실은 그런 의미로 보였다.
- 강화시술 대기인원은 9인 입니다.
- 순서대로 시술하시겠습니까?
듀라한이라고 불린 강화시술 보조시스템이 엘리엇 암셀에게 물었다.
그땐 나와 함께 시술에 참가한 테리, 제니퍼, 데스윙, 조셉 메를린은 천장에서 내려온 투명한 관에 격리된 상태였다.
격리된 관 안에선 소독제가 살포됐다.
투명한 관이 다시 바닥으로 사라졌을 땐, 모두가 하얀 수술복 차림으로 변해있었다.
"아서님이 요구하신대로 2단계 강화시술자 아홉 명을 준비해놓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돈은 천억 크레딧밖에 구하지 못했습니다."
엘리엇 암셀은 조셉 메를린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내게 말했다.
3단계 랭커 한 명을 만들어줄 때마다 1천억 크레딧은 받아야겠다고 해놓고 갑자기 9명을 대기시키라고 했으니, 당황할만 했다.
"나머지는 추후에 다른 방식으로 받죠."
"최,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엘리엇 암셀은 조셉 메를린의 존재가 신경 쓰이는지, 스켈레톤 자이언트 소환주문 같은 특이한 사령술을 구해오기로 했던 일에 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순서대로 시술하시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엇 암셀이 물었다.
"믿을만 한 자들입니까?"
"오시는 길에 인사드렸던 용병들은 모두 갓난아이때부터 암셀학파에서 나고 자란 자들입니다. 현재 시술대기 중인 아홉 명은 그들 중에서도 충성심이 뛰어난 자들로 뽑았습니다."
팔미라 시에서 높은 단계의 강화시술자들이 네크로맨서를 배신하고 귀족에게 붙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용병들을 갓난아이 때부터 키웠다는 걸 보니, 암셀학파도 그 부분에 대해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한명 씩 시술하죠."
"듀라한, 율리우스부터 시술한다."
엘리엇 암셀이 말한 순간 바닥이 열리고 수술용 캡슐이 올라왔다.
그 안엔 열여섯 살 정도 되보이는 소년이 누워있었다.
- 무균캡슐 개방합니다.
강화시술 보조시스템 듀라한의 목소리와 함께 캡슐을 가로막고 있던 투명한 막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몸 위로 홀로그램 창이 출력됐다.
- 이름 : 율리우스
- 나이 : 16세.
- 강화단계 : 2단계 강화시술 이후 2년 경과.
- 근력수준 : 컬 케이블 기록(265킬로그램)...
< 해당 인물의 체취와 좀비악취의 유사도는 6.1%입니다. >
율리우스라는 소년은 키가 170센치미터 중반 정도고 마른 편이었다.
'근육이 우락부락하지도 않은데 이두근육 만을 써서 265킬로그램을 들어올린다니... 강화시술은 볼 수록 절묘한 면이 있군.'
내가 이 세상의 네크로맨서들의 작품에 다시 한번 감탄한 순간이었다.
시스템이 메세지를 띄워올렸다.
< 연구정령 샤를이 규명한 좀비인자의 원리에 대해 탐독하시겠습니까? >
난 그제야 샤를이 보고했던 세 가지 연구결과 중 조셉 메를린에 관한 연구결과만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궁금하군. 띄워봐.'
시스템은 메세지와 함께 각종 연구자료를 내 시야에 펼쳐보여줬다.
< 샤를의 유전지식에 따르면 인간이 가진 유전자 중 8% 가량이 고대의 바이러스의 잔재라고 합니다. >
< 이를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라고 부릅니다. >
< 레트로바이러스는 인간의 몸에 남아 근력을 향상시키거나 암을 유발하는 등의 작용을 합니다. >
< 샤를은 마치 고대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에 잔재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것처럼 좀비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레트로바이러스화 해서 인간의 육체능력을 강화시킨 것이 좀비인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
< 문제는 좀비인자가 가진 유전형질들 중 인간의 육체를 강화시키는 유전자와 [특이능력]을 발현하는 유전자가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
시스템은 현미경으로 확대한 좀비 바이러스의 모습과 좀비 바이러스가 평범한 세포를 잠식해나가는 영상 등을 보여주며 메세지를 띄웠다.
< 현대 사령술사들은 좀비 바이러스의 백신화에는 성공했습니다. >
< 하지만 그 좀비인자 안에서 충돌하는 여러 유전형질에 대해선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
< 샤를은 인간의 면역체계와 좀비인자 그리고 그 좀비인자 안에서 충돌하는 여러 종류의 유전형질들이 강화시술의 효과를 저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
< 강화시술 과정에서 피시술자가 죽거나 낮은 단계의 강화시술을 받은 인간이 [특이능력]을 발현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
< 샤를은 이 일련의 과정들이 현대 네크로맨서들의 조악한 유전자 조작기술이 불러온 참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
좀비인자를 생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정령 샤를의 연구성과는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놀랍군. 그 유전자 조작기술로 좀비인자를 개선하면 낮은 단계의 강화시술자도 특이능력을 발현할 수 있다는 건가?'
< 가능합니다. >
< 좀비인자 개선을 위해 필요한 실험재료는 강화 또는 사이보그화하지 않은 순수한 인간 2만 명과 1레벨부터 6레벨까지의 일반 또는 엘리트 좀비의 좀비인자입니다. >
< 샤를의 연구를 허락하시겠습니까? >
'불허한다.'
연구정령 샤를은 의욕이 앞선 나머지 이 팔미라 시에서 순수한 인간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재료인지 간과한 것 같았다.
그리고 4레벨 이상의 좀비인자가 얼마나 비싼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굳이 인간을 실험체로 사용하지 않아도... 강화시술을 개선할 방법이 있을 것 같군.'
난 샤를의 연구 하나, 하나가 얼마나 수준 높은지 이제야 실감하고 말았다.
'흠... 강화시술이 어딜 지향해야할지 대충 알겠어.'
난 시야를 가득 채운 수식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 순간 천장에서 투명한 액체가 담긴 링겔이 내려왔다.
"율리우스,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엘리엇 암셀이 묻자, 캡슐에 누운 소년이 대답했다.
"제가 못 견디더라도... 친구들에게 용감했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율리우스라는 소년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엘리엇 암셀에게 물었다.
"물론이다. 네 용기는 암셀학파가 기억할 것이다."
엘리엇 암셀의 말은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 하는 격려 같았다.
'비장하군.'
< 3단계 강화시술의 사망률은 71%입니다. >
< 3단계 강화시술 도중 마인화하는 경우는 10.9%입니다. >
'80% 이상이 실패한다는 소리군?'
< 그렇습니다. >
난 그제야 율리우스라는 소년이 사시나무 떨듯 떠는 이유를 알게 됐다.
"아서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내가 대답하자, 엘리엇 암셀이 허공을 터치했다.
그러자 캡슐에서 두꺼운 구속구가 나와 율리우스의 사지를 결박했다.
그 순간 위잉! 하는 작음 소음과 함께 캡슐 안의 소년의 몸이 뒤집혔다.
소년의 등이 천장을 향해 드러나자, 천장에서 내려온 수십 개의 바늘이 율리우스의 척추를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