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카닉 x 네크로맨서-95화 (92/152)

95화. 함정

한밤 중,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길래 일어났더니 제니퍼였다.

"주인님, 함정입니다!"

제니퍼는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함정?"

난 제니퍼의 말을 듣고 에어로트럭 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주변에 펼쳐진 텐트들은 평화롭기만 했다.

"거기가 아니라 하늘이 문젭니다."

그 순간 제니퍼의 등 뒤에서 샤라라락! 하는 소음과 함께 작은 정찰드론들이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제니퍼가 에어로트럭을 터치하자, 정찰드론들의 시야가 내 눈앞에 삼차원 홀로그램 영상으로 펼쳐졌다.

정찰드론이 촬영한 하늘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약 10분 후, 제니퍼가 명령했다.

"라이트 온!"

그러자, 내 앞에 펼쳐진 홀로그램 영상이 한 순간에 밝아졌다.

3천 대의 정찰드론이 라이트를 밝힌 동쪽 상공에선 새빨간 구름이 드론들을 향해 몰려오는 모습이 포착됐다.

- 주군, 블러드 클라우드입니다!

그때, 데스윙의 정신파가 전해졌다.

< 전술 통신망과 연결된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합니다. >

< [블러드 클라우드]는 좀비집단에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장벽방어군이 사용하는 전술마법입니다. >

< 검색된 정보에 따르면 약 1천 톤 이상의 핏물로 만든 [피의 구름]으로 좀비들을 유인하고 그 틈에 아군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술마법입니다. >

난 시스템 메세지를 읽고나서야 소리도 없이 형성된 블러드 클라우드를 제니퍼가 가장 먼저 알아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머드 스켈레톤 뱀파이어릭 위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피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장 전술 통신망에 블러드 클라우드가 형성됐다고 보고해!"

난 에어로트럭에서 나오자마자, 날아올랐다.

그리곤 휴고 가르시아 팀장의 텐트가 있는 방향으로 비행했다.

< 저고도에서 속도를 높이시면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

'자잘한 피해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최고속력으로!'

내가 시스템 메세지를 무시하고 한순간에 최고 속력으로 비행하자, 내 배틀슈트 주변에서 콰광! 하고 충격파가 일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설치된 텐트들이 충격파에 밀려 무너져내리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침번이 날 막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야영지 외곽에 설치된 초소들에서 웨에에엥! 하는 사이렌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내가 시스템이 내 시야에 띄워준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사냥 1팀장 휴고의 텐트에 도착했을 때였다.

배틀슈트를 갖춰입은 휴고 가르시아가 텐트에서 나오고 있었다.

- 아서, 블러드 클라우드라니 사실인가?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전술 통신망을 통해 물었다.

"정찰드론이 확보한 영상입니다."

< 관련영상을 휴고 가르시아, 세사르 알마챠 두 사람에게 동시송출하시겠습니까? >

'송출해!'

내가 시스템에게 명령한 직후, 사냥 1팀장 휴고의 입에서 상소리가 터져나왔다.

- 젠장, 정보가 샜다!

그는 야영지 텐트 속에서 분분히 튀어나오는 휘하의 용병들을 보며 참담한 표정이었다.

< [블러드 클라우드]가 아군의 야영지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15분입니다. >

난 시스템 메세지를 확인하며 사냥 1팀장 휴고에게 말했다.

"우리가 작전을 방해하기 전에 장벽방어군이 먼저 선수를 친 건, 이젠 지나간 일입니다. 후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싸울 준비를 해야합니까?"

내가 물은 순간이었다.

< 사냥 3팀장 아론 다린이 전술 통신망을 통해 전 병력에게 음성메세지를 보냈습니다. >

< 음성메세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

'확인해보지.'

- 전 병력에게 알린다.

- 휴고 가르시아와 세사르 알마챠는 팔미라 시를 배반하고 4군단 사령부의 작전을 정면으로 방해할 계획을 세웠다.

- 4군단 사령부는 이미 형제들이 두 사람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사실도 확보했다.

- 하지만 내가 4군단의 조슈아 빌헬름 군단장님께 간청한 끝에 공을 세워서 우리의 죄를 덮기로 했다.

그때 사방에서 배틀슈트 헬멧을 해제한 용병들의 욕설이 터져나왔다.

"야이, 배신자 새끼야!"

"아론! 도대체 얼마를 받고 우릴 배신한 거냐?"

"7년 전에 저 자식을 살리는 게 아니었는데...!"

"더러운 쥐새끼!"

수천 명이 앞다투어 원색적인 욕설을 쏟아냈다.

하지만 아론 다린의 음성메세지는 끊기지 않았다.

- 죽기를 각오하고 좀비와 맞서 싸워라!

- 이번 싸움만 버텨내면 장벽방어군은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않기로 약속했다.

- 죽기를 각오하고...

아론 다린의 음성메세지는 두 문장만 반복하기 시작했다.

- 놈은 이미 도망쳤다. 진형을 갖추고 좀비들과 싸울 준비를 해라!

그때 상황을 파악한 세사르 알마챠의 목소리가 전술 통신망을 통해 전해졌다.

-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싸우는 건 4군단 놈들이 원하는 거 잖습니까?

그건 한번 들어봤던 사냥 11팀장 페르난도 헤라스의 목소리였다.

- 방금 4군단 사령부에서 내게 경고메세지를 보내왔다. 우리가 팔미라 시로 후퇴하면 장벽방어를 위해 포격하겠다더군...

사냥 1팀장, 휴고 가르시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야영지 여기저기서 깊은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젠장! 4군단 놈들, 정말 돌아버린 거 아니야?"

"하... 설마 썬더캐논을 쏘겠다는 건가?"

"썬더캐논 사거리는 이미 벗어났을텐데?"

"장벽에서 직접 발사하면 닿지 않겠지만, 기간트가 이삼백 킬로미터 밖에서 쏘아대기만해도 사거리는 무의미해."

장벽방어군의 포격위협에 용병들이 혼란에 빠져버렸다.

< 전술 통신망과 연결된 데이터베이스에서 [썬더캐논]에 관한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

< 팔미라 시의 장벽에 설치된 [공간이동형 중형 레일건 BTR-1000], 일명 썬더캐논의 사거리는 약 900킬로미터로 알려져있습니다. >

< 현재 아군은 장벽으로부터 1100킬로미터 떨어져있기 때문에 [썬더캐논]의 직접 사거리는 벗어났습니다. >

< 하지만 기간트가 아군의 300킬로미터 부근까지 접근해서 [썬더캐논]의 포격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면 포격가능거리에 닿을 수 있습니다. >

시스템 메세지를 읽는데, 모래거인을 때렸던 위력적인 포격이 떠올랐다.

'저번에 마운틴 퀸의 분신을 타격했던 라이트닝캐논은 왜 사용하지 않지?'

< [대괴수 방어무기 L-051], 일명 라이트닝캐논은 사정거리는 썬더캐논보다 길지만 에너지 소모가 수백 배 심하다고 합니다. >

'에너지 소모가 커서 마구잡이로 연사할 수는 없다?'

< 그렇습니다. 만약 용병이나 좀비집단 같이 다수를 상대할 경우엔 값싼 썬더캐논을 사용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

결국 아론 다린 한 사람의 배반이 30만 명에 달하는 용병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뜻이었다.

'아론, 그놈만큼은 꼭 잡아서 언데드로 만들어야겠다. 데스윙!'

- 예, 주군!

'휴고의 말대로 우리가 팔미라 시 방향으로 도망치면 4군단이 포격을 가할까?'

북쪽과 동북쪽은 로두스 성국의 영역이고 남동쪽은 마운틴 퀸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동쪽은 300만 마리 이상의 좀비떼가 몰려있어서 그 방향으론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럼 남은 건 우리가 온 서쪽의 팔미라 시로 돌아가는 방법뿐이었다.

- 가능합니다. 장벽방어군의 최우선 임무는 팔미라 시 보호에 있습니다. 우리가 좀비떼를 몰고 간다면 장벽방어군 소속인 4군단은 우리를 포격할 명분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데스윙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제대로 말려들었군. 다른 방법은 없을까?'

- 당장 도망가는 건 좀비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블러드 클라우드를 보고 몰려든 좀비들이 30만 명에 달하는 용병집단들을 포위하느라 분산되는 순간,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 핏물을 뒤짚어쓸 수밖에 없을텐데?'

- 그땐 이미 다른 용병들도 피범벅일 겁니다. 30만 명 중에 도망치는 용병이 저희뿐이겠습니까?

이번 사막정화 작전을 맡은 30만 명의 용병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4군단 사령부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됐다.

이런 상황을 만든 4군단 사령부가 용병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흠... 이 난리를 쳤으니 당분간은 팔미라로 돌아가긴 어렵겠군?'

- 4군단은 자신들이 팔미라의 시민인 용병들을 미끼로 썼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할 겁니다. 아마... 놈들은 이미 팔미라쪽으로 도망치는 용병들을 잡을 준비까지 끝냈을 겁니다.

'곤란하게 됐군.'

- 동쪽의 로렌 시로 도망치는 게 제일 좋습니다만, 그쪽은 너무 많은 좀비들이 몰려있어서 아군의 전력으로는 뚫고나가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럼?'

그때 시스템이 내 시야에 지도를 펼쳐줬다.

서쪽엔 팔미라 시, 동쪽 바닷가엔 로렌 시 그리고 동북쪽엔 로두스 성국이 자리잡고 있는 지도였다.

<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결과입니다. >

< 현재 위치에서 약 780킬로미터 남쪽에 [리옹 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

< [리옹 시]의 이단심판관들은 마법사를 사냥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

'따지고보면 나도 반쯤은 마법사니 리옹으로 갈 수도 없겠군.'

북쪽으로 도망치자니 다른 사냥기업의 용병들을 공격하는 좀비떼와 마주해야할 상황이었다.

유일한 출구인 남쪽엔 마법사를 사냥한다는 미친 이단심판관이란 놈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때 8천 명이 넘는 용병들이 각자 무기를 정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간트의 썬더캐논에 맞는 것보단 좀비들과 싸우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군.'

내가 보기에 용병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살 가망성은 낮아보였다.

내가 씁쓸한 마음을 홀로 지워내려는데, 지상의 용병들이 진형을 갖췄다.

그러자 백여 기의 배틀슈트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때 가장 높에 날아오른, 사냥 1팀장의 목소리가 전술 통신망을 통해 울려퍼졌다.

- 우리가 버티지 못하고 다 죽는 것! 그게 놈들이 바라는 바다! 이대로 죽어줄 셈이냐?

그 순간 후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칼날에 잘리기라도 한 듯, 허공의 공기가 퍼벙! 하는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칼날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칼날에 베인 공기가 하얗게 터져나가는 모습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 인비져블 블레이드입니다!

거센 공기가 내 배틀슈트를 때린 순간, 데스윙이 정신파를 보내왔다.

< 녹화한 영상을 토대로 4단계 강화시술자 휴고 가르시아의 특이능력을 분석합니다. >

< 보이지 않는, 길이 15미터의 칼날이 한 순간에 마하 1.7을 넘어섰습니다. >

< 교전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3레벨 엘리트 좀비 크랩의 갑각에 의미있는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파악됐습니다. >

그 순간,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송두리채 사라져버렸다.

'이 정도 규모의 교전이면... 밀러쉴더스의 팀장들도 죽을 수 있겠지?'

- 모두 무사히 벗어날 순 없을 겁니다.

난 데스윙의 정신파를 듣고 결심했다.

'이번 기회에 4단계 강화시술자들의 시신을 확보해야겠다.'

내가 속으로 용병들이 들으면 기겁할 각오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돌아가서 귀족놈들한테 엿을 먹여줘야합니다!"

"돌아가면 아론 그 개자식부터 씹어먹고만다!"

사냥 1팀장의 물음에 베테랑 용병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높여 답했다.

부하들이 뜻을 모으는 모습을 본 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 교전계획을 송출했다. 지뢰를 매설하고 지뢰를 모두 사용한 차량으로 탑을 쌓아라!

사냥 1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백 대의 에어로트럭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쪽 사막 방향으로 뻗어나간 에어로트럭들은 순식간에 각자 천여 발이 넘는 지뢰를 토해내고 돌아왔다.

8천여 명의 용병들은 에어로트럭으로 피라미드를 쌓기시작했다.

피라미드 꼭대기엔 좀비들을 저격하기 위해 저격용병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각 단마다 자리잡고 서서 몰려드는 좀비를 베어버릴 준비를 하는 용병들도 보였다.

그때 땅바닥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동쪽에서 100만 마리 이상의 좀비떼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

< 남은 거리는 43킬로미터입니다. >

< 남서쪽에서 7만 마리 이상의 좀비집단이 출현했습니다. >

< 남은 거리는 36킬로미터입니다. >

< 남동쪽에서 11만 마리 규모의 좀비집단이 출현했습니다. >

< 남은 거리는 29킬로미터입니다...

그와 동시에 워리어들이 쏘아올린 10만 대에 달하는 정찰드론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좀비집단에 대한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좀비에 대한 정보는 전술 통신망에 실시간으로 보고해.'

내가 시스템에게 명령한 순간이었다.

침중한 표정의 휴고가 다가와 헬멧까지 해제하고 내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할 생각인가?"

"제 워슈트들은 방어진형 밖에서 움직이며 진형이 무너지는 걸 막겠습니다."

애초에 워슈트들은 배틀슈트차림인 용병들과 함께 싸우기엔 부적절했다.

차라리 울트라소닉 소드를 이용해 파도처럼 밀려드는 좀비의 물결을 중간에 한번이라도 베어넘겨서 방어하는 용병들에게 잠깐이라도 쉴 틈을 줘야했다.

'너무 빨리 무너져버리면, 시신을 확보할 틈도 없겠지.'

싸움을 오래 이어갈수록 용병과 좀비 시체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휴고 가르시아가 죄책감 어린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내가 부하를 잘못 관리해서 벌어진 일이니... 이대로 몸을 피해도 원망하지 않겠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재료와 제물이 넘치는 환경을 놓고 도망갈 순 없지. 시스템, 정찰드론 일부를 사방으로 보내 공간이동할 수 있는 좌표를 확보해.'

< 3천 대의 정찰드론을 좌표 확보를 위해 운용하겠습니다. >

난 힘 닿는 데까지 싸우며 좀비와 용병의 시체를 확보하고 궁지에 몰리면 텔레포트 포탈을 열어 도망칠 계획이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한 순간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휴고 가르시아의 상처투성이 얼굴에 잠시 미소가 감돌았다.

"잘 부탁하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곤 용병들에게 향했다.

그의 어깨는 유난히 축쳐져보였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데스윙이 정신파를 보내왔다.

- 아론 다린은 휴고 팀장의 심복으로 알려졌습니다. 20년 이상 함께한 사이로 아는데, 도대체 왜 배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용병들에게 음성메세지까지 보낸 걸 보면...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데스윙은 아론 다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깊게 고민하지 않고도 아론 다린이 배신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3팀장이면 아론 다린이 4단계 강화시술을 받은지도 꽤 지났겠군?'

밀러쉴더스 휘하의 20개 사냥팀 팀장들은 모두 4단계 강화시술자라고 들었다.

그리고 낮은 숫자의 팀을 이끄는 팀장일수록 더 오래 근무했거나 더 강한 강화시술자라는 의미였다.

아론 다린이 사냥 3팀장이란 자리를 꿰차고 있었으니, 경력과 능력 모든 면에서 휴고와 세사르 다음이란 뜻이었다.

- 제가 알기론 15년 이상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 능력이 출중한 강화시술자가 20년 넘게 동고동락한 동료들을 배신할 이유가 5단계 강화시술 외에 또 있겠어?'

- 4군단이 지원한다면 정말... 아론 그 놈이 5단계 강화시술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샤를!'

- 네, 연구소장님!

'워슈트 전원 출격한다!'

그 순간, 에어로트럭의 짐칸 입구에 내 전용 워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 시각, 아서를 기준으로 동북방향 2,700 킬로미터 부근에 위치한 중세풍의 성.

성의 꼭대기엔 붉은 휘장과 아름다운 샹들리에로 장식된 회의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원탁에는 흰바탕에 금실로 치장한 화려한 사제복을 입은 남성들이 둘러앉아있었다.

그들은 머리카락색이나 피부색은 달랐다.

하지만 하나같이 황금빛 눈동자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똑똑! 하고 울렸다.

"들어와라."

머리카락 뿌리 부근에 황금빛이 은은하게 도는 은발의 사제가 말했다.

문이 열리고 키가 2.5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남성이 들어왔다.

그의 황금갑옷엔 오벨리스크에 음각되어있던 글자가 빽빽하게 새겨져있었다.

"성기사 존 랜도가 아스터 주교님을 뵙습니다."

"신실한 종이여, 무슨 일인가?"

"남서쪽 중간지역의 좀비집적도가 5.6 점을 넘어섰습니다."

"뭐라?"

"성기사, 남서쪽이면 정확히 어디인가?"

원탁에 앉은 20대의 서임사제가 묻자, 성기사 존 랜도가 원탁 위에 비치된 지름 1미터 크기의 동그란 수정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회의실의 천장을 가득 채울만큼 큰 영상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그건 하늘 높은 곳에서 마치 신이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시야였다.

하지만 위성영상처럼 선명하지 않고 어렴풋한 색만 분간할 수 있는 수준의 영상이었다.

팔미라 시는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팔미라 시 동쪽의 사막에선 불빛 한점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팔미라 시와 동쪽 사막 사이엔 붉은 구름이 형성되어있었다.

사제들은 그 붉은 구름을 확인한 순간 하나 같이 눈을 부릅떴다.

"저, 저건!"

"불경한 자들이 또 저런 사악한 마법을 사역하다니...!"

"주교님, 저 불신자들을 당장 징벌해야합니다!"

사제들은 붉은 구름과 그 구름을 향해 사방에서 모여드는 검은 무리들을 보고 은발의 아스터 주교에게 팔미라 시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기사단의 의견은 어떠한가?"

"팔미라 시의 장벽과 너무 가까운 위치입니다. 오벨리스크의 경고대로 5레벨 좀비가 탄생하더라도... 팔미라 시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성기사 존 랜도는 담담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성기사! 그게 무슨 불경스러운 말인가?"

"여신께서 보고계시네!"

"저 간악한 좀비가 진화하는 꼴을 두고 보자는 뜻인가?"

원탁에 둘러앉은 사제들은 하나같이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성기사 존 랜도는 그들의 말을 듣고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팔미라 시가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수작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섰다간... 놈들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습니다."

"여신의 종이 어찌 저 배신자들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20대 서임사제는 박차고 일어나 성기사 존 랜도에게 삿대질까지 해댔다.

그때, 은발의 아스터 주교가 오른 손을 들었다.

그러자 20대 서임사제는 물론이고 원탁에 둘러앉은 사제들과 성기사 존 랜도까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에게 복수하고자하는 팔미라의 얕은 수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레벨 좀비가 탄생하는 걸 지켜만 볼 수도 없지."

은발의 아스터 주교는 원탁을 짚고 일어나며 성기사에게 명령했다.

"5레벨 좀비가 탄생하면 출격하라."

"주교님, 그럼 팔미라 시의 꾀임에 넘어가는 겁니다."

"톰슨 사제."

아스터 주교는 성기사에게 설명하는 대신, 20대의 젊은 사제를 불렀다.

"네, 주교님."

"저번의 과오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네."

"서, 설마... 전장에서 성기사를 직접 지휘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하, 하지만...!"

타일러 톰슨은 이대로 끌려가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벌 떨어댔다.

"자네의 잘못된 판단으로 성전사단 하나를 잃었다곤 하나, 자네를 빈손으로 보낸다면 팔미라에게 희생양을 제공하는 꼴이되겠지."

서임사제 타일러 톰슨은 빈손이란 말을 듣고는 기대어린 눈빛으로 아스터 주교를 올려다봤다.

"2급 신성유물을 내어주지."

"지, 지금 성에 남은 2급 신성유물이라면...?"

"성인 스트롬버그의 카이트실드네."

"아아! 제가 팔미라인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겠습니다."

서임사제 타일러 톰슨은 곧바로 아스터 주교 앞에 무릎 꿇더니 연신 성호를 그으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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