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원소폭발
< 해당 언데드 [아머드 스켈레톤 뱀파이어릭 위치]의 전투력은 이미 유니크 등급을 넘어섰습니다. >
< 등급을 재판정합니다. >
< 레전드 등급 언데드 [아머드 스켈레톤 뱀파이어 남작]으로 승급하였습니다. >
그 순간, 피안개가 제니퍼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피의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어느새 붉은 드레스로 갈아입은 제니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본래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지닌 전형적인 백인미녀였다.
하지만 피를 대량으로 흡혈하고 뱀파이어 남작의 반열에 오르더니 검던 머리카락이 피처럼 붉은 선홍색으로 변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머드 스켈레톤 뱀파이어릭 위치로 일으킨 후, 창백하기만 했던 피부가 발그레하게 변했다.
핏기가 도는 모습이었다.
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워슈트를 타고 올라 콕핏 입구에 섰다.
그리곤 제니퍼의 볼살을 한움큼 쥐어봤다.
신기하게도 제니퍼의 볼살은 몰캉몰캉한 것도 모자라 따뜻하기까지 했다.
그건 내가 만들어준 인공근육 피부에 하얀색으로 도색한 아머드 스켈레톤 뱀파이어릭 위치가 아니었다.
- 주인님... 볼살을 좀 놔주시면 안될까요?
그때, 제니퍼가 새로 일으킨 워리어들의 눈치를 보며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2,796기의 워리어들은 그새 남은 좀비 사체를 포식하고 돌아와 나를 보고 도열해 있었다.
"이젠 누가봐도 언데드인 줄 모르겠군."
- 겉모습은 조금 변했지만... 저는 여전히 주인님의 종입니다.
내가 말하자, 제니퍼가 조종석을 밟고 일어나더니 풍성한 붉은 드레스를 쥐고 허리를 숙여보이며 대답했다.
그때였다.
드드드드! 하고 땅이 흔들렸다.
"이게... 뭐지?"
사방을 둘러봐도 땅이 이만큼 흔들리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제니퍼가 북쪽을 가리키며 정신파를 보내왔다.
- 북으로 약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폭발을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지?'
그 순간 제니퍼가 검은 흙먼지가 치솟는 장면을 정신파를 통해 전해왔다.
- 제겐 블러드 클라우드를 이루는 피가 눈과 귀나 다름없어요.
그녀는 넓게 펼쳐진 블러드 클라우드를 레이더처럼 쓰는 것 같았다.
제니퍼가 정신파로 설명한 순간, 시스템이 내 시야에 몇 개의 영상을 띄웠다.
수십 개의 황금빛 기둥이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모습이었다.
< 최북단으로 정찰보낸 정찰드론들이 확보한 영상입니다. >
< 로두스 성국의 [팔라딘폴]일 가능성이... 97.5%입니다. >
난 시스템 메세지를 확인한 후,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 4층 기체보관실에서 대기 중이던 연구정령 샤를을 꺼냈다.
그리곤 제니퍼에게 말했다.
"남은 블러드 클라우드는 샤를의 연구소에 보관해야겠다."
그 순간, 내 옆으로 텔레포트 포탈이 열렸다.
텔레포트 포탈 너머로 실험실의 모습이 보였다.
코소브 생명과학 연구소의 연구실만큼이나 큰 공간엔 고래가 들어가고도 남을만큼 큰 유리관들이 텅 빈 채로 놓여있었다.
***
- B-9 구역, 골렘 전용 51번 격납고.
"이런 반푼이들을 데리고 로두스 성국의 성기사단을 격멸하라니... 눈앞이 캄캄하군."
어깨에 은빛 별을 두개나 단 20대 초반의 동양인 남성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는 이번 복수전의 골렘편대장을 맡은 거트 볼드윈 소장이었다.
거트 볼드윈 소장 앞엔 짙은 남색 정복을 차려입은 영관 아홉 명이 군기가 바짝 들어간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는 아홉 명의 영관 중 가장 끝에 선 남자는 30대 후반에 짧은 금발머리를 지녔다.
왼쪽 눈썹 위 이마부터 왼쪽 턱끝까지 내려오는 자상이 인상적인 남자는 바로 막스 벡허였다.
'하프블러드도 아닌데 반푼이라고?'
누가 뭐래도 그는 오귀스트 가문의 직계혈통인 어머니와 망명귀족 출신인 아버지 알렉산더 벡허의 피를 이어받은 귀족이었다.
3대 가문의 직계혈통만 귀족으로 인정하는 팔미라 시가 아니라 다른 도시에 간다면 여기 모인 10명 모두 귀족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귀족과 평민 혼혈을 멸시하는 호칭인 반푼이란 말을 들으니, 거꾸로 솟은 피가 정수리에서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멸감을 느낀 건 막스 벡허뿐만이 아니었다.
"후욱!"
막스 벡허 옆에 선 발터 렌츠 중령이 화를 못 참고 거친 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격납고의 온도가 한순간에 영하로 치달았다.
그와 동시에 벽면에 하얀 성에가 끼고 영관들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거기, 검은 머리."
그 모습을 본 거트 볼드윈 소장은 검지손가락으로 정확히 발터 렌츠 중령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령 발터 렌츠!"
"반푼이란 말이 듣기 거슬리셨나보지? 감히 중령 따위가 소장님 말씀하시는데 초상능력을 사용해!"
"시정하겠습니다!"
발터 렌츠 중령은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초상능력을 거두진 않았다.
그게 그의 마지막 자존심인 것 같았다.
"이 모자란 놈이...!"
그 모습을 보고 거트 볼드윈 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자, 거트 볼드윈 소장의 검은 눈동자가 한순간에 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최고참 영관, 디터 노이젤 대령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 소장님! 소장님께서 손을 더럽히실 필요 없습니다. 렌츠 중령은 제가 따로 교육시키겠습니다!"
디터 노이젤 대령이 말한 순간, 거트 볼드윈은 고개가 그에게 휙! 하고 돌아갔다.
"노이젤 대령이 보기엔 본 소장이 이런 사소한 일조차 해결하지 못할만큼 어리숙해보이나보지?"
"아, 아닙니다! 저는 다만..."
디터 노이젤 대령이 변명하려할 때였다.
"끄극!"
거트 볼드윈 소장의 시선을 받은 발터 렌츠 중령이 기묘한 신음소리를 토하고는 앞으로 고꾸라져버렸다.
그는 마치 한순간에 석상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앞으로 넘어지면서도 바닥에 얼굴을 부딪히는 걸 막히위해 땅에 손을 짚지도 못했다.
"전투준비태세 중 항명은 즉결처분 대상이다."
거트 볼드윈 소장이 냉엄한 목소리로 꾸짖은 순간이었다.
바닥과 충돌한 발터 렌츠 중령의 정복 상의가 산산조각났다.
회색빛으로 변한 발터 렌츠 중령의 정복은 어느새 얇은 돌조각으로 변해있었다.
깨져나간 정복 안으로 드러난 발터 렌츠 중령의 상체 일부분도 회색빛으로 물든 모습이었다.
볼드윈 가문이 자랑하는 3대 초상능력 중 하나인 석화능력이었다.
'서리거인 발터가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쓰러지다니... 아무리 볼드윈 가문의 직계라도 초상능력이 이렇게나 차이난다고?'
일반적으로 석화능력은 초상능력 중 3품계에 속했다.
위상으로만 따지면 발터 렌츠의 초상능력인 서리능력과 같은 품계라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품계로 분류되는 석화능력이 눈 깜짝할 사이에 서리거인이란 이명까지 얻은 발터 렌츠를 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건 같은 품계의 초상능력끼리는 부분적으로나마 저항할 수 있다는 일반상식에서 벗어난 결과였다.
'볼드윈 가문의 석화능력은 상대를 돌로 만드는데 최소 15초 이상 걸린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같은 품계의 초상능력자를 눈깜짝할 사이에 반 돌덩이로 만든 거지?'
거트 볼드윈 소장의 초상능력은 막스 벡허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그 격차를 확인한 순간, 뜨겁게 끓어올랐던 막스 벡허의 피가 한순간에 얼음장처럼 식어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 T-61 구역에서 해머폴이 관측되었습니다.
- 골렘 11편대, 즉시 출동해주십시오!
- 거트 볼드윈 편대장님, 4군단의 긴급출격요청입니다!
"흥!"
안내방송을 들은 거트 볼드윈은 쓰러진 발터 렌츠 중령을 내려다보고 한번 코웃음 치더니 거치된 자신의 타이탄급 골렘 앞으로 이동했다.
그가 인장반지를 골렘을 향해 내밀자, 골렘의 눈에서 밝은 빛이 거트 볼드윈 소장을 향해 쏟아졌다.
빛이 사라졌을 땐, 거트 볼드윈은 모습도 사라진 후였다.
거트 볼드윈 소장이 등을 돌리자, 디터 노이젤 대령이 그의 눈치를 보곤 급히 다가와 쓰러진 발터 렌츠의 등에 손을 댔다.
그러자, 상체 상당부분이 회색으로 석화되었던 발터 렌츠의 몸이 서서히 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곧 혈색을 되찾은 발터 렌츠 중령이 고개를 들자, 디터 노이젤 대령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맹수의 목을 물어뜯지 못할거면 발톱도 꺼내지 말아라."
"콜록...!"
발터 렌츠 중령이 그 말을 듣고 기침하는 걸 본 영관들은 그를 내버려두고 급히 각자의 타이탄급 골렘 앞에 인장반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거치대에 연결되어있던 아홉 기의 골렘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 엄살 그만 부리고 당장 쫓아와라!
그때 거트 볼드윈 소장이 탑승한 골렘이 거치대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 11편대, 골렘나이트 10명 중 9명 탑승완료!
- 편대장님, 골렘나이트 발터 렌츠 중령이 아직 미탑승 상태입니다.
그때 격납고에 안내음성이 울렸다.
- 렌츠 중령은 곧 회복하고 우리 뒤를 따라올 것이다. 골렘 9기 먼저 출격한다!
- 해머폴이 발생한 장소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위치로 텔레포트 포탈을 개방합니다!
거트 볼드윈은 발터 렌츠 중령이 골렘에 탑승하는 것도 확인하지 않고 텔레포트 포탈로 들어가버렸다.
***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넘게 이동하고나서야 사냥 2팀장 세사르가 이끄는 수송트럭 무리의 꼬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아서?
그때 전술 통신망을 통해 세사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워슈트의 비행속도를 높여 선두에서 수천 대의 수송트럭들을 이끄는 에어로트럭으로 향했다.
- 아서, 무사한가?
"무사합니다."
내가 대답하는데, 동쪽에서 배틀슈트 한 기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 합류가 늦어져서 걱정했네.
내 앞에 멈춰 통신을 보낸 사람은 사냥 1팀장 휴고였다.
"용병연합을 구하느라 쉬지 않고 강행군했더니, 정비해야할 게 좀 쌓여있었습니다."
- 그래? 그럼 다른 워슈트는...?
세사르는 내 뒤를 보며 내게 물었다.
왜 혼자뿐이냐는 물음이었다.
그때, 사냥 1팀장 휴고 가르시아가 세사르의 에어로트럭 지붕에 내려서더니 그의 옆구리를 툭! 하고 쳤다.
세사르가 돌아보자, 휴고는 대답없이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 아!
세사르는 그제야 뭔가 알겠다는듯 탄성을 내뱉곤 입을 다물었다.
그들에게 기계만 넣을 수 있는 아공간 아티팩트가 있다는 걸 고백했었다.
하지만 그건 밀러쉴더스 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소속과 입장이 다른 수만 명의 용병들에게까지 내 손에 귀한 아티팩트가 있다는 걸 공개해서 좋을 건 없었다.
세사르도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난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들에게 물었다.
"용병 수가 거의 2배로 불어난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정확한 인원은... 7만 8천 정도지. 우리 무리가 큰 걸 보고 동쪽으로 이동하던 용병들이 합류했네.
- 아무래도 집단광기가 벌어진 상황에서 소수로 이동하는 건 부담스러웠겠지.
내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세사르가 대답하자, 휴고가 설명을 보탰다.
"대규모로 움직일수록 저들이 4군단에 발각당할 위험도 커지는 거 아니었습니까?"
-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사냥 1팀장 휴고는 뭔가 입에 담기도 꺼림칙하다는 듯 말꼬리를 늘렸다.
"낮지만?"
- 4군단이 5레벨 좀비로의 진화를 막아내지 못했을 경우를 걱정하는 거겠지.
그때 시체보관실에 쌓인 2레벨 좀비 스프린터의 시체를 증식장갑에 포식시키던 데스윙이 정신파를 보내왔다.
- 3레벨 좀비가 4레벨로 진화하는 모습을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데스윙은 10미터 높이의 하얀 고치의 모습을 정신파로 전해왔다.
- 진화단계에 접어든 이후 그 껍질이 한번 딱딱하게 굳은 놈들은 30mm 기관포로 포격해도 끄덕하지 않았습니다.
- 대량의 좀비들이 진화하는 것도 문제에요.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4레벨 좀비가 5레벨 좀비로 진화하는 과정의 집단광기라면... 4레벨 좀비로 진화하는 개체가 상당수 발생할지도 몰라요.
그때, 제니퍼가 말을 보탰다.
< 4층 기체보관실에서 대기 중인 조셉 메를린의 양자암호통신단말 WTT-050을 사용해 검색한 결과입니다. >
< 좀비는 [진화]와 [집단광기]라는 과정을 통해 집단을 형성합니다. >
< 이때 진화단계에 접어들어 주변의 좀비들에게 [집단광기]를 일으키는 좀비를 [우두머리]라고 칭합니다. >
'난 1레벨과 2레벨 좀비로만 이루어진 집단도 봤는데?'
< 여러가지 이유로 [우두머리]를 잃은 좀비들은 이룬 집단을 유지한 상태로 사냥감을 찾아다닙니다. >
난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3레벨 좀비 머슬의 머리엔 3억 크레딧이라는 현상금이 붙어있다.
하지만 고작 한 단계 낮은 2레벨 좀비 스프린터의 머리엔?
8천 크레딧뿐이었다.
'현상금이 3만 배 이상 차이나니까 용병들이 머슬만 사냥하고 빠지는 거군.'
우리머리 없이 떠도는 1레벨, 2레벨로만 구성된 좀비집단이 많은 이유였다.
< [우두머리]가 [군주]로 진화하는 경우, [집단광기]에 의해 몰려든 좀비들은 4레벨까지 진화한다고 알려져있습니다. >
'군주?'
< 5레벨 이상의 [우두머리]를 [군주]라고 칭합니다. >
< [마운틴 퀸]의 이명에 여왕이란 의미의 고대어를 사용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
확실히 2등 시민인 조셉 메를린이 접근할 수 있는 양자암호통신망에는 양질의 정보가 산재해있는 것 같았다.
< 일반적으로 [우두머리]보다 한 단계 낮은 레벨로 진화한 [병정좀비]들은 해당 좀비집단에 속하지 않은 좀비 또는 인간을 사냥해 진화 중인 자신의 [우두머리]에게 바칩니다. >
< 이때, 수준 높은 에너지원을 바칠수록 [군주]의 진화를 일찍 끝마칠 수 있게 돕는다고 합니다. >
그건 마치 일개미들이 하는 일과 비슷해보였다.
'최소 3단계 강화시술을 받은... 용병들이라면 그 좀비놈들에겐 높은 수준의 영양소로 보인다는 뜻이군?'
우두머리의 진화를 돕기위해 용병의 사체를 적극적으로 모은다니, 상상만해도 섬뜩했다.
< 그렇습니다. >
그때, 10여 기의 배틀슈트가 세사르의 에어로트럭을 향해 날아왔다.
배틀슈트의 헬멧을 투명화시키고 날아오는 이들을 보니, 반 이상이 내가 구한 용병연합의 수장들이었다.
- 이쪽은 밀덴, 스벤, 베르거, 디미트, 렌코, 프렌켈이네. 자네와 헤어진 이후 합류한 용병연합의 수장들이지.
"반갑습니다."
내가 여섯 명의 베테랑 용병들과 인사를 나누자, 흰머리의 백인용병 프렌켈이 휴고를 향해 물었다.
- 이 정도면 꽤 돌아온 것 같은데, 말씀하셨던 것처럼 남하해서 우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4군단 놈들의 시선이 로두스의 성기사들이나 진화 중인 군주놈에게 묶여있을 때, 팔미라 시로 입성해야합니다.
프렌켈이 묻자, 기다렸다는듯 옆머리를 민 디미트가 맞장구를 쳤다.
짝짜꿍이 잘 맞는 걸 보니, 이미 이 자리로 찾아오기 전에 우회해서 팔미라 시로 돌아가기로 입을 맞추고 온 것 같았다.
그들은 백골산까지 가지않고 곧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틀길 바랐다.
하지만 이번 임무를 맡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카라페이스의 뼈와 갑각을 구해오는 것이었던 난, 그들의 권유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을 선배님들만 하셨겠습니까?"
- 아서 단장, 우리와 합류하지 않은 용병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다면 그쪽이 옳은 게 아니겠소?
흰머리의 프렌켈이 곧바로 반박하는 걸 보니, 그가 다른 용병들을 규합해 온 것 같았다.
돌아보니, 내가 구해준 여섯 용병연합의 장들은 눈을 피하기 바빴다.
흰머리의 용병 프렌켈의 말대로 한 시라도 빨리 팔미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백골산까지 데려가려면... 한번 정리하고 가긴 해야겠군.'
난 비겁하게 내 눈을 피하는 용병들과 약삭 빠르게 치고나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프렌켈을 비롯한 용병들을 보고 마음을 정했다.
"다른 쪽으로 도망친 용병들만 그 생각을 했다면 다행이죠."
-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용병 디미트는 프렌켈과 다른 용병들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내게 물었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전개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4군단도 여러분처럼 생각할 거란 말씀입니다. 어차피 전투의 핵심은 골렘과 기간트들이 맡을 거 아닙니까?"
- 그렇겠지.
내가 노회한 프렌켈 대신 젊고 만만해보이는 디미트에게 묻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 모습을 본 프렌켈이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다 된 일을 디미트가 망쳐버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4군단에 소속된 워머신들과 병력들은 뭘 하겠습니까?"
- 설마 골렘들이 로두스 성국의 성기사들과 교전 중인데 우리에게 한눈을 팔까?
흰머리의 용병 프렌켈은 고개를 내저으며 내 계획을 망치려고 들었다.
"4군단은 팔미라 시의 시민 30만 명을 이번 복수전의 희생양으로 내놓았습니다. 이 사실이 팔미라 시 안으로 전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내 장담하건데 다음 시의원 선거는 볼만할 거야!
-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시의회 구성이 달라질 걸?
휴고와 세사르는 결코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다들 같은 생각 아닙니까? 우리가 저들의 정치생명을 끝장내려할텐데 4군단장이 우리를 살려보내겠습니까?"
용병연합의 장들은 내 물음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 그렇지만...
왼쪽 귀가 없는 용병 스벤이 딴지를 걸려고 할 때였다.
- 아이고, 내 눈!
- 어떤 놈이 장난을 친 거야?
- 젠장, 눈이 멀어버린 것 같은데...?
세상이 번쩍이더니, 전술 통신망이 시끄러워졌다.
섬광을 정면으로 본 사람들의 시력이 마비된 것 같았다.
돌아보니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 서쪽을 향해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 광량이 시력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
< 워슈트의 편광필터로 광량을 제한합니다. >
다행히 난 워슈트에 탄 상태라 시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전술 통신망을 통해 용병들의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 저, 저건 설마...?
- 핵인가?
- 아니, 원소폭발이다!
- 모두 엎드려!
- 충격파가 덮칠 거야!
비명성을 듣고 돌아보니, 서쪽에서 하얀 충격파가 우리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충격파가 어찌나 큰지 그 아랫부분을 차지한 100미터는 될 법한 높이의 모래폭풍이 초라해보일 지경이었다.
더 큰 문제는 충격파가 다가오는 속도였다.
처음 등장했을 땐, 10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세번 호흡하는 동안 1킬로미터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피하기는 늦었다는 생각에 난 곧바로 휴고와 세사르를 워슈트로 덮으며 에어로트럭을 붙잡았다.
'적층구조 베리어!'
그리곤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콰과과과! 파아아! 하는 굉음과 함께 충격파에 휩쓸려 튕겨날아가는 수송트럭들의 모습이 콕핏 안의 디스플레이로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