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막스 벡허
"크윽!"
막스 벡허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 맞아... 부화하려는 5레벨 좀비의 알에 볼드윈 소장이 빔소드를 꽂아넣었었지.'
그 직후, 로두스 성국의 서임사제가 고풍스러운 방패를 들고 주문을 외웠었다.
그 방패에서 황금빛이 번쩍! 하는 순간, 거트 볼드윈 소장이 탄 골렘의 마력로에서 마주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빛이 터져나왔다.
'그게... 원소폭발이었으면, 나는 죽었어야 했어.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아니... 여긴 어디지?'
땅을 짚고 일어나 그가 처음 본 건 안개에 휩싸인 거대한 은빛 호수였다.
마치 수은으로 이루어진 호수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생경한 모습을 보고 놀란 막스 벡허는 호수 중심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감전된 사람처럼 멈칫했다.
"반푼이! 멍청하게 서 있지말고 이리 와서 본 소장부터 구해라!"
20대 동양인, 거트 볼드윈 소장은 신경질적으로 막스 벡허 중령에게 호통을 쳐댔다.
하지만 막스 벡허 중령은 직속 상관의 호통을 듣고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어걸음 물러날 정도로 놀란 표정이었다.
은빛 호수 중심엔 거대한 황금알이 존재했다.
수면 위에 떠 있는 황금알은 지름만 400미터에 달할만큼 거대했다.
문제는 아래 반절만 남은 황금알과 그 위에 황금알 못지 않은 거대한 회색 상반신을 드러낸 괴물에게 있었다.
구름 같은 안개에 휩싸여 괴물의 몸을 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허리부터 머리까지 족히 500미터는 될 듯한 괴물이란 것만큼은 구분할 수 있었다.
놈은 눈을 감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괴물의 왼쪽 허리엔 거트 볼드윈 소장의 오른팔과 몸이 돋아나와 있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이 건방진 자식! 네가 아직도 볼드윈 가문의 귀족인 줄 알아?"
그때 하얀 서리바람이 쏟아져 거트 볼드윈 소장을 한순간에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막스 벡허가 고개를 들어보니 거인의 명치 부근에 가슴 윗부분까지 튀어나와 있는 발터 렌츠 중령의 모습이 보였다.
"발터,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 동안 그렇게 분풀이를 하고도 아직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느냐?"
그때 막스 벡허에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인의 젖꼭지 아래에 명치까지 튀어나온 디터 노이젤 대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세상을 달관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거트 볼드윈 소장과 발터 렌츠 중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얼어붙었던 거트 볼드윈 소장의 몸에 균열이 갔다.
그리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조각이 된 거트 볼드윈의 머리와 오른팔이 은빛 호수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 순간 거트 볼드윈 소장이 떨어져나간 자리가 꿈틀대더니 찰흙 같은 머리와 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새로 돋아난 머리와 팔은 순식간에 거트 볼드윈 소장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때였다.
"막스! 장벽방어군은 우릴 포기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구원 병력은 오지 않았어! 수만 번 실패하고도 잘못을 반복하는 이유가 뭐냐?"
노이젤 대령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수십 년이 지났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순간, 거대한 괴물의 상반신을 가렸던 안개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괴물의 몸에 파묻혀 있는 아홉 명의 골렘나이트와 로두스 성국의 서임사제 그리고 백 명에 달하는 성기사들의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리석은 자여, 발버둥쳐봤자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은빛 호수에 발을 담가라! 그럼 고통과 번민이 사라지고 여신이 너와 함께할지니!"
괴물의 배꼽 위에 왼팔과 머리만 돋아난 서임사제가 막스 벡허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그나마 말이라도 하는 자들은 한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백명이 넘는 성기사와 골렘나이트 일곱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노이젤 대령님, 제가 장벽방어군에 이 사실을 알리고 구조병력을 데려오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막스 벡허는 주먹을 질끈 쥐곤 곧바로 팔미라 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하는 굉음과 함께 볼에 닿은 공기가 터져나갔다.
'내가 이렇게 빨랐었나?'
막스 벡허는 눈 깜짝할 사이에 10킬로미터 이상 주파한 자신의 속도에 놀라고 말았다.
그때 막스 벡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우윳빛깔 결계였다.
'노이젤 대령님, 장벽방어군이 나서지 않는다면... 저 혼자라도 돌아오겠습니다!'
막스 벡허는 자신에게 골렘 운용술을 가르쳐준 은사의 이름을 되뇌며 우윳빛깔 결계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막스 벡허의 몸이 은빛으로 번쩍였다.
그의 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괴물의 눈썹 사이였다.
막스 벡허는 우윳빛깔 결계가 아니라 거대한 좀비의 미간에 주먹을 박아넣은 자세였다.
그는 그대로 좀비의 이마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하지만 다른 골렘나이트나 성기사들과 달리 몸 일부분을 남기지 않고 온전히 흡수되어버렸다.
그 순간! 은빛 호수 중심에 서 있던 거대한 괴물이 눈을 떴다.
찬란한 은광을 내뿜는 눈동자에 은빛 호수가 빛을 잃을 정도였다.
- 막스 벡허... 나는 막스 벡허다.
그 순간 괴물의 몸이 꿈틀대더니 왼쪽 눈 위의 이마부터 왼쪽 턱까지 자상이 생겼다.
막스 벡허 중령의 상처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은빛 호수가 황금알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랫부분만 남은 황금알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허리부터 드러난 상반신 위로 은빛 갑옷이 뒤덮이기 시작했다.
상체 전체를 가리는 투구와 안면가리개, 견갑과 장갑까지 형성한 순간이었다.
번쩍거리던 은빛 갑옷이 한순간에 검게 변색됐다.
마치 100% 마그니움 소재로 만든 타이탄급 골렘과 닮은 모습이었다.
***
"정말 살아돌아오다니... 아서,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장벽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사냥 1팀장 휴고가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말했다.
수만 명이 죽어나간 동부사막에서 살아돌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서 단장,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팔미라 시에서 아서 단장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텐데, 성공하셨다고 저를 잊으시면 안됩니다?"
사냥 17팀장 파코가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대머리 흑인 에단 네빌이 굽신거리며 말을 보탰다.
그때 띠링! 하는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지만 우릴 반긴 건 밀러쉴더스 본사 직원들이 아니었다.
- 이 배신자 용병 새끼들, 당장 튀어나오지 못해?
무려 12기의 기간트들이 우리를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올라온 밀러쉴더스 소속 전속용병들은 포박당한 채 기간트들 앞에 꿇어앉혀져 있었다.
블러드 클라우드도 모자라 원소폭발의 여파까지 맞고 겨우 살아돌아오는 길이었다.
4군단의 농간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을 헤치고 복귀한 전우들이 죄수처럼 꿇어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배신자라니? 4군단이 블러드 클라우드로 아군 병력한테 피를 뿌릴 때, 우린 최전선에서 좀비를 베었다!"
난 기간트들에게 소리치며 앞으로 나섰다.
"수만 명의 용병들이 죽어나갈 때, 4군단은 뭘 했지? 우릴 희생양으로 내놓고 4군단이 얻은 성과가 뭐냐? 로두스 성국을 무찔렀나?"
- 이, 이!
그때 12기의 기간트 중 국방색 바탕에 검은 색으로 장식한 기간트가 치고나오더니 내 얼굴에 거대한 레일건 포신을 들이댔다.
- 4군단 기간트워리어 헬무트 대위. 당장 포신을 거두고 물러나십시오! 여기는 1군단의 관할구역입니다.
그 순간 장벽 스피커가 울렸다.
- 이들은 4군단장님의 명령에 항명한 배반자들이다. 지금 내 앞을 막는 건, 4군단을 가로막는 것이란 걸 모르지는 않겠지?
그 순간 헬무트 대위가 탑승한 기간트가 천천히 날아올랐다.
하지만 놈의 포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마치 1군단을 도발하는 듯 한 태도였다.
그때 장벽 위에서 쿵! 처러럭,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스템은 내 시야에 장벽 위에 설치되어 장벽 밖을 향해 조준하고 있던 포신이 고개를 꺾어 장벽 안의 기간트들을 조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두 문의 포신이 아니라 장벽을 따라 족히 수백 대는 되어보이는 포신들이 4군단 소속 기간트들을 겨눴다.
- 1군단 장벽방어관 골렘나이트 귄터 오귀스트 대령이다. 관할구역을 벗어난 기간트가 감히 장벽 안에서 무력시위를 하다니... 반역을 범할 셈인가?
그때 장벽의 스피커에서 중년 남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령님, 약간의 오해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이 패잔병들만 데려가겠습니다.
자신만만했던 헬무트 대위의 기간트가 조용히 착지하더니 무릎 꿇은 용병들과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 감히 네깟 놈이 골렘나이트인 본 대령의 말에 토를 달아?
- 그, 그런 뜻이 아니옵고...
그 순간이었다.
꽈르릉! 하는 포성과 함께 헬무트 대위를 태운 국방색 기간트가 날아갔다.
낡은 아파트를 반파시킨 후에 드러난 모습은 처참했다.
< 헬무트 대위의 기간트가 썬더캐논의 포탄을 막아냈습니다. >
시스템은 느린 화면으로 양팔을 들어 H자 모양의 레일건 포탄을 막아내는 국방색 기간트의 모습을 보여줬다.
'장벽 안에 썬더캐논을 쏘는 놈이나 그걸 막아내는 놈이나... 가관이군.'
반파된 아파트 잔해 사이로 형편없이 파묻힌 사이보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1군단이 나서서 4군단을 막아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골렘나이트든 기간트워리어든 민간인 피해에 대한 걱정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정말 정이 안 가는 놈들이군.'
내가 속으로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 더 저항하면 반역죄로 판단하고 사살 후 네 가족들까지 재판에 회부할 것이다.
장벽 스피커에서 준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 물러나겠습니다.
귄터 오귀스트 대령이란 자는 헬무트 대위의 대답을 듣고도 수백 대의 썬더캐논 포신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12기의 4군단 소속 기간트들이 돌아가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썬더캐논 포신들은 기간트들이 모습을 감추고나서야 다시 장벽 밖을 겨누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일단 저들부터 일으킵시다."
난 곧바로 달려나가 무릎꿇은 용병들의 수갑과 족쇄부터 끊어버렸다.
"장벽 안에서 기간트를 운용하다니... 조슈아, 그 개자식 미쳐버린 걸까요?"
사냥 17팀장 파코는 1군단의 귀가 두려운지 4군단장의 이름을 부를 땐, 특히 목소리를 낮췄다.
"더 밀릴 곳이 없다는 뜻이겠지. 아서, 어떻게할텐가?"
사냥 1팀장 휴고 가르시아는 내 의견부터 물었다.
"용병들을 기다렸다가 본사로 가야죠."
"배려해줘서 고맙네."
"배려라뇨?"
"자넨 공헌도 계약용병이잖나? 전속 용병들을 기다려줄 필요없이, 자네 담당자를 찾아가서 대금만 받으면 끝날 일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휴고 팀장은 내가 같이 기다려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차마 사실 내가 밀러쉴더스 용병들 뒤에 서서 기다리는 조셉 메를린과 데스윙 등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장벽을 나설 때, 조셉 메를린과 테리를 데리고 나갔었다.
장벽방어군의 출입기록엔 조셉 메를린과 테리가 나간 기록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때, 용병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조셉 메를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셉 메를린과 데스윙 그리고 20기의 워리어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장벽을 떠나버렸다.
내가 이번 임무에서 워낙 요란한 행보를 보였던 게 문제였다.
이대로 장벽 안에서까지 조셉 메를린과 함께 움직이면 블랙마켓에서 활동해야하는 그의 활동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라도 따로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팀장님, 가시죠."
난 밀러쉴더스의 본사가 위치한 C-10 구역으로 향했다.
내 뒤엔 천 명이 넘는 용병들이 부상자와 사망자가 들어있는 저온수면캡슐을 든 채 따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