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하수인
3시간 후, C-10 구역 중심상업구역의 밀러쉴더스 본사 앞.
출입사무소에서 4등 시민에 불과한 내 신분때문에 시간이 조금 지체됐다.
하지만 밀러쉴더스 본사에 전화하자, 어렵지 않게 임시통행증을 받을 수 있었다.
본사 앞엔 이미 8천 명에 달하는 밀러쉴더스의 전속용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본사는 도대체 뭘 한 거야?"
"이 딴 것도 임무라고 내려?"
"용병 수만 명이 죽었다!"
"대표 나오라 그래!"
500여 개의 저온수면캡슐을 바닥에 깔아놓은 용병들은 본사 건물 꼭대기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본사에선 자주색 배틀슈트를 맞춰입은 경호원들이 나와서 그들이 본사 건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고 있었다.
그때 정장 차림의 40대 남자가 경호원들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여러분, 4군단의 무책임한 작전 결행으로 당황하셨다는 거 압니다. 험난한 전투를 겪으셨으니, 일단 귀가하시면 사측에서 적절한 보상방안을 마련해서 전달해드리겠습니다."
회색 눈의 백인 남성은 본사 건물과 용병들을 번갈아보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해서든 용병들의 화를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모든 게 4군단 잘못이냐?"
"이제와서 본사에서 발 뺀다고 우리가 속겠냐!"
하지만 본사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자, 용병들은 더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사냥 1팀장 휴고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용병들이 길을 열어줬다.
"인사팀장!"
그는 곧장 정장차림의 40대 남자에게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인사팀장은 이제야 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1팀장님! 일단 용병들부터 해산시켜주십시..."
"전속 용병들은 밀러쉴더스가 내려주는 임무만 맡는다."
휴고 가르시아 팀장이 인사팀장의 말을 끊자, 용병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건 본사와 전속 용병 간에 신뢰를 기반으로 한 계약이었다. 하지만 이번 임무는 그 신뢰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티, 팀장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핀, 네가 본사 사무실에 앉아있으니 용병인지 귀족인지 헤깔리는 모양이군?"
그때 사냥 2팀장 세사르가 나서서 인사팀장을 질타했다.
"만약 아서가 활약하지 못했으면 우리 밀러쉴더스의 전속용병들은 반 이상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희생양으로 내던져놓고 해산하라고?"
휴고 가르시아까지 말을 보태자, 인사팀장은 인상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떤 보상을 원하십니까?"
"모든 전속용병의 계약해지와 모든 부채 탕감. 그리고 1조 크레딧의 보상금을 원한다."
"팀장님, 그 모든 부채가 설마 배틀슈트 할부금까지 포함한 금액은 아니겠죠? 그건..."
"핀,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일단 대표님께 보고 올려."
인사팀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려는데, 휴고가 다시 말을 끊어버렸다.
"어차피 이만한 금액을 결정할 수 있는 건 대표님뿐이잖아?"
결심한 듯한 휴고가 크게 지르자, 인사팀장은 이어폰 형태의 통신단말을 터치했다.
소음과 관련된 아티팩트라도 착용했는지, 통신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을 마친 인사팀장이 통신단말을 터치하더니 휴고 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결정은 이번 임무의 성과를 보고 결정하시겠답니다."
"성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블러드 클라우드로 좀비떼한테 우릴 내던져준 주제에 좀비 머리를 베어왔어야한다는 거야?"
"팀장님, 저건 우릴 농락하는 개소리입니다!"
인사팀장이 밀러쉴더스 대표의 말을 전한 순간, 분노한 용병들이 각자 총칼을 꺼내들며 소리쳤다.
이대로 놔두면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난 어쩔 수 없이 한걸음 내딛으며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에어로트럭 여섯 대가 본사 건물 앞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은 곧바로 길을 열어줬다.
"인사팀장님, 실제로는 처음 뵙는군요."
"그래요. 아서 씨, 상황이 이렇게 된 게 참... 유감입니다."
인사팀장 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유감을 표했다.
큰 돈이 오갈 자리라는 걸 인지하고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이었다.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성과는 정확히 공헌도 몇 점입니까?"
"그, 그게..."
"그럼 기준도 없이 툭 던져본 거란 말씀이십니까?"
"아, 아닙니다. 그래요. 공헌도 오백만 점입니다."
"정확히 대표님께서 공헌도 오백만 점이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면 방금 인사팀장님께서 지어내신 숫자입니까?"
"전 대표님 이름을 걸고 말장난을 할 만큼 간이 크지 않습니다."
난 인사팀장 대신 휴고를 바라봤다.
인사팀장은 못 믿어도 휴고의 사람 보는 눈은 믿음이 갔기 때문이다.
"허튼 소리는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오백만 점이라니... 20팀이 한달을 죽어라 일해도 2천만 점 넘기기가 어려운데 고작 이틀만에 5백만 점은 너무 과한 거 아닌가?"
"팀장님. 대표님이 말을 바꾸시는 것 보셨습니까? 공헌도 500만 점을 구해오지 못하셨으면... 이만 해산시켜주십시오."
인사팀장은 더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만약 5백만 점을 채우면, 제 공헌도 계약도 해지되는 겁니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죠."
"들어가시죠."
내가 대답한 순간 우웅! 하는 기계음과 함께 에어로트럭 앞의 도로가 비스듬하게 주저앉기 시작했다.
"아서, 내가 같이 가겠네."
휴고 가르시아는 에어로트럭의 조수석에 오르는 내게 말했다.
"아닙니다. 깔끔하게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난 휴고 가르시아를 안심시킨 후, 인사팀장 핀이 안내하는대로 에어로트럭을 이동시켰다.
지하주차장을 거쳐 도착한 곳은 정부종합청사 좀비인자 매입계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여섯 대의 에어로트럭은 물류창고 같은 곳으로 이동했다.
그때 인사팀장 뒤로 조지 스톤 과장과 정장차림의 인사팀 직원들 20여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 얘기는 단 둘이 하고 싶습니다."
"아서님!"
내가 말한 순간, 조지 스톤 과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인사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들 나가있어."
인사팀장이 자신의 직원들을 내쫓고 발을 두번 구르자, 바닥이 열리더니 테이블과 소파 두 개가 올라왔다.
내가 제니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워리어들이 에어로트럭 짐칸에서 3레벨 좀비 머슬의 머리를 꺼내오기 시작했다.
인사팀장 핀은 3레벨 좀비 머슬의 머리가 100개 가까이 쌓이는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서 씨, 머슬의 머리는 아무리 많아봐야 공헌도 500만 점에 못 미칩니다."
"이번 임무에서 제가 가져오는 좀비 머리는 열배 값을 쳐주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봐야 공헌도 천 점이 만 점 되는 겁니다. 이게... 97개니까 97만 점. 4백만 점이 모자라군요?"
그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물었다.
내가 왼손을 들어올리자, 제니퍼가 직접 4레벨 좀비 디스트로이어의 머리를 가져왔다.
3레벨 좀비 머슬의 머리를 보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인사팀장은 디스트로이어의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디스트로이어의 머리가 원래 공헌도 30만 점 짜리였죠?"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열 배로 계산해도... 300만 점밖에 안됩니다. 아서 씨, 괜히 전속용병들의 일에 끼어들어서 본사와의 관계가..."
인사팀장은 날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의 말을 듣지않고 다시 한번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워리어 4기가 4레벨 좀비 디스트로이어의 머리를 하나 더 가져왔다.
"이, 이게 어떻게...!"
"내가 용병연합 여섯 곳을 구출했다는 얘기, 아직 못 들어보셨습니까?"
"아니, 분명 아서 씨는 차량 없이 움직여서 전리품을 가져가는 모습은 못 봤다고 했는데?"
인사팀장의 말을 듣고보니, 이미 내가 구해준 여섯 용병연합 소속 용병들의 증언을 교차검증까지 한 모양이었다.
내 에어로트럭은 뒤따라오는 휴고에게 맡기고 워슈트만 입고 돌아다녔으니 용병들이 보기엔 전리품 회수도 못하고 돌아다니는 걸로 오해했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내 아공간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오해가 밀러쉴더스의 허를 찌른 것이다.
"공헌도 697만 점."
"아서 씨, 아니. 아서 단장님. 디스트로이어의 머리는 이게 전부입니까? 더 있으시면 이번 기회에 거래하시죠? 지금처럼 10배씩 쳐주는 일은 정말 드뭅니다."
인사팀장 핀은 디스트로이어의 머리 두 개로도 부족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이번에 확보한 디스트로이어의 머리는 4개였다.
하지만 4개 모두 밀러쉴더스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
'시정부가 두 달 동안 공헌도를 5배씩 쳐주기로한 이상, 공헌도에 목마른 귀족들은 얼마든지 열 배 이상을 쳐줄 수 있어.'
공헌도 계약을 끝내면 자유롭게 사고팔수 있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디스트로이어의 머리를 팔 수 있을만한 곳을 알고 있었다.
'블랙마켓에 팔면 돼.'
어차피 내가 필요한 건 공헌도가 아니었다.
거기다 시정부는 어디서 좀비 머리를 베어왔는지 따위는 물어보지도 않고 사들인다.
그럼 어떻게 될까?
공헌도를 원하는 귀족들은 두말하지 않고 디스트로이어의 머리를 사들일 것이다.
웃돈까지 주고!
'이건 하나에 1조 크레딧짜리 고액권이란 뜻이지.'
평시엔 1천억 크레딧 짜리 디스트로이어의 머리지만, 지금은 열 배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 1조 크레딧짜리였다.
그 돈이면 블랙마켓에서 내가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휴... 그럼 두 개로 만족하죠. 다들 들어와!"
한숨을 내쉰 인사팀장은 부하직원들을 불렀다.
하지만 내 워리어들이 문을 붙잡자, 그그그극! 하고 기어갈리는 소리만 들릴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서 씨,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인사팀장은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이렇게 깔끔하게 거래를 마칠 수가 없었다.
'날 함정에 빠트려놓고... 공헌도만 챙기시겠다? 그렇게는 못해주지.'
난 당황한 표정의 인사팀장에게 물었다.
"4군단의 작전을... 밀러쉴더스가 몰랐다고 변명하진 못하겠죠?"
난 테이블 옆에 쌓은 2조 2910억 크레딧 어치 좀비 머리를 보며 인사팀장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미 답은 짐작하고 있었다.
- 인사팀장은 손가락 하나로 조지 스톤 과장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저번에 조지 스톤 과장은 주인님을 구하기 위해 4군단의 참모장을 불러냈었죠.
제니퍼가 정신파로 알려주지 않아도 밀러쉴더스와 4군단의 관계가 꽤 긴밀하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일개 용병을 구하는데 참모장을 불러올 수 있는 수완이면... 이번 사막정화 작전이 복수전의 성격을 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 저도 이 자를 만나보기 전엔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두려워하고 있군요.
그 순간 내 귓가에 인사팀장 핀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심장에서 뿜어진 피가 혈관을 거쳐 손발로 빠르게 뻗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문인지 인사팀장은 손을 자꾸 쥐었다펴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제니퍼가 보낸 정신파였다.
'내부장기와 혈액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면... 네 앞에서 거짓말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겠군.'
- 1분만 시간을 만들어주시면 이 자를 하수인으로 만들어 주인님께 복종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제니퍼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신파를 보내왔다.
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공헌도 계약을 해지하더라도 10대 그룹으로 불리는 밀러 쉴더스에 내 사람을 하나 심어놓는 게 나쁠 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허락한다.'
내가 명령한 순간이었다.
내 오른쪽 뒤에 서 있던 제니퍼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화악!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인사팀장의 이마가 제니퍼의 오른손바닥에 끌려가 붙어버렸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인사팀장 핀의 고개를 젖히더니 목에 송곳니를 박아넣었다.
"끄릅! 아, 아서 단장님...!"
발버둥치는 인사팀장과 흡혈과정 때문인지 눈동자가 붉게 변한 제니퍼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