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크라노야 섬멸작전
아서의 말을 듣는 순간, 노집사 라움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고작 4등 시민에게 골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추천장을 써준다는 건 과분한 제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5단계 강화시술자도 아닌 놈이 방금 얻은 이사 직책으로 기간트를 달라고 한 것이다.
그건 귀족을 아니, 토비아스 빌헬름 공자를 업신여기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비록 후계서열 13번째이긴하나 토비아스 공자는 빌헬름 가문의 후계자 신분이시다. 감히 사이보그 용병 따위가 빌헬름 가문의 후계자를 우습게 여기다니...!'
노집사는 사망선고를 내리기 전의 의사가 시계부터 확인하듯 물었다.
"아서 씨, 지금 토비아스 빌헬름 공자님의 제안을 거절하시는 겁니까?"
그 순간 노집사 라움은 아서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걸 느꼈다.
그건 명백히 상대의 전투력을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라움 집사님."
노집사 라움은 이미 자신을 적대할 준비를 마친 상대에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베었을 때, 즉사시킬 수 있는 아서의 급소들을 훑어봤다.
그 순간, 아서가 움찔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강화시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사이보그 주제에 감이 좋군.'
아서가 물러나며 인상을 쓰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배틀슈트 차림의 용병 둘이 아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집사님, 혼자 오셨으면... 선은 넘지 맙시다."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용병이 말한 순간 노집사 라움과 외눈 용병 사이의 도로가 퍼버버벅! 하는 소리와 함께 잘려나갔다.
'인비져블 블레이드라...'
노집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상대의 특이능력을 알아챘다.
그와 동시에 고작 4단계 강화인간 주제에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그가 팔미라 시에서 활동했던 40년 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초상능력을 따라잡겠다고 제 몸에 좀비체액이나 찔러넣는 더러운 강화인간 따위가...!"
노집사 라움이 이를 악물자, 갑자기 그를 중심으로 거센 돌풍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래! 네놈들이 자랑하는 배틀슈트가 내 블레이드스톰을 몇 초나 견뎌내는지 지켜봐주마!'
노집사가 마음을 독하게 먹었을 땐,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먼지는 이미 가신 후였다.
먼지가 가시자 8미터 높이의 허공에 뜬 노집사 라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양손바닥과 양발 밑엔 거세게 도는 돌풍이 그의 몸을 띄워올리고 있었다.
노집사 라움은 그 돌풍으로 칼날을 빚어낼 준비를 마쳤다.
***
노집사 라움이 돌풍을 일으키는 초상능력을 선보인 순간이었다.
< 휴고 가르시아가 전술 통신망에 접속했습니다. >
난 시스템 메세지를 읽자마자 배틀슈트의 헬멧을 장착했다.
그러자 헬멧 내부 스피커를 통해 휴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 단장님, 아무래도 저 자가 블레이드스톰인 것 같습니다.
"블레이드스톰?"
- 40년 전쯤에 이름을 날렸던 초상능력자입니다. 수십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다들 장벽 밖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빌헬름 가문에 포섭된 모양입니다.
그때 전술통신망에 접속한 세사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합니다. >
< [블레이드스톰]은 폭풍 속에 돌풍으로 이루어진 칼날을 숨겨서 적을 조각내는 초상능력입니다. >
< 용병협회에서 편찬한 [전술교범]에 따르면 가장 적절한 대응방법은 시전자가 돌풍을 일으키기 전에 참살해야한다고 나와있습니다. >
시스템 메세지를 읽고보니 생각보다 까다로운 상대 같았다.
그때 어느새 노집사 라움의 좌측으로 이동한 3팀장 훔멜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공격할 때 옆을 칠 생각인 것 같았다.
'제압하기도 어려워보이지만... 여기서 죽이면 그게 더 곤란해지겠어.'
배틀슈트를 입은 4단계 강화시술자 3명을 앞에 두고도 기고만장한 걸 보면, 워슈트나 제니퍼를 꺼내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수십 명의 스카우터와 용병협회 직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내가 아공간을 지니고 있다는 걸 들킬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노집사 라움을 죽이는 순간, 빌헬름 가문과 직접적인 원한을 맺게 된다는 점이었다.
< 사용자님. 조셉 메를린이 업로드한 데이터에서 새로운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
< 토비아스 빌헬름은 빌헬름 가문의 후계자 중 한 명입니다. >
< 3대 가문은 후계권을 가진 자손에게만 [공자]라는 칭호를 부여합니다. >
< 토비아스 빌헬름은 후계서열 13위입니다. >
난 그 시스템 메세지를 보고 노집사 라움의 고삐를 끌 방법을 생각해냈다.
"라움 님, 토비아스 빌헬름 공자께서 명령하신 게 저를 영입해오라는 거였습니까? 아니면 저를 처치하라는 거였습니까? 그 부분부터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오해가 없을 것 같군요?"
내가 묻자, 노집사가 숨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토비아스 빌헬름의 이름을 듣고나서야 이성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 순간, 점차 기세를 키워가던 돌풍이 차츰 잦아들더니 노집사가 땅으로 내려섰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이 노인은 아무런 결정권도 없군.'
난 결정권조차 없는 하수인과 길게 말을 섞어가며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토비아스 빌헬름 공자가 나를 영입하라고 지시하셨을 땐, 난 용병협회 이사가 아니었습니다. 가서 주인께 직접 물어보시고 더 훌륭한 제안을 가져오시길 바랍니다."
내 말을 들은 노집사 라움은 날 가르치듯 말했다.
"아서 씨, 지금 자신이 세상 전부를 얻은 것 같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얻은 건 팔미라 시의 티끌에 불과합니다. 부디 언행에 신중하시길..."
노집사 라움은 그 말만 남기고 자신의 건쉽으로 돌아가버렸다.
그가 건쉽에 타는 순간, 건쉽은 일렁임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저 투명화 기능은... 제법 탐이 나는군.'
밀러쉴더스의 미행능력에 진땀을 뺐던 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건쉽의 투명화기능이 탐이 났다.
난 건쉽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만 출발하지."
내가 에어로트럭 조수석에 타자, 휴고와 세사르가 뒷좌석에 탑승했다.
방금 전까지 노집사 라움의 측면을 치기위해 좌측으로 빠져있던 3팀장 틸로 훔멜스도 에어로트럭으로 돌아와 운전대를 잡았다.
***
그 시각, B-19 구역 밀러 테크놀로지 사의 배틀슈트 생산 4공장.
십대 후반의 동양인은 텅 빈 공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짐머 박사, 이 정도 시설이면 특이능력자 양산계획을 얼마나 앞당길 수 있겠나?"
그는 밀러 테크놀로지의 대표 율리안 밀러였다.
그의 뒤엔 30대 초반의 윌리엄 밀러가 말 한 마디 못하고 서 있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출하까지 걸리는 시간은 줄일 수 없습니다."
"뭐? 신형 솔져급 배틀슈트의 생산계획을 미루고 양산시설을 만들어줬는데 시간을 줄일 수 없다?"
율리안 밀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율리안 밀러의 아들 윌리엄 밀러는 자신이 아니라 부하직원을 향한 질타의 목소리만 듣고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짐머 박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배양 완료까지는 46일이 걸립니다. 그 시간은 단축할 수 없지만... 이 정도 시설이면 한번에 1만 명 정도는 생산할 수 있을 겁니다."
신제품 생산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특이능력자 배양에 관심을 쏟았던 율리안 밀러의 인상이 그제야 풀어졌다.
"전엔 130명이 한계라더니, 만 명이면 좀 낫군."
밀러 테크놀로지의 대표 율리안 밀러가 말한 순간 짐머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손발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밀러쉴더스가 운용하던 용병이 채 9천 명이 안됐었는데, 46일만에 특이능력자를 1만 명이나 생산하는 게 조금 나은 성과라는 건가?'
짐머 박사가 청소년의 얼굴을 한 율리안 밀러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왜 그러나?"
율리안 밀러는 짐머 박사의 작은 변화를 알아챘는지 그의 손발을 보며 물었다.
"가문의 숙원이 결실을 맺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손이 떨릴 지경입니다."
"그렇군. 윌리엄?"
"네. 아버지."
"짐머 박사가 이번 사업에서 큰 역할을 했으니... 밀러 바이오를 출범하면 네가 대표를 맡고 짐머 박사는 최고기술책임자를 맡겨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윌리엄 밀러는 특이능력자를 양산할 수 있는 기업을 아버지가 직접 운영하지않고 자신에게 맡긴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짐머 박사는 들끓는 원한을 속으로 삭혔다.
'1년이다. 1년만 웅크리면... 볼드윈 가문에 빼앗긴 가업을 되찾을 수 있다!'
밀러 테크놀로지 사의 배틀슈트 생산 4공장에선 세 사람이 각자 다른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
6시간 후, 장벽 서남부에 위치한 7번 엘리베이터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공터.
- 소형핵융합로 CFR-101 4,000 대
- 세이지 크리스탈 4,000 개
- 1 그램 단위로 소포장한 진은 4천 개
- 오리하르콘 571 큐브
.
.
.
- 시체보관실에 입고 완료했습니다.
에어로트럭이 정차하는 순간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을 총괄하는 제니퍼가 정신파를 사용해 보고해왔다.
'곧바로 워슈트를 생산하려면 정비실을 좀 비워야겠는데?'
백골산에 쌓인 카라페이스의 뼈와 갑각을 남김없이 담느라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 대부분이 꽉 차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 작업 공간을 마련하려면... 카라페이스의 뼈를 시체보관실로 옮겨야할 것 같습니다.
시체보관실에도 카라페이스의 뼈가 쌓여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시체보관실에 먼저 쌓아놨던 2레벨 좀비 스프린터의 시체를 워리어들이 포식한 결과, 여유공간이 생겼다.
'정비실에서 워슈트를 만들고 기체보관실로 이동시키려면 고생 좀 하겠군.'
- 30분 안에 완료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워슈트를 만들기 시작하면 뼈무덤은 금방 소모할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고생하자.'
내가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 안에서 고생할 언데드들에게 격려한 순간이었다.
- 단장님 인원보고 올려도 되겠습니까?
내 에어로트럭 앞으로 다가온 1팀장 휴고 가르시아가 전술 통신망을 통해 물었다.
"그러지."
- 총원 8,077명
- 열외 206명
- 현재인원 7,871명
- 운용차량 에어로트럭 401대 이상입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흠집투성이인 에어로트럭들이 보였다.
이번에 남은 1910억 크레딧을 탈탈 털어서 산 중고 에어로트럭들이었다.
용병들이 지금까지 운용했던 에어로트럭은 밀러쉴더스 소유였다.
당연히 밀러쉴더스를 나오면서 에어로트럭은 모두 반납하고 나와야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아서용병단은 천 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해야하는 '멸망한 도시 크라노야 섬멸작전'을 맡았다.
7천 명이 넘는 용병들을 걸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우리가 내려가는 속도보다 소드테일들이 팔미라로 진격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게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디스트로이어의 머리를 하나쯤 더 팔 걸 그랬나?'
내가 두 개 남은 디스트로이어 머리의 사용처에 대해 고민하는데, 게릭슨이 정신파를 보내왔다.
- 주군, 데스윙과 샤를이 블랙마켓 쪽으로 빠졌으니, 암셀학파에 맡겨둔 듀얼 탤런트들이라도 데려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게릭슨은 우리의 전력이 약해진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엘리엇 암셀이 맡고 있는 아홉 명의 듀얼 탤런트들은 따로 쓸 곳이 정해져 있었다.
'듀얼 탤런트는 네크로맨서 학회에서 공개해야지.'
네크로맨서 학회에 참가한 고위급 네크로맨서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줄수록 암셀학파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면 여러 네크로맨서 학파와 교류해서 더 훌륭한 주문을 물어올 수 있을 것이다.
- 아! 주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또 뭔가 걸리는 게 있나?'
- 용병들을 데리고 가시면 사령술을 쓰기가 곤란하실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워리어 3천 기면 이 자들을 데리고가지 않아도 소드테일 정도는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언데드만 운용하면 그 실력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팔미라 시의 권력자들에게 내가 리치급의 네크로맨서라는 걸 공개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강화시술을 통해 강화인간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팔미라 시의 네크로맨서들은 귀족들에게 견제를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수천 기의 워리어를 운용한다는 사실이 공개된다면?
'제대로 날개도 펴보기 전에 견제를 받아선 곤란해.'
- 사령술을 사용하는 모습을 들키더라도 생판 모르는 남들에게 들키는 것보다는... 신체복원이나 배틀슈트 정비 같은 방법으로 은혜를 베풀어놓은 휘하 용병들에게 들키는 게 낫긴 할 것 같아요.
그때 제니퍼가 정신파를 보내왔다.
- 그렇겠군요. 주군께서 거기까지 내다보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 두려워할 것 없다. 지금부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질 일만 남았으니까.'
난 부하들을 안심시킨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 5층 정비실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30미터 높이의 정비실을 가득 채운 뼈무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정비실 구석엔 워슈트 제작에 필요한 소형핵융합로와 세이지 크리스탈 등의 재료가 정리된 작업실이 조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