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카닉 x 네크로맨서-141화 (141/152)

141화. 짐머 박사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내가 일어난 순간, 엘리엇 암셀이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할 말이 남았습니까?" 

"그제, 암셀학파가 정식으로 네크로맨서 정기학회에 초대되었습니다." 

"정기학회?" 

내가 묻자, 엘리엇 암셀이 양손을 공손히 모은 채 대답했다. 

"1년에 두 번 씩 열리는 학회로 C 구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네크로맨서 학파가 참석합니다." 

난 일전에 엘리엇 암셀에게 네크로맨서 4대 학파 중 하나인 브라운 학파에서 스켈레톤 자이언트 소환주문을 구해오라고 지시한 바 있었다. 

'8미터 크기의 해골을 장악할 정도의 마법식이라면 분명 배울 점이 있겠지.' 

난 소드테일 변이종의 사체를 얻었다. 

스켈레톤 자이언트 소환주문은 인간보다 훨씬 큰 시체를 지배하는 사령술이었다. 

그 주문이라면 변이종의 사체와 게릭슨의 영혼을 이어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켈레톤 자이언트 주문, 이번에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전면에 나선다면 돈이 필요하겠지만, 학파장님께서 나서 직접 나서신다면... 아무리 브라운 학파라도 그쪽에서 먼저 숙이고 들어와야하지 않겠습니까?" 

엘리엇 암셀은 내 뒤에 거치된 기간트 사이클롭스에 한번 시선을 주더니 그렇게 물었다.

"그럼 시간을 한번 내봐야겠군요. 정기학회일은 언제쯤입니까?" 

"12일 남았습니다." 

이번 의뢰의 목적지인 항구도시 로렌까지는 에어로트럭으로 이동할 경우 도착하는데만 하루가 걸릴 예정이었다. 

네크로맨서 정기학회에 참석하려면 열흘 안에 괴물을 퇴치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그 안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내가 이번 괴물소탕 의뢰의 완수기간에 대해 걱정하는데, 시스템 메세지가 내 시야로 올라왔다. 

< 라이언 빈슨 용병협회장으로부터 이사회 참석요청이 도착했습니다. > 

"이사회?" 

< 총 8명의 이사 중 6명이 부재 중인 점을 감안해 화상회의로 진행할 계획이랍니다. > 

< 이사회 화상회의에 참석하시겠습니까? > 

"나가서 일들 보세요." 

난 화상회의에 앞서 부하들부터 연구실에서 내보냈다. 

세사르가 마지막으로 깍듯하게 묵례하더니 연구실을 나서자, 남은 건 제니퍼와 나뿐이었다. 

"참석하지." 

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내 앞에 일곱 개의 홀로그램 창이 띄워졌다. 

- 랭킹 1위 : 초토기사 라이언 빈슨 용병협회장 

- 랭킹 2위 :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 이사 

- 랭킹 3위 : 앤서니 듀이 이사 

- 랭킹 4위 : 조지프 크르나치 이사 

- 랭킹 5위 : 안드레아스 발데마르 이사 

- 랭킹 6위 : 리하르트 프리드릭 이사 

- 랭킹 7위 : 노버트 빈시 이사 

그때 라이언 빈슨 용병협회장이 말했다. 

- 다들 아서 이사와는 초면이지? 

- 난 일전에 동부사막에서 한번 본 적이 있어. 아서, 날 기억하나? 

짧은 금발의 사내, 미카엘 레오가 내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난 미카엘 레오 이사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난 과거 카라페이스의 뼈가 산처럼 쌓인 백골산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무어학파의 학파장 레이첼 무어와 그녀를 호위하는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를 만났었다. 

두 사람은 내가 만든 워슈트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는 특히 내가 앞으로 기간트 급 로봇을 만들길 바라는 눈치였었다. 

그때 용병협회장 라이언 빈슨이 내게 말했다. 

- 아서, 여기 앤서니나 조지프 같은 다른 이사들은 모두 쿼드 탤런트들이네. 

"쿼드 탤런트면 특이능력을 4가지나 발현했다는 뜻입니까?" 

- 그렇네. 3단계 강화시술 과정에서 특이능력을 한 가지라도 발현하면 랭커라고 부르는 건 자네도 알겠지? 

"랭커는 4단계 강화시술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데스윙이 살아생전 밀러 그룹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 네크로맨서들은 4단계 강화시술 과정에서 4가지 특이능력을 발현한 자들이 특히 5단계 강화시술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네. 

"다섯 분의 이사님들 모두 5단계 강화시술을 받으실 재목이란 뜻이군요?" 

- 나를 포함한 4대 기사들은 모두 4단계 강화시술에서 쿼드 탤런트였으니, 이들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중이네. 

난 그 말에서 라이언 빈슨 용병협회장의 속셈을 엿볼 수 있었다. 

이미 사대기사 중 둘이 네크로맨서 학회와 용병협회를 배반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사 다섯 명이 성공적으로 5단계 강화시술에 성공한다면? 

'이들이 귀족들과 맞설 비밀병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 

삼대가문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무력이 약한 네크로맨서와 용병협회에겐 더 많은 5단계 강화시술자가 필요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난 용병협회장의 속마음을 엿보면서도 그의 마음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건 새로 얻은 강화시술에 관한 정보 때문이었다. 

'4단계 강화시술에선 최대 4가지의 특이능력을 발현시킬 수 있다?' 

4단계 강화시술에 한번이라도 참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인 네크로맨서들의 한계가 쿼드 탤런트라고 나도 네 가지 특이능력만 발현시키리란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 용병협회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결과입니다. > 

< 위 다섯 이사는 [스콰이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 

< 이는 견습기사라는 뜻으로, 차기 다섯번째 기사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강화시술자들임을 의미합니다. > 

내가 시스템 메세지를 확인하는데, 라이언 빈슨 협회장이 말을 보탰다. 

- 다섯 사람 모두 외부전쟁에 투입되서 복귀가 어려우니, 이렇게라도 인사를 나누게. 

"처음 뵙겠습니다. 아서입니다." 

- 듀이 파이터스를 맡고 있는 앤서니 듀이입니다. 늦었지만 기간트 매입을 축하드립니다. 

- 크르나치 소드의 조지프입니다. 

- 발데마르 용병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안드레아스라고 합니다. 

- 프리드릭 쉴드를 이끌고 있는 리하르트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빈시 다이나믹스의 노버트입니다. 

다섯 스콰이어들은 모두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 듀이 파이터스 사는 용병단 랭킹 27위입니다. > 

< 크르나치 소드 사는 용병단 랭킹 30위입니다. > 

< 발데마르 용병단은 용병단 랭킹 31위입니다. > 

< 프리드릭 쉴드 사는 용병단 랭킹 32위 입니다. > 

< 빈시 다이나믹스 사는 용병단 랭킹 36위입니다. > 

시스템은 내게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줬다. 

'대기업에 속한 사냥기업도 아닐텐데, 용병단 랭킹 2,30위 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 [스콰이어] 다섯 사람 모두 3대 이상 용병업을 대물림해온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 

< 듀이 파이터스 사의 경우 무려 6대에 걸쳐서 용병업계에서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 

그 말은, 여기 모인 스콰이어들은 모두 용병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는 뜻이었다. 

'강화수저를 물고 태어나셨다?' 

내가 속으로 스콰이어들에 대한 평가를 재조정하는 순간이었다. 

- 나는 당장이라도 협회로 복귀가 가능한데, 지금 찾아가면 마리우스 2세 한번 태워줄 수 있나?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가 내게 물었다.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눈앞에 둔 6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표정이었다. 

- 미카엘, 그게 얼마짜린 줄 알고 태워달라는 건가? 

그때 용병협회장인 라이언 빈슨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따졌다. 

- 라이언, 난 너랑 다르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은 같은 사대기사라서 그런지 꽤 친해보였다. 

용병협회의 협회장이나 이사라는 직급에 구애받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가 말했다. 

- 너는 아서가 밀러쉴더스에서 독립해서 유명세를 떨친 후에 만났지? 난 그가 동부사막에서 모래 구덩이를 뒹굴 때부터 알던 사이다! 

그 말만 들으면 정말 나와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가 각별한 사이라고 오해할 법했다. 

'당시에 그가 4군단을 피할 길을 알려줬으니, 빚을 진 건 사실이다.' 

난 잠시 그를 기간트 사이클롭스에 태워줘야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라이언 빈슨 용병협회장이 물었다. 

- 그냥 스쳐지나가다 인사 한번 한 사이 아니야? 아서, 정말 저 자식하고 친한가? 기간트를 태워줄만큼? 

라이언 빈슨 협회장은 미카엘 레오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듯이 내게 물었다. 

"사실..." 

내가 대답하려는데 앤서니 듀이 이사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를 추궁했다. 

- 레오 이사님, 남의 기간트에 태워달라니 그게 할 소리입니까? 

그가 나서자 조지프 크르나치 이사까지 나서서 고개를 내저어보였다. 

- 다른 기간트워리어였으면 레일건부터 충전했을 겁니다. 

그러자 당황한 공간기사가 말했다. 

- 우, 우린 거의 친구라고!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파직! 하는 소음과 함께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의 화면이 검게 물들어버렸다. 

- 허, 허! 통신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 

라이언 빈슨 용병협회장은 연기가 어색했다. 

그가 공간기사 미카엘 레오의 통신을 강제로 끊어버린 것 같았다. 

- 난 자네가 언젠가는 명성을 떨칠 줄 알았네.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과찬이십니다." 

- 여기 모인 이사들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의지하도록 하게. 

난 그제야 용병협회장 라이언 빈슨이 갑자기 용병협회 이사회를 소집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간트워리어가 됐으니 이사로서 한몫 하라는 뜻인가?' 

그 동안 용병협회는 여러가지로 내 편의를 봐줘왔다. 

훈련장을 내 기간트 전용 연구실로 내주거나 소드테일 범람사태에서 전사한 용병들의 유가족을 상대할 때도 협회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내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사들을 소개해주며 서로 의지하라는 걸 보니, 이들을 도우라는 뜻 같았다. 

사실 그건 나도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차기 5단계 강화시술 대상으로 유력한 스콰이어들이었기 때문이다. 

'용병협회 이사로 이름을 올려놓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훌륭한 언데드 재료들이 굴러들어오는군.' 

난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무력이 필요하면 기간트워리어가 되어 도와드리고, 신체복원 같은 자질구레한 일이 필요하시면 블랙마켓에 잘 아는 업체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하하하! 듣던대로 아서 이사님은 배포가 대단하십니다! 

-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신체복원 비용을 360개월 할부로 해주는 업체가 있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사들은 앞다투어 칭찬과 질문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라이언 빈슨 용병협회장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맴돌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기분이 좋은 건 바로 나였다. 

'샤를 연구소가 미어터질지도 모르겠군.' 

*** 

그 시각, B-19 구역 밀러 테크놀로지 사의 배틀슈트 생산 4공장 32층. 

- D - 44 

홀로그램창을 통해 배양완료까지 남은 날짜를 바라보던 짐머 박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앞엔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투명한 튜브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양수 같이 투명한 액체와 어른 주먹 반만 한 태아가 담겨 있었다. 

그런 튜브가 32층의 천장부터 바닥까지 10개나 연결되어 있었다. 

문제는 축구장만큼이나 넓은 공장에 50센치미터 간격을 두고 그런 인체배양튜브가 끝도 없이 펼쳐져있다는 점이었다. 

그 수가 무려 7만 개에 달하는 인체배양튜브들이었다. 

그때 띠띠띠! 하는 높은 경고음과 함께 인체배양튜브 한 줄이 붉게 번쩍였다. 

- B32-13538 인체배양튜브의 산소포화도가 정상범위를 미달했습니다. 

- 빠른 점검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들린 순간이었다. 

천장에 설치된 레일을 타고 길다란 로봇팔이 다가와 문제가 발생한 인체배양튜브와 영양공급선을 점검했다. 

로봇팔은 순식간에 문제가 생긴 영양공급선을 교체했다. 

그 순간 경고음과 안내방송이 멈췄다. 

짐머 박사가 자동화 공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의 손목시계가 부웅! 하고 진동했다. 

- 윌리엄 밀러 대표 

직속상관인 윌리엄 밀러의 통신요청이었다. 

"숨어라." 

짐머 박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사사삭! 하고 바람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1미터 정도 되는 작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인체배양튜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짐머 박사는 소리가 멈춘 후에야 손목시계를 터치했다. 

그가 양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선 순간, 그 앞에 윌리엄 밀러의 상체가 홀로그램 영상으로 출력됐다. 

- 진행상황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순조롭게 배양 중입니다." 

- 성체 배양완료까지 얼마나 남았죠? 

"44일 남았습니다." 

짐머 박사가 대답한 순간, 윌리엄 밀러의 얼굴에 짜증이 일었다. 

- 지금 밀러쉴더스는 텅 비어있습니다. 용병업계에서 날 뭐라고 부르는지 압니까?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저런 자라다 만 애새끼가 아니라 당장 투입가능한 용병이란 말입니다! 

"그건 제 능력 밖입니다." 

짐머 박사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자, 윌리엄 밀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박사님은 우리 밀러 그룹의 핵심임원이 되시는 겁니다. 

윌리엄 밀러가 짐머 박사에게 미래를 약속한 순간이었다. 

- 자기야, 여기까지와서 일하기 있어? 

홀로그램 영상 너머에서 간드러지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그럼 통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통신은 윌리엄 밀러의 일방적인 통보를 끝으로 갑작스럽게 끊어졌다. 

윌리엄 밀러의 아버지인 밀러 테크놀로지 사의 대표 율리안 밀러는 아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방문한 날을 제외하곤 이 공장에 들린 적조차 없었다. 

'매번 입으로만 부와 명예를 약속하는 걸보니... 윌리엄 밀러의 혈관에도 귀족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군.' 

짐머 박사는 윌리엄 밀러의 행태가 익숙한지 화조차 내지 않았다. 

"쯧쯧!" 

그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자, 사방에서 사사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투명한 인체배양튜브 너머로 작은 인영들이 스쳐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짐머 박사는 본 척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때쯤이었다. 

그의 뒤에서 갑자기 찌직! 하는 소음이 들렸다. 

그 순간 짐머 박사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그러자 키가 1미터에도 못 미치는 남자아이들 수십 명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푸른 눈에 오똑한 코. 

밝은 금발에 뽀얀 피부. 

신기하게도 수십 명의 아이들은 머리카락부터 이목구비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심지어 피부 잡티까지 같은 자리에 나 있을 정도였다. 

"방금 쥐 잡아먹은 거, 누구지?" 

그가 묻자, 똑같이 생긴 수십 명의 아이들의 시선이 한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자 입에 붉은 핏방울을 묻힌 남자아이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가 배양실에선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고 했어, 안 했어?" 

"해, 했어요..." 

잔뜩 겁 먹은 아이는 옆에 선 친구 뒤로 제 몸을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키인 친구 뒤로 숨으려할 때마다 친구들이 물러나 짐머 박사가 볼 수 있도록 시야를 열어줬다. 

"배양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건 다행이지만... 식욕을 통제하지 못하는 건 문제로군." 

인체배양튜브를 통해 배아를 성인수준으로 성장시키려면 46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5일 정도만 배양해도 두살짜리 아이만큼 키울 수 있었다. 

문제는 실험노트를 스폰서인 율리안 밀러와 그의 아들 윌리엄 밀러에게 보여줬다는 점이었다. 

물론 실험노트는 짐머 가문의 혈족들에게만 전해지는 암호문으로 작성되어 두 사람은 실험노트를 보고도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46일이란 시간 동안 무한대에 가까운 지원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46일을 보낸다면? 

이 공장에서 생산한 특이능력자는 모두 밀러 그룹에 내어줘야했다. 

'놈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증조할아버지의 연구일지 속 속성배양법이 없었으면, 가문의 유산을 율리안 밀러에게 바칠 뻔했어.' 

두살박이 아이들은 쥐를 산 채로 뜯어먹자, 빠르게 성장했다. 

몇 시간만에 말문이 트이고 키가 몇센치씩 자라는 모습은 짐머 박사가 보기에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런 성장속도라면, 보름이면 성인 못지않게 클테지.' 

짐머 제네틱 사. 

그의 집안은 한 때, 생명공학 연구로 이름이 높았던 짐머 제네틱 사의 오너일가였다. 

사실 특이능력자 양산프로젝트 자체가 그의 가문에서 오래도록 연구해온 연구과제였던 것이다. 

그가 예상시나리오보다 빨리 아이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도 윌리엄 밀러에겐 보고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건 밀러 그룹이 아니라 나 아니, 우리 짐머 가문의 유산이다.' 

그는 특이능력자 양산프로젝트로 자신의 가문을 다시 일으켜세울 계획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 짐머 박사는 입가에 핏물이 묻은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칠칠치 못하게!" 

짐머 박사가 아이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주자, 아이가 그의 손에 묻은 핏물을 쫍! 하고 빨아먹었다. 

빠르게 자라는 만큼 대사활동도 왕성해져서 식욕이 폭발한 게 문제였다. 

"자, 내려가서 다 같이 쥐 잡아먹자." 

그는 곧바로 문과 벽이 모두 투명한 화물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3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을 태우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층, 한층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32층과 같은 배양실은 11층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10층부터는 키가 60센치미터 정도 되는 아이들이 쉴 새없이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먹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서 바닥이 가까워지저 그들이 잡아먹는 게 뭔지 한눈에 드러나버렸다. 

그건 하얀 실험쥐였다. 

"마, 맛있겠다!" 

"아빠, 배고파요!" 

말문이 트인 아이들은 짐머박사를 향해 배고픔을 토로했다. 

먹을 것을 보자마자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미취학아동 그 자체였다. 

*** 

다음 날, 용병협회 75층 기간트 전용 연구실.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그 순간 10미터 높이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제니퍼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회색머리 남자였다. 

"처음뵙겠습니다. 루비치 그룹 전략기획실 소속 티모시 패튼 차장입니다." 

그는 영화배우 같이 선명한 이목구비를 지닌 남자였다. 

"의뢰 관련 정보는 모두 받았습니다. 루비치 그룹 차원에서 제게 따로 당부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난 티모시 패튼 차장에게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내 기대 이상이었다. 

"기간트 운송에 도움을 드리고자 건쉽을 준비해왔습니다." 

"네? 뭐를 준비해왔다고요?" 

내가 되묻자 티모시 패튼 차장이 방화벽으로 가로막힌 창문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창문을 개방해주실 수 있습니까?" 

"창문 개방해!" 

내가 명령한 순간, 위잉! 하는 소음과 함께 창문을 가렸던 방화벽이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두겹의 두꺼운 유리창이 위아래 창틀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열리자 연구실 안으로 푸화아악! 하고 강풍이 불어닥쳤다. 

400미터 높이의 75층에서 창문을 열었으니, 거센 바람이 들어오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갑자기 국방색 비행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화기능을 해제한 것 같았다. 

모습을 드러낸 비행체는 4군단 참모장이 타고왔던 건쉽보다 더 크고 우람해보였다. 

"기간트와 골렘 등 대형 탑승형 로봇을 운송하기 위해 주문제작된 기체입니다!" 

티모시 패튼 차장은 바람소리를 이기기 위해 소리쳤다. 

"이거 팔미라 시 안에서 타고 다녀도 되는 겁니까?" 

"루비치 그룹 명의로 비행허가를 받았습니다. 물론, 기간트 마리우스 2세와 기간트워리어 아서님의 탑승사실도 보고를 끝냈습니다." 

의뢰를 맡았다고 건쉽까지 공수해서 모시러오다니, 그건 지금까지 내가 받았던 대우와는 차원이 다른 대접이었다. 

'기간트워리어들은 원래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건가?' 

난 전쟁용병과 일반용병의 차이가 얼마나 극명한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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