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위험등급 4.7
그대로 놔두면 혼령탑으로 빨려들어갈 영혼이었다.
하지만 난 이 놈이 흑연 크라켄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 순간 시스템 메세지가 올라왔다.
< 레어 등급 스킬 [영혼 감응]을 사용하셨습니다. >
그건 아치스를 아머드 소울리퍼로 만들기 전에 습득한 스킬이었다.
그때 흑연 크라켄의 영혼의 기억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건 높은 하늘에서 로렌 시를 내려다보는 시야였다.
섬뜩한 통증을 느끼고 돌아본 순간, 양손을 내게 펼친 기간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건 기간트 사이클롭스였다.
'이 놈이 맞았군.'
내가 놈의 기억까지 확인하고 놓아주자, 영혼수확 마법진과 연결된 검은 연기에 의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 [혼령탑]에 흑연 크라켄의 영혼을 수용했습니다. >
시스템은 내 왼쪽 시야에 혼령탑의 가장 큰 감옥에 가둔 흑연 크라켄의 영혼을 보여줬다.
***
- 시, 시장님! 60번 카메라에 마리우스 2세가 포착되었습니다!
"관련 영상 송출해!"
아드리안 시장이 명령한 순간이었다.
그의 정면에 30여 개의 화면이 펼쳐졌다.
로렌 시가 동쪽 절벽에 설치한 적외선카메라 화면들이었다.
수면을 뚫고 올라온 마리우스 2세는 빈손이었다.
"그, 그래. 이 야밤에 바다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것만해도 기적이야!"
아드리안 시장이 아서의 죽음이 불러올 정치적 파장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콕핏 우측으로 아드리안 시장의 막내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 동부방어군 사령관 루치아노 니카라 중장입니다. 마리우스 2세의 기간트워리어 아서 씨가 출입요청을 해왔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아드리안 시장은 잠시 고민했다.
배리어를 해제하면 다시 가동할 때까지 15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그 시간 동안 로렌 시가 무방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로렌 시가 크라켄 무리에게 공격당하는 것과 아서를 밖에 방치했다가 그가 사망하는 것에 대해 잠시 저울질 했다.
'크라켄 웨이브 정도가 아니라면 15분 정도는 버틸 수 있어.'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배리어 해제 후, 아서 씨가 들어오면 재가동한다. 각 군 사령관들, 동의절차 진행하도록!"
- 동부방어군 사령관, 동의합니다.
- 남부방어군 사령관, 동의합니다!
- 서부방어군...
네 명의 사령관이 연이어 동의한 순간이었다.
로렌 시 전체를 뒤덮은 회색 배리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회색 배리어가 사라지기까지는 고작 20여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 동부 장벽 위로 검은 바탕에 황동색으로 장식한 기간트가 내려섰다.
마리우스 2세였다.
"배리어를 재가동하라!"
해제할 때와는 달리 회색선이 장벽 위로 천천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드리안 시장이 정상적으로 재개되는 배리어를 보고 안심한 순간이었다.
- 시장님, 의뢰 완수했습니다.
마리우스 2세에서 이해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저 바닷 속에서 흑연 크라켄을 물리쳤다는 뜻입니까?"
- 이 놈이 흑연 크라켄입니다.
아서의 목소리와 함께 전술 통신망을 통해 실시간 영상이 수신되었다.
그건 크라켄 사체 수십 구와 유독 거대한 크라켄 한 구의 사체였다.
문제는 다른 크라켄보다 2배나 거대한 크라켄의 다리가 고작 6개뿐이란 점이었다.
"아서 씨, 흑연 크라켄의 다리가 왜 6개 뿐입니까?"
아드리안 시장은 곧바로 따지듯 묻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크라켄의 다리는 30개 수준이었다.
그보다 많거나 적은 경우는 있어도 10개도 안되는 다리를 가진 크라켄은 로렌 시에서 나고 자란 아드리안 시장조차 처음 봤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그 시각, 로렌 시 동쪽 장벽 앞 공터.
흑연 크라켄이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에 폐허처럼 변한 로렌 시 동쪽구역이었다.
난 장벽 앞 공터에 메카닉 네크로맨서의 무덤에서 꺼낸 일반 크라켄 사체 29구와 흑연 크라켄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로렌 시의 시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저 많은 크라켄을 마리우스 2세 혼자 잡아온 거야?"
"이 밤에 크라켄을 사냥하는 게... 가능한 일이었어?"
"부, 분명... 크라켄은 야행성이라 밤에 바다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라고 배웠는데?"
주춤거리며 모여든 로렌 시 시만들이 불신과 경악어린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후우우웅! 하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이지러지더니 U자형태의 국방색 건쉽 한 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팔미라 시부터 로렌 시까지 내가 타고온 베넷에어 사의 하이브리드 건쉽 HG-207 모델이었다.
그때 공터에 착륙한 건쉽에서 루비치 그룹의 티모시 패튼 차장이 달려나왔다.
그는 내가 꺼내놓은 크라켄들 중 정확히 흑연 크라켄을 보고 할말이 있는지 한참을 입을 뻥긋거렸다.
그리곤 사이클롭스을 올려다보며 내게 물었다.
"이, 이게 정말 흑연 크라켄입니까?"
난 곧장 콕핏을 개방한 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본사에서 위험등급 4.7로 평가받은 개체인데... 왜 다리가 여섯 개뿐입니까?"
그는 내 대답을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듯 내게 따져물었다.
"티모시, 설마 다리가 적다는 이유로 가격을 후려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때 어느새 벌떼처럼 모여든 시민들을 뚫고 들어온 마틴 쇼네어 경찰청장이 패튼 차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청장님! 크라켄은 다리 수로 값을 매기는 걸, 청장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이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티모시 패튼 차장은 경찰청장과 내 눈을 마주치더니, 어떤 호응도 받지 못하자 시민들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문제는 벌써 천 명 이상 모여든 로렌 시민들 중 그의 주장에 반발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다리가 적으면 제 값을 받지 못한다는 게 상식은 상식인가보군.'
난 속으로 새로 얻은 정보를 기억했다.
그때 패튼 차장의 말을 듣고 발끈한 경찰청장이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티모시, 저 놈은 특이능력을 발현해 혼자 로렌 시 전체를 압도하던 괴물이었소! 그런 괴물의 사체를 단지 다리가 적다고 가격을 후려칠 생각이라면 입도 뻥끗하지 마시오!"
마틴 쇼네어 경찰청장은 흑연 크라켄을 보며 고개를 내젓는 티모시 패튼 차장에게 고함을 쳐댔다.
그때 후우우웅! 하는 부스터음과 함께 동쪽 장벽 앞 공터에 기간트 한 기가 착륙했다.
그건 머리는 염소, 상체는 표범, 하체는 뱀인데다 등엔 날개까지 단 기괴한 형태의 기간트였다.
'프랑켄슈타인과는 달리 각 파츠의 규격이 통일된 걸 보면... 설계단계부터 저렇게 만들어진 모양이군.'
내가 그 기괴한 형태에 놀라는데, 기간트 키메라의 눈이 푸른 빛으로 번뜩였다.
그 순간 기간트 키메라 앞 5미터 부근에 어두운 색의 배틀슈트 한 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검고 회색인 장갑이 뒤섞인 가운데, 가슴 중심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배틀슈트였다.
난 그 모습을 보자마자 열려있던 콕핏에서 뛰어내렸다.
'이렇게 허술한 도시라면...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에 맹약이 걸려있지 않을지도 몰라.'
내가 입은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는 사실 짜집기 버전이었다.
데스윙의 커맨더급 배틀슈트에선 초소형마력로 7개를 연결하는 방법을 훔쳐배웠다.
그리고 바딤 하사의 형인 루이 바딤의 몸에선 캡틴급 초소형마력로의 설계도를 훔쳤다.
난 그 두 가지 개념을 더해 캡틴급 초소형마력로 7개를 연결해서 지금의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로렌 시의 시장인 아드리안 니카라 시장이 입은 배틀슈트는 어떨까?
'데스윙의 배틀슈트처럼 꼼수를 써서 출력을 높힌 버전만 아니라면... 내 기술수준은 최소 두 걸음 이상 진보할 수 있다.'
아드리안 니카라 시장의 배틀슈트가 초소형마력로가 하나로 구성됐다면?
1천 스프린터파워(SP) 이상인 초소형마력로를 갖춰야 기간트워리어급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초소형마력로의 최대출력은 602 스프린터파워(SP)에 불과했다.
그 말은... 아드리안 니카라 시장의 배틀슈트 설계도를 얻으면 그 안에 장착된 최소 1천 스프린터파워 이상의 초소형마력로까지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난 두근대는 마음을 억누르며 아드리안 시장 앞에 멈춰섰다.
그러자 아드리안 시장이 헬멧부분을 해제했다.
그 순간 머리카락과 눈썹 그리고 콧수염은 짙은 갈색인데 턱수염은 하얀 백인 중년남성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물은 처음뵙는군요. 기간트 키메라의 기간트워리어 아드리안 니카라입니다."
아드리안 니카라는 로렌 시의 시장임에도 스스로를 기간트 키메라의 기간트워리어라고 소개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마틴 쇼네어 경찰청장이 한번 보여준 예식이었기에 따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간트 마리우스 2세의 기간트워리어 아서입니다."
내가 마주 인사하자, 아드리안 시장이 허리를 펴며 손을 내밀었다.
난 기간트워리어급 배틀슈트의 설계도를 얻을 생각을 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충격이 맞잡은 손에서 전해졌다.
< 레어 등급 스킬 [해킹]이 실패했습니다. >
내려다보니, 아드리안 시장의 검은 배틀슈트 손에 방패와 그 위에 씌워진 왕관 문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패엔 크라켄과 성탑이 그려져 있어서 로렌 시를 나타내는 문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아쉬움과 동시에 당황스러움을 느낀 순간이었다.
"허허, 이거 실례했습니다. 로렌 시의 맹약은 가끔 이렇게 말썽을 부리곤 합니다. 알자스 마법아카데미에 자문을 구한 상태지만...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드리안 시장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자스 마법 아카데미란 곳은 마법뿐만 아니라 맹약에 관한 전문가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 그렇군요."
난 당황한 마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그러자 아드리안 니카라 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로렌 시의 문양이 드러난 오른손을 등 뒤로 감추며 물었다.
"그럼 흑연 크라켄부터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아드리안 시장은 표정을 관리하며 티모시 패튼 차장과 마틴 쇼네어 경찰청장이 다투는 흑연 크라켄 앞으로 날 이끌었다.
"아서님, 이게 정말 흑연 크라켄이 맞습니까?"
"관련영상 보내드리겠습니다."
내가 대답한 순간, 시스템 메세지가 올라왔다.
< 사각형 수족관 입수 후의 영상을 아드리안 니카라 시장에게 송출하시겠습니까? >
'송출해.'
그 순간 아드리안 시장의 헬멧이 왼쪽 부분만 씌워졌다.
십여 초 후 아드리안 시장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흑연 크라켄을 판매한 돈으로 피해복구비용을 충당하려고 했는데, 참 곤란하게 됐군요."
그가 고개를 내저은 순간이었다.
"시장님, 원래 본사에서는 로렌 시를 공격하는 흑연 크라켄이 로렌 시를 공격하는 영상을 검토한 결과 이 흑연 크라켄은 125완 크라켄 수준의 마력기관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티모시 패튼 차장이 아드리안 시장 옆으로 다가와 굽신거리며 말했다.
"125완이 무슨뜻입니까?"
내가 묻자, 티모시 패튼 차장은 아드리안 시장의 눈치부터 살폈다.
아드리안 시장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본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흔히 우리가 다리라고 부르는 크라켄의 다리는 사실 팔입니다. 그리고 저 크라켄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크라켄은 30개의 팔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알려졌습니다."
티모시 패튼 차장은 29구의 일반 크라켄의 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