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제 슬슬 나가 봐야겠어. 칼브란, 채비해 줘.”
욕실을 나온 이안은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칼브란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칼브란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오늘도 연무장에 가시려는 겁니까?”
“어.”
“겨울 초입이라 벌써 바람이 맵습니다. 오늘은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방한 술식이 걸린 코트까지 챙겨 주면서 걱정은.”
이안은 자신의 의사를 부드럽게 전달했다.
한데 태도만큼은 무른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가겠다 싶을 만큼 단호했다.
그러나 고집이라면 칼브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렇긴 하나……. 고열에 시달리다 자리 털고 일어난 지 이제 일주일째입니다. 하여 주치의도 외출을 삼가야 한다고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다소 과보호지만 칼브란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1년 중 9달은 침대에 누워서 생활했으니까.
여름엔 습해서, 겨울엔 추워서.
남들에겐 지장이 없을 사소한 이유로 병치레가 잦았다.
<마력핵이 없는 몸이라 생기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이안이 태어나고 일주일 뒤, 주치의가 내린 진단이었다.
마력을 생성하는 원천인 마력핵.
그것이 없다 한들, 그는 뷔트시겐 가의 후계자가 아니던가.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마력이 없으니 검술을 배워보려고 했더랬다.
‘물론 훈련 5분 만에 중단되었지만.’
목검을 쥐고 휘두른 그의 양팔이 팅팅 부어올라서였다.
까딱했다간 영영 팔을 못 쓰게 될 뻔했다는 주치의의 진단.
그것을 듣고 아버지께서 얼마나 황당해하셨던가.
누군가의 예상보다 더, 그의 몸은 유리 몸이었던 거다.
이게 이안이 다섯 살 때 있었던 일이었다.
그때부턴 그저 모두가 그가 살아 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험험. 아무래도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칼브란은 뜻을 꺾지 않겠단 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자도 안 물어 갈 똥고집.
아버지도 못 말리는 쇠심줄의 대가다웠다.
이안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빙긋 웃음을 내보였다.
“칼브란, 내가 태어났을 때 주치의가 한 말 기억해?”
“……석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 했습니다.”
“그럼 내가 석 달을 넘기니까 또 뭐라고 했지?”
“다섯 해가 고비라고 했지요.”
“다섯을 넘기니까 이후엔?”
“열 살까지는 무리일 거라 했습니다.”
“근데 난 올해 열다섯이고, 지금까지 말짱하게 살아 있잖아.”
그리고 하나 더.
“앞으로 주치의가 뭐라 하든, 적어도 난 서른까진 살아. 그러니까 너무 극성부리지 마.”
“엉터리 같습니다.”
“하하. 못 믿겠으면 말고.”
이안은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들어 올렸다.
헐렁하게 보여도 타협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해서 칼브란은 자신이 져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이 칼브란, 도련님 고집을 어찌 말리겠습니까. 하나 저보고 극성이라 하셨으니, 그만큼 준비를 단단히 하겠습니다.”
칼브란은 비장하게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대체 뭘 하려고?
물어볼 새도 없이 그가 잽싸게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표정에서부터 전해지는 불길함만 물씬 남기고서 말이다.
의욕에 불타는 칼브란이 나간 후.
이안은 잠시 문 쪽을 보곤, 못 말린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절 자식처럼 키운 그의 친애를 어찌 모르랴.
그것을 알기에 뭐가 됐든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 * *
“따뜻하십니까, 도련님?”
“역시 유능한 집사다워. 준비가 너어어무 철저해.”
“과찬이십니다.”
칼브란의 겸양에 헛웃음을 터트린 이안은 자신의 몰골을 훑었다.
두툼한 코트로 인해 숫제 곰탱이가 되어 있었다.
이대론 얼마든지 연무장까지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아까 칼브란의 표정이 얄궂더라니.
그를 말리지 못한 대가로 얻은 것은 뒤뚱거림뿐이었다.
포식한 곰처럼 걸으며 홀의 중간에 다다랐을 즈음.
“커어억!”
돼지 멱따는 소리가 홀 전체에 장렬하게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지 싶어 이안은 털에 파묻힌 모가지를 힘겹게 돌렸다.
홀에서 응접실로 가는 3시 방향.
요리사인 한스가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오, 한스!”
한스를 발견하자마자 이안은 반가운 마음을 한껏 담아 손을 흔들었다.
지난 생, 물자 보급 부대 총책임자였던 한스.
한스의 부대는 식량이나, 마도구, 밀서 등을 전장 곳곳으로 실어 날랐다.
그가 세운 작전에 따라.
‘원활한 보급’은 전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지 않던가.
그래서 그와 한스는 종일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친밀한 사이였던 것.
그 시절의 감정이 아직 이어지고 있는 이안은 살가움을 드러냈다.
“어제저녁에 먹은 부야베스가 맛있…….”
하지만 그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한스가 경기를 일으키며 귀를 막고 도망가 버렸으니까.
“도련님이 나한테…… 또, 말을 거셨어. 일주일에 열 마디도 안 하시던 분이, 나한테마아아안!”
그는 도망가는 와중에도 한탄 섞인 절규를 길게 남겼다.
‘또’다.
며칠째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한스로 인해 이안은 통상 서른세 번째 한숨을 쉬었다.
아니다.
서른네 번째였던가, 서른다섯 번째였던가?
하도 한숨을 쉬어 댔더니 세다가 까먹어 버렸다.
이게 다, 그가 말만 걸면 경기 일으키는 사용인들 덕분이었다.
조금 전 한스처럼.
한스가 도망간 방향을 응시하며 이안은 고개를 모로 꼬았다.
지난 생의 30년 치 기억을 간직한 그.
그와 달리, 모가 났었던 그의 15년 치의 기억만을 가진 가문 사람들.
이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괜스레 섭섭해지게.
“어째 내가 입만 열면 하나같이 반응이 똑같네.”
“원체 표현을 안 하시던 분이 갑자기 살갑게 구시니, 당황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냥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
“후훗. 그 몇 마디가 사용인들에겐 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을 테지요.”
그런가?
이안이 찌푸린 눈썹머리를 내려트렸다.
저런 식으로 눈썹을 휜다는 건, 도련님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곡선을 보며 칼브란은 며칠 전 일을 되새겨 보았다.
<오, 한스. 로스트비프가 맛있었어. 육즙이 씹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게……. 크으. 역시 최고의 요리사야.>
도련님이 주방을 지나다 총괄 요리사인 한스를 칭찬했다.
발끝에서부터 끌어 올린 도련님의 진심이었는데, 그 결과가 어땠더라?
<뭐지? 뭐가 문제지? 도련님께서 내 요리가 맘에 안 드셔서…… 돌려 까신 건가? 일절 칭찬이라곤 안 하시던 분이…… 아니지, 요리를 항상 새 모이만큼 드시던 분이 갑자기? 육즙이 어쩌고저쩌고 평을 하신다고? 대체 뭐가 맘에 안 드시는 걸까?>
아낌없는 칭찬 세례에 도리어 한스의 정신이 나가 버렸다.
오점 없던 요리사 인생 33년.
스튜가 타는 것도 홀랑 잊어버리고, 그는 연신 같은 말만 반복했었다.
하긴.
한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련님이 어떤 분이시던가.
과묵하기론 제국에서 따를 자가 없고, 예민하기론 앙칼진 고양이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뿐일까.
말투마저 탁탁 끊는 버릇이 있으셔서, 싹퉁머리 없단 말을 많이 들으셨다.
누군가에게 하는 칭찬?
결단코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었다.
한데…….
도련님이 변하셨다.
정확히는, 고열로 사흘을 호되게 앓고 일어나신 뒤부터 그랬다.
부쩍 다정한 말을 하며 속내를 표현하신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칭찬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라’고 엉뚱한 덕담까지 건네며.
사람이 이리 단시간에 변할 수 있을까?
“칼브란.”
이안의 부름에 칼브란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겼다.
“……예?”
“나 대신 한스한테 전해 줘. 진짜 맛있어서 한 말이니 오해하지 말라고.”
“예, 알겠습니다. 제가 도련님의 마음을 한껏 담아 전하겠습니다.”
“좀 과장해도 돼.”
“하하핫. 도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이 칼브란, 요 혓바닥에 쥐가 날 정도로 잘 놀려 봐야겠습니다. 한스가 도련님만 보면 끔뻑 죽도록!”
칼브란이 너스레를 부산스럽게 떨어 댔다.
이안은 눈가의 주름마저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래서 회귀했다는 게 잘 실감 나지 않았던 걸지도.
지척에 항상 붙어 있는 사람이 과거나 현재나 매양 똑같아서.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어딘가 묵직해졌다.
하지만 궁상떨기 싫어 이안은 재게 발을 놀렸다.
서둔 만큼 금방이었다.
십자 형태의 정원 한복판이 보이자 그는 우뚝 멈춰 섰다.
앞쪽으로 쭉 갈 시 정문이 나오고, 정문엔 워프 게이트가 있다.
칼브란이 가야 할 곳.
반면 십자로의 오른쪽 길로 가면 연무장이 나온다.
그곳은 이안의 목적지였다.
“이제 찢어져야겠네. 아버지가 내린 명을 수행하러 가야 하잖아.”
“예. 저도 도련님 곁에 있고 싶지만 이 칼브란, 워낙 유능하니 어쩌겠습니까. 가주님마저, 제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시니.”
“아무렴. 고급 인력인 우리 집사장님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시지.”
“능청이 부쩍 느셨습니다.”
“칼브란만 할까.”
이안은 목청껏 웃어 젖혔다.
청명한 웃음이 찬 서리 내린 공기에 녹아들며 정원을 울렸다.
산뜻하지만 다소 묵직하게.
불과 일주일 전.
이곳을 채우는 소리는 생이 으스러지는 비명뿐이었다.
아니면 불길이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절망뿐이거나.
두 가지가 지워진 현재는 참으로 평화로웠다.
이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이안은 눈가를 접으며 칼브란의 코트를 여며 주었다.
“여하튼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
“예. 그럼 속히 다녀오겠습니다. 날씨가 추우니 연무장에 오래 계시진 마십시오.”
“아이고, 요 잔소리마저 다시 돌아와 들으니 반갑네.”
그의 영문 모를 소리에 칼브란은 물음표를 띄웠다.
답을 해 주는 대신 이안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 게 있어. 이젠 그만 가. 작별 인사가 너무 긴 건 별로니까.”
* * *
칼브란과 헤어진 후, 이안의 뒤뚱거림은 연무장까지 이어졌다.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덥히고 있었다.
‘아침을 먹기 직전까진 수련 시간이었지?’
예전에는 단 한 번도 들르지 않았던 곳이었다.
마력핵이 없는 그와 달리 마력핵을 가진 자들이 흘리는 생기.
그 찬란함을 마주 보면 질투로 추해져 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러고 싶지 않아 외면하던 곳이었는데.
‘어째 회귀하고 나선 가장 많이 들르는 장소가 되었네.’
그가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안은 먹색 동공을 빛내며 연무장을 휘 둘러보았다.
방계까지 포함해서 열 살 즈음의 아이들이 다수였다.
이안과 나이가 비슷한 열다섯 즈음의 소년, 소녀는 수십이었고.
옹기종기 모인 그들은 초롱초롱하게 앞쪽의 단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상 위.
불곰처럼 덩치가 육중한 서른 줄의 교관이 서 있었다.
이안이 만나려는 자였다.
그는 체격만큼 나직한 울림통으로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하급 정령사인 페이라조 1성 둘, 나오거라.”
교관의 말에 앳된 아이 두 명이 씩씩하게 일어섰다.
다음.
“페이라조 3성 나오거라.”
열다섯 살로 보이는 소년 한 명이 대련장으로 들어섰다.
다소 자신만만한 기색이었다.
하급에서도 가장 낮은 단계인 1성을 상대하려니 그럴밖에.
“지금부터 2 대 1로 대련을 할 것이다. 우선 대련에 앞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서로 맹세의 인사.”
교관의 명령에 따라 대련자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끝난 뒤.
교관은 페이라조 1성인 아이들을 바라보며 첨언했다.
“이번 대련을 통해 너희 1성들은 나아갈 방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상대인 3성이 쓰는 기술을 똑똑히 봐 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