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4화 (4/214)

제4화

이안이 연무장에 있던 그 시각.

‘……늙은 너구리가 집요하긴.’

가주는 코트의 먼지를 털 새도 없이 집무실에서 선객을 맞이했다.

굳게 다문 입매에 꼬장꼬장함이 맺혀 있는 노인.

“며칠 전에 가주께 드린 청은 생각해 보셨소?”

2장로는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가주에게 쏘아붙였다.

“이젠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2장로님, 며칠 전에 답한 그대로 내 결정엔 변함이 없습니다.”

“허어. 진정 가주직을 반편이에게 물려줄 심산입니까?”

반편이.

이안을 모욕할 때 쓰이는 단어 중 하나였다.

본디 성정이 직설적인 2장로라도 선을 넘은 발언이었다.

미간을 구긴 가주는 단추를 뜯듯이 코트를 벗었다.

“반편이라……. 2장로님, 대화의 목적을 제대로 정해 주셔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를 모욕할 심산인지, 뷔트시겐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심산인지.”

“응당 뷔트시겐 가의 미래에 대해서…….”

“하면. 반편이니, 뭐니 그런 모욕적인 언사는 삼가 주시겠습니까. 빤히 아비 앞에서 아들을 모욕하는 건 시비를 걸겠다는 것이지, 대화를 나누겠다는 뜻이 될 수는 없을 터이니.”

“허허허. 이 늙은이의 아둔함을 가주께서 통렬하게 꼬집는군요.”

“그저 요청일 뿐입니다, 2장로님.”

“으음. 알겠소이다. 불필요한 언쟁은 하고 싶지 않으니, 내 앞으론 언사를 조심하겠소.”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가는 말은 정중했다.

말만.

정작 눈빛엔 날이 바짝 서, 뭐든 베어버릴 것 같았다.

누구 하나 물러섬이 없는 팽팽한 대치 상태.

날카로운 기 싸움은 얼마간 이어졌다.

그러다 2장로가 먼저 눈가에 힘을 풀며 운을 뗐다.

이런 신경전은 불필요하다는 듯이 소파에 몸을 여유롭게 기댄 채였다.

“여하튼. 가주께서 용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후계자 건에 대해선, 아직 시간이 남지 않았습니까. 이안의 성인식은 2년 후니.”

“그랬지요. 열일곱까지 두고 보자던 약조, 저 또한 기억하고 있소이다. 마력이 미약한 자라도 잠재된 능력이 드러나는 마지노선이니.”

“잘 알고 계신 듯하니, 이만 얘기를 끝내도 되겠군요.”

가주는 준엄한 표정으로 2장로를 직시했다.

명백한 축객령.

그의 기세를 읽었으면서도 2장로는 요지부동이었다.

“허허. 그렇다 하나 가주께서 잊으신 듯하오. 열일곱까지 두고 봤었던 약한 것들도, 마력핵은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그가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이었다.

이안에게는 마력핵이 없다는 것.

그 약점을 놓치지 않고 그는 제 의사를 밀어붙였다.

“능력 출중한 싹들이 뷔트시겐에는 아주 많습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를 후계자로 내정하길, 원로원의 한 사람으로서 간청드리겠소.”

“흐음. 형평성에 어긋난 간청인 것 같습니다.”

“아들을 밀어내야 하니, 가주의 성에 차지 않을 것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나, 뷔트시겐의 미래를 위해 상량해 주길 바라오.”

자신의 의견이 충언임을 확신하는 2장로의 태도.

여느 때라면 그의 고집을 충분히 헤아려 보았을 것이다.

여느 때라면.

하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이 주제의 핵심은 후계가 아닌, 이안의 거취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가주의 눈빛은 차분한 듯 차가워졌다.

“미래라……. 2장로.”

“……예, 가주.”

“후계자 자리를 박탈하면 이안은 본가를 떠나야 합니다.”

“그 규칙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소.”

뷔트시겐에는 절대 규칙이 있다.

현 가주나 원로원이 바꾸지 못하는 단 하나의 규칙.

‘가주와 후계자를 제외한 방계 혈족은 본가에서 살 수 없다.’

혈족 간에 서로 해치는 걸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래서 대개는 열일곱, 성인식을 치른 뒤 분가했다.

방계의 어느 가문을 영역으로 삼아서.

“한데 이안에겐 녀석을 지지하는 방계가 없습니다. 하여 오롯이 그 녀석 힘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건…….”

“무리에서 떨어진 약한 물소는, 하이에나 떼들의 맛 좋은 ‘먹잇감’이 되겠지요.”

“…….”

“그때가 되면. 일족 대신 아들을 택하는 아비가 되느냐, 아들을 버리는 비정한 가주가 되느냐, 선택해야 하는 건 나의 몫입니다. 2장로의 몫이 아니라.”

무거운 침묵이 집무실에 감돌았다.

입을 꾹 다무는 2장로에게서 서늘하게 고개를 돌린 가주는 그의 의견을 일축했다.

“하니 2년. 2년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닐 테니.”

* * *

연무장에서 돌아오는 길.

이안은 본관의 5층, 나선 계단의 끄트머리에 섰다.

5층.

집무실을 포함해서 서재, 침실 등이 있는 아버지의 공간이었다.

대대로 뷔트시겐 가에 충성해 온 가신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

이곳에 출입할 수 있냐, 없냐는 꽤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가주의 신임을 받고 있냐, 없냐를 가늠할 수 있는.

이것은 또, 중임을 맡길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자부심과 영광이 아로새겨진 선망의 장소.

하여 역사에 자취를 남길 이야기는 대개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아주 은밀하고 조용하게.

그러니까 요는, 5층이 뷔트시겐 가의 상징이라는 거다.

‘그래서 살리카가 여기를 가장 먼저 부쉈지.’

이안은 검은 대리석 벽을 쓸며 복도를 느릿하게 지나쳤다.

예전과 달리, 여전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공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무지근해져 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던 찰나.

흩어진 그의 숨결 끝으로 누군가가 교묘히 걸려들었다.

……2장로.

‘오늘도 후계자 건으로 찾아온 건가?’

2장로는 틈만 나면 아버지에게 후계자 교체를 건의했다.

그의 의도야 명백했다.

제 기준에 들어찬 아이를 후계자로 낙점하기 위함이었다.

어찌나 끈질기게 아버지를 들들 볶는지.

2장로가 찾아온 날이면, 아버지의 눈 밑이 전에 없이 시커메졌다.

“…….”

이안이 빤히 직시하자 2장로 또한 맞받아쳤다.

온기 한 점 없이 서늘한 뱀의 눈빛.

무생물 보는 듯한 건조함에도 이안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피하지 않으니, 쭉 찢어진 2장로의 동공에 이채가 어렸다.

아마 그의 행동이 예전과 달라서 일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2장로만 보면 식인귀라도 본 양 도망 다녔으니까.

이안은 여유가 묻어나는 웃음을 머금고 2장로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기세가 여전하십니다, 2장로님.”

“도련님은 못 본 사이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젊은이의 시간은 늙은이의 시간과 다르다더니.”

“에이, 늙다니요. 아직 현역에서 뛰시는 분이 엄살이 심하십니다.”

“허허허. 이런 ‘농’도 할 줄 알고.”

“제가 가진 재주가 많습니다.”

“이런! 아둔한 늙은이가 그동안 몰라봤습니다.”

허허실실인 2장로였지만 안광만은 빈틈이 없었다.

매서운 탐색을 이어 가다 그가 단조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이 늙은이를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보아, 할 말이 있으신가 봅니다.”

2장로는 후계자 건으로 그가 말을 걸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들어는 줄 테니 어디 말해 봐라, 라는 표정.

그 오만함에 이안은 볼이 패일 정도로 진한 웃음을 내보였다.

“할 말이야 있지요.”

“‘그 할 말’, 이미 가주께 다 들은 듯합니다. 후계 건으로 변명할 요량이시면…….”

“이런. 2장로께서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해요?”

“전 단지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2장로님의 노고에 대해.”

“…….”

“아버지께서 적적하실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 댓바람마다 찾아오시지 않습니까.”

“허허. 도련님의 말에 가시가 그득하구려.”

2장로는 동글한 이안의 입매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항시 우물쭈물하더니 웬일로 태도가 미끄덩했다.

이리 대놓고 유들유들하게 굴 줄이야.

변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건 숫제 다른 사람이었다.

어쩌다 겁 많은 고양이가 이리 변했을까.

호기심이 인 2장로는 더 말을 붙여 보려 했다.

맞붙은 그의 입이 재게 벌어지려던 차, 이안이 먼저 운을 뗐다.

“이런. 제가 2장로님을 너-무 오래 붙잡았군요.”

“한가한 늙은이라 오늘은, 도련님과 말을 나눌…….”

“제가 마력은 없어도 ‘눈치’만큼은 빤하답니다. 공사다망하신 듯하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안은 정중한 낯을 하고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뒤 세상 시원한 걸음을 선보이며 2장로를 지나쳤다.

단 한 발자국도 미적거리는 법이 없었다.

“…….”

홀로 덩그러니 복도에 남겨진 2장로.

그는 멀어지는 이안의 뒷모습을 관찰이라도 하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 * *

“오르니오는 잘 다녀오셨어요?”

이안은 중앙에 놓인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동작만큼 목소리 또한 잔잔했다.

산처럼 쌓인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최대한 집무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는 거였는데.

그의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항상 그랬다.

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대화를 할 적에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일이 잘 풀렸으니 잘 다녀온 셈이구나.”

“상단의 통행에 관해 조율이 순탄하게 끝나서 다행이에요.”

“이제 한시름 놓은 게지.”

“오르니오는 조용할 날이 없네요. 가뜩이나 살리카와 경계가 맞닿은 곳이라 분쟁이 끊이질 않는데.”

“그러니 더욱 신경 써야 하는 곳이지.”

“예. 천년 넘게 뷔트시겐 것이었는데, 능구렁이 같은 살리카에게 뺏길 순 없잖아요.”

대화는 매끄러웠다.

하지만 가주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이안이 먼저 제게 시선을 준 적이 있었던가?

일주일 전만 해도 없었다.

그간, 내향적이었던 녀석은 늘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대화가 짧든 길든 스침조차 없었다.

오죽하면 녀석의 동공이 어떤 빛깔인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일까.

한데 이젠 어느 때든 녀석의 먹색 동공을 볼 수 있다.

낯설고 생경한 상황.

가주는 갑자기 달라진 녀석의 태도에 솔직히 적응되질 않았다.

그런데 이 어색한 상황에 무언가를 보태려는 듯.

“그래도 섣불리 못 건드는 건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뷔트시겐은 아버지가 있는 한 끄떡없을 거예요.”

이안이 살가운 말을 술술 뱉어 냈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가주는 이상하게 뱃속이 간질거렸다.

“크흐흠.”

그는 목구멍이 상할 정도로 거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들의 ‘첫 칭찬’에 기뻐도 채신머리는 지켜야 하는 법.

짐짓 근엄한 몸짓을 꾸민 뒤, 그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나저나 이안, 며칠 전에 할 말이 있다 하지 않았더냐? 내가 오르니오 영지에 다녀온 후에 말이다.”

“아, 그거요?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에루리안으로 가려고 합니다.”

“……에루리안으로?”

“예.”

예상 밖의 말이 튀어나오자 가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딴 곳에 보낼 거면 차라리 날 죽이십시오!’란 녀석의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가기 싫다고 단식 투쟁까지 벌이더니…….”

“크음. 얼마 전까지 생떼를 썼던 것에 대해선,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저를 그곳으로 보낸 아버지의 뜻을 ‘그땐’ 헤아리지 못했어요. 필시 어떤 연유가 있어서 하신 일일 텐데.”

직계든 방계든 가문에서 버림받은 아이들만 간다는 에루리안.

그 사실 하나에 눈이 뒤집혀서 이안은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숨겨진 속뜻이라든가 하는.

<이안, 에루리안으로 가서 힘을 얻거라.>

솔직하게 말해, 그 ‘말의 의미’를 죽기 직전까지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회귀하고 나서야 완전히 깨닫게 된 거지.

“아버지 말씀대로, 힘을 얻기 위해 에루리안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안은 단호한 표정으로 한 자, 한 자 힘 있게 말을 토해 냈다.

억지로 보냈던 때와 달리, 제법 의젓하게 구는 모습에 흡족하신 걸까.

아버지의 눈매가 아까보다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냐? 기특하구나, 기특해.”

“아버지께 칭찬을 받았는데, 기쁘기보다 괜스레 찔리네요.”

“으응?”

“당연히 가야 하는 아카데미를 가는 것뿐인데, 기뻐하시니까요. 제가 참 못난 아들이었구나 싶어요.”

이안은 괜스레 멋쩍어져서 눈알을 한 바퀴 굴렸다.

지난 생에 못나게 군 만큼 아버지에게 잘하고 싶었다.

“별말을 다 한다. 크흠. 그나저나 방학이 끝나려면 여러 날이 남지 않았더냐. 그러니 이 아비와 낚시나 가지 않으련?”

“낚시요? 아버지랑 같이 가는 건데 저야 당연히 좋죠. 근데…….”

이안은 곤란하단 낯을 하고선 눈가 끝을 얇게 좁혔다.

미적거림이 역력했다.

당장 허락할 줄 알았던 녀석의 예상 밖의 반응에 가주는 은근슬쩍 되물었다.

“왜, 일정이 안 될 것 같으냐?”

“아, 그게……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 내일 당장 에루리안으로 가야 하거든요.”

“내일……? 이리 급작스레?”

“예. 내일부터 건국제가 시작되잖아요, 이퀴녹스가.”

“음……. 혹, 그날에 맞춰 가야 할 연유가 있는 것이냐.”

“예. 이퀴녹스 첫날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어떻게 된 게, 녀석이 가주인 자신보다 더 바빠 보였다.

같이 낚시하며 응어리졌을 아들의 속내를 들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녀석이 서두르는 듯해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단 속내를 내비칠 수도 없었고.

못내 아쉬워서 가주는 산처럼 쌓인 서류를 괜스레 뒤적거렸다.

“……알았다. 네가 불편함 없이 떠나도록 준비해 주마.”

“이왕, 준비해 주시는 김에 용돈도 넉넉히 넣어 주세요.”

“하하. 그러마.”

아버지의 경직된 미소가 약간 풀리는 듯했다.

그 낯을 들여다보며 이안은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이왕 잘해 드리자 결심한 거, 근심까지 덜어 드리면 좋지 않겠는가.

“아, 아버지.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이냐?”

“‘아게라’를 열어 주세요.”

“아게라? 회합에 참석하겠다는 것이냐?”

“예. 장로와 단주들을 만나 할 말이 있습니다.”

예측 불가한 이안의 행동에 가주는 지그시 녀석을 쳐다보았다.

표정부터 기색까지 어느 것 하나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 무언가를 작심했구나, 예감한 그는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아버지께서 후계자 건으로 근심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루리안으로 가기 전에 그 일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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