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5화 (5/214)

제5화

‘아게라’는 다음 날 점심이 되기 전에 열렸다.

언제나처럼 뷔트시겐 가의 대회의장에서.

족히 수천은 수용할 수 있는 너른 홀.

회의장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더 어수선했다.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 대니 그럴 수밖에.

“가주님의 입을 빌렸으나, 아게라는 도련님이 요청한 것이라 하더군.”

“들은 바론 그렇지만…… 대체 무슨 속셈이랍니까?”

“낸들 아오. 그동안 회합엔 한 번도 안 나오시던 분의 심중을.”

“거, 미련들 하긴. 후계자를 바꾸자는 2장로님의 건의 때문이지 않겠소.”

사십 초반의 남자가 홀이 떠나가라 목청껏 떠들어 댔다.

벌어진 입에서 튀는 침만큼 그는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같이 수군대던 단주들 또한 맞장구쳤다.

“그걸 몰라 묻는 게 아니잖소. 중론을 뒤집을 패가 도련님에겐 없을 터인데, 굳이 회합을 열 필요가 있느냔 것이지.”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뭐라도 해 보려는 걸 게요.”

“쯔읏. 마력핵도 없으면서……. 알아서 조용히 물러나면 좋을 것을.”

“그러게나 말이오. 끌어내리는 모양새는 취하고 싶지 않아 여태 기다린 것인데.”

“더 말해 뭣 하겠는가. 가주님 아들만 아니었다면 진즉 쫓겨났을 것도 모르고…….”

신나게 이죽거리던 남자는 말끝을 뭉뚱그릴 수밖에 없었다.

한 노인의 노성이 머리 위로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제 얼굴에 침 뱉는 아둔한 것들!”

기척도 없이 언제 오셨을까.

서슬 퍼런 노인, 아니 1장로의 기색에 단주들은 상체를 한껏 움츠렸다.

“……1장, 1장로님.”

“마력핵이 있든 없든, 도련님도 뷔트시겐이란 뿌리에서 자란 한 가지이다. 네놈들이 자란 그 뿌리.”

높낮이가 없는 묵직한 파동.

그 울림은 홀 구석구석까지 날카롭게 퍼져 나갔다.

이는 모두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으니.

“쯧쯧. 보듬지는 못할망정, 가주께서 내정한 후계자를 물색없이 헐뜯다니.”

1장로의 존재감에 압도당한 단주들은 점점 찌부러져 갔다.

하여 다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데.

“왜 어린 것들을 겁박하오, 1장로? 저놈들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번엔 2장로가 불쑥, 끼어들었다.

말의 알맹이는 필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나, 단주들 안색은 더 파래졌다.

두 장로가 ‘또’ 입씨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건 재앙이었다.

앙숙인 두 장로의 입씨름이 가져올 결과야 항상 빤했으니.

물건이든 사람이든 뭐라도 박살 나야 겨우 끝이 났다.

특히 후계자 건은 더욱 그랬다.

가주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자는 1장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는 2장로.

두 장로가 그 건으로 대립하다 얼마 전엔, 1장로가 가장 아끼는 정원이 초토화되었었다.

‘그게 열흘 전이니, 슬슬 터질 때가 됐지.’

불길함을 감지한 단주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말려들고 싶지 않단 명백한 의사 표시.

눈치 보는 것들을 일별한 1장로는 고개를 2장로에게로 돌렸다.

“틀리지 않았다? 가주께서 이미 결정을 내린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데도?”

“핵심을 잘못 짚으셨소, 1장로. 이 논쟁은 결국 힘이 있냐, 없냐에 관한 것이니.”

“상스럽게 힘만 따지긴. 자라지 못한 어린 가지 하나 품지 못하면서. ‘상생’을 모르는 강자의 논리는 폭력일 뿐이라네.”

“고고한 척하긴.”

“뭐라 했는가, 2장로!”

“늙어서 쭈그러든 게 아랫도리만은 아닌 모양이오. 귓구녕까지 막힌 걸 보면.”

“하여튼 네놈이 상스러운 게 어디 말뿐일까, 그놈의 심보도 똑같지.”

“뭐요?!”

“2장로의 신념을 모두에게 강요하지 말게나.”

비죽이는 1장로로 인해 2장로의 인내심이 툭 끊어져 버렸다.

제 분에 못 이겨, 급기야 그는 갓 잡은 생선처럼 파들거렸다.

“내 신념은 일족을 위한 것이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보시오! 그리 섬약한 자가 뷔트시겐 가주가 되면, 뷔트시겐의 미래가 어찌 될 것 같소?”

2장로는 조금도 1장로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쫄딱 망할 것이오, 쫄딱! 그땐 그 사태를 누가 책임진단 말이오?”

“선동질하기 쉽게 말을 참 극단적으로 하는군. 2장로가 그리 따지기 좋아하니 내 묻겠네. 지금 가문이 망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휘청이고 있는가?”

“본질을 흐리지 마시오, 1장로!”

“대답이나 해 보게.”

1장로의 종용에 2장로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뷔트시겐이 굳건하니 할 말이 없을 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1장로는 대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망해 가고 있다면 모를까,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왜 이리 가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가? 모시는 주군을 제대로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충심은 무슨.”

“1장로!”

“귓구녕 안 막혔으니 목청 좀 그만 높이게. 성질이 어찌 그리 지랄 맞을꼬. 가주께서 누차 말씀하시지 않았나. 도련님이 열일곱이 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그게 무에 그리 어렵다고. 기어이 아비가 아들을 내쳐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2장로는?”

의견 차이는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기어이 2장로가 1장로의 멱살을 잡아챌 것 같던 그 순간.

끼이익.

묵직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와 후계자인 이안, 두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이안에게로 집중되었다.

* * *

‘고래 떼 사이에 놓인 새우’, 너무도 적절한 비유였다.

회의장의 가장 안쪽에 앉아 있는 이안.

그와 마주 보는 형태로 자리한 뷔트시겐의 수뇌부들.

이안이 회의장을 훑을 때마다, 그들의 시선도 따갑게 들러붙었다.

노골적인 탐색.

은근한 무시와 아무런 기대가 없는 무관심.

어지간히 담이 세지 않으면 입도 못 뗄 분위기였다.

이 사이에서 이안은 부드러운 낯을 유지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먼저, ‘감사하단’ 말로 서두를 열고 싶습니다. 아게라가 저의 요청임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참석해 주셨으니.”

“그저, 지겹게 이어지는 논쟁이 끝날 기회를 마다치 않았을 뿐입니다.”

맨 앞줄의 2장로가 바로 맞받아쳤다.

네가 예뻐서 참석한 거 아니다, 란 속뜻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어찌 모를까.

본디 악의에 더 예민한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을.

살갗이 저릿해지는 공기는 흡사 가시 같았다.

그런데도 유려하게 접힌 이안의 눈꼬리는 여전했다.

“예. 저 또한 후계자에 대한 이 긴 논쟁을 끝내고자, 아게라를 요청했습니다.”

“흐음. 끝낸다, 라…….”

“저에 대한 우려와 불신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하문하십시오.”

“어찌하면, 단주 외 장로들께서 저를 후계자로 인정하시겠습니까.”

“거야 간단하지 않겠소. 압도적인 힘을 가지시면 됩니다. 지금의 가주님처럼.”

“진정 그것이면 되겠습니까?”

“무엇이 더 필요하겠소. 일족을 이끄는 수장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그것이라 생각하외다.”

2장로가 확고한 낯으로 단언하자, 이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도 어느 정도는 2장로의 신념에 동의한다.

힘이 곧 정의이고, 진리이며, 납득이라는.

지난 생에선 힘이 없어 무엇도 지키지 못했으니까.

2장로의 말에 절실히 공감했으나, 이안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그저 지난 일주일간 정리한 바를 차분한 어조로 끄집어낼 뿐.

“그럼,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호오? 도련님께서 많은 것을 준비한 것 같소이다.”

“저를 마땅치 않아 하는 분들을 설득하려면 응당 그리해야지요.”

“허허헛.”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헷갈리는 2장로 특유의 너털웃음.

호쾌함이 홀에 울리며 밀도 높던 공간의 이음새가 더 조여졌다.

그러자 깨질 듯 위태한 긴장이 넘실거렸다.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한데도 이안은 평정을 유지한 채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두 달 후, 에루리안에서 등급 측정이 있는 걸 아실 겁니다.”

“알다마다요. 정령사 협회에서 1년에 두 번 치르는 공식적인 일정 아닙니까.”

“그때, 반드시 모두가 수긍할 만한 성취를 보이겠습니다.”

“허허. 준비가 아니라 객기였나 봅니다. 마력핵도 없으신 분이 등급 측정이라니.”

2장로의 탄식에 맞춰, 회의장 안의 웅성거림이 몸집을 부풀렸다.

지금 등급 측정이라 한 거 맞냐.

후계자 자리를 뺏길까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거 아니냐.

다들 한마디씩 던지며 어이없어했다.

소란한 와중에도 이안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마력핵 없는 제가 가능성을 증명해 낸다면, 모두의 우려를 떨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남들보다 훨씬 늦된 성취…….”

2장로는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이 이상의 불필요한 언쟁을 피하려 이안은 그의 말꼬리를 잘랐다.

“2장로님. 제국에서 가장 성취가 빨랐던 정령사가 누구입니까.”

“당연히 가주님이지요. 다섯 살에 페이라조 2성을 단 것은 가주님뿐이셨으니.”

“그럼. 제가 아버지보다 빠른 성취를 이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 여태껏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겝니까?”

“예. 제 제안은 이렇습니다. 제가 그것을 해낼 시, 더는 후계자 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안의 제안에 2장로는 기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아무래도 된통 앓더니 머리에 이상이 생긴 성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들을 내뱉는단 말인가.

우스꽝스러운 장단에 더는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을 까닭이 없어 2장로는 차게 일어섰다.

그의 냉랭한 의사 표시에, 이안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두 달입니다. 두 달 안에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두 달?”

“제가 실패할 시, 2장로님이 미는 아이를 후계자로 내정해도 됩니다. 그땐, 어떤 불만도 제기하지 않고 뷔트시겐을 바로 떠나겠습니다.”

이안은 자신만만함을 끝까지 유지했다.

그 모습이 혼란을 가중시키며 모두의 머릿속을 꼬이도록 만들었다.

대체 뭘 믿고?

후계자 자리를 스스로 버리려는 건가?

아니면 숨겨 놓은 꼼수라도 있는 건가?

억측이 쏟아지는 가운데, 오롯이 가주만이 훔훔한 낯을 했다.

‘고래 떼 사이에서 기죽지 않는 녀석의 당돌함이란.’

마냥 기꺼워서 그의 마음은 뿌듯함으로 꽉 차올랐다.

확고한 믿음을 보이는 가주와 시종 당찬 이안을 번갈아 본 2장로는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핫.”

뭐가 재미있는지 혼자 웃던 그가 턱을 거칠게 문질렀다.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 손짓의 의미를 아는 이안은 2장로의 답변을 차분히 기다렸다.

“좋습니다. 도련님의 그 제안, 받아들이지요. 하나.”

“…….”

“내가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라, 솔직히 재미가 덜하군요.”

“재미는 없을지라도 앓던 이는 뽑히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때의 만족감을 키우기 위해, 이 늙은이가 ‘도련님의 제안’에 보상을 하나 걸고자 합니다.”

누구나 혹할 만한 것으로 말이지요!

“내 ‘텔로스’를 보상으로 내놓겠소이다. 도련님께서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뤄 낸다면.”

텔로스가 언급되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 웅성댔다.

텔로스.

손잡이부터 날의 끝까지 온통 새까만 검이다.

이 검이 특별한 건, 검에 정령이 깃들어도 감지가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과 결속한 정령의 속성을 감출 수 있다는 것.

이는 전력의 노출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장치이기에, 전투에 있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요건이 된다.

하여 텔로스는 2장로가 굉장히 아끼는 것이었다.

그 내력을 아는 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나달거리기 바빴다.

그걸 진짜로 내놓겠다고?

천금을 내놓을 테니 팔라던 상인들을 욕하며 내쫓던 2장로가 아니던가!

한데 이 시점에 그걸?

노골적인 호기심이 회의장을 휩쓸었다.

적나라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장로가 눈가를 접었다.

그 주름 사이사이엔 득의만만함이 스며 있었다.

“허허허. 솔직하게 말해, 도련님께 텔로스를 뺏길 일은 없을 것 같소이다.”

“방심하다간 이 판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2장로님.”

2장로의 장담에 이안 또한 눈꼬리를 접었다.

둘의 기 싸움을 지켜보며 단주들은 짠 것처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속내를 엉큼하게 숨긴 여우‘들’ 같다고.

‘2장로님은 원래 그런 분이니 그렇다 치고. 유약한 줄만 알았던 도련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을 줄이야.’

그동안 부러 숨기신 걸까?

원래 이런 분이셨는데 우리가 몰라본 건가?

회의장 안의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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