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아게라는 순조롭게 끝났다.
아버지가 시달리지 않을 유예 기간을 얻어낸 것으로 충분했다.
더는 망설이지 않고 이안은 즉시 뷔트시겐 가를 나섰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는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를 마주했다.
모든 것의 시작점인 곳.
‘……에루리안 아카데미.’
청색 지붕의 뾰족한 첨탑과 고깔 형태의 종탑.
그리고 세월의 풍화가 전혀 배어들지 않은 상앗빛 외벽.
정말 예전 그대로였다.
열다섯, 원치 않은 입학을 한 뒤 처음 본 모습 그대로.
이안은 석양에 물든 에루리안의 정경을 느릿하게 곱씹어 보았다.
<에루리안으로 가서 힘을 얻거라.>
지난 생, 아버지는 어떤 설명조차 없이 일방적인 통보를 해 왔다.
지독히 매몰찼고, 앞뒤의 맥락도 없어 그로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버지도 똑같구나. 쓸모가 없다고 날, 이딴 곳에 처박다니.’
배신감과 무력감.
그것들이 에루리안을 다니는 내내 그를 좀먹었었다.
풀 길 없는 심화에 사로잡혀선, 무작정 아버지를 원망했었는데…….
“아버지도 그 이상은 모르셨던 거지.”
“……예? 무엇을 말입니까?”
“아…….”
호위로 따라온 칼브란의 물음에 이안은 뒷덜미를 문질렀다.
상념에 너무 깊숙이 매몰되었던 모양이다.
혼잣말이 불쑥 튀어나온 걸 보면.
“아버지께서 날 에루리안으로 보낸 이유 말이야.”
“아. ‘힘을 얻어라’시던 가주님의 말씀 말입니까?”
“어.”
그 당시 아버지도 정확히 그 ‘힘’에 대해 알지 못했던 거다.
그게 무엇인지, 어떤 경위를 통해 얻는 것인지.
그렇기에 이안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미워했었다니.’
기어이 몇 년 동안 연락을 끊고 의절까지 했었다.
돌이켜 보면 참 철없는 행동이었다.
먹색 동공이 한층 짙어진 이안은 다시금 에루리안을 찬찬히 훑었다.
눈 덮인 건물들이 고풍스러워서 썩 볼 만했다.
예전엔 거대한 감옥 같아서 에루리안이 꼴도 보기 싫었는데 말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감상이 이토록 달라질 줄이야.
어쩐지 객쩍어져서 그는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싸라기눈에 묻힌 작은 소리.
하지만 이안의 모든 것에 신경을 세우고 있던 칼브란은 똑똑히 들었다.
도련님의 음색이 퍽 고조된 것을.
“도련님이 웃으시니 저 또한 매우 기껍습니다. 하나…… 이 칼브란, 염려는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응?”
“며칠 동안 기숙사에 도련님 혼자 계셔야지 않습니까. 몸도 약하신 분이.”
칼브란은 이안의 코트를 여며 주며 넋두리를 이어 갔다.
“제가 곁에서 챙겨 드려야 하는데…….”
“또 걱정을 사서 한다. 괜히 흰머리만 늘게. 공연한 걱정하지 마.”
“‘공연한’이 아니지요. 오늘이 건국제 첫날이라 볼거리도, 먹거리도 넘치는데 도련님께선 하나도 못 즐기시지 않습니까.”
“내년이 있잖아. 내년 이퀴녹스는 꼭 집에서 보낼게.”
이안의 다독임에도 칼브란의 근심은 가시지 않았다.
해서 ‘괜찮다’란 의미로 이안은 칼브란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것치곤 손길이 다소 엉성했다.
칼브란의 피 5할쯤은 ‘도련님 걱정’으로 구성된 걸 아니까.
아마 그가 서른, 마흔이 되어도 칼브란은 지금과 같을 것이다.
이안은 안색이 어두운 칼브란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더 심란해 보이는 건 아마, 아게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회합에서의 일이 칼브란의 속을 휘젓고 있을 테니까.
“저어, 도련님…….”
“어. 왜?”
“아……, 아닙니다.”
고개를 가로저은 칼브란은 별거 아니라는 듯 표정을 지웠다.
하지만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2장로, 이 망할 영감탱이!’
그 음흉한 너구리도 모르지 않는다.
도련님에게 마력핵을 심어 주려고 가주님이 안 해 본 게 없다는 것을.
시간과 돈.
두 가지를 몽땅 쏟아부은 게 자그마치 15년이었다.
한데도 도련님의 몸은 천년 바위인 양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럴진대!
그 늙은 너구리가 탈로스까지 걸며 도련님을 마구 부추겼다.
‘내가 그 영감탱이를 가만 안 둔다!’
칼브란은 어떤 의지를 다지며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가 누구던가.
날 때부터 유능한 집사였다.
“흠흠. 도련님, 제가 누굽니까?”
“칼브란?”
“예, 그렇습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크흠. 가주님 다음으로 제가 가장 강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뷔트시겐이 아니라 제국을 통틀어.”
“하니, 저만 믿으십시오.”
칼브란은 검은 동공을 단호하게 굴렸다.
“감히 주군의 자질을 논하는 불충한 것들! 2장로를 필두로 한 간악한 무리를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다신 그딴 헛소리 지껄이지 못하게.”
목청을 한껏 높이는 칼브란을 보며 이안은 입꼬리를 올렸다.
칼브란다웠다.
언제 어느 때건, 그를 중심에 놓는 사고방식.
가문이 아닌 그와 아버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충직.
그런 칼브란을, 한결같은 그를 보고 있자니 뭐랄까.
……지키고 싶어졌다.
저 얼굴, 저 표정, 포근한 웃음과 마음 전부를.
다시금 의지를 다진 이안은 양 주먹을 옹골차게 말아 쥐었다.
하지만 칼브란을 향한 말투만큼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나야 칼브란을 믿지. 하하. 불충한 무리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나중에 서신에 적어서 보내 줘.”
말을 하는 중, 이안의 눈길이 칼브란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하늘이 제법 어둑해졌다.
이대로 대화를 이어 가다간 한정 없이 시간만 갈 터.
이안은 흐름을 끊어 내듯 마무리 짓는 말을 건넸다.
“아, 그리고 엊그제 내가 부탁했던 것에 대한 경과도 같이.”
“‘도련님에 관한 소문’을 내달란 것 말씀이십니까?”
“어.”
“아, 그거라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제국 내 모두가 알도록 확실히 소문을 퍼트리겠습니다.”
이안이 퍼트려 달란 소문.
그건 ‘뷔트시겐 가주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이안 뷔트시겐이 드디어 마력핵을 얻었다.’란 것이었다.
왜 이런 지시를 내리는지 칼브란은 의문이 들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도련님이 이러시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럼, 난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어. 지금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조심히 돌아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헤어지면 도련님을 몇 달 후에나 볼 수 있는데. 하나, 더 붙잡는 건 불경이겠지요.”
“불경은 무슨. 내가 추워서 그래.”
“이런. 제가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이 추위에 도련님을 세워 두다니.”
칼브란은 다감하게 이안의 코트 위에 얹은 눈을 털어 주었다.
“항시 아프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어. 칼브란도 잘 지내고. 아, 내가 안 보일 때까지 또 괜히 서 있지 말고.”
이안은 뒤돌아선 채로 손을 흔들었다.
보지 않아도, 칼브란이 어찌하고 있을지는 빤했다.
예의를 다하려 고개를 숙이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힘이 있든 없든, 모시는 자로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게 칼브란이었니까.
이안은 칼브란을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제가 보이지 않아야 그가 추위에 서 있지 않을 테니.
‘예. 도련님 부디 강건하시기를…….’
나아가는 걸음걸음마다 칼브란의 경애가 묵직하게 달라붙었다.
그 무게가, 한없이 그를 흔들며 일깨워 주었다.
……살아 있다.
불타 파괴되거나 짓밟히지 않은 채로 아버지도, 칼브란도, 가문도.
하지만 평화는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살리카 가주가 야욕을 드러내는 건 앞으로 2년 뒤.
쥐새끼처럼 숨어서 일을 꾸미다 전쟁을 일으키는 건 그로부터 5년 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마력 한 줌 없는 상태가 아니라 힘을 가진 채로.
소중한 것을 반드시 지킬 수 있게.
그러기 위해 이안은 첫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 * *
<제1 도서관>
목적지에 도착한 이안은 나무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그러자 오래된 책에서만 나는 꿉꿉한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여기도 그대로네.”
낮게 중얼거린 이안은 일렬로 늘어선 책장들을 지나쳤다.
공간이 원체 커선지, 가볍게 내딛는 발소리조차 크게 울렸다.
“예나 지금이나 혼자군.”
언제나 그랬다.
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건 항상 그와 사서뿐이었다.
밤낮을 잊은 채 책만 파며 눌러살다시피 했으니까.
혹여 마력핵을 얻을 방법이 있을까 해서.
그것을 얻은 후 당당히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는 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정신 나갔단 소리까지 들었을까.
물론 그런 방법 따윈 찾지 못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 가장 안쪽에 당도해 있었다.
그곳 책장의 제일 밑단.
정갈하게 꽂힌 책들을 훑으며 이안은 느긋하게 쪼그려 앉았다.
……있다!
겉면이 까만 벨벳인 데다 금박으로 제목이 적힌 책.
『난쟁이가 ‘야매 정령사’로 살아가는 법』
책을 꺼내 든 이안은 복잡미묘한 손길로 겉면을 쓸어내렸다.
마력핵 없는 놈이 뭔 수로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예언자’란 칭호를 달 수 있었을까.
그건 다, 이 책 덕분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예언서.
“이 ‘예언서’를 처음 발견한 게 졸업 직전이었지, 아마?”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해 초조함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할 수 있는 건 없지, 그렇다고 가문으로 돌아갈 명분도 없지.
심란해서, 닳도록 본 책만 헤집고 또 헤집었었다.
그렇다고 없는 방도가 급작스레 생길까.
이대론 미쳐 버릴 것 같아서, 이안은 평소 읽지 않던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돌발적인 행동.
딱 그뿐이었으나, 이 책이 제 앞날을 바꿀 줄 누가 알았으랴.
“……이걸 잘 활용해 이름을 날리면, 명예롭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졸업 후 명성을 쌓고자 제국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예언서에 적힌 사건들을 알리고 다닌 것이다.
제국의 중추인 세 가문을 무너트리기 위한 살리카의 밑 작업을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힘이 지배하는 제국에서 누가 약자의 말을 믿어 줄까.
실패를 거듭하고 배신만 당했던 5년.
결국, 넝마가 된 몸을 이끌고 그는 뷔트시겐으로 돌아갔다.
이미 세 가문이 휘청이고, 살리카가 비대해져 버린 그때에서야.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순 없잖은가.
살리카를 막기 위해 장장 8년간의 전쟁을 치르며 고군분투했다.
어떻게든 예정된 운명을 바꿔 보려고.
하나 결국 제게 남겨진 것은 일족의 몰살뿐이었다.
“……내가 아집과 열등감을 좀 더 빨리 버렸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그게 뭐라고.
남들의 인정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라고.
미간을 찌푸린 이안은 책을 톡톡 두드렸다.
후회하고 후회한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그는 예외였고,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기회…….
그 단어를 몇 번이나 곱씹은 이안은 천천히 첫 장을 펼쳤다.
손글씨로 써 내려간 단정한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력핵을 가지지 않은 채 태어난다. 그것은 박탈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시작이었다.》
우아하고 힘 있는 흘림체.
거기에 매료돼,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이 소설을 단숨에 독파했었다.
이후엔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로 무작스럽게 봤었다.
이안은 그때처럼 마지막 장까지 숨도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끝머리.
《그는 자신의 눈알을 뽑아 가차 없이 터트렸다.
단언코 확신했다.
이것이 제 아버지를, 제 가문을 다시 되살릴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릴 적, 그의 아비가 대대로 내려오는 기물을 그에게 새겨 넣은 이유가 있을 터이니.
은색 실선들이 굶주린 뱀처럼 그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그러자 의식도, 감각도 고요하게 무너져 내렸다.》
타앗.
이안은 단호하게 책을 덮었다.
“다행히 이전과 바뀐 것이 하나도 없군.”
회귀로 인해 혹 달라진 게 있을까 했지만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가 취해야 할 행동은 명확했다.
이 책을 없애는 것.
예언서는 그의 손에 있으면 무기지만,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면 화근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화르르, 은색 불꽃이 일더니 삽시간에 책 전체로 번져 갔다.
“!!”
놀란 이안은 책을 놓쳐 버렸다.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책은 완전히 불타서 재만 남겨졌다.
흔적마저 없어지는 걸 멍하게 보던 것도 잠시.
차라리 잘 됐단 생각이 들어, 그는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이건 해결됐으니 이제 다음 장소로 가 볼까?”
가장 중요한 게 남았다.
소중한 것들을 지켜 내기 위해 반드시 쥐어야 할 것, 마력핵을 얻어야 한다.
힘이 없으면 말도 힘을 갖지 못한다.
뜻을 관철하기 위해선 무력 또한 필요하다.
지난 생에서 처절하게 몸으로 깨닫지 않았던가.
하여 이안은 도서관 입구 쪽으로 과감히 몸을 돌렸다.
그라나토스 숲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마력핵을 얻을 방법이 있으니까.
그가 도서관을 빠져나간 뒤였다.
파스스슷.
남아 있던 재가 석양에 휘감기며 사방으로 어룽졌다.
그러더니 이내 빛을 난반사하며 글자를 만들어 냈다.
《이안 뷔트시겐은 시간을 역행했다. 그리고 말로의 탑으로 향했다. 이퀴녹스에만 열리는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