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9화 (9/214)

제9화

가주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칼브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칼브란 랑고바트.

그가 가진 최초의 기억부터 곁에 있었던 친우.

누구나 인정하는 충직한 가신.

이런 자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배신은 타인이 하는 게 아니니까.

형제가, 살을 섞으며 산 아내가, 충직했던 가신이 하는 것이다.

욕망이 있는 한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있다는 뜻.

그렇기에, 이 아귀 지옥에서 변하지 않는 자는 그만큼 무서움과 동시에 든든하다.

그가 뚫어지게 보는데도 칼브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감출 것이 없으니 당당한 것이다.

“이안이, 이왕 사람을 얻겠다면 자네 같은 자를 얻으면 좋겠군.”

“……예?”

“아닐세. 나도 늙었나 보이. 내가 공연한 염려를…….”

“반신의 경지에 드신 분이 엄살이 심하십니다.”

“하하. 그리 보이는가? 하긴. 이안이 잘할 것을 아는데도 번번이 이러는군.”

“‘아들 바보’인 가주님의 특기 아닙니까.”

“크흠. 공연히 생사람 잡는군.”

“애면글면하시는 가주님을 위해, 이 칼브란이 한 말씀 올리자면.”

칼브란은 외알 안경을 과감하게 추켜올렸다.

“가주님의 성정을 빼닮은 도련님이시니 무엇이든 잘 해내실 겁니다.”

“흠흠. 그러할 테지. 영민한 녀석이니.”

칼브란의 확언에 가주는 본인이 칭찬받은 양 우쭐거렸다.

일족의 수장이기 전에 아비라서 기쁠 수밖에 없었다.

입꼬리를 올린 가주는 다소 편해진 낯을 하곤 양피지로 눈길을 돌렸다.

“녀석이 힘을 얻을 수 있길 바란 것은 사실이나…….”

실패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천형을 타고난 아들이 뒤늦게 한 걸음을 뗐다는 사실뿐이다.

힘겹게 내디딘 용기가 해일 같은 좌절로 돌아오지 않기를.

부디,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며 가주는 시선을 어둑한 창밖으로 돌렸다.

눈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 * *

이안이 녹스를 얻고 몇 시간이 지난 새벽.

눈 폭풍은 거셌으나, 그와 반대로 그라나토스는 소름 끼치게 조용했다.

흡사 무덤과 같이 쥐 죽은 듯 조용한 숲.

이곳에서 소음을 자아내는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이안.

“여기면 되겠다.”

이안은 수백 개의 나뭇가지가 얽혀 있는 고목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의 높낮이가 제각각이라 밟고 올라서기엔 그만이었다.

그것들을 발판 삼아 그는 조금씩 위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

원하는 대로 말로의 탑 근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이안은 대강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뒤 사과를 녹스에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사과.

그것을 잽싸게 낚아챈 녹스는 으스러지지 않게 꼬옥 쥐었다.

그 후, 아사삭 하고 베어 물고선 짧은 앞발을 동동거렸다.

맛있는 걸 먹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녹스.”

“왜 부르느냐?”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게 차폐 실드를 둘러 줘.”

“이렇게 갑자기?”

“어. 필요해서.”

“그런데 너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도 안 하니?”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안은 싱긋 웃으며 녹스의 손안에 있는 사과를 콕 가리켰다.

“이미 값도 치렀고.”

“이게 값? 겨우 이깟 걸로? 꼴랑?”

“어.”

“허어어. 참으로 뻔뻔한 결속자인지고.”

녹스는 거하게 한탄하면서도, 아주 열심히 차폐 실드를 둘렀다.

‘차폐 실드.’

기척을 감출 때 쓰는 정령술이다.

정령의 자연적인 기운에 숨어 인간의 기척을 지우는.

온전히 정령의 힘에 기반하기에, 녹스의 실드는 완전무결에 가까웠다.

4대 원소를 모두 다룰 줄 아니까.

일렁.

녹스와 이안을 둘러싸고 순간적으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둘의 모습이 투명해지면서 나무에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실드를 두른 녹스는 궁금증이 녹은 날개를 마구 비볐다.

“그나저나 이런 실드까지 쳐 가며 확인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으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탑에 올 자들을 한번 봐 보려고.”

“탑에 올 자들?”

“어. 원래는 오늘 살리카 가주가…….”

이안은 이곳에 온 연유를 녹스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살리카 가주의 야욕과 그 밑 작업의 첫 단계에 대해.

그의 요약본을 전부 듣고 난 후였다.

“이런 육시랄 놈을 봤나!”

분노에 찬 녹스가 걸쭉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절묘한 순간에 맞춰,

바스락, 욕 처먹을 관계자 대령이라는 듯 기민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 * *

……왔다!

후드를 뒤집어쓴 무리가 사방을 경계하며 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빨간 머리칼의 상급 정령사가 일곱.

열세 살쯤의 소년이 한 명.

그들의 모양새는 밀렵꾼처럼 굉장히 수상해 보였다.

아이 하나를 어른 일곱이 포위한 채 질질 끌고 왔으니까.

도망갈 구석을 차단하겠단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행색도 완전 딴판이군.’

소년은 낡고 해진 외투를 입어 동상까지 걸린 반면.

정령사들은 두툼한 털 코트로 인해 볼이 불그죽죽했다.

관계의 우위가 명확해 보였다.

그를 증명하듯, 정령사들이 하는 짓도 영락없이 왈패였다.

어린 소년에게 발길질을 무작스럽게 해댔으니까.

“야! 똑바로 못 걸어?”

퍼억!

“고아 새끼가 어쩌다 가주님 눈에 들어선. 아주 살판났지?”

퍽! 퍼억!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 하! 내가 너 같은 천한 새끼를 왜 보호해야 하는데?”

소년은 걸핏하면 처맞았다.

“살리카의…… 사냥개.”

저 소년이, 전생의 그놈이었다.

그의 가문을 도륙 냈었던 미친놈.

그런데…….

파괴적인 불꽃을 닮았던, 이안의 기억 속의 남자는 없었다.

눈은 움푹 꺼졌고, 입술은 거스러미와 피딱지로 범벅된 채였다.

얼룩덜룩 총천연색으로 멍든 얼굴.

갈비뼈의 형태가 다 드러난, 삐쩍 곯다 못해 해골 같은 몰골.

비칠비칠 걷는 걸음엔 매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저런 꼴에, 저런 취급을 당하던 놈이었다니.’

살인귀, 피에 굶주린 미친개, 지옥 불도 마다할 악귀.

별별 악명을 다 달았던 사냥개의 시작은 이토록 초라했었다.

그래서 더…… 미쳐 버린 것일지도.

사담이긴 하지만, 저놈은 나중에 제 일족까지 모두 때려죽이는 패악질을 벌인다.

“……개자식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깊숙이 사고를 이어 가던 이안은 머리통을 거칠게 흔들었다.

흉수의 사연 따위에 관심 가져서 뭐 할까.

하다못해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에게도 있는 것이 사연인 것을.

굳이 저자에 대해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이안은 사냥개에게서 매정하게 눈을 뗐다.

그러자마자 녹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저것들이 알을, 아니, 나를 노리는 자들이냐?”

“어. 저 사냥개가…….”

“마력핵이 없는 놈이구나.”

“어.”

“천년 넘게 마력핵이 없는 건 황자뿐이었다. 특이한 너 말고는. 한데 마력핵이 없는 놈이라니…….”

“아, 아까 말했다시피 저 사냥개는 마력핵이 없다기보다 파괴된 건데…….”

마력핵의 파괴.

살리카 가주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탑 안에 있는 알을 얻어 4대 원소를 쥐어 보고자.

힘을 갈망했지만, 그는 자신의 마력핵을 파괴하진 않았다.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대신 방계나 권속에 둔 일족의 아이들을 데려와 마력핵을 파괴했다.

하지만 모두 다 그 즉시 즉사하고 말았다.

당연했다.

마력핵은 심장에 자리하고 있어서, 핵을 파괴하는 건 심장을 으깨는 짓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결과가 빤한 미친 짓을 가주가 관뒀냐?

절대 아니다.

거듭된 실험과 실패에도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다.

마력핵이 파괴당하고도 살아남는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유일’한 생존자가 저 사냥개야.”

지난 생에 그는 알을 얻어 4대 원소를 모두 운용할 수 있었다.

“추워서 뒈지겠다. 야, 빨리 들어갔다 나와!”

“너, 허튼짓하면 모가지를 잘라 버린다!”

탑의 결계가 시작되는 곳, 거기서 곧장 멈춘 살리카들이 사냥개의 등을 떠밀었다.

억센 손길에 넘어진 사냥개가 눈밭을 굴렀다.

빠각 소리가 나는 것이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냥개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악착같이 일어섰다.

비틀대는 움직임을 따라, 핏물이 하얀 눈밭을 시뻘겋게 적셨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피의 양이 제법 많았다.

한데도 개의치 않고 사냥개는 절뚝거리며 탑의 석문으로 향했다.

‘이번엔 너보다 내가 빨랐다.’

이안은 무표정한 낯으로 사과를 크게 베어 물었다.

회귀 전, 예언서를 읽고 혹시나 해서 탑에 와 봤지만 역시나 알은 없었다.

이미 때를 놓친 거였다.

어쩌면 손안에 쥘 수도 있었던 것.

힘을 얻을 기회를 놓친 뒤로, 자책과 후회를 얼마나 반복했던가.

그 감정은 죽을 때까지 그를 고통스럽게 짓눌렀었다.

때만 놓치지 않았어도,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 여겼기에.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지.”

이안은 석문을 뚫어지게 보며 다시금 사과를 으적으적 씹었다.

사과가 뼈대만 남겨졌을 즈음.

사냥개가 ‘말짱’해진 걸음으로 탑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더니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곤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아마, 알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즉시 살리카들은 사냥개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과 셔츠의 틈새로 아른거리는 빨간빛.

“역시, 마력핵이 생겼는지 검사해 보네.”

“생각보다 꼼꼼한 놈들이구나.”

결론이 난 것인지 살리카들은 사냥개를 데리고 황급히 떠났다.

불청객이 사라진 뒤, 이안은 나무에서 살포시 내려왔다.

* * *

탑을 향해 가는 이안의 날아갈 것 같은 보폭.

상큼함마저 묻어나는 걸음에 녹스가 묘한 낯을 했다.

“왠지 네가 전형적인 악당 같구나. 저것들이 아니라.”

“아. 살리카 가주가 속을 걸 생각하니 통쾌해서. 저 알이 녹스 네 환영술로 만든 ‘가짜’인 줄도 모르고.”

상상만 해도 고소했다.

이안은 파안대소하며 입매를 한껏 비틀었다.

살리카 가주는 사냥개가 알을 먹고 난 후에 야욕을 드러낸다.

정확히는 2년 뒤, 사냥개가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시점부터였다.

그런데 사냥개가 먹은 게 가짜였으니.

가주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을 계획을 ‘오늘’ 박살 낸 셈이었다.

“믿게 하려고, 알에다 녹스 너의 마력까지 심었잖아. 한동안은 헛된 꿈을 꾸겠지.”

“사냥개가 당장은 4대 원소를 다룰 수 있을 터이니.”

“그러다 차츰차츰 능력이 쇠락하면……. 푸하하핫!”

살리카 가주는 알이 쓸모없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는 아이들을 상대로 실험하지 않겠지.

이 이상 아까운 생목숨을 잃지 않아도 된다.

“캬아.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노출되지도 않았고.”

그에게 마력핵이 생긴 시기가 공교로웠다.

모르긴 몰라도, 의심 많은 살리카 가주라면 충분히 확인해 보려 할 터.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만약 그런 불상사가 생긴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의 2회차는 시작도 전에 ‘암살’로 일찍 종 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들자니 모든 최악을 피한 셈이었다.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네.”

이안의 사악한 표정을 보곤 녹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실력은 하찮고, 성격은 안 좋은 결속자로구나.”

“하하핫!”

“욕을 먹고도 웃는 것이냐?”

“대신 녹스 네가 성격이 좋으니 균형이 딱 맞잖아.”

이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실력이 하찮다.’

전생에서는 마력핵이 없어 그조차도 들어 보지 못했었다.

뭐가 됐든 ‘실력’이란 단어가 붙었지 않은가.

듣기에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지,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히죽인 이안은 탑의 결계를 가뿐히 통과했다.

몸이 바스라지지 않고 말짱했다.

예상대로, 알을 먹은 그를 탑이 주인이라 인정한 것이다.

‘마력이 있는데도 결계가 발동되지 않는 이유지.’

여유롭게 석문으로 다가간 이안은 그 앞에 사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 후, 할 일을 끝마쳤다는 양 깔끔한 태도로 뒤돌아섰다.

“돌아가자, 녹스.”

둘의 그림자마저 완전히 사라진 후.

사과 바구니를 덮은 커다란 그림자가 사과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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