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0화 (10/214)

제10화

다음 날.

“이안, 눈이 펑펑 온다! 엄청 펑펑 와!”

창틀에 오동통한 앞발을 걸친 녹스가 소리쳤다.

외침에는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외면하기 힘든 소리에 이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굵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네.”

아침 해가 쨍쨍한데도 쏟아지는 양이 많아선지, 눈이 녹지 않고 쌓여 갔다.

제법 볼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흥분한 녹스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눈이 새삼스럽지 않아서였다.

제국의 계절은 여름과 겨울뿐이라, 9월부터 반년간 겨울이다.

거기다 그가 나고 자란 뷔트시겐 영지.

바람이 멈추지 않는 그곳에선 사시사철 눈 폭풍이 불었다.

여름이 되면 눈발이 약해지긴 하지만 그치진 않는다.

지겹도록 본 거라 그러려니 하려는데, 녹스의 날개가 심상치 않았다.

마찰열만으로 불을 붙일 수 있을 만큼 비벼지고 있었다.

나가고 싶다.

미치게 나가서 놀고 싶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날갯짓에 이안은 밖을 쳐다보며 창틀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살리카가 알을 먹기 전 먼저 낚아채기!

이 계획 때문에 에루리안에 빨리 온 터라, 방학이 끝나려면 아직 며칠이 남아 있었다.

‘두 달 안’에 페이라조 2성을 달성해야 해서, 열심히 수련해야 하지만.

‘오늘만 녹스의 장단에 맞춰 줘 볼까?’

“녹스, 나갈래?”

“그냥 그렇다는 거다. 위대한 나는 아이처럼 놀지 않는다.”

솔직한 몸짓과 그렇지 못한 말투.

청개구리 같은 녹스를 보며 이안은 창문을 열어젖혔다.

훅, 하고 차가운 공기가 할퀴듯 볼에 닿았다.

스치는 것만으로 얼굴이 땡땡 얼 것 같은데, 녹스의 날갯짓이 더 거세졌다.

이거야 원.

‘결속이라 쓰고 육아라 읽어야 할 판이군.’

“그럼 나 혼자 나간다?”

“호, 혼자 가겠다고?”

녹스는 불안이 깃든 눈알을 마구 굴렸다.

“이 험난한 세상! 하찮은 네놈 혼자서 나갔다간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주절대는 녹스를 보며 피식 웃은 이안은 창틀에 걸터앉았다.

어쩜 저리 속이 투명한지.

“역시 혼자는 위험할 것 같아.”

“크흐흠.”

“녹스, 나가자.”

살살 부추겨 놓곤 이안은 창틀에서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이안의 행동에 조바심이 난 녹스는 노란 앞발로 그를 쿡쿡 찔렀다.

“아… 안 가?”

“으음. 녹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생각? 설마, 금세 마음이 바뀐 것이냐?”

“그런 건 아닌데, 3층이라 뛰어내렸다간 다리가 부러질 것 같네?”

“응?”

“있지, 날 저 아래로 옮겨 줘.”

“……허어어.”

“놀고 싶다며.”

“츳. 내가 결속을 한 게 아니라 육아를 하는구나, 육아를.”

‘결속에 대한’ 같은 생각, 본인 위주의 해석이었다.

한탄한 녹스는 이안의 셔츠를 물고서, 그를 들어 올렸다.

덩치로 보나 뭐로 보나 절 곱게 데리고 가는 건 ‘이놈’이어야 한다.

쪼그맣고 귀여운 제가 혹사당할 게 아니라!

하여간 낯가죽이 두껍고 뻔뻔한 놈이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이안을 꽉 문 채 녹스는 파닥파닥 몇 번 날갯짓했다.

어느덧 가까워진 지면.

녹스는 땅바닥에 팽개치듯 이안을 내려놓고서 입을 재게 놀렸다.

“날 탈것으로 이용하다니…….”

더 할 말이 남았건만, 뻔뻔한 놈이 먼저 선수를 쳤다.

“영광입니다, 위대한 녹스 님.”

……위대한 녹스 님?!

그 한마디에 녹스는 흐물흐물 녹아 버렸다.

복수?

그따위 거 홀랑 까먹은 지 오래였다.

단순한 녹스의 반응에, 이안이 피식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눈을 받았다.

“녹스, 실컷 놀아.”

“흠흠. 이번만 봐주마. 네가 빨리 놀고 싶어 하니.”

“하하.”

이안의 웃음이 호쾌했다.

왠지 모르게 계속 저놈 수에 말려들고 있다는 촉이 내리꽂혔다.

하지만 녹스는 생각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하얀 눈이 부르지 않는가.

탑 안에 갇혀 있던 50년, 그토록 만져 보고 싶었던 것이!

“눈! 누우우운이다!”

단박에 시선을 뺏긴 녹스는 맹렬하게 눈더미로 돌진했다.

데구루루, 녹스가 눈밭을 구르는 사이.

“강아지도 풀어놨겠다, 이제 내 할 일을 해 볼까?”

이안은 펼쳐진 손바닥에 마력을 집중했다.

후우웅.

떨어지는 눈이 손안으로 말려들며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오오, 된다!

달걀만 한 크기.

누군가는 필시 하찮다 하겠지만, 이안은 이것만으로도 흡족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첫 성과물이었으니까.

한껏 들뜬 그는 회오리를 만들었다 꺼트리기를 무한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광적으로 뛰놀던 녹스가 입을 헤벌쭉 벌리고서 깡충깡충 뛰어왔다.

온몸에 얼룩덜룩 눈을 묻힌 채로.

꼭 강아지 같았다.

“커흠. 이안 너, 참 즐거워 보이는구나.”

“여기서 제일 신난 건 녹스 너인 것 같은데?”

“헹. 나한테 덤탱이 씌우긴.”

“그렇다고 해 줄게. 내가 지금 마력핵이 생겨서 몹시 관대하거든.”

“관대는 무슨. 하! 핵이 생겼다고 다가 아니다. 특히 너한테는!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이니!”

신랄하게 말한 녹스가 눈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이것저것 따져 뭐 하누. 어차피 이리된 것을. 해서 내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산책’을 하며 정리란 것을 해 보았다.”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눈 바닥을 뒹군 것도 산책이라면 뭐.”

“크흐흠. 내 원대한 뜻을 하찮은 네가 어찌 알겠느냐! 긴말할 필요 없다.”

녹스가 짧은 발을 꼼지락거려 눈을 흩뿌렸다.

마력을 담은 탓에 제법 멀리 분사되는 궤적.

이안의 동공이 궤적을 따라가자, 녹스가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일단 내가 눈을 뿌리면, 너는 바람을 이용해 그것을 전부 주워 담아라.”

“전부?”

“전부! 쥐똥만 한 네 마력으로 마력 회로를 돌린다고 얼마나 늘겠느냐. ‘정석’으론 빠른 성과를 보이기 힘들 터.”

“그럼 이 방식이면…….”

“에헴. 내 방식이면 두 달 안에 크은 성과를 보일 수 있을 게다.”

녹스가 거들먹대며 인정사정없이 눈을 쳐냈다.

준비할 일각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소 밀어붙이는 식이었지만, 이안은 불평하지 않고 곧장 바람을 불러냈다.

* * *

헉. 헉. 허어억.

이안은 단내가 나는 호흡을 가쁘게 내뱉었다.

온몸의 맥이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숨을 정돈할 수가 없었다.

미치게 힘들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는데, 희한하게 기분은 좋았다.

자신이 이룬 점진적인 성과가 한눈에 보였으니까.

이안은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무릎까지 쌓인 눈더미.

‘생각보다 꽤 받아 냈는데?’

녹스가 흩뿌린 눈의 절반가량을 받아 내고 있었다.

처음엔 죄다 흘려버려서 가슴 높이까지 쌓였었는데.

그러다 높이가 허리쯤으로 낮춰졌고, 마지막엔 무릎 가량이 되었다.

5시간 만에 이 정도로 발전하다니!

“나, 되게 천재인 건가?”

“헹. 천재는 개뿔. 실력이 하찮아서 말도 안 나온다.”

이안의 자뻑에 녹스가 잽싸게 초를 쳤다.

“황자는 알을 먹은 즉시, 이 정도는 거뜬히 해냈다.”

방정맞게 좋아하긴.

불퉁하게 내뱉어 놓고, 녹스는 뭔가가 찔린 듯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즉시’는 아니었다.

한 5일……쯤?

정확히는 5일하고 반나절이 걸렸다.

‘알을 먹어 마력량이 무한해진 황자도 그 정도에 이룬 것을.’

쥐똥 같은 마력량으로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이안이 일군 성과에 녹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녹스 너도 내가 놀랍지?”

“…….”

귀신같은 놈.

그걸 또 득달같이 잡아내 물고 늘어진다.

녹스는 거들먹대는 이안의 얼굴에 대고 콧방귀를 대차게 뀌었다.

“네 그 뻔뻔함이 놀랍다.”

“하하하.”

무슨 타박을 해도 녀석은 걸핏하면 웃었다.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건지.

파안대소하는 이안을 녹스는 빤히 내려다보았다.

영락없이 열다섯 소년에 걸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데…….

분명 그러한데도, 어쩐지 녀석의 얼굴에는 세월에 닳은 ‘중년의 꾸덕함’이 배어 있었다.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이안의 낯.

그 면면에 녹스는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흐음. 당최 종잡기 힘든 녀석이군.’

혹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게, 녀석이 견뎠을 무게 때문인 걸까?

마력이 한 줌뿐인 자라도 그저 부러웠을 이안의 처지.

그 와중에 녀석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는지.

자존심이 상했을까?

아니면 자격지심과 질투에 들끓었을까?

혹여 무력감에 자신을 놓고 싶진 않았을까?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녹스는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적어도 한 가지는.

타고난 것이 무엇이든, 녀석이 결코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것.

아마 치열하게 노력했을 것이다.

대체 뭘 보고 이렇게 단정 짓는 것이냐 하면…….

수련하는 내내 이안은 불평도, 엄살도, 쉬자는 말도 단 한 번을 내뱉지 않았다.

어찌나 독하게 임하는지.

되레 이 귀한 몸이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다.

‘그래도 뭐…… 조금 괜찮은 제자를 주운 건가?’

녹스는 기분이 좋은 만큼 앙증맞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숨이 넘어가도록!

그런 녹스를 빤히 보다가 이안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왜, 하나뿐인 제자가 잘나서 너무 뿌듯해?”

하여튼 저 주둥아리는 감동에 젖을 시간을 안 준다.

“헹! 자만하지 말아라. 겨우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것이니.”

“속내랑 표현이랑 너무 다른데? 알고 보니 내 스승님은 부끄럼이 참 많으시네.”

“부끄……. 어디서 돼먹지 않는 소리를!”

녹스의 새침함에 이안의 눈썹 머리가 실룩거렸다.

“거기다 귀엽고.”

“귀엽……다고?”

이안의 솔직함에, 도리어 녹스는 얼이 빠져 턱을 쩌억 벌렸다.

벌어진 턱관절에 매달린 것은 두 가지였다.

네놈이 말실수했다는 표정.

위대한 자신에게 어울리는 찬사는 ‘멋지다’뿐이라는 항변.

급기야 불뚝함이 치솟은 녹스가 짧은 앞발을 마구 휘둘렀다.

“그 말을 당장, 취소하거라.”

공격도 안 되는 재롱에 이안은 싱글거렸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수련은 마무리해야 할 성싶었다.

그의 생각에 쐐기를 박듯, 때마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 그러고 보니 밥을…….

이안은 눈썹 머리를 내리며 홀쭉한 배를 부여잡았다.

“배고프다.”

“……그러고 보니 점심이 진즉 지났구나.”

“그러니까 먹고 하자. 굶는 건 딱 질색이거든.”

이안이 결연하게 뒤돌아서자, 녹스의 동공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고작 한 끼 걸렀다고 뭐 저리 비장한 표정을?

사실 녹스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안이 얼마나 먹을 것에 한 맺힌 놈인지.

‘사람답게 살려면 잘 먹어야지.’

음식은 중요하다.

일견 사소해 보이는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를 형성하는 뼈대 같은 것이다.

사흘을 굶다가 곰팡이 핀 빵을 먹어 본 경험이 있는가?

아니지, 그 빵마저 뺏겨 본 적 있는가?

그는 있다.

예언자로 각 가문을 떠돌던 시기엔 수시로 굶었었다.

뷔트시겐 가문의 적자가 뒷골목 출신처럼 쓰레기통을 뒤지기까지 했다.

그가 버려야 했던 건 귀족이었다는 자긍심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이었다.

‘잘 먹고, 잘 싸며 무병장수해야지.’

살리카가 일으킬 전쟁을 막는 거? 중요하다.

가문을 지키는 거? 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건 ‘잘 챙겨 먹자’였다.

배때기가 풍족해야 마음도 낙낙해지고, 여유가 생겨야 수련도 더 잘되는 법이니.

기숙사로 향하는 이안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질풍 같은 속도를 재게 따라붙으며 녹스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뷔트시겐의 귀한 도련님이 뭐 저리 밥에 진심일꼬.’

* * *

녹스의 의문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아침, 점심, 저녁.

수련하는 와중에도 이안은 꼬박꼬박 세 끼를 챙겨 먹었다.

특히 메추라기 완두콩 수프의 고소함, 그리고 로마네 피노 누아르 와인의 풍미가 깊이 밴 사슴 고기가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잠깐?

‘내가 이걸 왜 서술하고 있는 거지?’

다다음 날, 그러니까 은색 달만 남은 날.

이날도 이안은 먹을 거에 무척이나 집착했다.

녀석은 콩소메가 맛있다며 세 접시나 비웠다.

못 고칠 불치병이었다.

보아하니, 어릴 적 사용인들과 숨바꼭질하다 다락에라도 갇힌 모양이다.

그때 쫄쫄 굶은 게지.

이안의 식탐을 그렇게 정리한 녹스는 의문을 한구석으로 밀었다.

먹을 거에 홱 도는 거만 빼면 뭐.

녀석은 썩 훌륭한 제자였다.

마력량 늘리는 수련에 뚜렷한 성과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뿌듯함과 이따금 밀려오는 당혹 어느 사이.

방황하는 녹스를 두고 어느새 은색 달이 기울었다.

이건, 방학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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