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교훈 주겠다던 페이라조 3성께선 실력이 겨우 이 정돈가?”
이안은 살리카의 심기를 긁으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히오나스 호수를 메운 무수한 바람의 선.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파동을 지녀, 쓰임이 제각각인 그것.
이안은 그중 제일 밑 선, ‘우트’에 해당하는 것을 손에 쥐었다.
우트는 곧 ‘초속.’
그는 우트에 얼음 조각을 감아 힘껏 살리카에게로 튕겼다.
피이이잉.
초속의 속도로 쇄도한 조각은 놈의 가슴팍을 정확히 가격했다.
“크읏!”
된통 얻어맞자마자 분노한 살리카가 눈알을 까뒤집었다.
“이 개새끼가!”
살리카의 분노에 불의 정령이 또다시 앞발을 굴렸다.
이전보다 위력이 강해진 폭발.
썩어도 준치라고 살리카 저놈은 확실히 A반이었다.
저런 놈은 뒤탈이 없게끔 완벽히 제압해야 한다.
그의 그림자만 봐도 발발 떨도록.
이안은 바람의 선 세 개를 당겨 얼음덩어리를 포탄처럼 쏘았다.
투우웅.
묵직한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구체.
그것이 살리카의 가슴팍에 사납게 닿으려는 순간.
살리카가 발밑에 있던 용암을 끌어 올려 얼음덩어리를 막아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거들먹거렸다.
“운 좋게 공격 한 번 성공했다고 의기양양하긴.”
“그렇게 나불댈 시간 따위 없을 텐데.”
이안은 용암 방패를 느른하게 직시했다.
쩌거걱.
그러자 둔탁한 울림과 함께 얼음이 용암을 갈랐다.
수십 갈래로 부서지는 용암 파편.
그 사이를 매섭게 질주한 얼음이살리카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커으윽!”
살리카는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고꾸라졌다.
파들파들 떨리는 그 등을 콰악 밟은 이안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앞으론 레브를, 아니, C반을 건들면 그땐 네 모가지가 날아갈 거야.”
그는 발에 바람을 감아 가차 없이 살리카를 걷어찼다.
10m쯤?
훨훨 날아간 살리카의 등짝이 엘다 나무에 거세게 부딪혔다.
엘다 나무의 강도는 다이아몬드 수준이라 마도구 재료로 쓰인다.
그런 나뭇가지가 몇 개 부러질 정도로 강한 반동.
충격에 심장께가 진탕 흔들린 살리카는 기절해 버렸다.
‘마력핵 근처가 공격당했으니 뭐.’
살리카가 의식을 잃자, 그가 부리던 불의 정령도 영향을 받았다.
정령은 단박에 흐려지며 놈에게로 되돌아갔다.
‘더 볼 것도 없겠군.’
살리카에게서 신경을 끈 이안은 고개를 틀어 레브를 보았다.
괜찮은지 물으려고 했더니.
“……난, 너한테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까칠함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레브가 매몰차게 돌아섰다.
녀석은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딘가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무사했으니 된 거지.
녀석에게 ‘눈도장’ 찍은 것으로 만족한 이안은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캄캄해 과제 하기는 글러 먹었다.
내일 하자 싶어, 이안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가 멀어지고 난 뒤.
호숫가의 분위기가 다시 수선스러워졌다.
여태껏 나무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튀어나왔으니까.
“이안 쟤, 마력핵을 얻었다는 소문이 진짜였어!”
“야, 지금 그게 문제냐. 마력핵 얻은 지 며칠 안 됐잖아. 그치?”
“일주일도 안 돼……. 허억. 야, 나 소름. 1성이 3성을 죽사발 만든 거네.”
“그럼 이안 쟤, 3성인 거야?”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며칠 만에 등급 올리는 게 가능했으면, 난 벌써 카르디아가 됐게?”
“아니, 그래도 3성을 때려눕혔는데?”
“와씨. 나 또 소오름……. 이안 쟤, 그냥 천재인 거야? 뒤로 자빠져도 기술을 줍는 그 천재?”
아이들의 수군거림은 레브에게도 닿았다.
걸음을 멈춘 레브는 멀어지는 이안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의 옅은 동공에 푸른 불길이 타올랐다.
‘마력핵을 얻은 지 고작 며칠째라고?’
그럴 리 없다.
이안은 마력을 운용하고, 통제하고, 사용하는 게 능숙했다.
싸움을 시작한 이상 상대에게 자비를 두지 않는 점까지 포함해서.
그런 이안에게서 익숙한 모습이 겹쳐졌다.
실전 임무를 맡고 제국을 돌아다니는 단주들, 그들의 모습이.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겨 본 진짜배기들 말이다.
* * *
<이안 뷔트시겐과 트란 카스티야가 개싸움을 했다.>
<그런데 들것에 실려 나간 건, A반인 트란 카스티야였다! C반인 이안이 아니라!>
<이안의 손짓 한 방에 트란이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이 소식은 에루리안 전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과장과 허풍까지 덧대어진 채로.
그리하여 종내엔.
“허허. 이거 참.”
교수들 전원이 학장실로 집합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학장은 제 양쪽에 일렬로 앉아 있는 교수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얼마 남지 않은 빨간 머리카락을 소중히 쓸어내렸다.
“다들, 왜 모이라고 했는지 알 겁니다.”
“…….”
“허가받지 않은 대련이라니요! 대체 학생들 관리를 어떻게 한 겁니까!”
낯을 찡그린 학장이 못마땅하다는 듯 언사를 높였다.
그럴수록 교수들은 딴청 부리며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끄응. 에루리안 어디서든 ‘정식 대련’을 할 수 있는 건 일주일 뒤, 전투학 수업이 시작되고부터입니다.”
학장은 질책을 담아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클로에 교수, 안타까우나 교칙을 어기고, 싸움을 먼저 건 이안에겐 징계 처분을…….”
“학장님, 교칙에 대해 충분히 주지시키지 못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징계 건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클로에 교수!”
“이안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정식 대련 기간이 아닌 때에 동급생을 팼다니까요!”
“그럼 누군가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도 ‘아, 교칙 때문에 모른 척해야겠다.’ 이래야 했던 겁니까?”
“커흠. 그건……, 아무리 그래도 손속이 너무 과해…….”
“과한 건, 불로 사람을 태우려 한 A반 녀석들입니다!”
클로에의 흥분 지수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 녀석들에 대해선 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하! 설마, 같은 살리카라고 감싸시는 겁니까? 아니면 A반이라서요?”
“클로에 교수!”
학장은 클로에의 쪼임에 편두통이 일어 관자놀이를 짚었다.
인상을 쓴 모양새가 더 멀리 뛰기 위한 숨 고르기 같았다.
적어도 그렇게 느낀 클로에의 입매가 삐딱해졌다.
그 모습이 성에 차지 않아, 학장은 부러 밉살스러운 어투를 구사했다.
“클로에 교수, 교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혹여 이안에게 ‘플리의 비늘’ 같은 것을 준 적 있습니까?”
“플리의 비늘?”
학장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플리의 비늘’은 마력을 증폭시키는 물약이다.
바실리스크의 비늘이 들어가서 제법 비싼.
흔한 물약은 아니나, 임무를 수행하는 정령사에겐 필수품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언급되는 건 이상했다.
확실히 이상한 질문이었다.
뭔가 찝찝해서 계속 곱씹다가 클로에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학장의 질문, 그것의 의도를 제대로 해석하게 됐으니까.
“그. 러. 니. 까. 제가 이안에게 마력을 증폭시키는 물약이라도 먹였단 겁니까?”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차분? 차아분? C반 학생이 A반 학생을 이겼다는 이유로, 지금 저의 개입을 의심하시는 거지 않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의혹을…….”
“이건 명백한 모욕입니다.”
“아니, 그게…….”
“제가 이안에게 물약을 줘서 대련의 결과를 바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제대로 해 주십시오!”
클로에는 목청을 높이며 학장을 들이박을 것처럼 상체를 내밀었다.
별 거지 같은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이성적으로 굴 수가 없었다.
“설령 제가 물약을 주었던들. 이안은 마력핵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입니다. 그런 녀석이 물약 발로 페이라조 3성을 이길 수 있단 겁니까?”
하!
“그럼 말입니다. 카르디아 1성인 학장님이 ‘플리의 비늘’을 마시면, 살리카 가주님을 들이박을 수 있단 거네요?”
“아니, 비유가 또 그렇게…….”
쩔쩔매는 학장을 대변하고 나선 건 선이 굵은 남자였다.
“흥분은 이성적이지 못한 자의 산유물입니다. 클로에 교수님은 일단 진정 좀 하시죠.”
“진정이요?”
클로에는 씨근덕대며 대거리할 표적을 바꿨다.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치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학생들이 대련을 벌였을 시,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 또한 도맡고 있는 인물.
“기드온 교수, 싸움이 벌어졌던 히오나스 호수를 조사했을 줄로 압니다. 남아 있는 마력의 흐름을 읽었을 테니 말 좀 제대로 해 보십시오. 수상한 정황이 발견되었습니까?”
“흠흠. 그런 건 아니나, 전례가 없는 일이잖습니까. 아무리 이안이 직계라 할지라도 C반인 이상,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
“전례가 없다? 이를 어쩌나? 지금 생겨 버렸는데. 페이라조 1성이 3성을 꺾은 일이.”
클로에는 말을 다다다 쏘아붙였다.
“일단 확실히 하자면 전 물약을 주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저는 이 건에 대해서, 징계가 아닌 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곤경에 처한 친구를 이안이 도와준 것이니까.”
“크흠.”
“이 마당에 스승들은 모여서 ‘물약을 먹었네, 마네. 징계를 주네, 마네.’하고 있다니. 휴우. 아주 내가 쪽팔려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클로에 교수!”
“뭐요?! 왜 부릅니까! 나랑 대련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하여튼 이안에 관한 거라면 사사건건 트집을!”
클로에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기드온 교수는 처음부터 이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직계’라서 싫단다.
기가 막혀서.
이건 숫제 상대가 숨 쉬는 게 싫다, 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본인이 방계인 걸 선택하지 못했듯, 이안 또한 마찬가지일 뿐인데.
거기다 듣도 보도 못한 특이 체질까지.
그런 녀석이 이제 겨우 날갯짓하려는데,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어서.
“쯔읏.”
클로에는 혀를 세게 찼다.
그녀가 내뿜는 험악한 기세에 학장실은 냉랭해졌다.
분노하는 클로에 교수와 언짢아하는 기드온 교수.
이 둘 사이를 달래듯 나긋한 어조가 끼어들었다.
“허허허. 일 년에 다섯 번도 안 되게 열리는 회의가 과열될 만큼, 이안이 대단한 성취를 보이긴 했나 봅니다.”
말투와 달리 볼이 움푹 들어간 남자는 음침해 보였다.
스톨레 바르푸니.
눈 밑이 시커먼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들, 이 시점에 제가 한 마디 얹자면……. 이안이 교칙을 어겨서 받아야 할 징계와 친구를 도와준 선의, 두 가지가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 같습니다. 하니, 그냥 없던 일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
“다들 침묵하는 걸 보니 합의는 이뤄진 것 같습니다.”
스톨레 교수는 건조하게 깡마른 손가락을 하나 폈다.
“그럼 남은 과제는 하나겠군요.”
“과제라면?”
“하하. 클로에 교수,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 없습니다. 천재 제자인 이안을 가르치는 것에 관한 것이니까요.”
“……?”
“녀석의 성취가 생각보다 빠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 녀석을 감당하고 이끌어 주려면, 이렇게 입만 털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라도 더 치열하게 연구해야지.”
스톨레의 말투는 냉정을 넘어 신랄했다.
광분하던 클로에와 달리 차분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어쩐지 불편해진 분위기.
그걸 깡그리 무시한 스톨레가 화사함을 유지한 채로 입을 달싹거렸다.
그의 말이 향하는 대상은 명백히 기드온 교수였다.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는 것을 ‘질투’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