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이안의 징계 건은 흐지부지됐다.
차후에 물의를 일으킬 시, 퇴학당할 수 있단 경고만 받은 채 말이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입까지 함께 봉해지던가.
외려 갈수록 이안에 관한 건 더욱 크게 부풀려져 갔다.
반면 소문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이안은.
휘이. 휘이익.
만사태평하게 휘파람을 불며 그라나토스의 남쪽으로 향했다.
어제 살리카 때문에 하지 못했던 식물학 과제를 하러 가는 길.
그의 걸음을 쫓듯, 만화경 같은 석양이 발밑에 스미며 뒤따랐다.
사냥을 마친 짐승 특유의 느릿함.
이안만이 가진 보폭을 말끄러미 보다가 녹스가 말문을 열었다.
“홀로 느긋하다, 느긋해. 과제가 어렵다고 벌써 포기한 것이냐?”
“그럴 리가. 산책하기 좋은 날씨잖아. 간만에 눈 폭풍도 안 불고.”
“산책 좋지……. 한데 이왕지사 돌아다닐 거라면, 아침 이슬 정령을 찾을 겸 새벽에 나오는 것이 좋을 터인데?”
“새벽?”
“다른 학생들은 새벽에 숲을 헤매지 않더냐?”
“흐음…….”
이안이 빤히 보자, 녹스가 오동통한 앞발을 마구 비볐다.
그 모양새가 딱 그거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
그의 응시가 길어질수록 녹스는 안절부절못했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녀석을 보다가 이안은 불쑥 말을 흘렸다.
“시치미 잘 떼네.”
“뭐, 뭣?”
“그냥 그렇다고.”
아침 이슬 정령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면서 또 저런다.
왜 제가 남쪽으로 가는지, 왜 이 시간에 가는지 다 알면서.
하여튼 음흉하긴.
이안은 손에 들고 있던 오르골을 녹스에게 보란 듯이 흔들었다.
램프 형태의 그것은 석양을 받자 유난하게 반짝였다.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지 않던가.
괜한 탐심이 생길 만큼 오르골은 썩 예쁜 모양새였다.
‘이 오르골에서 나는 소리를 아침 이슬 정령이 가장 좋아한다고 했으니.’
이안은 램프의 손잡이 부분을 눌러 아리아를 켠 다음 계속 나아갔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아리아가 열 번 정도 반복되었을 즈음 그는 걸음을 멈췄다.
오렌지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호수 앞에서.
헤르세.
클로에 교수가 단서라고 준 화분의 새싹이 바로 이 꽃이었다.
이안이 꽃대를 툭 치자마자, 그의 귓가로 맑은 하프 선율이 들려왔다.
“……역시 여기 있네.”
* * *
아르테리아 호수.
석양을 받으면 유독 반짝이는 수면이 별자리 같다 해서, 그리 붙여진 이름.
명성에 걸맞은 빛 폭풍에 이안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덩달아 시야각도 줄어들었지만 분명하게 보였다.
날개가 꽃잎 모양인 작은 정령이.
석양과 같은 오렌지색 날개를 파르르 움직이는 모습이.
“……아침 이슬 정령.”
“뭣?”
“시치미 뗀 누구 씨도 알겠지만, 오르골 소리에 반응해서 ‘오후에’ 나왔네?”
“커흠.”
반박할 여지가 없는지 녹스가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당황하면 나오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지그시 보는 이안의 눈을 티 나게 피하며 녹스가 웅얼거렸다.
“그나저나 아침 이슬 정령이 이 시간에 나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뭐……, 어찌저찌? 내가 워낙 정보력이 대단하잖아.”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보는 아닌데.”
“엄밀히 따지면 알려지지 않은 게 아니라, ‘알리지 않은’ 거지.”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건, 정보를 은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이유가 얽힌 것은 또 아니다.
매우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과제를 수행하면서 겪을 후배들의 재미와 깨달음을 위해서란다.
짓궂은 선배님들의 장난 그득한 배려랄까?
물론 이런 은폐가 가능했던 건, 정령이 가진 이름 때문이었다.
‘아침 이슬’ 정령.
절묘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편견을 갖는다.
‘아, 아침 이슬이니까 정령은 새벽이나 아침에 돌아다니겠구나’ 하고.
천만에.
이안은 분주히 날갯짓하는 정령을 집요하게 시선으로 쫓았다.
“저녁놀을 흡수해 아침 이슬을 만드는 건데.”
“그래서 녀석들은 대개 오후에 돌아다니지.”
“어. 새벽이나 아침이 아니라.”
“한데 이안, 정말 어찌 안 것이냐? 난 몹시 궁금하다, 궁금해.”
“아, 그게 우연히 발리올 가주에게서 들었어.”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절.
대지 가문인 발리올 가주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아하하하. 이안, 살리카 가주의 구겨진 낯짝을 봤나?>
-똥 씹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래, 그거! 똥 씹은……. 딱 맞는 표현이로군. 으하하핫! 내 리스니야크 협곡을 쥐려다 실패했으니 그럴밖에.>
발리올의 리스니야크 협곡.
뷔트시겐의 북쪽 관문과 연결되는 최단의 통로였다.
살리카 가주는 이 통로를 끊어 두 영지를 고립시킬 속셈이었다.
서로 협력하지 못하도록.
한데 회심의 작전이 실패했으니 어땠겠는가.
살리카 가주는 화병을 얻었고, 발리올 가주는 깨춤을 추었다.
<꺼어억. 십 년 묵은 체증이 가신다, 가셔.>
승리에 취한 그는 평소보다 곱절로 수다를 떨어댔다.
별별 시답잖은 얘기들.
그 끝에 나온 것이 중앙 아카데미 시절의 얘기였다.
<으하핫. 살리카 그 개자식 빼놓고 나랑 네 아버지만 해낸 과제가 있지. 그게 뭐냐면…….>
바로 이안이 수행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과제였다.
‘그땐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써먹게 되네.’
아득한 과거를 단절시키듯, 녹스의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래, 그렇다 치고. 어찌 아침 이슬을 얻을 것이냐?”
“최선을 다해서?”
“에잉. 재미없는 놈!”
“성급하긴. 내가 생각해 둔 대로만 되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야.”
이안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런 뒤 과제의 첫 단추를 끼우기 위해 호숫가로 걸어갔다.
“여기가 좋겠군.”
호수가 시작되는 지점.
적당한 자리에 오르골을 내려놓은 이안은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다.
정령이 어슴푸레하게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그러고는 아침 이슬 정령의 동태를 지켜보았다.
* * *
“후우. 예상보다 더 어렵네.”
이안은 후다닥 도망가는 정령의 뒤태를 허탈하게 보았다.
나흘째다.
아리아의 선율에 푹 빠져 있는 정령에게 말 걸기를 실패한 것이.
내빼는 재주가 수준급이었다.
방법을 알고 있어서 쉬울 거라 여겼는데,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그 덕에.
“하하하하. 실패했구나. 그리 잘난 척하더니 실패했어.”
녹스의 방정맞은 이죽거림만 연타로 얻고 있었다.
배까지 까뒤집고 고소해하는 모습이라니.
그 꼬라지에 이안의 이마에 불뚝 힘줄이 솟았다.
반드시 성공하고 말 것이다.
저 녀석의 코를 납작 누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의지가 샘솟은 이안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내 돌파구를 강구했다.
그러다 문득.
“……아, 그거면!”
세기의 천재라 불리던 한 정령사의 묘비명이 떠올랐다.
《정령이나 애인이나 똑같아,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오래가는 법》
그녀의 입버릇이었다나 뭐라나.
처음 들었을 땐 뭔 헛소리지 했는데, 이 상황에 처하고 보니 알겠다.
그 묘비명은 명언이었다.
기가 막힌 묘수에 이안은 시익 웃었다.
큰 깨달음을 획득한 뒷날.
이안은 오르골을 최대한 호수 가까이 놓은 후, 10m쯤 떨어졌다.
그러고는 고목 나무 밑동에 앉아 가져온 책을 펼쳤다.
‘난 책을 읽을 테니 넌 편하게 음악 감상해’, 라는 듯이.
절대로 정령에겐 말을 걸지 않았다.
계획을 실행한 둘째 날, 그는 고목과 8m 떨어진 지점에 오르골을 두었다.
셋째 날엔 5m, 넷째 날엔 3m.
이쯤 되니 정령이 휑 떠나지 않고 꽤 오래 오르골을 들었다.
그리고 1m 지점이 되었을 때, 정령은 오르골을 끝까지 들으며 램프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간혹 눈이 마주쳐도 도망가지 않았다.
또렷한 성과를 얻은 다음 날.
이안은 오르골을 자신의 옆구리 쪽, 책더미 위에 두었다.
상대의 콧구멍 안까지 보이는 지척.
한데도 정령은 쭈뼛거림 없이 아리아를 들으며, 책에도 흥미를 보였다.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수선 떨길 수십여 분.
곁으로 다가온 정령이 책을 들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살포시 눌렀다.
노력이 결과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이안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정령을 바라보았다.
짧은 눈 마주침.
찰나를 놓칠세라, 정령은 긴 속눈썹을 팔락이며 간절하게 말했다.
“너,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 * *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과제가 생겼다.
우선은 차분히 정리할 필요가 있어 이안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이니.
“……난 머리통이 복잡한데, 저 녀석은 혼자 천하태평이네.”
이안은 깃펜을 쥐며 책상 위에 있는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가리비 모양의 마들렌을 양발로 꽉 쥐고 있었다.
잘 먹는다.
양 볼 가득 쿠키를 채운 모양새가 곧 볼이 터질 것 같았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인데, 표정만큼은 무척 근엄했다.
<이안, 이런 누추한 곳에서 지내도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하는 거다.>
처음 만난 날 녹스가 그리 말했더랬다.
스테이크를 볼이 미어터지게 욱여넣으면서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품위가 넘치다 못해 바닥에 굴러다닌다.
널브러진 녹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안은 도로 종이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아침 이슬 정령인 ‘헤르세’의 부탁.
<내 동생을 구해 줘.>
곤경에 처한 건 그녀의 막냇동생이랬다.
수십 해 전 태어나 아직 아이인지라, 자기가 늘 살뜰히 보살펴야 하는.
그러다 문제의 그 날.
그녀가 땅의 기운을 정돈하는 사이, 숲으로 놀러 나간 동생이 납치를 당했다고 했다.
그 동생을 구해 달라는 것이 정령의 의뢰였다.
“흐음.”
이안은 ‘어떤’ 문장을 죽죽 그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 편 만들기.’
단호한 마음이 녹은 깃펜의 유려한 움직임.
그것을 따라가던 녹스가 쩝쩝대며 머리통을 갸웃거렸다.
“수상하다, 수상해.”
“뭐가?”
“과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치곤, 네 오지랖이 너무 적극적인 것 같아서 말이다.”
“동생을 구해 달라는데 안타깝잖아.”
“음……? 내가 본 너는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 움직이는 놈인데.”
“아, 내가 그랬나?”
회귀하고부터는 계획대로만 움직였으니, 녹스 눈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순탄하게 흐르고 있단 신호인즉.
이안은 흔들림 없는 음색으로 말을 계속해 나갔다.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지. 기회는 토끼 사냥 같은 거니까.”
“토끼 사냥?”
“토끼를 잡으면 고기도 얻고 털도 얻잖아.”
“아……. 하나로 둘을, 아니 여럿을 얻겠다? 욕심이 많은 놈이구나.”
퉁명해도 타박이라기보다 기특하게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
녹스의 속내가 드러난 날갯짓에 이안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가 얻고자 하는 것, ‘헤르세.’
그들은 헤르세란 꽃을 서식지 삼아 공동체로 살아간다.
그래서 군락을 이룬 꽃밭에 사는 모든 이들이 친족이었다.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해.
이 말이 가장 어울리는 정령일 것이다.
이런 집단적 성향 탓일까.
그들은 은혜와 원한에 철저할 뿐만 아니라, 엄청 집착하는 편이다.
……집착.
이안은 깃펜을 느릿하게 빙그르르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