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아이루스’라고 알아?”
“황실과도 거래하는 거대 상단 아니더냐?”
“지금은 그렇지만 처음엔 작은 상점이었어. 규모를 그만큼 키울 수 있었던 건, 헤르세를 구했기 때문이고.”
“보답으로 헤르세가 ‘필릭스 상단주’에게 아침 이슬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아침 이슬.
정령과의 교감력을 높여 주는 단약.
이를 정령사가 섭취할 시, 정령의 고양감이 상승하며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증가한다.
일종의 개다래나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셈.
여러모로 정령사에겐 꽤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헤르세의 특성상,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매우 적은 게 흠이지만.
‘그러니 자연히 비싸질 수밖에 없지.’
이 비싼 아침 이슬을 아이루스의 상단주는 헤르세에게 무한히 공급받고 있다.
서술이 길었는데, 요는 아침 이슬의 효과나 가격이 아니다.
정령 하나를 구한 값으로 상단주가 헤르세‘들’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오호라.”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녹스는 금세 이안이 말한 바를 알아챘다.
상단주가 얻은 것을 자신도 얻겠다는 거였다.
이른바 토끼 사냥.
과제도 해결하고, 헤르세와의 연결 고리도 만들고.
‘허허. 고놈 참.’
대견해서 녹스는 혼자 독식하던 마들렌 하나를 이안에게 건넸다.
선심과 독려.
고스란히 드러난 속내에 이안의 입꼬리가 위로 휘어졌다.
“녹스 네 반응을 보니 내가 더 잘 해내야겠다.”
“한데 말이다, 네 포부는 나쁘지 않다만…… 헤르세를 잡아간 것이 ‘남쪽의 관리자’라 하지 않았든?”
“어.”
남쪽의 관리자.
말로의 탑의 각 방위를 지키는 정령 중 하나이다.
탑이 세워졌을 때부터 그라나토스에 서식하고 있는 토박이 정령.
녹스는 눈길을 창문 너머, 울창한 숲에 두었다.
돌풍에 창문이 덜컥거리는데도 숲은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그 녀석이라면…… 소머리구나.”
“어. 투르다 사막에 사는 케이론 족의 최상위종이지. 그래서 생김도 비슷하잖아.”
“거기다 고것들은 쌈박질에 환장한 것들이기도 하지 않더냐.”
“성격도 다혈질에다 제멋대로고. 그런데도 관리자라고 제 둥지는 잘 벗어나지 않잖아.”
“하니, 관리자를 둥지 밖으로 끌어내긴 힘들 것이다.”
“그렇긴 하지.”
녹스는 마들렌을 꿀떡 삼키곤 이안을 흐릿하게 보았다.
“가장 중요한 건, 관리자의 등급이 상급인 카르디아 3성이라는 거다. 그에 비하면 하찮은 너는…….”
“이제 걸음마 뗀 아기 수준이지. 페이라조 1성이니까.”
녹스의 냉정한 평가에도 이안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마디로 비벼 볼 여지도 없다, 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아이가 체격이 건장한 검투사에게 덤비는 것과 같았다.
까딱하다간 뒈지지.
눈썹 머리를 휜 이안은 지금껏 끄적거렸던 종이를 녹스에게 건넸다.
주니까 받는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종이를 쥔 녹스가 이게 뭐냐는 눈빛을 이안에게 보냈다.
이안은 의문에 답하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관리자를 끌어낼 방법.”
“방법?”
“여태 관리자가 납치한 정령들을 적어 봤어. 먼저 헤르세.”
헤르세는 날개에서 하프의 선율 같은 소리가 난다.
“다음은 사르타베.”
“순록의 뿔을 가진 하얀 토끼는 뿔에서 종소리가 난다고 들었다.”
“그리고 루티아.”
“이놈은 날갯짓할 때마다 휘파람 소리가 난다지.”
이안과 녹스는 번갈아 가며 그간 납치된 정령들의 특징을 읊었다.
말로 하다 보니 더욱 명확해졌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바로.
“소리지!”
수수께끼를 풀어낸 이안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못 볼 꼬라지에 표정이 썩어 들어간 녹스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참으로 칭찬을 막는 낯짝이었다.
“칫! 한데 관리자를 끌어낸 다음엔 어찌할 것이냐? 이안, 너에겐 잡을 능력이 없을 터인데.”
“없기는.”
이안은 피식 웃으며 침대 옆에 놓아둔 가죽 가방을 잡아끌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집에서부터 챙겨 온 것.
가방엔 그의 부족함을 메워 줄 보조 마도구들이 한가득이었다.
* * *
남쪽 관리자가 사는 둥지 근처.
하현달이 짙은 야밤에 이안과 녹스는 적진 앞에 섰다.
불빛 하나 없는 동굴은 으스스했고, 살을 여미는 칼바람은 음침하게 불었다.
그때마다 이안의 손끝에서도 뭔가가 나풀거렸다.
아이 팔 길이만 한 자주색 실.
안개처럼 희미한 그것을 녹스는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뷔트시겐 서단에서만 나는 레드니의 족쇄구나.”
“어. 관리자를 상대하려고 챙겨 온 거야.”
레드니란 거미가 뽑아낸 실로 만든 구속구.
이것에 온몸이 감기면 아무리 최상위 정령이라도 마력을 쓸 수 없게 된다.
왜냐?
레드니의 주식이 마력이라, 실도 특수한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마력 빨아들이기.
때문에 실에 감긴 채 1시간만 지나도, 마력핵이 부서져 소멸하게 된다.
“정령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 족쇄면, 충분히 위협을 가할 수 있지.”
하지만 정령이든 정령사든 이 실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레드니가 10년 동안 실을 뽑아내도 겨우 어른 팔 길이 밖엔 안 나오니까.
심지어 그 길이에 가격은 금화 십만 개다.
평민 4인 가족이 30년을 일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 있는 돈.
녹스는 너울거리는 실을 끊임없이 눈으로 좇으며 입을 뗐다.
“구하기 힘들었을 터인데.”
“고생 좀 했지. 본가에서도 워낙 관리가 엄격한 물건이라.”
이안은 실이 감긴 왼손을 성기게 흔들었다.
작은 손길 하나조차 느슨함이 폴폴 풍겨 왔다.
마치 죽음을 앞둔 노인처럼 한치의 서두름도 없달까.
이안의 느긋함을 뒤쫓는 녹스의 오색 홍채가 더욱 깊게 물결쳤다.
‘……반신의 경지에 든 가주들도 전투 직전엔 저런 여유를 가지기는 힘든데.’
“이안, 너는…….”
“응? 왜?”
“아니다.”
“싱겁긴.”
이안은 근심을 조롱조롱 매단 녹스를 힐끗 보았다.
다정한 것도 병이라더니, 녀석이 딱 그짝이었다.
가만 보면 별일 아닌데, 매사 그의 몫까지 속을 끓인다.
“녹스, 너무 걱정하지 마. 계획이야 엉성해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준비까지 엉성한 건 아니니까.”
이안은 안심하라는 듯 녹스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녀석의 불안이야 이해가 갔다.
녹스가 미심쩍어할 정도로 그의 계획은 단순했으니까.
단계 1.
튕기면 새소리가 나는 레드니의 족쇄로, 소리에 예민한 관리자의 이목을 끈다.
단계 2.
관리자가 걸려들면, 레드니의 족쇄를 관리자에게 감는다.
단계 3.
마력을 쓸 수 없게 된 관리자를 제압한다. 그리고 납치된 헤르세를 구해 의뢰를 완수한다.
허술해 보여도 이안은 이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하면, 쥐가 고양이에게 방울을 달기 위해선 뭐가 필요하겠는가.
고양이보다 실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운이 뒤따라야 한다.
먼저 실력?
관리자가 카르디아 3성이니 제압하려면 가주급이 되어야 한다.
노력해서 언젠가 이뤄야 하겠지만 그게 지금일 순 없었다.
그렇다면 운?
회귀까지 한 걸 보면 이건 확실히 있었다.
이안은 기합을 넣으며 레드니의 족쇄를 바싹 당겼다.
그러자 녹스가 통통한 앞발을 꽉 쥐며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조심해라.”
“응. 다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할 거야.”
녹스의 염려에 답하며 이안은 족쇄를 튕겼다.
즉시 차라랑, 청아한 소리가 남쪽 구역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적막한 밤을 꿰뚫는 리듬.
이에 감응하듯 숲이 웅웅 메아리쳤다.
그리고 새 형상의 정령들이 칠흑 같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레드니의 족쇄가 내는 소리에 화음을 넣는 것 같았다.
족쇄가 한 번 울리면 포로롱.
족쇄가 두 번 울리면 포로롱 포로롱.
얼떨결에 결성된 음악대로 숲이 한창 소란스러워졌을 때였다.
“쿠어어어!”
거친 포효가 숲에 메아리쳤다.
……관리자였다.
지배자의 울음에 숲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살갗을 후비는 선연한 침묵.
잠깐의 고요 후, 쿵쿵 땅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커지는 위압감이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왔다.
“……온다!”
이안은 짧게 녹스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마력을 끌어 올렸다.
* * *
쿵. 쿠우웅.
한 걸음, 한 걸음이 흡사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려 올라간 두 개의 뿔, 날카로운 송곳니, 2m가 넘는 육중한 몸.
검은 갈기를 흩날리며 돌진하는 관리자는 위협적이었다.
“녹스, 지금!”
이안의 신호에 녹스는 날개로 자신의 몸 전체를 덮었다.
일시적으로 검은 날개가 오색으로 빛을 발했다.
“앞으로 5분. 내 고유 기술이 관리자의 등급을 에르그로 낮추는 시간이다.”
“5분 안에 끝을 내야 한다는 거지?”
“그러지 않으면, 관리자 손에 묵사발 나는 건 네가 될 터.”
영롱한 빛을 뿜던 날개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곤 금세 오색 안개로 변하더니 꾸물꾸물 서로 엉켜 들었다.
“네 녀석의 등급이 높았으면 시간을 더 벌어 줄 수 있었다만. 에잉. 반성해라.”
“예이. 정진하겠습니다, 스승님.”
“능청은. 어디서 저런 것이 내게 굴러왔을꼬.”
“내가 널 주운 거지.”
죽어서도 입만 동동 뜰 녀석 때문에 안개가 순간 일렁거렸다.
[하여간 그놈의 말발은. 여튼, 후딱 해치우기나 하거라! 시간 간다!]
걱정 섞인 녹스의 호통에 이안은 긴장을 날카롭게 벼렸다.
그 순간.
등급을 낮추는 안개, 그것을 유유히 통과한 관리자가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동시에 검은 구체가 이안을 향해 맹렬하게 쏘아졌다.
‘일몰의 테두리.’
살뿐 아니라 뼈까지 단박에 녹이는 불덩이.
저것에 스치기만 해도 산에 닿은 것처럼 부식돼 버린다.
이안은 구체를 맞받아치기보다 바람을 이용해 옆으로 흘려보냈다.
치이이잇!
끈적한 덩어리를 받아 낸 땅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일렁일 때마다 주변의 것들을 모두 재로 만들어 버렸다.
스슷. 스스슷.
어마어마한 위력을 주시하며 이안은 거리를 더 벌렸다.
그러지 않으면 퍼지는 연기에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제법 떨어졌는데 연기가 엄청 뜨겁네.’
첫 구체를 피하자마자였다.
시야를 막는 연기를 가르며 검은 구체가 또 한 번 날아들었다.
쿠아아아왓.
이안은 섬광 같은 발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꾸 빠져나가는 그 때문에 약이 올랐는지, 관리자의 그르렁거림이 더 낮아졌다.
‘이대로 공격을 계속 피해야 해.’
힘의 차이가 명백한 관리자를 상대할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째, 놈의 구체는 무조건 바람을 이용해 흘려보내기.
둘째. 그 외엔 미친 속도로 피하기.
모든 마력을 발에만 집중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 방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단 하나.
관리자를 유인하려는 것이다.
그가 미리 깔아 놓은 레드니의 족쇄가 있는 곳으로.
물론 관리자에게 직접 족쇄를 감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의 실력으론 무리였다.
스치기만 해도 뒈질 테니까.
[이안, 재촉하고 싶진 않으나 벌써 1분이 지났다.]
-알았어. 속도를 조금 높일게.
이안은 관리자 주변의 안개가 흔들리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다지 여유가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관리자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해 조금씩, 조금씩 6시 방향으로 나아갔다.
레몬트리가 있는 곳까지.
족쇄는 나무 아래에 두 개, 나뭇가지에 두 개를 묶어 두었다.
그 첫 번째 족쇄.
땅 위로 드러난 나무의 뿌리를 관리자가 밟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