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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6화 (16/214)

제16화

츠스스슷.

뿌리에 묶어 두었던 레드니의 족쇄가 정령의 마력에 반응했다.

애초 짧았던 족쇄는 삽시간에 늘어났고, 관리자의 오른 발목을 휘어 감았다.

거기가 시작점이었다.

족쇄는 담쟁이덩굴처럼 다리 전체로 퍼져나갔다.

“크르릇.”

순간 관리자가 기우뚱하며 게걸음으로 몇 발자국 이동했다.

그러다 레몬트리의 나뭇가지에 한쪽 팔이 부딪혔다.

두 번째 족쇄.

즉시 발동한 덫은 관리자의 왼팔에 뱀처럼 감겨들었다.

이제 남은 건 두 개.

절반 성공했다고 자칫 방심했다간 골로 갈 수 있었다.

특히 상대가 강하다면.

[족쇄의 효과까지 합쳐져, 관리자가 에르그 1성이 되었구나. 이안, 이제 ‘3분’ 남았다.]

“쿠아아아악!”

신체가 억압돼도 관리자는 당황하지 않고 한껏 뒤로 당겼던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웅!

공간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이안의 허리가 바닥에 닿을 듯 꺾였다.

그의 가슴팍 위로 관리자의 날카로운 발톱이 아슬하게 스쳐 갔다.

그리고 놈의 발은 곧장 땅에 처박혔다.

콰콰콰쾃!

움푹 파인 땅덩이만큼 바깥으로 봉긋하게 흙더미가 솟아올랐다.

매서운 바람이 흙더미를 지르밟고 가자, 희뿌연 먼지가 일었다.

틈을 타 이안은 잽싸게 관리자와의 거리를 벌렸다.

‘……후우. 마력이 얼마 안 남았어.’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는 초조함을 억눌렀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한다.

이안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공격을 피했고, 동시에 계산적으로 움직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세 번째 족쇄가 관리자의 오른팔에 파고들 때까지.

‘이제…… 마지막 하나.’

찰나, 이안의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며 시야가 암전되었다.

어지러웠다.

박박 긁어 쓴 마력이 거의 동이 난 것 같았다.

몸이 파들 떨리며 그의 다리가 살짝 꺾이더니 균형이 무너졌다.

[1분도 채……. 이안, 조금만 더 버티거라!]

녹스의 다급한 당부가 귓전을 울린 그때.

이안의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챈 관리자가 지면을 박찼다.

흡사 개구리 같았다.

육중한 덩치가 낼 수 없는 도약을 하더니, 공중에서 그대로 내리꽂혔다.

관리자와 이안의 거리는 고작, 한 뼘.

“……!”

냉혹한 송곳니를 번득이며 관리자가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 순간.

츠츠츠, 불길한 소리가 발밑을 타고 위로 기어 올라왔다.

“잡았다, 납치범.”

이안의 환한 미소에 관리자가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

레드니의 족쇄가 유일하게 자유로운 왼발을 옥죄고 있었다.

관리자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족쇄는 더 깊이 그를 옭아맸다.

“저항해 봤자 소용없어.”

비정한 음색과 함께 육중한 관리자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쿠우우웅!

일어나려 버둥거리는 몸짓을 이안은 무심하게 응시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그저 관망하는 시간은 느릿하게 겨울바람을 묻히며 지나갔다.

빨개진 코끝이 얼얼해질 즈음.

점차 둔중해지던 관리자의 몸부림이 멈췄다.

이안은 손에 남은 족쇄를 내려다보았다.

‘이거면 완전히 관리자를 봉인할 수 있지만.’

실을 올려다보는 관리자의 눈을 직시하며 그는 쪼그려 앉았다.

“너도 알지?”

“…….”

“이게 네 머리통에 감기고 1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그르륵.”

다소 비협조적이었다.

말을 할 줄 알면서 계속 짐승 소리만 낮게 깐다는 건, 대화를 거부한다는 표시였다.

이안은 분기에 찬 소리를 듣다가 차분히 입을 뗐다.

“너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다만, 나도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

“이 나무 보이지? 레몬트리.”

이안이 가리킨 곳으로 관리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삼각형 형태의 노란색 나무는 잎이 구름처럼 몽글몽글했다.

무해해 보이지만…….

“레몬트리는 족쇄의 효과를 증폭시키지. 해서 10분이면 다 끝나.”

“잇!”

“그러니까 할 말 있으면 해. 들어 줄게.”

달래는 이안의 어투에 관리자가 뭔가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인간! 도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거지?”

“원한은 아니고, 의뢰를 받았어.”

“의뢰? 나를 잡으라고?”

“아니.”

“그럼 나를 죽이라든?”

“그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너, 걸핏하면 소리 나는 정령을 납치한다며?”

“어? 무슨 납치?”

관리자가 소 눈망울을 하고 해맑게 되물었다.

발뺌이 아니고 진짜 모르는 눈치였다.

뭐지 싶어 이안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사르타베, 루티아, 헤르세.”

“아, 고것들? 걔들은 내가 내 둥지로 초대한 거다.”

“초대?”

“그렇다. 난 억울하다. 심심할 때 같이 음악 연주를 하려던 것뿐이다.”

억울?

납치범이 납치라는 걸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더는 대화가 무의미한 것 같아서 이안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럼 그 친구들을 풀어 줄 수 있지?”

“그건…….”

이 자식이!

이안은 매타작을 버는 관리자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무튼 됐고. 무조건 풀어 줘. 이 실을 네 머리통에 감기 전에.”

“그럼…… 그것만 이행하면 날 살려 주는 건가?”

“앞으로 다신, 어떤 정령도 납치하지 않겠단 맹세도 하면.”

조건을 달자, 잘도 나불대던 관리자가 조용히 이안을 보았다.

꽤나 집요한 눈빛이었다.

무언가를 끈질기게 가늠해 보더니, 관리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맹세하겠다.”

“입으로 떠드는 건 누구나 해. 그러지 말고, 약속을 어기면 심장이 바스라 진다는 듀리크의 맹약을 해.”

“어렵지 않지. 그것도 할게.”

관리자의 태도가 지나치게 순순했다.

괜스레 찝찝해져 관리자를 조금 더 탐색해 보려 했건만.

그럴 겨를을 주지 않겠다는 듯 관리자가 선수를 쳤다.

그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낸 뒤 다짜고짜 이안의 손목에 떨궜다.

토옥.

정령의 피는 조금 뜨거웠다.

약한 화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

그 피가 스미자 혈관이 까맣게 도드라지며 욱신거렸다.

약간의 통증이 몇 초 지속되었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맹약이 새겨지는 과정을 전부 지켜본 관리자가 눈을 반짝였다.

“맹세는 끝났다. 이제 나 풀어 주는 건가?”

“약속했으니까.”

이안은 관리자에게 감겨 있는 레드니의 족쇄를 시원하게 회수했다.

족쇄를 코트 주머니에 챙긴 후, 그는 깔끔하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미련 없이 떠나는 이안.

조막만 한 인간을 관리자는 잠시 선뜩하게 보았다.

그러다 미간을 일그러트리곤 순식간에 그의 발목을 콰악 움켜쥐었다.

“……!”

전신을 강타하는 오싹함.

일순 이안은 듀리크의 맹약에 깔린 전제 조건이 통하지 않는 건가, 라는 의심을 했다.

전제 조건.

‘서약자는 맹약을 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 채 그는 홱 돌아섰다.

그런데.

냉기 서린 그의 눈에 비친 건…… 눈망울이 그렁그렁한 관리자였다.

“이제부턴 네가 나랑 놀아 줘!”

* * *

납치된 헤르세와 함께 다시 찾은 아르테리아 호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헤르세 무리의 수장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의 얼굴에선 호의가 담뿍 배어 나왔다.

노인의 인사치레에 이안은 예의 바르게 화답했다.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 손녀를 구해 준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헤르세 수장이 꽃으로 만들어진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문질렀다.

고심하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지 이안에게 다시 의중을 물었다.

“무엇으로든 보답하고 싶습니다. 혹여 은인께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손녀분이 무사한 것만으로 되었습니다.”

“이리 겸손하실 데가.”

이안의 겸양에 헤르세 수장의 표정이 더욱 간곡해졌다.

과연.

은혜와 원수를 목숨 걸고 갚는 정령다웠다.

노인은 세상 결연한 표정으로 고집을 꺾지 않겠단 뜻을 내비쳤다.

“우리는 결코 은혜를 저버리는 일족이 아닙니다. 부디 몰염치한 일족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헤르세가 예의 없고 욕심 많은 인간을 싫어한다는 걸 이안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호의를 거절했지만, 지나친 겸손 또한 무례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실상 원하는 게 있는데 계속 내숭 떨어 무엇하랴.

“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실은 제가 과제 하나를 완수해야 합니다. 하여 아침 이슬이 필요합니다.”

“그거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아침 이슬을 귀히 여긴다 들었는데, 으음. 한 다섯 상자쯤 드리면 되겠습니까?”

다섯…… 상자?

수장은 곁에 있는 젊은 정령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지체하지 않고 젊은 정령이 헤르세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나왔을 땐 그의 손에 상자가 들려 있었다.

어른 손바닥 두 개를 쫙 펼친 크기.

그 상자들엔 아침 이슬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림잡아도 한 상자에 4, 50개쯤은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개당 가격이 금화 30개니 저것만 해도 가격이 상당했다.

한데도 수장은 발길에 채는 돌멩이를 주듯 화끈하게 질렀다.

“…….”

과한 양에 이안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과욕은 금물이었다.

오래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더더욱.

선을 지킬 필요가 있어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양만 콕 집어 말했다.

“한 개면 됩니다.”

“예에? 한 개요?”

“예.”

“허허허. 은인이 겸손하신 분이라, 오히려 제 부담이 더 커졌습니다.”

흐뭇한 낯으로 수장은 이안의 선한 미소를 요리조리 보았다.

퍽 성에 찼다.

아주 오랜만에 겸손의 미덕을 아는 인간을 만났으니까.

한 번의 교류로 끝내기에는 이어진 인연이 아까웠다.

어떡한다?

방도를 골몰하다가 수장은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말을 덧댔다.

“고작 아침 이슬 한 개로 은혜를 퉁 칠 순 없지요.”

수장은 틈을 두지 않고 입을 벙긋거렸다.

“하여, 은인께 간곡히 청하고 싶습니다. 오늘 있을 저희 일족의 연회에 필히 참석해 주시기를.”

이안의 대답은 듣지도 않았다.

거절을 거절하겠다는 듯, 수장이 자신의 날개를 문질렀다.

손에 오렌지색 가루가 묻어나자 그는 가루를 세차게 훅 불었다.

그의 입김에 실려 흩날린 가루는 이안의 가슴팍에 닿았다.

왠지 꽃잎으로 간질이는 느낌이라서 이안은 가슴팍을 문질렀다.

‘이게…… 책으로만 보던 연회의 초대장인가?’

헤르세만의 독특한 초대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누구나 가능한 건 아니었다.

수장의 날개에서 나온 꽃가루만이 자격을 가진다고 했다.

* * *

‘호수 위의 연회라니, 특이하네.’

연회가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이안은 조금쯤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손바닥의 표면과 잔물결 치는 수면이 맞닿은 채 이지러졌다.

아르테리아 호수 중앙.

물 위인데도 앉은 자리가 축축하지 않았다.

두툼하고 폭신한 양털을 깔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의 시작을 이런 풍경 속에 맞을 줄이야.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정면을 유심히 보았다.

백에 가까운 헤르세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날갯짓마다 흐르는 하프 선율.

아름다운 몸짓.

그들의 춤사위 끝에 생기는 반짝이는 구슬.

또르르르.

이안은 발치로 굴러온 것을 조심히 집어 들었다.

‘……아침 이슬.’

호수의 수면을 메운 투명한 구슬은 햇빛을 난반사했다.

하여 표면이 유리가 부서진 것처럼 유독 반짝거렸다.

‘직접 보니 신기하군.’

신기해서, 구슬을 둥그스름하게 굴리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안, 연회가…… 허어억. 참으로 재미나다.”

헤르세를 따라 미친 춤사위를 선보이던 녹스가 다가왔다.

얼마나 격하게 흔들었는지 혀까지 길게 빼물고 있었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게. 헤르세가 아침 이슬을 만드는 장면을 직접 보게 될 줄은.”

“특별히 초대된 자들만 볼 수 있는데, 이안 너는 차암 운도 좋다.”

“운도 실력이지.”

거들먹대며 이안은 구김 없이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평소보다 배는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몇 배는 더.

그 모양새를 뚫어지게 보다가 녹스가 은근하게 물었다.

“이안, 그렇게 좋아?”

“어. 헤르세의 신뢰를 얻었단 뜻이니까.”

“하긴. 연회에 초대받은 인간은 내가 아는 한, 지금껏 열 손가락 안에 든다.”

“그렇게 적어?”

“백 년에 한 명꼴? 그러니 실컷 즐기거라.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니.”

“그래야겠네. 녹스 너도 실컷 즐겨. 춤도 더 추고.”

이안의 말은 분명 녹스를 향했는데, 엉뚱하게 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응. 나 열나게 추고 있다. 완전 조아아아!”

경망스러운 말투의 꼬리를 따라가 보니…….

시커먼 소 한 마리가 궁둥이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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