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나흘 뒤.
식물학 수업에서 주어졌던 과제 기간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이안은 클로에 교수의 부름을 받았다.
“기특한 녀석! 과제를 완수한 것은 너뿐이구나, 이안.”
A반, B반, C반을 통틀어 오직 이안만 성공했다.
아니.
에루리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클로에 교수의 아낌없는 칭찬에 이안은 미소로 화답했다.
“저의 성공이 교수님께 기쁨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녀석, 너스레도 떨 줄 알고.”
클로에 교수 또한 미소를 머금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만면에 흐르는 호의.
그 부드러운 공기를 타고 캐모마일 향이 교수실을 휘돌았다.
“이안.”
“예, 교수님.”
“이번 과제를 할 때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지?”
“아. 교수님께서 지식의 목적은 나누는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핫. 녀석. 나한테 공을 돌리는 거니?”
“그 또한 교수님께서…….”
“아이쿠. 됐다, 됐어. 또 날 띄울 작정이라면.”
클로에 교수는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공치사가 과히 나쁘지 않은 듯, 손짓이 흐물거렸다.
제자가 해 주는 칭찬에 유독 약하신 분이니.
그녀의 기분을 추켜올린 이안은 차의 향을 천천히 음미했다.
매끈한 그의 행동이 새삼스러워서였을까.
클로에는 아주 오랫동안 이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업 첫날부터 달라졌다고 느끼긴 했지만.’
오늘따라 녀석의 표정은 장난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생소했다.
자신이 아는 한,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아이였기에.
오죽하면 인형사가 만든 딱딱한 목각 인형 같단 생각을 더러 했을까.
한데 요즘 들어선 곧잘 감정을 드러내곤 한다.
상당히 긍정적인 변화였다.
그라나토스에 틀어박혀 사람을 기피 하던 때에 비한다면 특히나.
“항시 숲에서 살더니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구나.”
“아,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 운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나눠 준 거고?”
“아이들이 헤르세의 활동 시간이 아닌, 전혀 엉뚱한 시간대에 나가는 걸 보고 언질을 좀 주었을 뿐입니다. 교수님께서 과제를 내신 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요.”
“녀석도, 차암.”
‘언어’는 자신을 대변하는 창구라 할 수 있다.
어조나 단어 등등에서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니까.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이안은 상당히 진중하고 노련했다.
자신감을 표출하면서 상대를 존중하는 화법을 구사했으니.
이러한 대화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게 어디 쉽던가.
클로에는 꼭 뷔트시겐 가주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람의 현자.’
뷔트시겐 가주의 별칭이었다.
일을 처리함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현명함.
신분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비로움.
절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지도자로서의 냉엄함.
가주는 현자란 별칭에 걸맞은 인품과 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정말 쏙 빼닮았어.’
“저랑 아버지가 그렇게 닮았습니까?”
“어, 어어?”
“제 얼굴을 태울 것처럼 뜨겁게 보셔서.”
하다 하다 눈치 빠른 것까지 빼다 박은 모양이다.
이안의 웃음기 가득한 말투에 클로에는 호탕하게 탁자를 내려쳤다.
“아하핫. 솔직히 말해, 지금의 네 모습은 젊었을 적 가주님 같구나. 내가 어렸을 적에 본 그 모습 그대로야.”
“지나친 과찬을 받아 탈이 날 것 같습니다.”
“과찬은. 이안 네 명성도, 네 아버지 못지않단다. 너, 지금 엄청 유명하거든.”
“그 정도입니까?”
“아이들이든 교수든 셋만 모이면 네 얘기를 하느라 정신들이 없지.”
클로에는 유쾌하게 깔깔거렸다.
목젖 보이게 웃는 모습.
꾸밈이 없기에, 그 자체로 상대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정말…… 여전하시구나.’
예전에도 늘 이런 모습으로 그에게 조언을 해 줬더랬다.
식물학 교수님답게 마력핵을 얻게 해 준다는 식물에 관해서.
아무런 성과 없이 번번이 실패해도, 교수님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었다.
에루리안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아마 그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 것일 터.
“아무튼. 너의 끈기가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내가 다 뿌듯하구나.”
“언제나 지지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에 교수님.”
이안은 클로에 교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말로는 꺼내 보이지 못했던 과거까지 모조리 담은 인사였다.
“하지만 교수님, 지금 그 기쁨을 다 누려 버리시면 안 됩니다.”
“으응?”
“앞으로도 얼마든지, 자랑거리 삼으실 수 있도록 제가 더 큰 성과를 보일 테니까요.”
“아하하핫. 그런 자신감, 보기 좋구나. 아주 좋아.”
제자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대화는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한 시간가량이 훌쩍 지나 버렸다.
어느새 점심시간.
약속이 있다며 이안이 떠나고 난 뒤.
홀로 남은 클로에는 빈 찻잔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채워지지 않는 도자기에선 청아한 소리가 났다.
가득 채울 것만 남은 이안처럼.
“다행이네.”
“뭐가?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클로에?”
첫 수업을 같이했던 정령, 메이즈가 그녀의 어깨에 매달리며 물었다.
궁금증이 스민 목소리에 클로에는 상냥히 답했다.
“이안 말이야. 예전엔 저 아이를 두르고 있는 독기가, 저 아이를 태워 버릴 것 같았거든.”
“아, 클로에가 종종 했던 말이잖아. 기억나.”
“그런데 지금은 그 애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살아가게 하는 동력처럼 보여.”
“이젠 마음에 독이 없나 보지.”
“그러게. 여유도 보이고.”
“잘 됐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아끼는 제자니 잘 해낼 거야. 이젠 마력핵도 생겼잖아.”
“응.”
클로에는 이안이 나간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라비틀어졌던 본질을 깼으니, 그 그릇에 많은 것들을 채우길 바랐다.
아무것도 쥐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은 채.
* * *
C반 아이들이 생활하는 기숙사, 리아트리관.
그곳의 1층 응접실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B야, B!”
“내 생전 이런 점수 처음 받아 봐!”
“세상에 이런 점수가 존재하다니! 완전 좋다.”
“역시 클로에 교수님! 과제에 실패해도 B를 주셨어, B를.”
발리올 한 명이 제 점수를 들고 목청을 높였다.
들뜬 소년 옆에서 또 다른 아이가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자기 얘기에 집중하라는 듯이.
“야, 근데 아까 봤냐? A반 개자식들?”
“말똥에 처박힌 것 같은 얼굴? 큭큭. 나 그거 보고 묵은 체증이 한 방에 가셨잖아.”
“걔들도 B, 우리도 B. 같은 점수 받고 존심 꽤나 상했을걸?”
“아주 이를 득득 갈던데? 우리보고 C반, C반거리지도 못 하고.”
“아하하하!”
응접실에 모인 C반 아이들은 다 같이 웃어 젖혔다.
한마음, 한뜻이었다.
걸핏하면 C반, C반거리는 거 진짜 짜증 났었다.
그들을 부르는 듯 교묘히 욕을 하던 그것들!
그동안 A반에게 당한 설움과 모욕을 생각하니 더없이 통쾌했다.
“이게 다 이안이 도와줘서 가능했던 거지.”
“맞아, 맞아. 근데 나는 그때……, 이안이 말을 걸어서 기절할 뻔했잖아.”
“너도 그랬냐? 나도 그랬다.”
아이들은 서로의 팔꿈치를 치며 킬킬댔다.
뭘 그런 걸로 쫄고 그러냐며 핀잔을 주고받으면서도 수다는 이어졌다.
“근데 말이야. 이안 걔, 생각보다 친절하더라?”
“아닌데?”
“야, 넌 도움을 받아 놓고 말을 그딴 식으로…….”
“아니, 내 말은 이안이 우리랑 말 한마디 안 해서 그렇지, 예전에도 A반처럼 무시한 적은 없었다고.”
“그렇긴 했어. 무시보단 오히려…….”
“우리를 피하는 느낌…… 이었지, 아마?”
아이들은 1학기 때의 이안을 되짚어 보았다.
기억나는 거라곤 항상 ‘혼자서’ 책을 읽는 모습뿐이었다.
누군가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피하려는 것처럼.
그랬었는데…….
“그나저나 이안이 우리 초대에 응하려나?”
동글동글하게 생긴 발리올의 눈길이 제 앞에 놓인 탁자로 향했다.
조촐한 다과회를 연상시키듯.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 모양이 다양한 디저트류와 음료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처음 차림 그대로였다.
“아마…… 안 오지 않을까? 1학기 때의 전적을 생각하면.”
“하긴. 초대해도 여태껏 한 번도 안 왔잖아.”
“오늘은 이안을 위해 연 건데. ‘고맙다’라고 말하기도 틀렸네.”
“야, 야. 축축 처지지 말자. 좋은 날이잖아. 그냥 우리끼리라도 재밌게…….”
말을 하다 말고 발리올은 입을 쩌억 벌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녀석이 보고 있는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응접실 입구 쪽…….
“……!”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이안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 아이들은 순간 당황했다.
자신들이 불렀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그렇게 잠깐 멍하게 있다 정신을 차린 발리올이 벌떡 일어섰다.
“어, 어……. 이안…… 왔어? 여, 여기…… 앉아.”
이쪽으로 오란 손짓에 이안은 걸음을 옮기며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혈기 왕성한 남자애들이 모여 포도 주스를 홀짝이고 있었다.
포도 주스를!
‘같은 나이대인데 참 많이 다르네.’
전란의 시대,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어 버린 그때.
그 시절을 함께했던 어린 용병들은 상당히 조숙했다.
음주 가무는 기본이요, 그 옆에 창부를 끼고…… 이건 야설이 되니 넘기자.
그런 녀석들만 보다가 이 병아리들을 보니 뭐랄까.
참으로 해맑아 보였다.
“꼭 유령 본 사람처럼 뭘 그렇게 더듬어? 내가 괜히 온 건가?”
“어? 아, 아냐. 잘, 잘 왔어.”
“그럼 서 있지만 말고 편히 앉을까?”
이안은 발리올이 가리킨 앞자리로 가 차분히 앉았다.
여유로운 기색과 낙낙한 태도.
마치 이 연회를 주관한 주인장 같았다.
“보고만 있으려고 차린 음식은 아닐 거 아냐. 먹으면서 얘기들 나눠.”
이안의 당당함에 홀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이안, 너도…… 많이 먹어.”
“어. 초대해 줘서 고맙다.”
별거 아닌 인사에 아이들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흡사 젖먹이 강아지 같달까.
너무도 쉬이 연상되는 모습에 이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웃는 게 뭐 대수라고.
녀석들은 먹던 포도 주스를 거하게 뿜으며 콜록거렸다.
아까보다 더 어수선해진 분위기.
정돈되지 않는 혼란은 얼마간 더 지속되었다.
그러다 또 어느 순간부턴 녀석들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이안의 물음에 아이들은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조용히, 그러나 나름 치열하게 이어진 실랑이.
그 끝자락에 대표로 루하흐, 아니, 레브가 입을 열었다.
“아, 실은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다들 모인 거야.”
녀석의 말 때문인지, 포도 주스에 취한 건지, 아이들 얼굴이 죄다 불그죽죽했다.
하는 짓들이 귀엽다.
하지만 이런 간질거리는 분위기는 참을 수가 없었다.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으니까.
아무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할 시점인 것 같았다.
“앞으로 잘 지내 보자.”
이안은 포도 주스를 술처럼 단숨에 목구멍으로 붓고선 일어섰다.
조금이나마 거리감을 줄여 보고자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가.
얼굴도 비쳤겠다, 이제 남은 용건만 마무리 지으면 될 터.
이안은 들고 왔던 유리 상자를 레브 쪽으로 밀었다.
대번에 아이들의 관심이 상자로 몰렸다.
“그리고 이건 초대해 준 것에 대한 답례.”
‘오다 주웠다.’, 딱 그 표정이었다.
깔끔한 태도를 선보인 뒤, 이안은 일어서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느긋한 뒤태.
멀어지는 그를 빤히 주시하던 레브는 눈길을 유리 상자로 돌렸다.
왕관 모양의 오렌지색 꽃.
‘……이거!’
상당히 놀란 레브는 상자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달짝지근해서 벌꿀을 연상시키는 향.
어떤 확신에 굳어 버린 그와 달리,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꽃을 우물거렸다.
“이안은 좋은 놈이야.”
“먹을 거 줘서?”
“넌 내가 그런 쉬운 놈으로 보이냐? 근데 이거 생긴 거랑 다르게 왜 이렇게 셔? 꼭 레몬 마시는 것 같다. 으윽!”
“그러게. 뭐가 이렇게 미치도록 시냐?”
“크으읏. 준 성의는 고마운데, 도저히 못 먹겠다.”
오두방정 떨다 뱉으려는 아이들을 보며 레브가 단호히 말했다.
“뱉지 말고 삼켜.”
“응? 삼키라고? 레브 넌 입맛에 맞나 보다? 식탐도 없는 애가 웬일이래? 아, 그냥 내 것도 줄까?”
“그거 나한테 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걸.”
“에이. 이게 뭐라고. 겁나 시기만 하구만.”
“그거? ‘헤르세의 환희.’”
“응? 뭔 환희?”
“헤르세의 환희. 헤르세가 연회를 열 때만 간혹 나온다는 영약.”
“……뭐어어?”
“희귀한 거야. 한 알만 먹어도 교감력을 무진장 높여 주거든.”
“…….”
“너희들이 정령을 얻게 된다면, 그 정령에 대한 지배력을 빠른 시일 안에 최대치까지 찍을 수 있을 만큼.”
“진짜아앗?”
아이들은 턱관절 나가게 입을 떠억 벌렸다.
이런 물건은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
직계들이나 먹을 법한 귀한 것.
그렇게 좋은 걸 지금 답례라고 우리한테 던져 줬다고?
아이들의 괴성은 겨울밤의 버석한 공기를 타고 짱짱하게 퍼져 나갔다.
유유히 계단을 밟는 이안에게 가 닿을 만큼.
그 쨍한 환호에 이안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슬그머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