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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9화 (19/214)

제19화

“진정, 후회 안 하느냐?”

벌써 ‘이틀째’다.

지겹지도 않은지 녹스는 틈만 나면 똑같은 질문을 해댔다.

눈구멍을 부릅뜨고, 콧구멍을 넓혀 대면서.

“뭘 계속 묻고 그래.”

“물을 만하니 그런다. 헤르세의 환희지 않더냐. 그걸 아이들에게 주었으니.”

“녀석들이 그걸 먹고 페이라조를 넘어서면 좋잖아?”

“진정 그것이면 된다고?”

연거푸 묻는 녹스에게 이안은 색색의 사탕이 담긴 병을 떠안겼다.

50년 산 한 살배기가 생각이 지나치게 많다.

조금은 단순해도 될 것을.

“저번에도 말했잖아. 내가 생각 없이 일 저지르는 놈은 아니라고.”

“오호? 생각이 있으시다?”

“녹스, ‘파라칸시스’ 시합이라고 알아?”

“안다. 학기 말에 있는 반 대항 시합 아니더냐. ‘불의 가시’를 놓고 경쟁하는.”

“어. 그게 나한텐 반드시 필요해.”

불의 가시.

마력을 대폭 상승시켜 주는 상급 영약이다.

괜찮은 물건이지만, 그 때문에 불의 가시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오직 그에게만 적용되는 어떤 효과 때문이었다.

막힌 3대 원소 중에 불의 통로를 개방할 수 있는 효과.

“그러려면 시합에서 이겨야 하고.”

“아……. 그래서 녀석들에게 그걸.”

끄덕끄덕.

“하긴. 네가 비실비실한 C반 애들을 이끌고 A반을 이기려면, 그 정도는 투자해야 승산이 있겠구나.”

“어. 반드시 녀석들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지.”

불의 가시와 헤르세의 환희.

두 개를 놓고 경중을 따졌을 때 그에게 더 필요한 것은 불의 가시였다.

교감력을 올려 주는 거야 다른 경로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하여 환희를 아이들에게 나눠 준 것에 후회는 없다.

“역시 넌 참…….”

사탕 통을 꽉 끌어안은 녹스는 이안의 먹색 동공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담담한 녀석의 동공.

혜안을 가져 흔들림이 없는 자가 대개 저런 눈빛을 가진다.

행동 하나하나에도 저렇듯 계획이 있으니.

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나, 과한 칭찬은 독이 될 수 있음에 녹스는 부러 말을 아꼈다.

그리고 해답도 얻지 않았던가.

녹스는 일찍이 관심이 식은 얼굴을 하고선, 통통한 앞발을 유리병에 쉼 없이 비벼댔다.

“한데 말이다, 이안.”

“응?”

“커흐흠. 기억하느냐?”

“뭘?”

“네 녀석이, 과제가 끝나면 열심히 도와준 ‘보상’을 내게 주겠다 한 거 말이다.”

“아, 그거.”

“그래, 그거!”

녹스의 비비적거림이 더욱 격렬해졌다.

저러다 발바닥 가죽 다 까질지도 모르겠다.

‘어떤 기대감’에 절어 아픔 따윈 깡그리 잊은 듯싶지만.

발바닥의 평안을 위해 이안은 품에서 얼른 ‘책’ 한 권을 꺼냈다.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양장본이었다.

“당연히 잊지 않았지. 자, 약속한 책!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위대한 녹스 님.”

“험험. 수고랄 것까지야. 그저 하찮고 연약한 제자를 도왔을 뿐이다. 공치사는 필요치…….”

“아, 필요 없다고? 그럼 다시 되팔아야겠네.”

이안은 너스레를 떨며 도로 책을 품 안으로 가져갔다.

이제 막 세상 빛을 본 책이 도로 어둠으로 묻히기 직전!

터억, 녹스가 그의 손목을 잽싸게 낚아챘다.

“공치사는 필요치 않으나! 내 너의 성의니 ‘기꺼이’ 받아 주마!”

콧구멍을 과하게 벌름거린 녀석이 책을 꽈악 움켜쥐었다.

거의 강탈 수준이었다.

녹스의 격양된 몸짓에 이안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수호자의 취미란 것이…….’

《수호자님께서는 언제나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역사서’나 ‘철학’에 관한 책을 읽으셨답니다. 감히 마주할 수 없는 눈부심은 제국을 염려하는 마음이 드러난……》

……은 개뿔.

찬양에 가려진 숨은 진실.

수호자가 들고 있었던 책은 역사서도 철학서도 아니었다.

그건 야한 소설이었다, ‘야한 소설!’

‘녀석의 취미가 야설 읽기라니.’

그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보든 말든.

녹스는 입꼬리 찢어지게 웃으며 책을 촤악 펼쳤다.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셔츠를 뜯었나 Ⅰ』

세상 모든 야설을 섭렵한 저놈을 위해 어렵게 구한 신작!

야설계의 대가가 5년을 은둔하다가 낸 역작!

이 책을 판 상인의 말을 고대로 읊으며 이안은 온갖 생색을 냈다.

“후우. 내가 그 시뻘건 책 하나 사재끼려고 수도에서 얼마나 개고생한 줄 알아?”

“제목이 차암 맘에 든다. 한데 아가씨가 시종들의 셔츠를 어떻게 뜯었을꼬?”

“그 책, 하마터면 못 살 뻔했다고. 웃돈을 주고 겨우 구해…….”

“딱 내 취향일세. 삽화까지 있는 것이. 푸흘흘.”

“녹스, 내 얘기 듣고 있어?”

“잘했다, 잘했어. 요 똘똘한 녀석! 홀홀홀. 눈이 나처럼 아주 높아!”

“허어어어.”

수련으로 성취를 얻어도 못 받던 칭찬, 오늘 듬뿍 받는다.

속사포로 쏘아 놓고 본인도 찔리는지.

눈알을 사방으로 굴리던 녹스가 배를 뚱 내밀었다.

“……내 이즈음에서 한마디 보태자면, 커흠.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게 다아 새로운 지식 습득인 것이거늘.”

“지식 습득?”

“깊게 파고들면 다친다. 하나, 건성으로 듣지 말고 마음에 새기거라.”

책을 받은 시점부터 녹스의 말은 일방통행이었다.

그가 뭐라 하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해댔으니까.

“역시 이쪽은 늘 지식이 새롭다, 아주 새로워.”

“암요.”

“파도 파도 끝이 없어 내 지식 욕구를 마구 자극하는구나.”

“그러시겠죠.”

“한데…… 갈수록 어째 이안 네놈의 말투가 불손하다?”

새침 떨던 녹스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아무리 칼날 같이 찔러 와도 이안은 그저 녀석이 귀여웠다.

이 와중에도 근엄함을 챙기려 들다니.

녀석의 빤한 속셈에, 푸스스 새던 웃음이 크게 터져 버렸다.

게다가.

표정은 엄한데, 손은 닳을세라 책을 애지중지 쓰다듬고 있지 않은가.

완벽한 언행 불일치.

보아하니 스승님의 ‘은밀한 취미’를 지켜 줘야 할 때인 것 같았다.

해서 이안은 어느 때보다 비장하고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오오, 과제 해야 하는 온실에 벌써 도착했네.”

“…….”

“존경하는 스승님, 먼저 들어가시지요.”

이안은 날갯죽지에 책을 ‘소중히’ 넣는 녹스의 등을 살살 밀었다.

원하는 걸 얻은 녀석의 기꺼움을 대변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즐거운 그의 마음을 대변하려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유리 온실의 표면이 과하게 번쩍거렸다.

* * *

“왜, 이안 것만 잘 자라지?”

“그러게.”

“대체 뭐가 문젤까?”

온실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의 두런거림이 날아들었다.

아이들은 클로에 교수님이 내준 두 번째 과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데, 희한한 것이 있다면 딱 하나.

본인들 것은 제쳐 두고 그의 화분 앞에만 몰려 있다는 거였다.

“…….”

오늘도 저러고 있네?

이안은 옹기종기 모인 머리통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아이들은 연거푸 조잘거렸다.

“혹시 말이야. 이안은 헤르세를 잘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나?”

“그러겠지. 시들시들한 우리 것과는 확실히 다르잖아.”

“그래, 맞아. 얘만 진짜 오동통한 걸 보면 확실해.”

확신에 찬 발언 후, 발리올은 이안의 화분을 쓰다듬었다.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겉만 훑다가 녀석이 불쑥 제안 하나를 던졌다.

“그냥 우리…… 이안한테 물어보자.”

“물어보자고?”

“응. 중앙 아카데미 교수들만큼 뭐든 잘 알잖아. 교수님들이 말하는 거 너도 들었지?”

“들었지.”

“그러니까. 우리의 싹을 구제할 방법은 이안뿐이야.”

“맞아, 맞아. 게다가 걔, 의외로 다정하잖아. 그러니 알려 줄지도 몰라.”

다……정?

이안은 잘 걷다가 오른발을 삐끗했다.

기가 찼다.

어쩌다가 하루아침에 자신에 대한 평가가 다정이 되었을까?

뭘 해 준 것도 없는데.

그가 기막혀하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뭔가 형님의 기운이 철철 느껴지지 않아?”

“맞아. 이틀 전에 날 보던 눈빛이, 우리 아버지가 날 보는 것보다 따스하더라.”

“야, 그건 좀.”

“그렇게 느끼는 게 나뿐이냐? 너도 그렇게 말했잖아.”

‘이런 생각들을 하는 줄은 몰랐네.’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당황스러웠다.

이안은 괜스레 찬 손바닥으로 홧홧해진 얼굴만 문질러댔다.

살갗이 마찰하는 미약한 소리가 들릴 리 없건만…….

절묘하게 아이들의 머리통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어?”

딱 마주친 시선, 어색한 기류.

잠깐의 정적이 단시간에 온실 안을 가득 메워 갔다.

수십 초?

대치 아닌 대치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말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에게서 ‘형님’과 ‘아버지’란 단어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진짜 그렇게 부를 리 없는데.

이안은 애써 차분한 척, 표정을 굳히곤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아, 그게…….”

이안의 아는 척에 정작 제안을 한 발리올은 당황해서 쭈뼛거리기만 했다.

녀석처럼 도통 입을 떼지 않는 아이들.

그들 틈바구니에서 비집듯이, 작지만 강단 있는 음색이 들려왔다.

“클로에 교수님이 주신 과제 말이야. 헤르세 키우는 거.”

입을 뗀 건, 레브였다.

녀석은 줄곧 C반 아이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아이들이 신뢰하고 의지해서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레브를 보며 이안은 매끄럽게 말을 받았다.

“과제? 그게 왜?”

“싹을 두 뼘 높이만큼 자라게 하라고 하셨잖아.”

“그 정도가 되면 언제든 제출하라고 하셨지.”

“응. 그래서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싹이 점점 말라 가.”

레브의 시선을 따라 이안은 아이들의 화분을 훑었다.

시들시들했다.

싹이 누런 게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흐음.’

이안의 입이 열리길,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기다렸다.

의욕이 넘쳤다.

첫 번째 과제를 받았을 때와는 그 태도가 사뭇 달랐다.

아마도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았기 때문이리라.

‘축 처졌을 때보다 보기 좋네.’

이안의 입꼬리는 의식할 새도 없이 상향선을 그렸다.

“일단 싹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말해 봐. 문제점을 찾아야 고칠 수 있으니까.”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마침 수업을 위한 긴 책상도 있겠다, 이안은 책상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앉아서 얘기하자는 신호에 아이들은 호다닥 자리를 잡았다.

가만 보면 의외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헤르세는 호수에서만 피잖아. 물을 엄청 많이 먹는 식물이래서, 물을 많이 주고 있어.”

“나돈데. 시간마다 아이 머리만 한 항아리로 열 통쯤 붓고 있어.”

“나도, 나도. 혹시 해충 생길까 봐 잎도 매일 닦아 주고, 거름도 주고.”

“아니, 틈날 때마다 와서 돌보는데 왜 죽지?”

아이들의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자신이 우려했던 바와 다르지 않아, 이안은 재차 아이들에게 질문했다.

해결책은 주겠지만 무턱대고 떠먹여 줄 순 없으니까.

“그러니까 시간마다 들른다는 거지?”

“응.”

“그럼 너희들은 내가 화분을 보러 온실에 몇 번이나 들르는지는 알아?”

고개를 젓는 아이들 틈에서 레브가 자신 있게 답했다.

“알고 있어.”

레브는 이안을 뚫어지게 보며 막힘없이 얘기했다.

“아침과 저녁, 딱 두 번 화분에 손을 대. 이슬을 맞히려고.”

“두 번. 내가 과제 하기 싫어서 성의 없이 구는 게 아니라면, 이유가 뭘까?”

“…….”

“음. 그럼 일단 헤르세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볼래?”

그의 물음에 아이들이 마구잡이로 한마디씩 했다.

“대표적인 야생화야.”

“그리고 꽃이 예뻐서 수요가 많았어. 귀부인들이 온실에서 키우고 싶대서, 상단들이 헤르세를 독점하려고 난리 난 적이 있을 만큼.”

“근데 다들 실패했잖아?”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싹이 자라는 건 두 뼘이 한계였으니까. 그 이상을 키운 사람이 없댔어.”

“맞아. 그래서 경쟁에 뛰어든 상단들 몇은 파산했다 들었어.”

아이들이 대화하는 걸 지켜보다 이안은 원하는 단어가 나오자 끼어들었다.

“왜 ‘파산’했지?”

“투자했는데 손해만 봤으니까. 헤르세 자체가 손길을 타면 죽어 버리는…….”

……아!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챘다.

과제를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본질을 놓친 거였다.

헤르세란 꽃은 헤르세란 정령처럼 수줍음이 많은 꽃이었다.

즉, 사람의 손길 자체를 거부했다.

살짝이라도 만지거나 뿌리를 파서 옮기면 죽어 버린다.

그나마 손길을 타도 말짱한 싹조차 두 뼘 높이가 한계였다.

그 이상이 돼야 꽃이 피는데 그러질 못하니, 결과야 보나 마나지 않은가.

한마디로 인공적인 재배가 불가능했다.

꽃 자체가 헤르세의 집이니, 오롯이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터.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애지중지한 게 문제란 거지?”

답을 찾은 아이들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아침, 저녁으로 이슬만 맞혀도 돼.”

“알았어. 열심히 해 볼게.”

이것들아,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라니까!

화분을 보며 생각에 잠긴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보는 이안.

서로의 시선이 엇갈렸다.

이번 과제의 주제는 ‘본질’이었다.

본질, 어떤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

그것을 파악하라는 것이 클로에 교수님이 과제를 낸 이유였다.

그녀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제가 간단하다고?

아니, 그녀가 내주는 과제야말로 제일 어려운 거였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물어야 하니까.

‘교수님께서 일전에 내게 찾으라고 하신 것도 이것이겠지.’

이안은 탁자를 검지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지난번 클로에 교수님과 개별적으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였다.

교수실을 나서는 그를 향해 교수님이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때론 말을 아껴야 할 때가 있지. 이번이 그런 것 같구나. 하지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과제에 숨겨 놨단다. 찾아보렴.>

이제 막 출발점에 선 제자에게 과한 염려는 훈계가 될 터.

그래서 에둘러 과제로 표현하신 것이다.

끊임없이 정진하고 나아가되, 본질을 잃지 말라고.

‘그의 본질.’

마력핵이 없어 결핍과 비참함을 아는.

그렇기에 절망에 몸부림치며 밑바닥을 기어 보았던 삶.

클로에 교수님은 당부하고 싶었을 것이다.

초심을 잃지 말고, 마력이 약한 이들을 차별 없이 잘 보듬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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