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레브 아르데슈.
바다 엘프의 서식지인 아르데슈란 영지, 그곳 영주의 둘째.
표면적으론 그렇다.
드러난 외양 또한 마찬가지였고.
혈관이 비치는 투명한 피부. 물 빠진 푸른색 머리카락과 옅은 푸른색 눈동자.
영락없이 방계의 특징만 지녔지, 직계의 특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페르나로 인해 전부 감춰졌으니 그렇겠지.’
하지만 ‘냄새’만은 예외였다.
오롯이 루하흐의 ‘직계’에게서만 나는 그 향기 말이다.
청량한 에드레이 나일의 바다 냄새.
루하흐의 표식이라 불리는 그 향이, 미약하지만 계속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안은 스산한 적막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의 경계심만 사겠지.”
레브처럼 의심 많은 상대를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완전한 거짓으로 완벽히 속이거나, 배를 드러낸 개처럼 속내를 다 보이거나.
지금은 후자를 택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얘기하는 건, 너와 친해지고 싶어서야.”
“……뭐어?”
“친구하고 싶다고.”
“친……구?”
“어. 그래서 네가 하는 의심부터 먼저 풀고 싶었어.”
“아…….”
“생각해 봐. 내가 만약 감시자였으면 네가 A반 것들한테 괴롭힘당할 때 도와줬을까?”
“…….”
“그냥 놔뒀겠지. 죽든 말든. 괜히 끼어들어 네 의심을 살 게 아니라.”
“…….”
또다시 적막이 찾아와 두 사람 사이의 빈틈을 메웠다.
수 분? 혹은 수 초?
길면서도 짧았던 시간이 지난 후.
“확실히 이안 네 논리는 완벽하고, 내 의심은 빈약하네.”
레브는 납득한 것 같은 기색을 내보였다.
오해를 깔끔하게 푸는 것이 친구 되기의 첫걸음이지 않겠는가.
순조롭게 첫발을 내디딘 것 같단 예감이 든 그때였다.
벌떡.
팽팽하던 줄이 끊어진 것처럼 레브가 거칠게 일어섰다.
그러고는 어떤 사족도 없이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행동이 하도 재빨라서 그대로 가 버릴 줄 알았는데.
“……네 망상에 맞장구쳐 줄 순 없지만. 크흠. 저번 일은 미안했어.”
갑자기 멈춰 선 레브가 뜬금없는 사과를 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저번 일?”
“개새끼들한테서 구해 준 거 말이야. 그때 고맙단 말을 못 해서.”
“아아. 그건 됐어. 살리카가 짜증 나서 그런 거니까.”
이안의 어투는 가볍다 못해 건들건들했다.
상대의 부담감을 덜어 주려는 배려 때문일까.
이안의 의도는 도리어 어떤 부채감을 만들어 냈다.
입술을 짓씹은 레브는 몇 초간 가만히 있다가 도로 걸음을 옮겼다.
자박자박.
속도는 일정했지만,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눈 속에 푹푹 파였다.
발이 무겁다는 것은 고민이 많다는 뜻.
[저 녀석, 오늘 잠자긴 글렀구나. 네놈이 들쑤신 통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터이니.]
-그래도 영민한 녀석이라 오래 고민하진 않을걸?
[남한테 짱돌 던져 놓고 좋아하긴.]
* * *
기분이 좋은 만큼 날씨마저 좋았다.
이안은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수련에 열중했다.
어제, 쥐가 나도록 입을 털었던 히오나스 호수 서편.
“바람이 좋네.”
그의 느른한 음색을 타고 바람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쇄애액.
저 멀리 날아간 화살촉은 땅바닥에 깊숙이 꽂히며 흩어졌다.
“녹스, 어제는 물고기를 먹었으니까 오늘은 벨렘을 잡아서 먹자.”
“‘벨렘’이면 흰 순록이구나. 그거 재빨라서 노련한 사냥꾼도 잡기 힘들다던데.”
“날 처음 만났을 때 먹은 스테이크 기억하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잊겠느냐.”
“못 잊을 만하지. 그때 다섯 접시나 흡입했잖아. 스승님이 제일 좋아하는 거니까, 이번엔 내가 ‘직접’ 잡아 줄게.”
이안은 거들먹대며 연거푸 바람 화살을 날렸다.
사냥이든 기다림이든 맥락은 비슷하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맛 좋은 먹이를 얻기 위해선 참을 줄 알아야 한다.
‘하여튼 집요한 녀석.’
녀석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두 시간째 한자리에 눌어붙어 있다.
질렸단 기색으로 녹스는 앞발을 통통 튕겼다.
찰박찰박.
짧은 발재간에 호수의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그러자 밑바닥에 숨어 있던 히오나스가 금색 꼬리를 저었다.
군침 돌게 하는 저 물고기나 벨렘이나.
저 질긴 놈에게 걸렸으니 기어이 씨가 마르고 말 터.
“저것들이 가엾어 보이다니 원.”
“응?”
“아니, 그냥 혼잣말이었다. 한데, 연습은 언제까지 할 것이냐?”
“아. 조금만 더.”
“이러다 벨렘 다 도망가겠다.”
“설마 내가 놓칠까. 그게 어떤 재룐데.”
“하긴. 똑같은 사냥감이라도 ‘그라나토스에서 나는 것’이라면 네겐 특별하니.”
녹스는 팔짱을 끼고 다 안다는 투로 읊조렸다.
‘나는 네가 지금, 사냥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라는 투.
그런 녹스를 흘끗 본 후 이안은 웃으며 대꾸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라나토스의 정수를 ‘흡수’하며 자라니까.”
“그 정수가 어디 보통 정수더냐. 대기를 무겁게 짓누를 만큼 마력이 넘치는 이 그라나토스만의 것인데.”
“그래서 태곳적부터 숲에서 자란 것들은 마력이 쌓여 있잖아.”
그것들을 섭취하면 마력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안에 한해서’였다.
그가 말로의 탑의 ‘주인’이 되면서 따라온 일종의 혜택이었으니까.
이안은 바람 화살 다섯 개를 힘차게 쏘았다.
화살이 나아가며 생성한 파동엔 어떤 기대감이 스며 있었다.
“물론 영약이나 정령서에 비할 건 못 돼. 축적되는 양이 적으니까.”
“새똥 같은들. 이안 너에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어. 남들보다 뒤늦은 출발에서 생긴 간극을 메우는 정도는.”
부족함을 메울 수단이 곁에 있지 않은가.
이 에루리안에 머무는 동안, ‘잘’ 활용해 어떻게든 성과를 얻을 것이다.
수련의 성취든, 사람이든 간에!
그의 불타는 의욕만큼 그가 만들어 내는 화살의 개수가 점차 늘어났다.
반면.
기운을 뺏긴 양 시들해진 녹스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배때기를 스치는 정오의 볕이 따사로웠다.
마치 봄인 양.
“그건 그렇고. 어찌하여 정작 제일 큰 사냥감은 안 오는 것이냐?”
“큰 사냥감? 아, 레브?”
“내 보기에, 그 아이의 성정이 꽤나 신중해 보이더니.”
“아마 오늘은 안 올 거야. 상황이 상황이라 고민을 하루 만에 끝낼 순 없을 테니. 더군다나 감춘 비밀이 워낙 커서.”
“하긴. 보통 비밀이 아니지.”
“그러니까 7년 가까이 혼자 끌어안고 있었잖아. 뭔가를 결정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결정이든, 녀석에게는 생의 분기점이 될 테니까.
* * *
이안이 사냥에 여념 없는 주말을 보내고 있던 그 시각.
뷔트시겐 저의 정문에는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전방에 있는 워프 게이트만 노려보면서.
“흐으음.”
풍채 좋은 그림자의 한숨은 묵직했다.
뭔가 실망한 것 같은 숨이 전부 사그라지기 전.
“가주님.”
시들한 그림자에게로 칼브란이 정중하게 다가왔다.
그의 팔에는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두툼한 코트가 들려 있었다.
“도련님은 그만 기다리시고 이만 들어가시지요. 저녁이 다 되어 날이 찹니다.”
“되었네. 아직 밤이 된 건 아니잖은가.”
“도련님께서 어제 서신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적혀 있길, ‘때가 되면’ 오시겠다고…….”
“흥.”
“성취를 이루시면 가주님을 뵈러 오실 겁니다, 필히.”
“그 녀석이 만족할 성취를 이룰 때가 되면, 이미 난 늙어 죽었겠군.”
가주의 콧바람은 워프 게이트 초소의 지붕만큼 뾰족했다.
딱 그만큼 성마른 낯에는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틀 내내 도련님을 기다렸으니 그럴 수밖에.
정확히는 이안이 떠난 뒤로 주말마다 이랬다.
멀리 있는 자식을 기다리는 아비의 마음은 촌부나 왕이나 똑같은 것을.
칼브란은 훔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주님, 도련님께선 가주님과 제가 ‘무척이나’ 보고 싶으실 겁니다.”
“오지도 않는데, 무얼.”
“오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혹…….”
“혹?”
“오시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으응?”
가주는 웬 쉰 소리냐며 칼브란 쪽을 쳐다보았다.
웬일인지 칼브란의 표정엔 삭풍이 불고 있었다.
‘할 말이 많아요.’는 덤이었고.
어이하여?
의아해하는 가주에게 설명을 풀어놓으려 칼브란이 입을 뗐다.
“이게 다아! 2장로, 그 망할 영감탱이가 원흉이지요.”
“2장로?”
“두 달 안에 성과를 보여야 하는 도련님께서, 영감탱이의 눈치가 보여 집에 오실 수나 있겠습니까.”
“아아.”
“도련님이 오시면, 그 영감탱이가 득달같이 달려와 신경을 박박 긁을 터인데.”
칼브란은 외알 안경을 거칠게 추켜올렸다.
그의 손길이 어쩐지 조금 음침했다.
“그러니! 도련님께선 오고 싶어도 오실 수 없는 상황에 놓이신 것이지요.”
“흐음.”
“하니, 그 방해물만 제거한다면!”
“이안이 집에 올 것이다?”
“예.”
생각에 잠긴 가주를 말끄러미 보던 칼브란이 속살거렸다.
“가주님, 제가 누굽니까? 가주님의 오른팔이며 지혜의 주머니이자, 가려운 곳을 알아서 긁을 줄 아는 충신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러하지.”
“이 칼브란, 가주님을 위해 고심하다 방도를 짜냈지요.”
“방도라 하면?”
“영감탱이에게 임무를 맡기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임무를?”
2장로는 진즉 은퇴한 다른 장로들과 달리 현역이었다.
즉, 지금도 임무를 달리고 있다는 뜻.
이런 행보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힘이 곧 정의이고, 진리이며, 납득이라는.
이를 반영하듯 2장로는 육십 줄의 나이에도 여전히 새벽마다 수련하고 있다.
결코, 입만 터는 부류는 아니란 거였다.
그에 대해 잘 아는 칼브란은 눈알을 번득거렸다.
“후후훗. 단기 임무가 아닌 ‘장기’ 임무로 말입니다.”
“아. 한두 달쯤 걸리는?”
“예!”
“위험하진 않은데, 지루하기만 한 그런?”
“그렇습니다. 가주님께서 콕 집어 ‘지정 임무’를 보내는 것이지요.”
“지정 임무는 ‘신임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니.”
“예. 가문을 위하는 영감탱이의 충성심을 가주님께서 알아주시는 것뿐이지요. ‘단지’ 그뿐입니다!”
칼브란은 딱 잘랐다.
이것은 음모나 흉계가 아니라는 양.
이에 동조하듯 모르쇠로 일관한 가주가 매끈한 턱을 쓸어내렸다.
“……학업에 지친 이안이 편히 쉴 곳은 집뿐이지 않겠나?”
“아무렴요.”
“눈치 볼 사람이 없어야 편할 테고?”
“그렇습니다, 가주님.”
“하면. 크흐음. 칼브란 자네의 충언을 내 고려해 봐야겠네.”
가주와 충신인 칼브란의 의견은 삽시간에 일치를 보았다.
두 사람은 한기 어린 저녁 바람에도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것을.
“칼브란.”
“예, 가주님.”
“이만 들어가세. 이안은 아니 올 테니, 어떤 임무가 적당할지 추려 봐야겠네.”
“예. 날이 추우니 속히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께서 강건하셔야, 후일 도련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을 테니까요.”
두 사람이 도란도란 본관으로 발길을 돌린 그 시각.
모종의 작당을 모르는 2장로는 저녁 수련을 하다가 몸을 떨었더랬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뒤통수가 싸하면 뭐 하나.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면 대처할 방도도 없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