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3화 (23/214)

제23화

투둑. 투두둑.

각진 얼음 결정이 검은 우산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때아닌 우박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안은 팔을 쭈욱 뻗어 손바닥에 얼음 결정을 받아 냈다.

“벌써 사흘이 지났구나.”

평소와 다르게 녹스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녀석이 우박을 피해 자리 잡은 곳이 하필 그의 정수리였다.

제가 새 둥지도 아니고.

모양새는 빠졌지만, 모자를 쓴 것처럼 따뜻해서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게.”

“대화 나누다 홱 가 버린 뒤로 레브 그 아이와 별 접점이 없으니 이거 참.”

“솔직히 ‘잘 지내 보자.’ 그런다고 바로 친구가 되면, 오죽 좋게?”

“하긴. 누군가와의 관계가 노력 없이 공으로 얻어지진 않지.”

“그러니까.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이안은 ‘시간’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손안의 얼음 결정을 굴렸다.

뾰족뾰족한 표면이 흡사 까칠한 레브를 닮았다.

경계심 많은 녀석과의 관계는 시간을 들여야 했다.

거친 얼음 결정의 표면이 긁히며 둥그스름해지는 것처럼.

다만…….

상념이 길어지자 녹스가 앞발로 그의 이마를 꾸욱 눌렀다.

“왜 그러느냐? 근심이 많아 보인다.”

“더디게 가야 하는 걸 아는데, 망할 시간이 나한테만 야박하네.”

“너한테만 야박하다고?”

“어. 다른 게 아니라 레브의 마력향 때문에.”

“그 아이의 마력향?”

“미미했지만…… 내가 맡을 수 있다는 건 다른 사람도 맡을 수 있다는 거니까.”

“아, 나도 그게 걸렸다. 보아하니 페르나에 금이 갔더구나.”

“짐작해 보건대 레브의 수련 때문이지 싶어.”

비유하자면 이렇다.

마력이 강물이라면 페르나는 일종의 제방이다.

흐르는 것을 막는 역할인 셈.

처음에는 견고했을 테지만, 어느 순간 급속하게 늘어난 마력을 감당하기 버거워졌을 것이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 레브로 인해.

이안은 눈썹 머리를 한껏 내려트렸다.

“이대로 가다간…….”

“그 아이의 존재가 발각될 수도 있겠구나, 루하흐 가주에게.”

“아마도 시간 문제겠지.”

“보아하니, 네가 근심하는 게 이것인 모양이로군.”

‘발각.’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1학년 말, 유난히 눈 폭우가 거세던 어느 날이었다.

머리까지 푸른 두건으로 둘둘 싸맨 루하흐의 친위대가 기숙사로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레브를 개처럼 질질 끌고 갔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레브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이안은 우산대를 말아 쥐며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학기 말까지 남은 시간은 두 달하고도 보름 남짓.

그때가 오기 전에 레브를…….

‘……어?’

시점이 절묘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떤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여신이 등을 떠미는 건지.

기숙사 입구를 벗어나고 있는 레브가 시야에 떡하니 잡혔다.

수련하러 가나?

마침맞게 얘기를 붙여 볼 기회가 생겼다.

“레브…….”

이안은 녀석을 부르려다 입을 도로 다물었다.

레브 뒤로 깔린 잿빛 안개 때문이었다.

결코, 자연 발생적이지 않은 미묘한 작위성.

‘……누군가 있어!’

잿빛 안개는 분명, 정령사가 만든 거였다.

루하흐라면 누구나 시전할 수 있는 ‘안개비’란 기술.

일종의 은신술이다.

환자를 치료할 때 방해받지 않으려고 사용하는.

흔한 기술이지만.

‘이 안개!’

마치 늪처럼 눅진한 데다 불쾌감을 주는 들척지근함.

‘그자’의 특징이었다.

이안은 전장에서 몇 번 마주쳤던 그자를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자기보다 약한 자들만 학살하며 허세를 부리던 역겨운 놈!

‘녹스.’

[응? 왜 그러느냐?]

‘미행해야겠어. 차폐 실드 좀 둘러 줘.’

[알았다.]

녹스가 군말 없이, 그리고 신속하게 실드를 둘러 줬다.

들킬 염려도 없겠다.

이안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안개를 뒤쫓았다.

정확히는 마력의 파동이 제일 강한 곳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비릿한 안개를 쫓아 얼마쯤이나 걸었을까.

어느 순간 안개가 멈춰서, 이안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

뿌연 시야에도 매우 선명하게 발광하는 푸른 잎.

엘다 나무가 군락을 이룬 곳은 딱 한 곳뿐이다.

바로 히오나스 호수.

‘말이 씨가 된다더니, 진짜로 감시자가 붙었네.’

이안은 꿈쩍 않는 안개를 노려보았다.

잿빛 희뿌염 속, 감시자는 레브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감시자 주변의 안개가 구름 모양으로 소용돌이쳤다.

‘마력향 감지’ 기술을 시전하고 있다는 뜻.

몇 번이나 모였다가 흩어지는 구름을 보니 알 만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리라.

‘한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감시자가 더 빨리 붙었었군.’

아직은 의심뿐인 게 확실했다.

저렇게 기술을 써서 마력향을 확인하려는 걸 보면.

이런 상황에 막무가내로 끼어들면 되레 의심을 부추길 터.

돌아가는 추이를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안은 안개가 짙은 쪽을 피해 게걸음으로 굼실굼실 이동했다.

감시자의 동태를 살필 겸.

안개 너머, 꿈틀대는 마력의 파동을 확인할 겸.

망막의 초점이 안개에서 레브로 바뀐 그 순간.

츠스. 츠스슷.

레브가 힘껏 짜낸 마력이 푸른 오라를 형성하며 뻗어 나갔다.

멀리, 아주 멀리.

주변을 압도하며 넘실대는 기운은 그야말로 바다 그 자체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의 파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에드레이 나일이 눈앞에 그려졌다.

루하흐의 근원이라 불리는 그 바다가.

‘과연.’

레브의 마력은 남달랐다.

어릴 적부터, 루하흐 초대 가주의 재림이라 일컬어지던 녀석이었기에.

그리 불리던 것이 허명은 아닌 듯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거대한 오라는 허상이었단 양 일거에 사그라져 버렸다.

“젠장, 젠장!”

레브의 고통 어린 비탄과 함께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이건, 옳은 표현이 아니다.

사그라진 게 아니라 뭔가에 잡아먹힌 듯 거두어졌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아아아악!”

레브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그 울부짖음은…….

무력감과 절망이 짙게 들러붙어 찢기고 갈라져 있었다.

‘…….’

녀석의 절통함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안은 다시금 안개로 시선을 돌렸다.

안개의 눅진함이 역할 정도로 진해졌다.

‘……기드온 교수.’

남의 불행을 즐기는 악질.

기드온은 레브의 고통을 보며 희열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열하디 저열한 못난 자격지심.

그것을 재차 확인한 이안은 이제야 지난 생에 ‘유일’하게 알지 못했던 토막 하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마력향이 샌들, 루하흐 가주가 녀석에 대해 알 방도는 없었다.

누군가가 까발리지 않는 이상.

제자를 팔아먹은 쥐새끼가 지척에 있었던 셈.

‘저자라면 골백번 그러고도 남지.’

가주에게 잘 보일 기회를 놓칠 인물이 절대 아니니.

그렇다면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페르나로 인해 저렇다는 걸, 눈치채진 못한 것 같군.’

* * *

녹스가 책상 끝과 끝을 왔다 갔다 했다.

호수에서 목격한 일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꼼지락 한 번, 이안을 흘낏 보길 한 번.

수십 차례 반복하다가 녀석은 어렵사리 입을 벙긋거렸다.

“그 아이를 보니 알겠더구나.”

“뭘?”

“페르나를 왜 ‘저주계열의 최상위 술식’이라고 부르는지 말이다. 금이 가도 그 정도 위력이라니.”

녹스의 기색은 상당히 침울했다.

수호자란 위치에서 가지는 어린 정령사에 대한 연민.

이 감정이 친분과 별개로 녀석에게 울적함을 안겨 주었다.

“아니, 아니지. 금이 가서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란 표현이 더 맞는 거겠지. 에휴.”

“강할 수밖에. 본래는 남을 해하려고 만들어 낸 술식이었으니까.”

“망할. 지랄 맞은 어떤 정령사가 자격지심에 고안해 낸 것이었으니.”

“응. 저보다 뛰어난 제자가 더는 등급을 올리지 못하게 하려고.”

물론 레브의 페르나는 목적이 달랐다.

그저 보호만을 위해 씌워진 것이었으니까.

이안은 혹시나 해서 레브의 상태에 관해 녹스에게 물었다.

“녹스 네가 보기엔 어때?”

“뭐가 말이냐?”

“레브의 페르나가 깨질 것 같아?”

“전대 가주가 건 술식이다.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어림없다.”

찔끔찔끔 마력향만 샐 뿐이지.

일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녹스가 애꿎은 앞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후우. 10년 넘게 ‘절대’ 등급이 오르지 않는다, 라……. 이안, 페르나에 걸린 정령사 대개가 어떻게 되었지?”

“……자살을 택했지.”

“…….”

“깰 수만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겠지만……. 거의 불가능하니.”

세상만사 이치가 하나를 쥐면 하나를 내어 줘야 한다.

페르나로 등급을 속일 수 있는 대신, 등급을 올릴 수 없게 된다.

보호막이 깨질 때까지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

이런 부작용을, 전대 루하흐 가주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을 살리려면 그 수밖에 없었겠지.”

이안은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물을 부술 듯 쏟아지던 우박의 기세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얼음덩어리가 떨어지는 사그락 소리는 여전했지만.

“…….”

방 안에 2차 침묵이 무겁게 깔렸다.

아비의 마음에 옳고, 그름을 따져서 무엇하랴.

더는 입 댈 것이 없어 녹스나, 저나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바깥만 보길 한동안.

적막 속에서 이안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을 정리했다.

“흐음. 서두르다 탈 날까, 차근히 계획을 진행하려 했는데…….”

기드온 교수 때문에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미 그자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이안은 고드름 달린 유리창을 보며 책상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레브를 뺏기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다.

왜냐면 살리카 가주에게 강력한 패는 두 개였기 때문이다.

4대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사냥개.

그리고 수십을 동시에 치유하는 레브 루하흐.

두 개의 패를 다 깽판 놓지 못하면 지난 생의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그 꼴을 또 겪을 순 없었다.

일족이 처참하게 죽고, 가문이 망하는 꼴은 절대로!

“원래는 등급 측정일이 지나고 시작하려 했는데. 당장 페르나부터 깨야겠다.”

“페르나를? 그걸 깨면 의심만 하던 기드온이 확신하게 될 터인데?”

“깬 뒤엔, 마력향이 흐르지 않도록 덧씌워야지.”

“덧씌워?”

“어. 덧씌워 줄 루하흐 상급자만 있었어도 번거롭지 않을 테지만. 그런 부탁을 할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루하흐엔 없으니.”

“하면 어찌하려고?”

“‘빛의 정령서’를 구해야지.”

“뭐어어?”

“깨고 씌우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그게 잡화점 가서 고르는 물건처럼 아무 데나 널린 건 줄 아느냐. 다른 것도 아닌 빛의 정령서인데?”

“그. 러. 니. 까. 정령서를 만들 수 있는 빛의 정령을 찾아야지.”

“빛의 정령을?”

* * *

목표가 세워졌으면 남은 건 직진뿐이다.

다음 날, 우박이 완전히 그친 이른 아침.

이안은 질척이는 흙바닥을 헤치며 그라나토스를 횡단했다.

목적지는 말로의 탑, 정확히는 그보다 위인 숲의 최북단이었다.

“빛의 정령의 개체 수가 얼마나 적은데, 그것들을 찾겠다고?”

“어.”

“힘들 터인데. 빛의 정령왕이 사라진 뒤로 거의 멸족하다시피 하지 않았느냐.”

이안은 종알거리는 녹스를 말끄러미 보았다.

녀석의 눈알은 초점 없이 무한정 굴러가고 있었다.

“녹스, 내가 어디 가려는 줄 알아?”

“그거야 북쪽…….”

“하하. 공교롭게도 우연처럼 마침! 북쪽 관리자가 빛의 정령이네?”

그 정령이라면 능히 페르나를 깰 수 있다.

어렵지 않을 터이나.

“소문으론 놈의 성깔이 굉장히 ‘더럽다.’고 들었다. 몹시 살가운 여느 빛의 정령과는 달리.”

녹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녀석의 반응이 엄살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자자한 악명을 어찌 모르랴.

익히 들었지만 이안은 평이하게 답했다.

“그냥 더러운 게 아니라 똥도 피해 갈 정도라고, 남쪽 관리자가 그러던데.”

“한데도 찾아가겠다고?”

“가서 비벼 봐야지.”

“돈 드는 것도 아니니 그야 이안 네 맘이다만. 탑의 관리자라 한들, 이안 너에게 마냥 우호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야 알지.”

“부탁은 더더욱 안 들어줄 테고.”

“것도 알지! 까이면 될 때까지!”

“그래. 네 똥 굵다. 너는 참 변죽이 좋아서 심사 편하겠구나.”

“하하하하.”

녹스의 뚱한 타박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안이 파안대소했다.

제23화

투둑. 투두둑.

각진 얼음 결정이 검은 우산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때아닌 우박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안은 팔을 쭈욱 뻗어 손바닥에 얼음 결정을 받아 냈다.

“벌써 사흘이 지났구나.”

평소와 다르게 녹스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녀석이 우박을 피해 자리 잡은 곳이 하필 그의 정수리였다.

제가 새 둥지도 아니고.

모양새는 빠졌지만, 모자를 쓴 것처럼 따뜻해서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게.”

“대화 나누다 홱 가 버린 뒤로 레브 그 아이와 별 접점이 없으니 이거 참.”

“솔직히 ‘잘 지내 보자.’ 그런다고 바로 친구가 되면, 오죽 좋게?”

“하긴. 누군가와의 관계가 노력 없이 공으로 얻어지진 않지.”

“그러니까.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이안은 ‘시간’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손안의 얼음 결정을 굴렸다.

뾰족뾰족한 표면이 흡사 까칠한 레브를 닮았다.

경계심 많은 녀석과의 관계는 시간을 들여야 했다.

거친 얼음 결정의 표면이 긁히며 둥그스름해지는 것처럼.

다만…….

상념이 길어지자 녹스가 앞발로 그의 이마를 꾸욱 눌렀다.

“왜 그러느냐? 근심이 많아 보인다.”

“더디게 가야 하는 걸 아는데, 망할 시간이 나한테만 야박하네.”

“너한테만 야박하다고?”

“어. 다른 게 아니라 레브의 마력향 때문에.”

“그 아이의 마력향?”

“미미했지만…… 내가 맡을 수 있다는 건 다른 사람도 맡을 수 있다는 거니까.”

“아, 나도 그게 걸렸다. 보아하니 페르나에 금이 갔더구나.”

“짐작해 보건대 레브의 수련 때문이지 싶어.”

비유하자면 이렇다.

마력이 강물이라면 페르나는 일종의 제방이다.

흐르는 것을 막는 역할인 셈.

처음에는 견고했을 테지만, 어느 순간 급속하게 늘어난 마력을 감당하기 버거워졌을 것이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 레브로 인해.

이안은 눈썹 머리를 한껏 내려트렸다.

“이대로 가다간…….”

“그 아이의 존재가 발각될 수도 있겠구나, 루하흐 가주에게.”

“아마도 시간 문제겠지.”

“보아하니, 네가 근심하는 게 이것인 모양이로군.”

‘발각.’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1학년 말, 유난히 눈 폭우가 거세던 어느 날이었다.

머리까지 푸른 두건으로 둘둘 싸맨 루하흐의 친위대가 기숙사로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레브를 개처럼 질질 끌고 갔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레브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이안은 우산대를 말아 쥐며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학기 말까지 남은 시간은 두 달하고도 보름 남짓.

그때가 오기 전에 레브를…….

‘……어?’

시점이 절묘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떤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여신이 등을 떠미는 건지.

기숙사 입구를 벗어나고 있는 레브가 시야에 떡하니 잡혔다.

수련하러 가나?

마침맞게 얘기를 붙여 볼 기회가 생겼다.

“레브…….”

이안은 녀석을 부르려다 입을 도로 다물었다.

레브 뒤로 깔린 잿빛 안개 때문이었다.

결코, 자연 발생적이지 않은 미묘한 작위성.

‘……누군가 있어!’

잿빛 안개는 분명, 정령사가 만든 거였다.

루하흐라면 누구나 시전할 수 있는 ‘안개비’란 기술.

일종의 은신술이다.

환자를 치료할 때 방해받지 않으려고 사용하는.

흔한 기술이지만.

‘이 안개!’

마치 늪처럼 눅진한 데다 불쾌감을 주는 들척지근함.

‘그자’의 특징이었다.

이안은 전장에서 몇 번 마주쳤던 그자를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자기보다 약한 자들만 학살하며 허세를 부리던 역겨운 놈!

‘녹스.’

[응? 왜 그러느냐?]

‘미행해야겠어. 차폐 실드 좀 둘러 줘.’

[알았다.]

녹스가 군말 없이, 그리고 신속하게 실드를 둘러 줬다.

들킬 염려도 없겠다.

이안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안개를 뒤쫓았다.

정확히는 마력의 파동이 제일 강한 곳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비릿한 안개를 쫓아 얼마쯤이나 걸었을까.

어느 순간 안개가 멈춰서, 이안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

뿌연 시야에도 매우 선명하게 발광하는 푸른 잎.

엘다 나무가 군락을 이룬 곳은 딱 한 곳뿐이다.

바로 히오나스 호수.

‘말이 씨가 된다더니, 진짜로 감시자가 붙었네.’

이안은 꿈쩍 않는 안개를 노려보았다.

잿빛 희뿌염 속, 감시자는 레브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감시자 주변의 안개가 구름 모양으로 소용돌이쳤다.

‘마력향 감지’ 기술을 시전하고 있다는 뜻.

몇 번이나 모였다가 흩어지는 구름을 보니 알 만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리라.

‘한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감시자가 더 빨리 붙었었군.’

아직은 의심뿐인 게 확실했다.

저렇게 기술을 써서 마력향을 확인하려는 걸 보면.

이런 상황에 막무가내로 끼어들면 되레 의심을 부추길 터.

돌아가는 추이를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안은 안개가 짙은 쪽을 피해 게걸음으로 굼실굼실 이동했다.

감시자의 동태를 살필 겸.

안개 너머, 꿈틀대는 마력의 파동을 확인할 겸.

망막의 초점이 안개에서 레브로 바뀐 그 순간.

츠스. 츠스슷.

레브가 힘껏 짜낸 마력이 푸른 오라를 형성하며 뻗어 나갔다.

멀리, 아주 멀리.

주변을 압도하며 넘실대는 기운은 그야말로 바다 그 자체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의 파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에드레이 나일이 눈앞에 그려졌다.

루하흐의 근원이라 불리는 그 바다가.

‘과연.’

레브의 마력은 남달랐다.

어릴 적부터, 루하흐 초대 가주의 재림이라 일컬어지던 녀석이었기에.

그리 불리던 것이 허명은 아닌 듯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거대한 오라는 허상이었단 양 일거에 사그라져 버렸다.

“젠장, 젠장!”

레브의 고통 어린 비탄과 함께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이건, 옳은 표현이 아니다.

사그라진 게 아니라 뭔가에 잡아먹힌 듯 거두어졌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아아아악!”

레브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구 비명을 질러 댔다.

그 울부짖음은…….

무력감과 절망이 짙게 들러붙어 찢기고 갈라져 있었다.

‘…….’

녀석의 절통함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안은 다시금 안개로 시선을 돌렸다.

안개의 눅진함이 역할 정도로 진해졌다.

‘……기드온 교수.’

남의 불행을 즐기는 악질.

기드온은 레브의 고통을 보며 희열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열하디 저열한 못난 자격지심.

그것을 재차 확인한 이안은 이제야 지난 생에 ‘유일’하게 알지 못했던 토막 하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마력향이 샌들, 루하흐 가주가 녀석에 대해 알 방도는 없었다.

누군가가 까발리지 않는 이상.

제자를 팔아먹은 쥐새끼가 지척에 있었던 셈.

‘저자라면 골백번 그러고도 남지.’

가주에게 잘 보일 기회를 놓칠 인물이 절대 아니니.

그렇다면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페르나로 인해 저렇다는 걸, 눈치채진 못한 것 같군.’

* * *

녹스가 책상 끝과 끝을 왔다 갔다 했다.

호수에서 목격한 일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꼼지락 한 번, 이안을 흘낏 보길 한 번.

수십 차례 반복하다가 녀석은 어렵사리 입을 벙긋거렸다.

“그 아이를 보니 알겠더구나.”

“뭘?”

“페르나를 왜 ‘저주계열의 최상위 술식’이라고 부르는지 말이다. 금이 가도 그 정도 위력이라니.”

녹스의 기색은 상당히 침울했다.

수호자란 위치에서 가지는 어린 정령사에 대한 연민.

이 감정이 친분과 별개로 녀석에게 울적함을 안겨 주었다.

“아니, 아니지. 금이 가서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란 표현이 더 맞는 거겠지. 에휴.”

“강할 수밖에. 본래는 남을 해하려고 만들어 낸 술식이었으니까.”

“망할. 지랄 맞은 어떤 정령사가 자격지심에 고안해 낸 것이었으니.”

“응. 저보다 뛰어난 제자가 더는 등급을 올리지 못하게 하려고.”

물론 레브의 페르나는 목적이 달랐다.

그저 보호만을 위해 씌워진 것이었으니까.

이안은 혹시나 해서 레브의 상태에 관해 녹스에게 물었다.

“녹스 네가 보기엔 어때?”

“뭐가 말이냐?”

“레브의 페르나가 깨질 것 같아?”

“전대 가주가 건 술식이다.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어림없다.”

찔끔찔끔 마력향만 샐 뿐이지.

일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녹스가 애꿎은 앞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후우. 10년 넘게 ‘절대’ 등급이 오르지 않는다, 라……. 이안, 페르나에 걸린 정령사 대개가 어떻게 되었지?”

“……자살을 택했지.”

“…….”

“깰 수만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겠지만……. 거의 불가능하니.”

세상만사 이치가 하나를 쥐면 하나를 내어 줘야 한다.

페르나로 등급을 속일 수 있는 대신, 등급을 올릴 수 없게 된다.

보호막이 깨질 때까지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

이런 부작용을, 전대 루하흐 가주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식을 살리려면 그 수밖에 없었겠지.”

이안은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물을 부술 듯 쏟아지던 우박의 기세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얼음덩어리가 떨어지는 사그락 소리는 여전했지만.

“…….”

방 안에 2차 침묵이 무겁게 깔렸다.

아비의 마음에 옳고, 그름을 따져서 무엇하랴.

더는 입 댈 것이 없어 녹스나, 저나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바깥만 보길 한동안.

적막 속에서 이안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을 정리했다.

“흐음. 서두르다 탈 날까, 차근히 계획을 진행하려 했는데…….”

기드온 교수 때문에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미 그자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이안은 고드름 달린 유리창을 보며 책상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레브를 뺏기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다.

왜냐면 살리카 가주에게 강력한 패는 두 개였기 때문이다.

4대 원소를 다룰 수 있는 사냥개.

그리고 수십을 동시에 치유하는 레브 루하흐.

두 개의 패를 다 깽판 놓지 못하면 지난 생의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그 꼴을 또 겪을 순 없었다.

일족이 처참하게 죽고, 가문이 망하는 꼴은 절대로!

“원래는 등급 측정일이 지나고 시작하려 했는데. 당장 페르나부터 깨야겠다.”

“페르나를? 그걸 깨면 의심만 하던 기드온이 확신하게 될 터인데?”

“깬 뒤엔, 마력향이 흐르지 않도록 덧씌워야지.”

“덧씌워?”

“어. 덧씌워 줄 루하흐 상급자만 있었어도 번거롭지 않을 테지만. 그런 부탁을 할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루하흐엔 없으니.”

“하면 어찌하려고?”

“‘빛의 정령서’를 구해야지.”

“뭐어어?”

“깨고 씌우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그게 잡화점 가서 고르는 물건처럼 아무 데나 널린 건 줄 아느냐. 다른 것도 아닌 빛의 정령서인데?”

“그. 러. 니. 까. 정령서를 만들 수 있는 빛의 정령을 찾아야지.”

“빛의 정령을?”

* * *

목표가 세워졌으면 남은 건 직진뿐이다.

다음 날, 우박이 완전히 그친 이른 아침.

이안은 질척이는 흙바닥을 헤치며 그라나토스를 횡단했다.

목적지는 말로의 탑, 정확히는 그보다 위인 숲의 최북단이었다.

“빛의 정령의 개체 수가 얼마나 적은데, 그것들을 찾겠다고?”

“어.”

“힘들 터인데. 빛의 정령왕이 사라진 뒤로 거의 멸족하다시피 하지 않았느냐.”

이안은 종알거리는 녹스를 말끄러미 보았다.

녀석의 눈알은 초점 없이 무한정 굴러가고 있었다.

“녹스, 내가 어디 가려는 줄 알아?”

“그거야 북쪽…….”

“하하. 공교롭게도 우연처럼 마침! 북쪽 관리자가 빛의 정령이네?”

그 정령이라면 능히 페르나를 깰 수 있다.

어렵지 않을 터이나.

“소문으론 놈의 성깔이 굉장히 ‘더럽다.’고 들었다. 몹시 살가운 여느 빛의 정령과는 달리.”

녹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녀석의 반응이 엄살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자자한 악명을 어찌 모르랴.

익히 들었지만 이안은 평이하게 답했다.

“그냥 더러운 게 아니라 똥도 피해 갈 정도라고, 남쪽 관리자가 그러던데.”

“한데도 찾아가겠다고?”

“가서 비벼 봐야지.”

“돈 드는 것도 아니니 그야 이안 네 맘이다만. 탑의 관리자라 한들, 이안 너에게 마냥 우호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야 알지.”

“부탁은 더더욱 안 들어줄 테고.”

“것도 알지! 까이면 될 때까지!”

“그래. 네 똥 굵다. 너는 참 변죽이 좋아서 심사 편하겠구나.”

“하하하하.”

녹스의 뚱한 타박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안이 파안대소했다.

매사 그런다.

가벼우면서 진지하고, 진중하면서 산뜻했다.

뭐든 미리 학습해 본 사람처럼.

매사 그런다.

가벼우면서 진지하고, 진중하면서 산뜻했다.

뭐든 미리 학습해 본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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