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깨끗한 부츠가 온통 진흙 범벅이 되었을 즈음.
이안은 횡단을 멈추곤, 고개가 등판에 닿을 만큼 뒤로 꺾었다.
앞을 가로막은, 깎아지를 듯한 기암절벽.
“휘유. ‘접근 금지’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네.”
적회색 암산이 도도하게 우뚝 솟아 그를 내리눌렀다.
이 꼭대기.
기운이 쨍한 저곳에 빛의 정령의 서식지가 있다.
저길 올라가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뒤 ‘상시 대기 중’인 훌륭한 ‘탈 것’을 지그시 보았다.
“노오오오옥스.”
그 부름의 의미를 어찌 모르랴.
수차례의 경험으로 이미 뼈에 새겨진 것을.
“왜 내가 매번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파닥 파다닥.
한탄한 녹스는 억세게 이안의 코트를 물었다.
그러고는 그를 가뿐히 들어 올려 암산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난 못 나니까?”
“끄응. 말이나 못 하면.”
“제자의 성취를 위해 뼈를 깎아 노력하는 참된 스승님! 멋져요, 아주 멋져!”
“어휴. 얄밉다, 얄미워!”
꿍얼거리면서도 녹스는 진상 손님인 이안을 꼭대기로 안착시켰다.
당연히 곱게 내려 주진 않았다.
패대기치듯이 녀석을 ‘퉤’ 뱉어 버렸다.
확 자빠져 버렸어야 하는 건데, 애석한지고!
휘리릭.
패대기에 익숙해진 이안은 공중제비를 돈 후 땅바닥에 착지했다.
곡예사가 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안정적인 자세였다.
이안의 기막힌 몸놀림에 맞장단 치려는 듯.
뜨끈한 바람이 녀석을 휘감더니, 잇달아 검은 코트를 휘날렸다.
‘에잇. 바람까지 불고 지랄이야.’
* * *
녹스의 콧방귀를 발판 삼아 이안은 암산 끄트머리로 향했다.
빛의 정령이 머무는 고즈넉한 성.
굳게 닫혀 있을 거란 예측과 달리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냥 들어가도 되겠는데?”
이안은 잠깐 녹스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 성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내딛자마자.
“……빛 뭉치?”
샛노란 구체들이 그를 반기며 뱅글뱅글 허공을 유영했다.
민들레 씨앗 같다.
보송한 구체들이 신기해서 이안은 허리를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영상석이네.
하나하나가 그라나토스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헤르세가 사는 아르테리아 호수.
남쪽 관리자가 사는 크레비노스 동굴.
‘오, C반 녀석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보이고.’
에루리안의 정경 또한 한눈에 보였다.
‘여기에 영상석이 있단 얘긴 들어 본 적 없는데.’
뭔가를 생각하던 이안의 이마가 슬쩍 구겨졌다.
그 순간.
구체가 투영하는 사물이 엉키며 웬 허연 물체가 잡혔다.
뭔가 하고 좀 더 집중해서 봤더니.
빛의…… 정령?
허연 물체는 의자에 앉아 이쪽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드러누워 있는 건가.
척추 골절이라도 당했는지 거의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파이프 담배까지 피워 물고선.
뻑뻑. 뻑뻑뻑.
‘담배를 빼 문 사자라니.’
방만한 자세의 흰색 사자는 기묘하고 신비로웠다.
위엄도 넘쳤고.
특히나 복슬복슬한 갈기에선 햇볕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나, 빛의 정령이야.’를 온몸으로 외치듯이.
이안은 누가 들어와도 무관심한 관리자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루체 프로테.”
“…….”
“빛의 최상위 정령이자 북쪽 관리자.”
“흐응. 무려 50년 만에 나타난 탑의 주인이 이곳에 어인 행차 실꼬?”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내숭을 떠는 것도 우습겠네.”
“…….”
“너한테 뭘 좀 부탁하려고 왔어.”
“부탁? 듣지 않아도 빤하겠군. 인간들이 내게 원하는 거야 다 거기서 거기니.”
“빤해서 미안한데, 나한테는 꼭 필요한 거라…….”
“꺼져.”
냉랭한 한마디를 던지곤 북쪽 관리자가 홱 돌아섰다.
어째 쎄한 예감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걸까.
원체 성질머리가 더럽대서 무시당할 걸 예상하긴 했지만, 이건 뭐.
뭘 해 보기도 전에 싹부터 잘렸다.
‘흐음.’
이안은 신중한 표정으로 재차 관리자의 흰 꼬리를 응시했다.
보드라운 털 한 올 한 올에 죄 고집이 박혀 있었다.
‘무턱대고 들러붙는다고 될 상대가 아니군.’
그랬다간 도리어 역효과가 날 터.
안면을 튼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성싶었다.
애초 사전 탐색이 목적이었으니.
본디 사냥이라는 것이 덫만 깐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사냥감의 성향을 파악해야 성공률이 올라간다.
더 욕심부리지 않고 물러나야 할 때인즉.
“오늘은 얘기할 상태가 아닌 것 같네.”
“…….”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
살랑살랑 흔들리던 꼬리가 멈칫했다.
꼬리에도 표정이 있다면, ‘멈칫’의 의미는 아마도 이거일 거다.
‘이렇게 간다고?’
그렇다면 그 물음에 답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
‘네게 질척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이 뜻을 확실히 표명하고자 이안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녹스와 함께 성 밖으로 나왔다.
미련 없는 깔끔한 돌아섬이었다.
* * *
다음 날, 북쪽 관리자의 서식지.
“나 또 왔어.”
“…….”
“오늘은 여기서 좀 놀다 가도 되지?”
관리자는 등 돌린 그대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외면하는 건 되레 좋은 징조였다.
정말 싫었다면, 암산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이미 훼방 놨을 테니까.
비교적 순탄한 출발.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싱긋 웃은 이안은 양모 담요를 깔며 본격, 눌러앉기에 돌입했다.
오래 있기 위해 먹을 것까지 양껏 챙겨 오지 않았던가.
“녹스, 너도 편히 앉아.”
[이 계획이 먹히겠느냐?]
‘확실히. 우리가 판을 까는 순간부터 입질이 시작될걸?’
[흠. 북쪽 관리자가 노름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지만…….]
‘그러니 그걸로 꼬셔야지.’
‘전설의 노름꾼’인 북쪽 관리자.
그는 초대 황제가 살아 있을 적에 날리는 꾼이었다.
고꾸라트린 노름꾼만 수천이요, 재산 털어먹은 이만 수백이었다.
이 말인즉슨, 활동기엔 단 한 판도 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려 근 30여 년간을.
‘관리자가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이 게임으로 말이야.’
이안은 나무판을 담요 위에 깔았다.
손길은 신속했고, 검은 돌을 중앙에 놓는 것까지 착착이었다.
그런 뒤 녹스에게 돌을 놓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맨들맨들한 하얀 돌을 집은 녹스는 못 말린단 표정을 지었다.
[네놈이 무모한 건 알아줘야겠구나.]
‘이 정도는 돼야 전설의 노름꾼을 낚지.’
[이왕 하기로 한 거 나도 최선을 다해 거들마.]
녹스는 미간을 구기며 하얀 돌을 나무판에 놓았다.
상황만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나무판에 두는 체스 비스무리한 이 게임도 매한가지였다.
“끄응. 이걸 뭐라 하였지? ‘바둑?’”
“어.”
“이거 꽤나 생소하고 무지 어렵다.”
“실은 나도 그래. 어려워.”
“상인 노릇을 하려면 필수라는 이걸, 이안 넌 어디서 배웠어?”
“코르디아 가의 한 어르신한테 배운 건데.”
“이게 동방 상인이 루하흐의 상인에게 전수해 준 거라지?”
“응. 루하흐가 항구 도시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잖아. 푸른 도자기를 거래하다 우연히 배운 거랬어.”
이안은 나무판 끄트머리에 검은 돌을 두었다.
몇십 수만에 완전히 하얀 돌을 에워쌌다.
그래도 먼저 배웠다고 녹스보다 실력이 조금 나았다.
물론 새똥만큼이긴 했지만.
비등비등하게 어설픈 것에 우열을 따져 무엇하랴.
어차피 승부가 나기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바둑을 어려워하던 녹스도 어느샌가 푹 빠져들었다.
이것이 계획의 일부라는 것마저 까맣게 잊고 칭얼거릴 정도로.
“한 수만 물러 주거라. 한 수마아아안!”
“안 돼. 낙장불입.”
“쳇. 그렇게 아득바득 이겨 먹겠다고? 이거 배운 지 겨우 이틀인 초보를?”
“어. 이기는 건 언제나 짜릿하거든.”
“쪼잔한 놈! 스승 공경도 모르는 놈!”
녹스는 제 성질껏 바둑판을 무자비하게 난타했다.
깽판이 따로 없었다.
“내가 더러워서 바둑의 신이 되고 만다.”
녹스의 투지를 연료 삼아 바둑판은 다시금 가열차게 굴러갔다.
‘한 수만 물러 줘.’란 보챔이 난무한 채로.
그렇게 내리 세 판째.
하도 아래만 봤더니 목이 뻐근해져 왔다.
이안은 잠깐 쉴 겸, 목덜미를 꽉꽉 주무르며 관리자를 보았다.
여전히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였다.
미동조차 없다.
관심 끌기에 실패한 건가?
이안은 관리자와 바둑판을 연달아 본 후 생각에 잠겼다.
‘일단 미끼는 던져 놨으니, 오늘은 이쯤 할까?’
이제는 입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또다시.
가만 보면 어째 하는 일마다 천상 낚시할 팔자였다.
헤르세도, 레브도, 심지어 북쪽 관리자까지.
쉬이 얻어지는 게 없다.
그래도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북쪽 관리자가 도박의 신이라면, 그는 ‘낚시의 신’이니까.
하도 입질을 했더니 이제는 치고 빠질 때를 기막히게 알았다.
이안은 차분히 바둑판과 양모 담요를 정리했다.
“루체, 내일 또 놀러 올게.”
그 후 북쪽 관리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녀석이 무시하든 말든, 그는 무척 경쾌했다.
어차피 어떤 판이든 질긴 놈이 이기는 거였다.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였고.
* * *
이후론 매일매일 북쪽 관리자의 서식지에 들렀다.
낚시질 하루째, 이틀째, 사흘째…… 그리고 닷새째.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돌아오듯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풍경도, 기온도 늘 한결같은 이곳.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공간을 보며 녹스가 은근히 물었다.
“이안, 성과가 있는 것 같으냐?”
“으음. 장담할 수 있는 건, 이 낚시가 언젠간 성공한다는 거지.”
“어찌하여?”
“녹스, 감정 중에 제일 연약하고 질긴 게 뭐일 것 같아?”
“글쎄. 증오…… 아닐까?”
“아니. 외로움이야.”
이안은 고즈넉하게 자리한 관리자의 성을 쳐다보았다.
우아한 맛은 있지만, 기척이랄 게 전혀 없었다.
“생각해 봐. 북쪽 관리자가 사람과 교류한 건, 천 년 전이야.”
“천 년…….”
“초대 황제가 요절한 뒤부턴 황실과 왕래가 끊겼으니.”
“긴 세월이구나. 천성이 독불장군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할 만큼.”
“심심하고 무척 외로웠겠지.”
외로움은 정신을 갉아먹는 벌레이다.
그것에 좀먹히면 누군가가 내민 손이 악인지, 선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적어도 지난 생의 이안은 그랬다.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던 방랑자 시절.
예언자라고 추켜세우며 경청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줬었다.
자신을 믿어 주는 게 고마워서.
그렇게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인 줄도 모르고.
줏대 없이 끌려다니다 번번이 배신을 당했더랬다.
어리석었던 날들을 한편으로 물리며 이안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럴 때 같이 놀 인간이 떠억 하니 나타나 봐. 게다가 천 년 전에는 없던 새로운 놀이까지 들고. 어떨 것 같아?”
“……혹할 것 같구나.”
“그치? ‘핵심’은 녀석의 흥미를 자극하는 거야. 그러기만 하면?!”
“호오. 협상의 여지는 충분하단 것이로구나?”
“어.”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녹스는 눈가를 좁혔다.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심계가 보통이 아니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하는 행동.
도저히 열다섯이 가질 수 없는 깊이에 녹스는 또 한 번 놀랐다.
이 녀석은 대체…….
“어이, 인간.”
여기에 더 놀랄 것이 남았다는 듯 관리자가 성문 앞에서 이안을 삐딱하게 불렀다.
“난 ‘어이’는 아닌데. 이름 가르쳐 줬잖아.”
“네 이름 따위 관심 없다. 내게 가치 없는 그 이름 따위.”
“그럼 가치 없는 인간은 왜 부르셨을까?”
“너, 바둑…… 크흠. 빛의 정령서 때문에 이곳에 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