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5화 (25/214)

제25화

“아이고. 죽겠다, 죽겠어.”

이안은 에루리안 정문에 서서 주먹을 쥐고 허리를 두드렸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빠지지 않고 죄다 쑤셨다.

대여섯 시간?

쪼그려서 바둑만 뒀더니 관절이 삭아 버렸다.

“녹스 넌 괜찮아?”

“나도 죽겠다. 노름꾼의 집념을 얕본 대가를 이리 혹독하게 치를 줄은.”

“그래도 북쪽 관리자가 재밌어했으니까.”

삐걱대는 뼈마디를 달래며 이안은 껌껌한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몇 시간 전.

“일단 거기 인간 하나, 수호자 하나. 바둑인지, 뭔지부터 둬 봐라.”

난데없는 관리자의 요구, 거기에 숨겨진 의도는 명백했다.

‘나도 바둑 두고 싶다!’

무려 6일 만에 낚시질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를 놓칠쏘냐.

둘은 미적거리지 않고 즉각 바둑을 두었다.

타앗.

그러자 관리자는 규칙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요하게 바둑판을 훑었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관찰만 하길 두 판째.

“허이구. 답답해서 못 참겠다.”

관리자가 녹스의 옆구리를 밀치며 하얀 돌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귀청 떨어지게 바락바락 화를 냈다.

“이 무식한 놈아! 요기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돌 옆에 두면, 네 놈이 먹는데!”

“……왼쪽 끄트머리?”

“그래. 거기에 두면 네놈이 이기는 판이거늘.”

어벙한 녹스의 되물음에 북쪽 관리자가 가슴팍을 퍽퍽 쳐댔다.

“도저히 안 되겠다. 나와 봐라.”

“응?”

“나오라고! 내가 진정한 바둑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터이니!”

자고로 진정한 노름꾼은 노름이라면 관 뚜껑도 열고 일어나는 법.

바둑판을 보는 관리자의 눈깔은 이미 뒤집혀 있었다.

주둥이 또한 기대감에 차서 자꾸만 혀로 핥아 댔고.

히죽.

그런 관리자를 보며 이안은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끼를 물었으니 곧 빛의 정령서를 얻을 수 있겠지?”

“좋으냐?”

“어. 생각보다 반응이 빨리 와서 더.”

“내 무릎을 갈았으니 그 정도는 돼야지.”

“내가 조만간 스승님의 무릎 값을 거하게 치르겠습니다.”

“무릎 값? 호옥…… 그걸로?”

“그걸로.”

녹스의 게슴츠레한 눈짓에 이안은 허리를 숙여 귓속말했다.

“벌써 ‘2권’이 나왔답니다.”

그의 말에 녹스가 날개를 사정없이 퍼덕거렸다.

먼지 날리는 푸닥거림을 피하려 이안이 고개를 사선으로 튼 찰나였다.

깜빡깜빡.

녹스의 날개 끝에 있는 은색 달 문양이 빛을 발했다.

기드온이 기숙사 근처에 ‘접근’하면 발동되도록 한 ‘탐색진.’

그것이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감시자가 기드온이란 걸 알고 난 직후,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외벽에 새겨 놓은 그것이.

“기드온이 수작을 부리려 기숙사에 갔나 본데?”

“며칠 잠잠하다 했더니.”

“개가 똥을 끊지. 서두르자, 녹스.”

이안은 재게 발을 놀려 기숙사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숙사 왼쪽 귀퉁이에 기드온이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다.

뾰족한 턱을 검 대용으로 써도 될 것 같은 인상.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배신을 할 상.

하필 하루의 끝자락에 상대해야 하는 인간이 저자라니.

일진 사납다.

이안의 표정은 절로 굳어졌다.

“…….”

진즉 발각된 줄도 모르고, 기드온은 야비한 표정으로 허공에 술식을 써 내려갔다.

투영화 술식?

필시 레브를 훔쳐보려는 것일 터.

‘저대로 둘 순 없지.’

단박에 굳은 표정을 푼 이안은 부러 목청껏 기드온을 불렀다.

“기드온 교수님!”

그의 외침에 순간 기드온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하지만 금세, 그런 적 없다는 듯 침착함을 되찾았다.

비열했던 기색 또한 삽시간에 인자함으로 바꿨고.

[설마 저놈……, 눈웃음 지은 것이냐?]

‘저게 말로만 듣던 ‘살인 미소’란 거야.’

[크억! 소름 돋는다!]

이안의 마음을 대변하는 녹스의 비명과 동시에, 기드온이 대답했다.

“오, 이안. 여태 수련하다 오는 것이냐?”

비위도 좋다. 싫은 놈을 두고도 저리 순식간에 안면을 바꾸다니.

“밤바람이 좋아 산책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이 늦은 시간에? 하긴 학업에 정진하다 보면 환기가 필요한 법이지.”

“예.”

“그래도 숲은 위험한 곳이다. 너무 밤늦게는 돌아다니지 말렴.”

기드온이 살인 미소를 흩뿌리며 팔을 뻗었다.

그러더니 격려를 담아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안, 넌 우수한 학생이란다.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구나.”

“감사합니다.”

“너도 알고 있겠지? 내 너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이안은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기드온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느낌이 께름칙하니 축축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해도 이자는 그런 기운을 풍겼다.

본성이 묻어나는 거겠지.

잠깐 닿았던 손이 거둬지고, 기드온이 먼저 뒤돌아섰다.

지켜보고 있겠다, 라…….

그만을 겨냥하고 지껄인 말은 아닐 터.

“흠.”

어둠 너머로 사라지는 기드온의 뒤태를 보며 이안은 눈썹 머리를 추켜올렸다.

* * *

빛의 정령서를 얻어서 마력향을 해결한다 치자.

레브에 관해선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안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선 창밖을 흘겨보았다.

“페르나가 깨져 성장하게 되는 것까진 좋은데…….”

“그래서 네가 이렇게 개고생하고 있는 거 아니냐.”

“까닥하다간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문제지.”

“어이하여?”

“각 가문에 있는 방계에 관한 규칙 때문에.”

“아! 두각을 나타내는 방계는 반드시 가주와 대면하고 본가에서 수련을 받는다, 란 그 규칙?”

“어.”

“맞다. 그 아이가 루하흐인 이상 그리될 수도 있겠구나.”

녹스는 바깥의 기척을 살피며 말을 덧댔다.

혹 기드온이 다시 올 수 있어 정찰하는 것이다.

“그럼 루하흐 가주가 그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나서면, 꼼짝없이 뺏길 터인데.”

“…….”

“이 문제를 해결할 방도는 있는 것이냐, 이안?”

“있긴 한데……. 이것만큼은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해.”

“뷔트시겐 가주?”

“어.

염두에 둔 바가 있어 이안은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후 편지지를 꺼내 유려한 필체로 서신을 써 내려갔다.

《아버지께.

제국의 겨울은 언제나 그렇듯, 혹독하게 춥습니다. 그리고 이 추위만큼 요즘 아이루스 상단에서 마찰을 많이 일으키고 있다 들었습니다.

심려가 크시겠지만, 끼니까지 거르며 집무에만 매진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러다 건강을 해칠까 저어되니. 하지만 다행히 칼브란이 곁에 있어 안심……. (중략.)

아버지.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날개 아래 비호하고 싶은 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행운이라고.

그 말씀대로 ‘평생의 지기’가 되고 싶은 이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 곤란한 사정이 있어 아버지께 작은 청을 드리려 합니다. (중략.)

이 사안은 아버지와 가문에 있어서도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구절절 장문을 쓴 이안은 재차 서신을 검토했다.

그런 연후 정성스레 밀랍 인장으로 봉했다.

밀랍이 굳어 가는 걸 보던 녹스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이안. 작은 청이라는 게, ‘소키에타스 제도’인 게냐?”

“어. 합법적으로 다른 가문 사람을 채 올 수 있는 제도니까.”

“그렇긴 하지. 싹이 보이는 자들에게 이적을 제안하는 것이니.”

“성립만 되면, 레브가 루하흐 가주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게 돼.”

쉽게 말하자면 이런 거다.

실력 좋은 레브를 뷔트시겐 가에서 ‘영입’하는 것.

상호 합의가 이루어지면 레브는 소속이 뷔트시겐으로 바뀐다.

법률로 허용된 공식적인 인재 가로채기인 셈.

이안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공기를 들이켰다.

기분이 좋아선지 몰라도 발끝까지 스미는 바람이 무척 달았다.

“허울은 좋아도 있으나 마나 한 제도였는데, 이렇게 써먹게 되네.”

“누가 소속을 바꾸려 하겠느냐.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고달픈 길인 것을.”

“그렇기도 하고. 인재를 뺏기지 않으려 본가에서 빡세게 방계까지 관리하니 틈이 없었지, 여태까진.”

“그렇다 한들. 너처럼 영악한 녀석이 파고들 빈틈은 있는 모양이구나.”

“솔직하게 말해 이번엔 운이 좋았어.”

“하긴. 페르나 때문에 그 아이가 실력도, 재능도 없는 녀석이라 평가받고 있으니.”

“그러니까 운이 좋았단 거지.”

이안은 히죽거리며 편지의 겉면을 쓸어내렸다.

레브의 소속이 바뀐다는 것.

이 문단에서 그가 노리는 바는 두 가지였다.

제아무리 루하흐 가주라도 레브를 맘대로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레브가 눈치 보지 않고 실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

“일타쌍피야, 일타쌍피. 흐흐흐.”

* * *

먼동 터 오는 새벽에 이안은 문가 옆 괘종시계로 다가갔다.

공용 우체통으로 연결된 편지함.

거기에 서신을 넣은 이안은 시계추를 톡톡 두드렸다.

“답신이 빨리 오면 좋겠다.”

아버지가 그의 제안을 받아 주는 것.

이것이 성립되어야, 레브 문제를 온전히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이 또한 기다림은 필수였으니.

“할 일을 마쳤으니 오늘도 뼈를 갈러 가 볼까?”

이안의 산뜻한 제안에 녹스가 기침을 거하게 했다.

“……쿨럭. 이안, 기침이 나는 것이……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것 같다.”

“감기?”

“으응. 온몸이 쑤시는 것이……. 쿠울럭.”

“콧물도 나고, 막 열도 나?”

“어어어. 아무래도 몸살감기인 듯……. 케에엑. 하여 같이 못 갈 것 같은데 어쩌누?”

“흐으음.”

“그 사지에 널 혼자 밀어 넣으려니 마음이 미어지나…… 너 또 뭐 하는 거야!?”

녹스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안은 가죽 가방을 뒤적였다.

거기서 비취색 물약 하나를 스리슬쩍 꺼냈다.

그러고는 그걸 녹스 눈앞에서 살살 흔들었다.

약 올리듯이.

“짜잔.”

“…….”

“정령이 아프면 먹는 약. 내가 또 우리 스승님 아플까 봐 미리 준비해 놨지요오.”

“……그래, 넌 참 준비성이 철저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겠다.”

헹!

핀잔을 대차게 쏜 녹스는 책상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일명 배 째라, 였다.

“난 안 갈란다.”

“스승님, 어찌 제자를 버리려 하십니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이 가…….”

“‘족’같은 동료? 나는 못 하것다. 배 째!”

“노오옥스.”

“내 뼈는 소중하거든! 이대로 펴어어엉생 북쪽 관리자의 바둑 노예로 사느니 다시 알로 되돌아가고 말지.”

녹스의 떼쓰기가 생각보다 강력했다.

이안은 ‘이걸 어떻게 꼬드겨 데려가나.’ 잠시 고뇌에 빠졌다.

나만 죽을 순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왜들 그리 죽상이야? 루체한테 욕먹었어? 아니면 녀석이 뒈지게 패?”

창문을 타고 경쾌한 음색이 흘러 들어왔다.

남의 방에 무단 침입하는 형상은 무척 낯익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통 까만 소.

그러니까 남쪽 관리자이자, 납치범인 로르 비바체였다.

“넌 또 왜 왔어? 불쑥불쑥 오지 좀 말라고.”

불쑥 등장한 검은 소에게 녹스가 시비를 걸었다.

이안한테 뺨 맞고 남쪽 관리자한테 푸는 격.

짧은 발을 탁탁 두드리는 녀석을 두고 로르는 투레질했다.

“히히.”

태평하게 웃은 소는 책상 위에 안착했다.

창문에서부터 여기까지 무척 자연스러운 연결 동작.

로르는 녹스 옆에 찰싹 붙어선 엉덩이로 마구 치댔다.

“나 기다렸어? 이리 격하게 반기는 것이 날 기다렸구먼?”

녹스가 인상을 쓰며 발로 밀어낸들.

굳세고 유쾌한 로르는 마냥 천진난만했다.

머릿속이 꽃밭인 녀석에게 무엇으로 대적하랴.

“근데 왜들 이리 즐겁지 못해?”

“단순한 넌 모르는 어른들의 사정이란 게 있어.”

“사정? 루체 걔가 둥지 문을 안 열어 줘?”

“그런 건 아닌데……. 끄응.”

“히히. 원래 좀 까칠한 녀석이다. 탑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어.”

입을 터는 로르를 보다가 녹스가 은근하게 불렀다.

“어이, 까만 소.”

“응? 왜?”

“혹시 말이야. 북쪽 관리자의 약점 같은 거 없어?”

“약점? 걔가? 걔는 완벽주의자야. 그런 거 없어.”

“진짜 없어?”

“응.”

너무나 단호한 로르 때문에 녹스는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말갛게 쳐다보던 로르는 갑작스레 탄성을 내질렀다.

“아, 생각났다!”

“약점?”

“아니, 좋아하는 거. 걔 반짝이는 거 좋아해.”

“누가 그딴 거 알고 싶대?”

“내가 옛날에 담청색 다이아몬드를 줬더니 그건 받더라고. 딴 건 다 거절하더니.”

“너도 참. 그렇게 구박받으면서도 그 녀석이 좋디?”

“우리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어?

북쪽 관리자에 대해 잘 아는 로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안은 누군가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흔히들 이걸 ‘직감’이라고 한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그 ‘무엇.’

그 무엇에, 이안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찾았다! 빛의 정령서를 ‘바로’ 얻어낼 방법.’

후훗! 로르를 이용하면 돼!

이거면 바둑 노예도 벗어나고, 시간까지 단축할 수 있다.

이안은 공물을 바치듯 초콜릿 통을 로르의 품에 안겨 주었다.

덥석 받아서 오물거리는 녀석.

녀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안은 예언서 한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루체와 로르는 그야말로 빛과 어둠이었다. 그래서 성격이 정반대였다. 로르는 어울림을 좋아했고, 루체는 독립적이었다. 그것도 몹시.

하여 루체는 치근대는 로르만 보면 학을 뗐다. 자신의 둥지에 결계를 치고 기어이, 암산 위로 옮길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