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27화 (27/214)

제27화

“오늘만이라도 푹 쉬라고 하고 싶은데…….”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이젠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놀라우니까.”

“네 정체를 확인하려는 감시자가 붙었어.”

“감시자가?”

“다행히 루하흐 가주와 연결된 건 아냐. 근데 피하기 힘든 상대야.”

“누군데?”

“기드온 교수.”

“교수님? 진짜로 기드온 교수님?”

“어.”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황한 레브가 사실 여부를 재차 확인할 만했다.

기드온이 누구던가.

평소 행실만 놓고 보면 그자보다 좋은 놈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정도다.

온화한 성품에 세상 친절하고, 언제나 웃는 얼굴에 학생을 위한 조언도 서슴지 않고.

그야말로 다정다감의 표본과 같은 인간이었다.

이런 실정이니.

어느 누가 그의 겉가죽을 의심하겠는가.

믿음이 깨진 여파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레브의 표정은 다소 침울해졌다.

“항상 나를 격려해 주던 분이.”

“겉은 그랬겠지. 꿍꿍이가 있었으니.”

“……꿍꿍이.”

레브는 경직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이 많아진 얼굴.

다소 흐려진 녀석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이안은 녀석이 정리할 짬을 줄 수가 없었다.

기드온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안은 돌아가는 상황을 넌지시 들이밀었다.

“이대로 가다간 곧 정체가 탄로 날 거야.”

“……그렇겠네. 그러기 전에 일단 아르데슈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면 대책은 있고?”

“생각해 봐야지.”

상념에 잠긴 레브의 눈빛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아르데슈 가.

도망자인 레브를 받아 준 유일한 안식처.

레브는 지금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다칠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 속내를 짐작한 이안은 슬쩍 운을 뗐다.

“레브.”

“응?”

“갑작스러운 물음일 수도 있는데. 너와 네 주변 사람들까지 보호할 방법이 있다면 뭐든 해 볼 의향 있어?”

“……당연히.”

레브의 의사는 확고했다.

흔들림이 없어, 이안 또한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럼, 너뿐만 아니라 아르데슈 가를 보호할 그늘 하나 만드는 거 어때?”

“보호할 그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네가 뷔트시겐이 되면 돼.”

“설마…… 인재 영입인 소키에타스 제도를 말하는 거야?”

“어.”

“그렇게 되면 루하흐를 버려야 되는데. 나는 몰라도 우리 가족들이…….”

“그건 걱정하지 마. 온전히 버리란 뜻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훗날, 네가 안전이 보장되면 언제든 루하흐로 돌아가도 된다는 거지. 제약 따윈 없어.”

가려운 곳을 알아서 긁어 주는 제안.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일방적으로 자신에게만 유리한 제안에 레브는 정말 궁금해졌다.

‘쟤는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쫓기는 신세인 전대 가주의 마지막 핏줄.

몰락한 가문의 양자.

어느 것 하나 자기한테 도움 될 게 없는데.

“너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말했을 텐데. 친구가 되고 싶다고. 레브 너를 얻기 위해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의 진심을 보여 주는 거야.”

“…….”

레브는 곧장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거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민은 남았되, 이미 결정을 끝낸 눈빛이었으니까.

고작 호밀빵 한 덩이 씹을 시간.

아주 잠깐의 정적이 지난 뒤, 레브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이안.”

* * *

“머리카락 색이…… 돌아오고 있어.”

레브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카락을 들췄다.

얼룩진 것처럼 군데군데 푸른색이 진해지고 있었다.

이는 억눌렸던 마력이 순환되며 생긴 현상이었다.

“기분이 묘하네.”

아버지와 똑 닮은 머리 색에 레브는 거울 속 자신을 뚫어지게 보았다.

<껄껄. 가주님, 감축드립니다. 도련님께서 8살에 페이라조 3성을 이루시다니. 이는 뷔트시겐 가주님 이후 두 번째 기록이라, 일족의 크나큰 영광입니다.>

자부심 넘치던 장로들의 얼굴.

따스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아버지의 커다란 손.

거울 속 호리호리한 모습 위로 그것들이 고스란히 덧대졌다.

레브는 재차 머리칼을 들추다 끝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이제 그자에게…….”

결연히 말하던 레브는 책상 세 번째 서랍을 잡아당겼다.

거기 놓인 산호 상자.

상자의 뚜껑에는 고대 문자가 엉켜 있었다.

문자의 얽힘이 시작되는 오목한 부분에 피를 떨군 레브는 상자를 열었다.

덩그러니 놓인 새파란 보석.

<시온, 이것 봐라. 네가 가지고 싶다 했던 청옥이다. 여기에 이 숙부가 가문의 상장인 푸른 장미를 새겼단다. 아름답지 않으냐?>

생일 선물이라며 인자하게 웃던 숙부.

그러나 제 가족을 일말의 자비 없이 도륙 냈던 자.

그 악귀를 떠올리며 레브는 입술 끝을 우그러뜨렸다.

그동안은 힘이 없어 감히 복수를 꿈꿀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제게 기회가 생겼으니.

이를 발판 삼아 복수에 성공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자의 심장에 이 청옥을 박을 것이다.

“반드시!”

재차 마음을 다잡은 레브는 상자를 움켜쥐며 창밖을 보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듯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레브는 산호 상자를 닫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서둘러 집으로 가 볼까.”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지만 일단 아르데슈 가부터 다녀와야 했다.

이안이 제안한 ‘소속 옮기기’에 관해 상의해야 하니까.

레브는 가방을 들쳐 메고 방을 나섰다.

한 발자국 떼자마자 마주한 뜻밖의 손님.

“……어? 이안.”

“집에 가?”

“응. 클로에 교수님께 말씀드렸어. 한 이틀 정도 수업에 불참한다고.”

“아르데슈 가로선 급작스러운 제안일 테니, 좀 걱정스럽네.”

“내가 잘 말씀드려야지.”

레브는 그다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당사자가 확신하는데 사족을 다는 건 무의미했다.

그래서 이안은 방문의 이유인 작은 목함을 레브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잘 지내 보잔 뇌물.”

“……뇌물?”

“아, 마력 안정제야. 네 마력이 불안정해서.”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으니 아무래도. 그래서 마력이 역류 되지 않게 조심하고 있어.”

“조심한다고 해도 자칫 한순간에 마력이 폭발하면 핵이 부서질 수 있으니까, 일단 먹어 둬.”

받지 않고 레브는 머뭇거렸다.

저택 다섯 채는 살 수 있는 물약을 선뜻 받기가 힘든 모양이다.

이안은 팔 아프다 능청을 떨며 레브의 손에 목함을 쥐여 줬다.

“이 물약이 아무리 비싸도 친구 목숨보다 비싸진 않아.”

“…….”

레브는 서늘한 목함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이안, ……고맙다.”

“뭘 자꾸 고맙대. 별거 아냐.”

“아무리 친구라도 이런 건 정확히…….”

“아, 됐어. 난 이만 간다.”

돌아선 이안의 등에 대고 레브는 크게 외쳤다.

“이안, 나중에 꼭 갚을게! 비싼 걸로!”

“뭐 정 그러면 진짜 비싼 걸로 갚아.”

“하하. 알았어.”

* * *

레브가 떠나고 방으로 돌아온 후.

“후우.”

이안은 침대맡에 앉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레브 일이 전환점을 맞고 보니, 잊고 있던 편두통이 맹렬하게 몰려들었다.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여파 탓.

‘요샌 노상 뾰족한 철침 밭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네.’

회귀하고 나서부턴 늘 이런 상태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사달이 날 것 같은.

두서없이 새가 두개골을 쪼개는 것 같아 이안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젊은 녀석이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긴.”

주름이 잔뜩 진 이마를 녹스가 살살 펴며 다독거렸다.

미약한 손길.

한데도 참 희한하게 이럴 때마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을 함께 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

이번 생은…… 혼자가 아니었다.

낯설면서 든든한 이 심정을 뭐라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괜스레 혼자서 청승맞아지고 있는데.

“이안, 내 하나만 물어보마. 미리 말하건대, 능청 떨지 말고 솔직히 답해 주려무나.”

녹스가 목소리를 깔며 한껏 분위기를 잡았다.

훈훈했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심히 진중한 태도에 이안은 그러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뭔데?”

“레브 말이다.”

“응? 그 녀석이 왜?”

“만약…… 포섭에 실패했다면, 그 아이를 어찌할 심산이었느냐?”

“뭐 그냥…….”

“솔직히!”

“내게 좋은 패는 남에게도 좋은 패지. 그러니 내 것이 아니라면…… 싹을 잘라야겠지.”

이안의 어조는 무척 단조로웠다.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고 무덤덤했다.

그렇기에 가장 뜨겁고 순도 높은 진심이었다.

또한, 묘하게도 쓸쓸해 보여서 녹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알았다.”

“더 물어보고 싶은 건?”

“없다.”

“그래. 언제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솔직히 답해 줄 의향은 있고?”

“해 줄 수 있는 얘길 숨길 생각은 없어.”

“그 또한 알았다.”

“녹스, 언젠가는 전부 말해 줄게. 전부.”

“염려 말아라. 이안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네 편이니.”

“…….”

“스승은 어느 때든 제자를 버리지 않는다.”

녹스는 더 말을 하려다 도로 목구멍으로 삼켰다.

자신의 머리통에 얹어진 이안의 손이…….

웃고 있는 이안의 표정이…….

어쩐지 처량한 울음을 머금은 것 같아서였다.

* * *

이틀 후.

이안은 숲에서 딴 포멜로를 먹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전투학 수업을 하러 가는 길.

모퉁이를 도는 그의 등을 누군가가 약하게 쳤다.

……레브였다.

녀석의 표정은 뭔가를 덜어 낸 것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잘 해결됐나 보네.”

“응. 상의할 것도 없었어.”

“…….”

“나만 위험하지 않으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하셨거든.”

“그럼 이제 남은 일은 잡음이 생기지 않게 마무리하는 것뿐이겠네. 조만간 뷔트시겐 가에서 전령을 보낼 거야.”

두 사람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며 원형의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한산한 공간엔 C반 녀석들만 있었다.

원칙적으로 전투학 수업은 1학년 전체가 같이 듣는다.

등급이 다른 학생들끼리의 대련을 위주로 하는 수업이기 때문.

하지만 오늘만은 특별 수업이 있어 C반만 모여 있었다.

“이안, 레브, 여기 와서 앉아.”

두 사람을 발견한 올리브가 옆자리를 두드리며 크게 불렀다.

계단 첫 번째 줄 왼쪽 끄트머리.

올리브가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가자, 녀석이 종알거렸다.

“근데 두 사람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아, 그게 어쩌다 보니.”

“어쩌다? 둘이서만 다니지 말고 나랑도 같이 다녀.”

소외됐다 여겼는지 올리브가 섭섭해했다.

가뜩이나 처진 눈꼬리가 곧 턱과 맞붙을 것 같았다.

그 모양새가 어찌나 짠해 보이는지.

낑낑대는 강아지 같아서 이안은 달래는 투로 말했다.

“올리브, 이따 수련하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내가 끼어도 돼?”

“당연히.”

“오, 그럼 나 갈래. 실은 요즘 수련을 해도 진척이 없었는데 잘 됐다.”

정말 단순한 녀석이었다.

금세 밝아진 올리브는 양발을 까닥거렸다.

올리브까지 합세한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활달했다.

이 들뜸 속에서.

“웬일로 여러분들의 표정이 밝군요.”

홀연히, 누군가가 연무장 정중앙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스톨레 바르푸니.

전투학을 가르치는 교수.

땅에서 솟구치는 그의 등장은 무척이나 요란스러웠다.

대지의 발리올인 스톨레 교수만의 특징.

그래서 학생들 누구 하나 놀라워하지 않았다.

다들 침착한데, 볼 때마다 감탄하는 정령이 하나 있긴 했다.

녹스는 포멜로를 까먹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언제 봐도 저자는 화려하구나. 행동도, 차림도 전부.]

-매번 놀라긴.

[신기해서 그런다. 한결같이 요란하니.]

-발리올이니까.

[하여간 작달막한 몸에 걸치면 얼마나 걸칠 수 있다고. 까마귀 마냥 반짝이는 걸 밝히는지.]

녹스는 핀잔인지 탄식인지 모를 화법을 구사했다.

녀석의 말을 들으며, 이안은 ‘반짝반짝’거리는 스톨레 교수를 찬찬히 살폈다.

태양 같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눈에 두른, 살롱의 마담들이나 착용할 법한 화려한 꽃무늬 안대.

큼지막한 루비가 박힌 귀걸이.

나풀나풀 대며 시각을 뺏는 화사한 옷차림.

사람 자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난하게 반짝거렸다.

흡사 금덩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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