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전투학 과제를 위해 길을 나선 참.
녹스는 말로의 탑으로 향하는 내내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보란 듯이’ 책상 위에 남겨져 있던, 두툼한 서신 한 통.
《위대한 정령이시여.
초대 황제의 친우셨으며, 황제와 여신이 한 계약의 증거이신 분. 당신을 뵐 수 있어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
말을 나누고자 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나, 그런 밀담은 제 몫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과 연이 닿은 도련님의 것이니.
두 분의 기연에 대해 미천한 제가 어찌 감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노신, 괜한 염려에 몇 자를 적어 봅니다.
이왕 닿은 연, 당신께서 길잡이이자, 벗이자, 형제가 되어 주시길 간청드려도 되겠습니까? 도련님께서 외롭지 않게 말입니다.
실은, 최근 도련님께서 악몽을 꾸고 눈을 긁으며 괴로워하시는 잠버릇이…….》
‘기척을 감추려던 노력이 무색해지게…….’
칼브란이란 자는 저를 기민하게 감지해 냈다.
한데도 헤어질 때까지 시치미를 뚝 떼곤 내색 한 번을 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이안과 대화를 나누고 뷔트시겐 가로 돌아갔으니까.
……라고 착각하게 심리전을 펼치다니.
‘내 익히 뷔트시겐 가의 저력은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완전 소오오름.’
“녹스, 어때? 직접 보니 뭔가 다르지 않아?”
그의 자랑질이 못마땅한가 보다.
녹스가 눈가를 쭉 찢으며 이안을 흘겨보았다.
썩은 동태 눈깔.
떫은 심보가 그득 담긴 녹스의 눈꺼풀을 이안은 힘껏 들어 올렸다.
짓궂은 손을 털어 내려 녹스가 통통한 머리통을 흔들어댔다.
“쳇. 솔직히 인정하긴 싫다만. 100년도 못 산 애송이 치곤 뭐.”
“칼브란의 능력치야 제국에서 알아주니까.”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런 자를 수하로 둔 네 아비란 자가. 진정으로.”
“아버지는 더 대단하신 분이시지.”
두런두런한 말소리를 따라 눈발이 나부꼈다.
언제나 그렇듯 나뭇가지에 닿으며 삽시간에 녹아 버렸지만.
여전한 녹빛에 잠깐 시선을 둔 녹스가 다시금 입을 뗐다.
“여하튼 칼브란이란 자를 보니 알겠더구나.”
“뭘?”
“네가 집에도 가지 않고 수련에만 매진하는 까닭을.”
“…….”
“그자 같은 자들이 뷔트시겐엔 득실득실할 것 아니냐.”
누구나 보아 온 만큼 재단하고 평가한다.
칼브란 같은 인재가 득실거리는 뷔트시겐 가.
그런 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과연 이안을 어떻게 볼까.
웬만한 성취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콧대 높을 그들의 심중을 짐작해 본 녹스는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특히나 매번 경이로운 업적을 남긴 네 아비, 그의 성장을 지켜봐 온 자들이라면.”
“죄 눈이 정수리에 달렸지. 장로들이든, 단주들이든.”
어지간해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인즉.
이안은 꼬장꼬장한 원로들을 떠올리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일부러 ‘그 녀석’으로 점찍은 거야. 남들에게 선보일 공식적인 첫 정령으로.”
“하긴. 첫 정령으로 어둠 정령을 얻으면…….”
“후계자 자질을 의심하는 그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어.”
“나를 공개하면 직방일 테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야…….”
녹스의 머리통을 문지르며 이안은 저 먼 남쪽을 응시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공연히 이목을 끌어 봤자 위험을 자초하는 꼴이 될 터.”
녹스의 현재 모습은 익히 알려진 수호자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바람이 감긴 날개, 불의 꼬리, 물덩이 같은 몸, 대지의 기운이 감긴 노란 발바닥.
이걸 보면 누구나 ‘어? 4대 원소다.’라고 할 만큼 특징이 또렷했다.
이는 살리카 가주의 욕심을 부추기기 충분한 요소였으니.
‘지금은 숨겨야 하지, 지금은.’
아직 악의에 유연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도약을 위해선 때때로 웅크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이안은 남쪽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고 북쪽으로 발을 뗐다.
“가자, 녹스. 내 공식적인 첫 정령을 잡으러.”
* * *
의기투합해서 질풍처럼 도착한 말로의 탑.
“흠.”
이안은 사과 바구니를 석문 앞에 내려놓았다.
그 후 뭔가를 찾으려 탑 주변을 꼼꼼하게 정탐했다.
“없네.”
“‘오늘도’ 없구나.”
“이러면 곤란한데.”
“탑을 지키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수문장이라는 것이.”
“그러게. 근 두 달간 녀석한테 갖다 바친 사과 바구니가 몇 갠데, 코빼기도 안 보이네.”
“흐음.”
“사과가 없어지는 걸 보면 먹긴 하는 것 같은데…….”
“먹튀다, 먹튀.”
이안과 녹스는 석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영락없이 연인에게 차인 꼬라지.
그 꼴을 하고선 둘은 사과를 아삭 베어 물었다.
그 와중에도 사과는 꿀맛이라 더 ‘젠장할’이었다.
“녹스, 혹시 수문장을 찾는 탐지 기술 같은 건 없나?”
“나는 탑 안을, 수문장은 탑 밖을 지키지만 한 묶음은 아니다. 서로를 탐지할 수 없단 말이지. 본디 그렇다.”
이안은 무릎에 걸쳐 놓은 팔을 까닥거리며 저 먼 곳을 보았다.
두 달간 수문장의 그림자조차 보질 못했다.
전적이 이러할 진데, 일주일간 녀석을 볼 확률?
없다.
배추 애벌레의 무수한 주름 수만큼 ‘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이안은 일어섰다.
“가자, 녹스.”
“어딜 말이냐?”
“여기저기 찾아봐야지.”
고개를 주억거린 녹스와 함께 이안은 말로의 탑을 나섰다.
탑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탑의 주인 이안 뷔트시겐이야.]
[숲에 있는 거라면 뭐든 주워 먹는.]
[주워 먹고 참견하고, 주워 먹고 참견하고.]
[참견쟁이. 참견쟁이.]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을까? 대체 뭘 참견하려고?]
함박눈이 너울대며 그의 앞에서 휘몰아쳤다.
“…….”
‘절 좀 봐 달란’ 몸짓에 이안은 양 손바닥을 펼쳐 눈을 받았다.
눈사람 형태로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는 무엇.
눈의 정령, ‘치오난’이었다.
치오난은 동그란 머리를 까닥거리다가 풀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반짝거리는 실선은 바닥에 닿자 사방으로 비산했다.
빛의 파편들이 튀어 오르는 모습.
‘장난꾸러기’라는 별칭에 걸맞게 발랄하고 경쾌했다.
예측 불가한 정령의 동선을 시선으로 쫓다가 이안은 눈을 빛냈다.
숲 전체에 퍼진 치오난들이라면 사냥개의 행방을 알고 있을 터.
“너희들, 혹시 탑의 수문장을 본 적 있어?”
[수문장? 크고 멍청한 그놈?]
“어. 그놈.”
[걔라면 저어어어기…….]
성질 급한 놈은 진즉 숨넘어갔겠다.
말꼬리를 질질 끄는 치오난의 행동에도 이안은 인내심을 가졌다.
묵묵히 기다렸더니, 장난기를 거두고 녀석들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일제히 한 방향으로 뻗친 눈송이.
그것을 따라 고개를 사선으로 틀었더니.
“……!!”
군락을 이룬 별이끼 나무 뒤, 꿈틀거리는 뭔가가 눈에 잡혔다.
두 개의 머리통에, 번개가 튀는 은빛 갈기.
머리통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
……수문장이었다.
이안은 가자미눈을 하고선 수문장, 아니, 지옥 사냥개를 탐색했다.
녀석은 줄곧 나무 뒤로 몸을 욱여넣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꼭 자신의 몸을 숨기려는 것처럼.
코끼리가 얇은 막대기 뒤에 선 것과 비슷한 몰골이랄까.
보아하니 낯가리는 중이었다.
헤르세만큼이나 수줍음이 많다고 하더니.
이안은 부러 보지 않은 척하며, 정신 공명으로 녹스에게 말했다.
-녹스, 저기 봐. 5시 방향.
[5시? 어, 저 녀석……?]
* * *
수문장을 발견한 지 두 시간여 후.
“우웩!”
녹스가 숨을 헐떡이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하도 뛰었더니……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이안.”
“헉. 허억. 덩치는 산만 한 게 빠르긴 겁나 빠르네.”
“저건 어둠 정령이 아니라 번개 정령이다, 번개.”
혀를 길게 빼문 녹스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이러다 어르신 잡겠다.
이안은 녹스의 등을 다독이며 두 시간가량의 행적을 되짚었다.
<어렵사리 만났는데 도망갈라. 조심히.>
이안은 사냥개에게 말을 걸어 보려 살금살금 다가갔다.
낯을 많이 가린다더니, 한데 웬걸?
그가 다가가도 사냥개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잽싸게 다가갔는데, 젠장!
고개를 갸웃한 사냥개가 ‘은신’을 하곤 모습을 감춰 버렸다.
“…….”
코앞에서 목표물을 놓쳐 버린 것이다.
허망함에 벙쪄 있던 찰나.
스스슷.
은신을 푼 사냥개가 빼꼼 뒤를 돌아보았다.
녀석과의 거리는 불과 10m.
왠지 ‘나 잡아봐라.’란 몸짓, 그것에 낚여 이안은 본능적으로 녀석을 쫓았다.
가까워지면 은신하고, 달리기가 느려진다 싶으면 다시 은신을 풀고.
아예 안 보이면 몰라.
눈앞에서 알짱거리는데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반강제적으로 그라나토스 북쪽 구역을 뺑이치며 돌아다녔다.
미쳤지.
포기할 때를 놓쳐 버린 어리석은 집념, 그로 인해 발바닥에 불만 났다.
그리고 허무하게도 술래잡기의 끝은…….
“다시 말로의 탑이라니!”
이안은 턱밑에 고인 땀을 닦으며 보라색 나무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한정 없이 쫓아선 답이 없겠다.”
“이 고생을 또 할 순 없다. 은신 때문에 답도 없고. 대책이 필요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건 뭐냐?”
“생각 중?”
이안은 머리가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뇌를 굴렸다.
뒤를 쫓으면 계속 뒤꽁무니만 보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수문장을 잡을 수 없다.
녀석을 포획하려면 한곳에 잠복하는 것이 최선일 터.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옆에서 빙빙 돌고 있던 눈의 정령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치오난.”
[응?]
“질문 하나만 더 해도 돼?”
[으음. 물어봐.]
“혹, 수문장이 자주 출몰하는 구역이 어딘지 알아?”
[멍청한 그놈이라면…… 아카데미 근처에서 맨날 놀아.]
“아카데미 근처에서?”
치오난의 대답에 황당해진 이안은 끝머리의 어조를 높이고 말았다.
아카데미 근처라니.
자신은 거기서 수문장의 꼬랑지도 본 적이 없다.
정작 목표물이 지척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니.
“나 뭐한 거래? 날마다 사과 바구니 들고 북쪽 탑까지 왜 왔을까.”
심정이야 어떻든, 일단 사냥개의 출몰 지역은 알아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흠. 설령 잠복한다 해도 은신이 문젠데.”
“내가 녀석의 은신을 감지할 수 없으니 파훼부터 해야 한다.”
“파훼…….”
이안은 고민을 거듭하며, 내려간 눈썹 머리를 문질렀다.
“수문장의 은신을 간파하려면 같은 어둠 속성에, 녀석보다 상급이어야 하는데.”
“그런 녀석을 어디서…….”
“후후훗. 있잖아, 그런 녀석.”
“누구?”
의문을 표한 녹스는 금방 해답을 찾았다.
“아, ‘그놈’이면 가능하겠구나. 카르디아 3성이니.”
“어. 로르한테 가자.”
해결책이 나왔는데 미적거릴 까닭이 없었다.
그길로 둘은 로르가 있는 그라나토스 남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남쪽 관리자인 로르의 둥지.
크레비노스 동굴에 도착한 둘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바깥과 달리 안쪽은 대낮처럼 밝았다.
등을 대신한 담청색 광석들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광석인 마에디스트.
이안은 어깨높이에 박힌 마에디스트를 요리조리 살폈다.
“이렇게 순도 높은 게 지천에 깔렸네.”
“매번 뭘 그렇게 구경하누? 너희 뷔트시겐의 주요 거래 품목이라 자주 볼 터인데.”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불순물 없는 건 귀해서.”
“그 귀한 걸, 로르 저놈은 조명으로 쓰고, 북 대신 쓰고 아주 지랄을.”
“소리가 맑아서 화음 넣기 좋다고 그러던데.”
“화음은 무슨. 걸핏하면 무식한 힘으로 퍽퍽 깨 먹기나 하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며 둘은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