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31화 (31/214)

제31화

동굴의 끝자락 커다란 공동.

로르는 널브러진 채 마에디스트를 앞발로 두드리고 있었다.

녀석이 오른발을 까닥하면.

깜빡깜빡.

오른편 마에디스트 덩어리가 리듬감 있게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녀석이 왼발을 까닥하면, 왼편의 마에디스트가 그랬고.

화려한 조명이 로르를 감싸고 있었다.

“…….”

[혼자 놀기의 달인이 따로 없구만.]

“오오, 저게 바로 천년 고수란 건가?”

이안은 감탄사와 함께 장인에게 박수를 투척했다.

그 소리가 동굴에 경쾌하게 울리자.

“……!!”

고개를 치켜든 로르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다다 달려왔다.

“이안, 이안!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

“어? 어어.”

“히히. 기분 좋다! 잘 왔어. 이리 와. 너 오면 주려고 따 놓은 스타필리가 많다.”

“진짜…… 많네.”

이안은 제 이마 높이까지 오는 산딸기의 탑을 쳐다보았다.

로르가 앙증맞은 소의 모습을 하고 있는들.

기본적으로는 7피트 5인치(226cm)의 신장을 가진 덩치였다.

딱 거기에 맞는 수확량.

“까닥하다간 깔리겠는데?”

“너 주려고 내가 한땀 한땀, 이 손으로 땄다니까.”

로르가 소 발굽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그러더니 무너질 것 같은 탑의 밑동을 무작스럽게 파냈다.

그 후 한 움큼 집어선 뇌물인 양, 이안에게 건네며 은근하게 불렀다.

“이안.”

“어?”

“있지, 매일 루체와 바둑 두잖아. 혹시…… 내 얘기 안 해?”

“안 하던데.”

“쳇. 서운하게. 루체 둥지에 둘러 진 결계만 아니었어도, 내가 맨날 놀러 갈 텐데.”

검은 소 로르만을 위한 전용 결계.

그건 이른바 ‘차단’이었다.

이 형제 간의 애증에 대해선 이안도 손을 대기가 모호했다.

극도로 싫어하는 자와 극도로 좋아하는 자, 둘 사이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겠는가.

어찌할 방도가 없는 문제.

이안은 빨간 물이 든 손가락을 털다가, 입 못 댈 문제를 비껴 애초의 목적으로 선회했다.

“로르, 재밌는 술래잡기 안 해 볼래?”

“술래잡기?”

“어. 은빛 갈기를 가진 사냥개를 잡는 놀인데…….”

“탑의 수문장? 나 할래. 할 거다. 그 녀석만 잡으면 되는 건가?”

이것저것 재지 않고 로르는 덥석 승낙했다.

신이 나는지, 굼실거리는 엉덩이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보는 이마저 즐거워지는 몸놀림.

거기엔 자신만만함 또한 묻어 있어서 이안은 슬쩍 물어보았다.

“로르, 그 녀석이 어딨는지 알고 있어?”

“알지. 그 녀석 아카데미 근처에서 죽치고 있잖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너도 거기서 봤어?”

“당연하지. 너 보러 갈 때마다 매번 봤다.”

진짜 ‘나만 빼고’였다.

정작 수문장을 찾는 저 하나만 빼고 ‘다’ 봤다.

기가 막혀서.

황당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어떤 의문 하나가 앞섰다.

에루리안 근처면 이 그라나토스에서 사람이 제일 많은 곳이다.

게다가 수문장은 수줍음이 많고.

한데 녀석은 인적 득실한 그곳에서 무얼 하는 걸까?

* * *

얼렁뚱땅 결성된 ‘수문장 포획 조.’

이안, 녹스, 그리고 검은 소 로르.

이들은 에루리안 근처 덤불 숲에 쪼그려 앉아 잠복을 시작했다.

포도색 덤불 안으로 석양이 스미는 시간대.

이때를 선택한 건 수문장이 자주 출몰하는 시간이라서다.

“뭉쳐 있으면 놓칠 수 있으니까 흩어지자.”

1조인 이안은 오른쪽, 2조인 녹스와 로르는 왼쪽을 전담했다.

물 샐 틈 없는 양동 작전.

포획 조는 발치에 깔린 땅거미가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흐음……. 안 오네.”

감감무소식이었다.

애초에 이곳엔 나타난 적조차 없다는 양, 터럭 한 올도 보이질 않았다.

설마 로르가 보낸 신호를 놓쳤나?

혹시나 해서, 이안은 반대편 덤불로 눈길을 옮겼다.

하라는 잠복은 안 하고, 완전 놀자판이었다.

입에 넣어야 할 쿠키를 서로에게 뿌려대며 어찌나 화기애애한지.

참, 사이가 정답다.

얼핏 보기엔 그랬지만, 실제 2조의 상황은.

“…….”

녹스가 ‘고깝다’는 눈빛을 한 채로, 로르를 흘겨보았다.

“음흉한 놈!”

“내가 어딜 봐서?”

로르의 시치미에 녹스는 쿠키로 빵빵해진 볼을 누르며 목청을 높였다.

“계속 발뺌하시겠다? 내가 너를 몰라?”

“히히. 하나도 모르면서.”

“너 대체 저의가 뭐야? 맨날 소갈머리 없는 놈처럼 굴면서 내 제자 주위를 맴도는 저의가.”

“그딴 거 없어.”

“없어? 하! 우리 좀 솔직해져 보자.”

“솔직? 그래, 좋아. 난 숨기는 거 없으니까.”

“너 말이야.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잖아. 우리가 헤르세 구하러 쳐들어갔을 때, 등급을 낮추는 안개가 깔렸던 거.”

“…….”

“한데도 무시하고 이안한테 돌진했고.”

왁왁거리는 녹스의 주둥이에서 쿠키 가루가 뿜어져 나왔다.

사방으로 분산되는 폭탄 조각.

고것과 함께 튀는 침 세례를 로르는 태연히 받아 냈다.

“아아, 그거? 거야, 웬 쪼그마한 인간이 황실의 혈통도 아니면서 주인의 냄새를 풍겨서 그랬지.”

“그래서 그리 봐준 것이다? 단순한 공격만 하면서?”

“맹랑한 고놈이 재밌어 보이더란 말이지.”

“허어.”

“레……뭐시기 족쇄? 장난감까지 들고 필사적으로 덤비는데, 뭉개 버릴 수야 있나.”

무기질의 낯을 내보인 로르는 쿠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무려 천년 만에 말을 걸어 준 인간인데.”

로르의 음색은 낯짝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50년을 탑 안에 갇혀 지낸 너라면 알지 않으냐.’

라고 녹스에게 묻고 있었다.

로르의 말 없는 공격에 녹스는 앞발을 휘저었다.

이른바 ‘반사’였다.

괜히 되먹지 않게 공감대를 형성하지 말란 거부.

빤히 보이는 몸짓을 뚫고 다시금 로르의 차가운 음색이 내리꽂혔다.

“그냥, 그랬다고.”

“…….”

슬렁슬렁한 대답인데도 희한하게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해서 녹스는 미간을 좁히며 로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능구렁이 같은 저 속내를 어찌 전부 헤아릴 수 있을까.

무려 천년이 넘게 산 놈의 속내를 말이다.

탐색이 길어지자, 로르가 ‘별거 없어.’라는 식으로 히히 웃어 보였다.

그러곤 이런 얘기 그만하자는 투로 성기게 말을 돌렸다.

“흠. 그나저나 어둠 정령이라…….”

“또 뭐.”

“이런 고생 할 필요 없이 나랑 결속하면 되는데 웬 수문장?”

“넌 안 돼! 너같이 음흉한 놈은 절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옛다, 흙.”

로르가 쿠키 가루를 ‘흙’이랍시고 녹스에게 찰지게 뿌렸다.

눈처럼 흩날리는 쿠키 가루.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안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포획 작전 따윈 진즉 까먹어 버린 것 같다.

‘저것들을 믿은 내 죄지.’란 표정을 이안이 짓든 말든.

눈치를 팔아먹어 버린 둘의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졌다.

“에퉤퉤. 그래도 넌 어차피 안 돼!”

“왜, 등급 차이가 너무 나서?”

“알고 있고만.”

“등급 차이 그까짓 거, 내가 내리면 그만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릴.”

“아, 그냥 이안이 갖고 싶어 하는 수문장을 없애 버릴까?”

“진짜 회까닥 돌았네, 돌았어.”

“히히.”

녹스는 실실대는 로르의 동공을 찌를 것처럼 째려봤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가 써 붙여진 녀석의 흐릿한 눈빛.

녹스는 저것이 미치도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봐봐, 저. 저 사악한 눈빛. 무튼 사냥개는 건들지 마라. 흐튼 짓, 흐지 말라고.”

녹스의 경고에 로르는 잠시 숨을 고르다 목소리를 깔았다.

“수호자.”

“뭐.”

“네 염려와 달리 난 진짜 별생각 없다. 그저…… 이젠 혼자 있고 싶지 않을 뿐.”

“…….”

뜬금없는 고백에 할 말을 잃은 녹스, 그 옆에서 덤덤한 로르.

복잡 오묘한 둘 사이를 가르며 이안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녹스, 로르.”

네가 부르니 꽃이 되었다지 않던가.

둘의 표정은 언제 떫었냐는 듯 일거에 활짝 폈다.

“이안이 부른다!”

덤불을 헤친 검은 소는 포르르 이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귀도, 꼬리도 쉼 없이 도는 게 무슨 풍차 같았다.

“이아아안.”

“……저게 소 새끼냐, 개새끼지.”

로르의 뒤태를 양껏 흘기며 녹스는 신랄하게 평했다.

이죽거려놓고선, 그리 말한 당사자 또한 날개를 재게 퍼덕이며 날아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안에게로.

본인이 알진 모르겠지만, 녹스도 도긴개긴이었다.

주인 반기는 강아지와 진배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오늘 잠복은 여기서 끝내야겠어.”

“술래잡기 더 안 해?”

“오늘은 안 오려나 봐. 내일, 다시 모이자.”

“히히. 이안, 기숙사로 돌아갈 거냐?”

“어.”

“그럼 나도 따라갈래. 그래도 되지?”

“맘대로 해. 고생들 많았어. 가서 맛있는 거 먹자.”

* * *

다음 날.

이안은 서둘러 그라나토스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해 질 녘에 시작하는 잠복.

그에 앞서 오늘은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이안, 하늘 좀 봐라. 빛무리가…….”

녹스의 탄성에 이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청명한 하늘에 커튼이 드리워진 듯 빛무리가 펼쳐져 있었다.

“…….”

유난한 광휘, 그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하얀 눈, 화창한 바람 소리.

선연한 풍경을 이안은 서늘한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저 빛무리가 있던…….’

오늘이었다.

올리브가 살리카에게 맞아 다리가 불구가 돼 버린 날.

“후우.”

이안은 부러 숨을 크게 내쉬며 뻐근한 둔통을 덜어냈다.

하지만 예민해져 버린 신경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빨리 올리브를 찾아야겠다.”

재게 움직여 어느새 다다른 동쪽 구역.

그곳에 이르자 숲의 공기와 모습이 완연하게 바뀌었다.

나무뿌리에 뒤엉킨 암석, 고드름처럼 지면에서 높이 솟구친 바위들.

뾰족한 바위 사이를 폴짝폴짝 오가는 날다람쥐 닮은 대지 정령들.

“‘로포스’가 있으니 이 근처인데.”

이안은 올리브를 찾으려고 시선을 왼쪽 끄트머리로 돌렸다.

그러자 여지없이 보이는 연한 주홍색 머리카락들.

이안은 무리의 가운데 있는 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쥐가 파먹은 옥수수처럼 생긴, 저놈이다.

티무스 세테리앙.

올리브의 다리를 망가트린 놈.

“야, 이 개새끼야. 눈 안 깔아?”

티무스가 올리브의 뺨을 때렸다.

모욕을 줌과 동시에 위계를 주입하는 같잖은 짓.

어째 하나같이 A반은 트란 같은 놈들만 득실대는지.

“감히 X만 한 C반 따위가 살리카 구역을 넘봐?”

“내가 서 있는 땅도 내 땅, 네가 서 있는 땅도 내 땅. 몰라?”

“우리가 있으면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어길 시 어떻게 된다?”

티무스가 야비한 낯짝으로 올리브의 다리를 툭툭 쳤다.

그 다리, 성치 못할 거라는 의미.

“킬킬. 겁 좀 그만 줘라. 무서워서 어디 서 있기나 하겠냐? ‘거기’가 다 쪼그라들었겠다.”

날건달들의 협박에도 올리브는 똑 부러졌다.

“웃긴 것들이네. 살리카 땅? 그딴 게 어딨다고.”

“하, 이것 봐라?”

“몰려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새끼들. 너희들이나 꺼져.”

“X발. 어디서 따박따박 시건방지게 말대꾸를!”

짜아아악!

올리브의 턱이 돌아가 버릴 정도로 티무스의 손속은 매서웠다.

굽실거리지 않으니 심기가 불편한 거였다.

“이안이 잘 나간다고 너까지 뭐라도 되는 줄 아냐?”

캬악, 퉤!

“C반 네깟 쓰레기들? 이안 걔가 여길 졸업하면 아는 척이나 할 것 같냐?”

“…….”

“도련님 콧바람 쐬는데 괜한 장단 맞추며 헛바람 들지 말고 정신 차려, 새꺄.”

티무스는 말끝마다 올리브의 얼굴에 손찌검했다.

무자비한 손길이라 올리브의 코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양쪽 콧구멍에서 봇물 터지듯 새는 핏물.

“별 거지 같은 놈이 되게 말 많네.”

그것을 닦지도 않고 올리브는 주먹을 내질렀다.

돌기가 난 손등은 대지 원소를 감았다는 의미.

녀석의 거센 반격에 티무스는 언짢은지 입가를 실룩거렸다.

“벌레 새끼가 불쌍해서 충고를 해 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놈은 불의 창을 만들어 휘둘렀다.

횡을 그리는 궤적이 목울대를 스치자, 올리브가 휘청했다.

기회라 여긴 모양이다.

그걸 놓치지 않고 단박에 거리를 좁힌 티무스는 그대로 올리브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퍼어억!

작정한 발차기에 올리브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러자마자 놈은 올리브의 오른 다리를 노리며 창을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크윽!”

올리브의 신음에 한껏 올라간 티무스의 입귀.

놈은 만족스러운지 고갤 짓쳐 들고 나머지 놈들에게도 동참하라고 눈짓했다.

“킬킬.”

쓰레기 옆엔 역시 쓰레기만 있다.

누구 하나 빼지 않고 선뜻 티무스의 악행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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