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이안, 이 전쟁이 언제 끝날까?”
“글쎄.”
“넌 뷔트시겐의 적자라 어깨가 무겁겠다.”
“…….”
“전쟁이 끝나고 나면 가문을 이을 거지?”
“올리브 넌? 전공을 세우면 본가의 호위대에 들어갈 수 있으니, 거기 들어갈 거야?”
“나? 이제 사람 죽이는 거 지겹다. 농사나 지으려고.”
“농사?”
“응. ‘발리올의 비옥한 평야는 죽은 씨앗을 심어도 숨결을 불어넣는다.’란 말, 너도 알지? 그런 땅을 밟고 자라서 그런지 난 농사꾼이 되고 싶었다.”
“농사꾼.”
이안은 올리브의 말을 반복하며 곱씹었다.
“음. 너라면 괜찮겠다.”
“그치? 난 별 욕심 없어. 전공을 세우면 연금도 주니까 평범하게 살란다. 그거면 내 동생들이랑 그냥저냥 먹고 살 만큼은 될 테니.”
“평범이라…….”
이후로 올리브는 ‘평범’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꾸 감자 심는 법이나 옥수수 심는 법을 늘어놓았다.
이 말 했다가 저 말 했다가.
의식의 흐름대로 녀석은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대화인지, 독백인지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었다.
곧 있을 전투를 위해선 쪽잠이라도 자야만 했다.
각자의 천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헤어지려던 순간.
“이안.”
올리브가 취기가 오른 모양인지 전에 없이 밝게 불렀다.
생의 의지가 굳건했기에 불꽃 같았던 얼굴.
“나 꼭 살아서 돌아갈 거야.”
“…….”
“우리…… 같이 살아서 돌아가자.”
그리 말했던 녀석은…… 그날 전투에서 죽어 버렸다.
유난히 빛무리가 청명해 누군가가 죽기엔 아까운 그 날.
그저 자신의 소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참전했던 녀석.
마냥 평범했었던 녀석의 목숨은 너무도 연약했고, 쉬이도 꺼져버렸더랬다.
‘빌어먹을.’
까마득한 과거를 회상하던 이안은 마른세수를 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기억들은 잊히지 않는다.
본래부터 있었던 양 골수에 들러붙어 얼룩이 되어 버렸기에.
아마 올리브를 자신도 모르게 신경 썼다면 이 때문일 것이다.
부디…….
이번 생에는 쉬이 꺼지는 연약한 목숨이 아니기를.
데구루루.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안다는 양, 무언가가 발치로 굴러 들어왔다.
발등까지 올라왔다 다시 내려간 무엇.
‘……사과?’
그것을 집어 든 이안은 빨간 사과가 굴러온 방향을 되짚었다.
거기, 포도색 덤불 숲 끄트머리에…….
[크륵.]
은빛 갈기 날리는 수문장이 얌전히 앉아서, 그를 말똥말똥 보고 있었다.
새끼 강아지 크기.
작아진 몸피를 한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의 눈빛에는 위로가 담겨 있었다.
‘짜아식, 울적해 하지 마.’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달까.
과한 해석일 수 있는데, 그것이 정답이라는 양 녀석이 울음을 토해 냈다.
[캬우울. 캬울.]
* * *
그날 저녁.
“어이, 사냥개. 두 번째 결속이라는 건 첫 번째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알고 있나?”
[크륵?]
“넌 정확히 두 번째다. 하여 네놈이 지켜야 할 건 하나다.”
녹스는 책상 위에 늠름하게 서서 사냥개를 내려다보았다.
배를 뚱 내민 채 뒷짐 진 자세.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몇 시간 째 저러고 있으면서도 똥폼을 풀지 않는 걸 보면.
“서열 1순위인 나를 존경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크르륵?]
경배를 강요하는 녹스의 발버둥에 이안은 바람 새는 웃음을 터트렸다.
피식. 피시식.
산통을 깨는 경박한 웃음소리.
이에 녹스는 분위기를 깨지 말라며 이안을 흘겨보았다.
새침한 시선이라, 이안이 재빨리 ‘계속해, 계속해’라고 눈짓을 보냈다.
“커흐흐흠.”
녹스는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했다.
그런 뒤 책상 아래에 있는 사냥개에게 위엄 있는 시선을 보냈다.
“말로의 탑에 묶인 동지 관계? 그딴 건 사회생활에 필요치 않다.”
녹스는 엄정하게 선언했다.
“내게 온정을 기대하지 말아라. 하나 누차 말했듯, 날 존경하면 졸개 삼아 줄 순 있다. 영광으로 알도록.”
[크륵?]
녹스가 어떤 말을 하든 사냥개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짖을 테니.
영락없이 그런 모양새랄까.
가만 보면 사냥개의 성격도 보통은 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거 몰라요.’를 꿋꿋하게 시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녹스의 세뇌가 안 먹힐 것 같은데.’
너무도 명백한 단정이 이안의 머릿속을 스치던 때였다.
사냥개가 무심하게 이안의 발치로 와서 발라당 드러누웠다.
마치 1인자는 너라는 듯이.
완벽한 처세술에 이안은 사냥개의 볼록한 배를 살살 문질렀다.
그 손길엔 웃음기가 배였다.
“녹스, 너 아무래도 패한 것 같다.”
“패? 패에? 이 위대한 내가 패에에에에?”
“사냥개 성격으로 봐선 앞으로도 못 이길 것 같고.”
“허! 지금 어디서 망발을? 내가 저것 하나 못 이긴다고?”
“그럴 것 같은데?”
“저, 저!”
혈압이 오른 녹스가 뒷목을 붙잡았다.
본디 먹고 먹히는 것이 먹이 사슬의 본질 아니던가.
영원한 포식자도, 영원한 피식자도 없는 법.
어쩌면 녹스는 ‘자칭 1인자’ 자리를 뺏길지도 모르겠다.
것도 가까운 시일 내에.
* * *
“오올, C반의 자랑! 과제를 일주일 만에 끝내다니!”
본관의 3층 복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유난한 그 길.
그곳을 걷는 이안의 낯빛에선 후광이 새어 나왔다.
마력핵을 얻은 지, 근 2달 만에 정령을 얻었으니 오죽하랴.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며 올리브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안 네가 난 놈은 난 놈이구나. 캬아아.”
“훗. 이 형님 멋지지?”
“멋지십니다, 형님.”
“아우의 칭찬이 영 맛이 없구나.”
“떠벌리기도 벅찬 성취라 그럽니다. 형님께서 첫 정령을 일주일 만에 얻었잖습니까. 근데 그게 또 어둠 정령이라니.”
짓궂은 표정으로 올리브는 이안의 등짝을 과격하게 두드렸다.
찰진 타격음.
그 소리에 여태 조용히 있던 레브가 올리브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올리브, 그렇게 약하게 쳐서 이안 등뼈가 부서지겠어? 더 세게 쳐.”
“응?”
“잘난 척하는 꼴이 완전 얄밉잖아.”
“캬캬캬.”
레브의 장난스러운 부추김에 올리브는 배꼽 빠지게 웃어 젖혔다.
어찌나 숨넘어가게 깔깔대는지.
완벽한 유쾌함은 결국, 레브마저 피식 웃도록 만들었다.
“축하한다, 정령 얻은 거.”
누군가의 결실을 제 일처럼 온전히 축복해 주는 이.
그런 자가 어디 흔하던가.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기색에 이안은 짧고 굵게 화답했다.
“고맙다.”
감정이 보일 정도로 환히 웃어 보이는 이안의 모습.
너무도 생경한 광경이라 아이들은 이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쟤가 저런 식으로 웃는다고?
적잖이 충격이었다.
언제나 무표정에 딱딱한 얼굴만 내보이더니 이건 뭐.
숫제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에 다른 사람이 들어앉은 것 같다.
“봤냐? 이안 웃는 거?”
“살다 살다 쟤가 웃는 걸 보게 되네.”
“솔직히 나라도 웃겠다야.”
노란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이안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지옥 사냥개에 붙박였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게 어찌나 위풍당당한지.
“어둠 정령을 얻었잖아.”
“하긴. 그렇지? 근데 나 어둠은 처음 봐. 되게 신기하다.”
“신기한 건 둘째치고, 어둠은 까칠하고 예민해서 결속 맺기 힘들지 않나?”
“그러니까 이안이 대단한 거지. 말도 안 되게 까칠한 놈을 꼬셨으니.”
“하긴. 교수님들조차 어둠은 없는데.”
“쟨 진짜 괴물이다, 괴물.”
연신 감탄하던 발리올은 옆의 친구에게 거듭 속살거렸다.
“근데 일주일이면 뷔트시겐 가주님이 세운 기록이랑 똑같은 거 아냐?”
“응. 완전!”
“캬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
“그걸 뭐라고 해야 하지? 실력이 존나 하늘을 뚫었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은 좀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을 듣고 몰려든 인파로 점점 더 미어터질 뿐.
“근데 말이야. 저 사냥개 엄청 귀엽다.”
“그러게. 번개가 팍팍 튀는 게 꼭 전격계 정령 같기도 하고.”
“뭔가…… 있어 보여.”
“확실히. 은색 털을 가진 지옥 사냥개라 그런가 개멋지네.”
크륵.
아이들의 웅성거림에 점잔 떨던 사냥개가 고개를 짓쳐 들었다.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사냥개의 우쭐거림이 귀여워 이안은 내도록 녀석만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
이안의 시선을 빼앗아 가려는 듯, 인파의 끄트머리에서 ‘헉’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수선함을 넘어…… 뭐랄까.
조용한 흥분과 위압이 팽배하게 넘실거렸다.
그곳으로 이안은 고개를 틀었다.
바다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쪼개지는 인파.
그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열 명 남짓한 살리카들이었다.
그림자만 봐도 작년에 먹은 브리오슈가 역류할 것 같은, 재수 없는 것들!
훈풍 돌던 이안의 얼굴은 삽시간에 무표정이 되었다.
* * *
그들 가운데 중앙, 거기다 제일 앞.
산호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나붓나붓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태도 그렇고, 눈웃음 짓는 외양도 그렇고.
흡사 엘프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이 빼어났다.
매혹적이면서 기품있는 특유의 아우라가 흘러넘치는 것까지.
‘멜러니 폰투스.’
살리카 가주의 방계 혈족이며 조카.
가주를 지키는 수호검 가문인 ‘폰투스 가’의 장녀.
치열한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 이곳으로 쫓겨난 추방자.
이안은 무감하게 폰투스를 쳐다보았다.
“이안 님.”
사뿐하게 지척까지 온 폰투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를 이렇게 불렀다.
동급생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이안’이란 호칭도 아니고.
통상적으로 정중함을 담아 부르는 ‘도련님’도 아니고.
전자도 후자도 아닌 호칭은 경계가 모호했다.
“축하드려요. 이번에 어둠 정령을 얻으셨다지요.”
폰투스는 산호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구나 혹할 만한 매력적인 몸짓.
그녀의 미모에 홀린 주위에선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고로 예쁘면 장땡인 거다.
이안은 눈썹 머리를 문지르며 폰투스를 지그시 보았다.
그녀는 외모도, 성격도 여전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호의를 내보이고 있었으니까.
지난 생의 해묵은 인연.
폰투스는 종종 도서관으로 찾아와 말을 건네곤 했었다.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냐며.
“여전히 나에게만 높임말을 쓰네.”
“호홋. 직계시잖아요. 이번에도 스스로 그 가치를 증명하셨고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
“운도 본인의 노력이란 말이 있지요.”
“그 ‘노력’이란 글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멜러니 폰투스 그대지. 곧 에르그 승급 시험을 치른다고 들었는데.”
“예. 열다섯에 에르그 1성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잖아요.”
“미리 축하해야겠군. 당연히 합격할 테니.”
“과분한 평가에 감사드려요.”
“‘고맙단’ 말은 내가 해야지. A반은 5층인데, 이곳까지 왔다는 건 신경을 썼다는 의미니까.”
“당연한 것을요.”
아낌없는 칭찬과 사근사근함.
폰투스가 내보이는 기품에 아이들은 찬사를 보냈다.
‘상냥해.’ ‘너무 눈부셔.’ ‘정말 완벽해.’
호의의 파도가 밀려와도 폰투스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주변에 휩쓸리기 쉬운 열다섯답지 않는 태도였다.
“이안 님이신데, 제가 직접 와야지요.”
“다시 말하지만 영광이군.”
“그런데 요즘은…….”
폰투스는 창밖의 시계탑을 본 후 도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팔락거리는 눈꺼풀이 나비 같았다.
“도서관에 잘 가시지 않나 보네요. 거기서 모습을 뵐 수 없으니.”
“요즘엔 좀 바빠서.”
“아,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말끝을 흐리며 여운을 남기는 폰투스.
이안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대화할 때 끝머리를 맺지 않는 방식.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 다양한 해석을 하도록 유도한다.
이를 알고 있는 폰투스는 대화를 나눌 때 늘 이런 식으로 틈을 두었다.
이안이 뚫어지게 보자 폰투스는 생긋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 아쉽지만 곧 전투학 수업이 시작될 터라, 저는 이만 가 봐야겠네요.”
“다음에 볼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찾아가도록 하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눈꺼풀을 팔락거린 폰투스는 계단 쪽으로 몸을 틀다가 다시금 바로 했다.
할 말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아, 가기 전에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성취도 좋지만 그라나토스를 다닐 땐 조심하셔요. 거긴 위험한 곳이잖아요.”
“그러도록 하지. 미인의 염려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니.”
이안은 반들반들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곤 아주 살짝 폰투스와 가까워지게 상체를 숙였다.
“멜러니 폰투스.”
“예?”
“그대가 내게 베풀어 준 호의, 기회가 된다면 그 빚은 꼭 갚도록 하지.”
이안의 웃음에 폰투스는 곱다랗게 목례를 했다.
그런 연후 차분한 걸음으로 뒤돌아섰다.
.
.
.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본관을 나서는 길.
층계에 선 멜러니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살리카에게 눈길을 주었다.
짧은 눈 마주침.
스치는 것에 불과해도 살리카가 바로 몸을 곧추세웠다.
긴장이 잔뜩 배인 몸짓.
그걸 본 멜러니는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확인하듯 물었다.
“대개의 시간을 그라나토스에서 보내는 거 맞지?”
“누구? 이안?”
“응.”
“뭐더라? 히오……, 아! 히오나스에서 맨날 C반 것들이랑 논다던데.”
“논다, 라…….”
멜러니는 팔짱을 낀 손을 두드리며 창밖 너머를 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그녀에게선 좀 전까지 보였던 따스함이 한 톨도 없었다.
오직 한기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