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감격에 젖어 서로 얼싸안은 C반.
그들을 지켜보는 스톨레 교수의 미소가 유려했다.
그는 슬쩍 몸을 기울여 클로에 교수에게 속살거렸다.
귀 밝은 누군가가 듣지 못하게.
“C반의 결속력이 참 강하지 않습니까, 클로에 교수님.”
“그렇네요. 저렇게 밝은 모습은 저도 처음이라…….”
“계기와 구심점만 있다면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죠.”
“구심점이라…….”
“중심을 잡아 주는 이가 있냐, 없냐가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내는 법이니까요.”
“그 구심점이 아이들을 보듬고 인정해 줄 줄 안다면 더더욱.”
“이안 저 아이는 참…….”
“녀석 덕분에 아이들의 등급에도 실질적인 변화가 생겼네요.”
“헤르세의 환희를 그리 선선히 나눠 줬으니.”
클로에는 밝은 손길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덕분에 아이들이 희망을 품게 됐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겁니다.”
“당장 성이 오르지 않는 아이들 조차도요. 그들도 조만간 등급의 변화가 있을 테니.”
아직 1성인 학생들조차 마력량이 2성에 근접해 있었다.
그리고 두 교수는 알고 있었다.
이런 변화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비밀로 하려는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해서 발설하지 않았을 뿐.
클로에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곤 눈을 찡긋했다.
“앞으론 이에 대해 더는 입에 올리지 않기로 할까요, 스톨레 교수님.”
“그럴 겁니다. 사랑스러운 제자들의 비밀을 지켜 주고 싶으니까요.”
두 교수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때.
마지막 차례인 이안이 느긋하게 단상으로 올라섰다.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며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간 이안이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알기에, 다들 호기심이 번득거렸다.
장내 분위기 때문일까.
여태 무심하던 정령사 협회원들도 이안을 흘끗 보았다.
“…….”
기이한 열기에 뒤덮인 이안은 여신상과 마주 보았다.
그 즉시였다.
양쪽의 마아트가 동시에 몸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뿐일까.
두 마아트 중 오른쪽에 있는 정령의 세 번째 눈이 번쩍 뜨였다.
“!!”
마아트의 극적인 변화에 협회원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려 7년 만이었다.
오른쪽 마아트의 세 번째 눈이 떠진 것은.
‘시온 루하흐.’
전대 루하흐 가주의 아들이자 요절한 비운의 천재.
그 소년을 측정한 이후로 마아트는 눈을 뜬 적이 없었다.
충분히 놀라운 이 마당에.
스르륵.
왼쪽에 있는 마아트의 세 번째 눈마저 떠졌다.
이에 경악한 젊은 협회원이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두, 두 마아트의 눈이 떠진 건…… 40여 년 만인데…….”
마아트의 세 번째 눈, ‘심안’은 잠재력을 의미한다.
고로 종종 오른쪽 마아트의 눈은 떠진다.
하지만 측정 불가를 뜻하는 왼쪽이 반응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충격과 혼란.
협회원이 놀란 감정을 쉽사리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데…….
바르르.
두 마아트의 온몸이 잘게 떨리더니 오색 빛을 뿜었다.
마치 태양이 이곳에 뜬 것처럼 눈부시게.
눈을 찡그린 젊은 협회원은 연거푸 말을 더듬었다.
“페이라조 3, 3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페이라조는 본 적 없다는 표정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말았다.
마력핵을 얻은 지 겨우 두 달 만에 페이라조 3성이라고?
믿기지 않는 결과에 협회원뿐 아니라 주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장내는 침묵에 빠졌다.
* * *
기숙사 앞마당 워프 게이트 앞.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은 주절대며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야 정령사 협회도 떠나네.”
“응? 아, 이안과의 면담이 끝났나 봐.”
“측정 끝나자마자 이안한테 엄청 뭘 묻던데. 특히 젊은 여자가.”
“유례가 없던 일이니까 그렇겠지.”
“하긴. 두 달 만에 페이라조 3성을 찍었으니 그럴 만하지. 안 그래, 에이프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은 걸 거야.”
“노력?”
“이안 말이야.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항상 수련하고 있었거든.”
에이프릴은 푸른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우연한 마주침에도 이안의 행동은 늘 똑같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우박이 쏟아지든, 눈 폭풍이 오든 언제나 이안이 한결같다는 의미였다.
지독한 노력.
그리고 충분한 보상.
생각에 잠긴 에이프릴의 손등을 그녀의 친구가 잡고 흔들었다.
“아, 수련하니까 생각났다. 에이프릴 저기 봐봐.”
여학생의 턱짓이 향한 곳엔 레브가 있었다.
가방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C반 녀석들의 중심에.
“이안이랑 종일 붙어 다니는 쟤도 3성이란다.”
“겹경사라 클로에 교수님이 엄청 좋아하시던데.”
“솔직히 말해서 제일 노난 건 레브 쟤지.”
“응?”
“기억 안 나, 에이프릴? 뷔트시겐 가주님이 영입했잖아.”
“아, 가주님께서 될성부른 싹을 미리 알아보신 건가?”
“사실…… 등급보다 난 그게 더 부럽더라. 레브 쟤한테 미래가 있는 거.”
여학생의 한숨은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선지 드문드문 이어지던 부러움과 질시의 눈빛이 늘어났다.
수많은 생각이 뭉쳐 날카롭게 찔러대는 시선의 창.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C반 아이들은 학교를 빠져나가는 녹색 육륜 마차만 쳐다보았다.
“이안은 언제 온대?”
“글쎄. 면담은 끝난 것 같은데 왜 안 오지?”
“인사하고 집에 가려 했더니만 늦네.”
“이안 오면 후딱 가야겠다. 벌써 정오다.”
“아우.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인지, 나발인지! 진짜 집에 가기 싫다아아앗!”
“이런 전통은 대체 왜 있는지 모르겠다. 등급 측정이 끝나고 나면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니. 것도 일주일씩이나!”
“이 무식한 놈아, 관조를 위해 꼭 필요하다잖냐.”
“내가 몰라서 그런 거냐. 집에만 안 가면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도 좋다는 거지.”
아이들 대부분은 집에 가기를 꺼려했다.
장남이 아니라고 무시당하지.
방계 혈족의 뒤치다꺼리해야 하지.
이래저래 사람 취급 못 받는 집안은 숨이 막혔다.
이런 마당에 관조는 무슨, 성찰은 개뿔!
툴툴대는 아이들을 보며 레브는 상념에 잠겼다.
‘휴식기.’
등급 측정을 하고 나면 주어지는 시간이다.
자기를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의 성취를 되짚어 보라는 의미로 주어지는.
한 단계 앞으로 더 나아가라는 뜻.
의미는 뜻깊었으나, 이것이 유의미한 선은 정해져 있다.
직계나 방계혈족, 그리고 그들과 가까운 능력 좋은 방계.
실제로 이 휴식기에 그들은 어떤 성취를 얻는다.
지배력을 집중적으로 연마해 정령의 특수 기술을 개방한다든가.
아니면 새로운 정령을 얻거나.
결속한 정령들의 기술을 조합해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거나.
‘나도 이 기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선 안 돼.’
목표는 정해져 있다.
페르나로 인해 생긴 나쁜 버릇을 6, 7할쯤은 교정하는 것.
레브는 손톱이 파고들 만큼 주먹을 말아 쥐었다.
“깨춤 춰도 모자란 날에 또 죽상이다.”
“…….”
“세상 근심 혼자 지지 말고 좀 즐겨, 레브.”
이안이 느른한 보폭으로 다가왔다.
* * *
학생들이 에루리안을 떠나고 있는 그 시각, 학장실.
“열댓 명 가까이 페이라조 2성이 되었단 말입니다! 것도 C반이!”
“뿐입니까. 페이라조 3성까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남은 학생들은 또 어떻고요. 협회원의 표정이 ‘페이라조 1성이긴 한데…….’ 이렇더군요.”
“이거 참.”
“그러니 반을 나눠야지 않겠습니까.”
“등급 좀 올랐다고 덥석덥석 반을 올리긴 그렇습니다.”
교수 회의는 좀체 의견이 모이지 않고 있었다.
C반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로 각자의 생각을 떠들기만 할 뿐.
왁자지껄함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기드온 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C반을 해체해야만 합니다.”
“기드온 교수, 이제 학기가 겨우 두 달 남았는데 그건…….”
“물론 전례가 없었던 일이긴 합니다. 학기 도중 학생의 등급이 오르는 건. 하나, 이는 필요한 일입니다.”
“자칫하다간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아니지요. 해체는 혼란이 아닌 평등을 위한 것입니다.”
A반, B반, C반.
이런 반 배정은 단순히 등급만을 나누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균등한 수준끼리 모아 교육을 받게 하는 것.
이를 위한 거였고, 이는 아카데미의 설립 취지라 지금껏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그래서 반을 나누는 과정 또한 까다롭고 엄격하다.
1학기는 공식 등급 측정 결과에 따라 나누고, 2학기는 임시 측정을 해서 나눈다.
혹여 등급이 오른 학생이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 때문.
‘원칙적으론 그렇지만 여태껏 등급이 변한 적은 없었지.’
하여 이런 문제를 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기드온은 뾰족한 턱을 거칠게 문질렀다.
어딘가 음습함이 묻은 손길.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페이라조 3성만큼은 A반으로 옮겨야 합니다.”
3성이 된 이안과 레브.
둘 중에 적어도 ‘레브’만큼은, 그가 담당하는 A반으로 오게 만들어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만 되면 언제든 레브의 정체를 확인해 볼 수 있으니까.
이때다 싶어 기드온은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의 주장대로, 점차 반을 나누잔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 가던 차였다.
콰아앙.
잠자코 있던 클로에 교수가 책상을 후려쳤다.
저놈의 천박한 손버릇.
기드온은 절로 찌푸려지는 눈살을 펴며 표정을 관리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콧방귀를 대차게 뀐 클로에가 신랄하게 의견을 표명했다.
“지금 내 학생들을, 불로 지지고 다리를 망가트리려 한 것들과 같이 두잔 겁니까?”
“불미스러운 일은 일부의 소행입니다. 징벌도 내렸잖습니까.”
“일부요? 그걸 일부라 할 수 있습니까? 방조와 무시 역시 가담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학생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겁니까, 클로에 교수?”
“차라리 뒷골목 건달이 더 낫겠습니다. A반보단!”
“클로에 교수!”
“전 그 양아치들한테 제 새끼들을 절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C반을 아끼는 건 이해하겠으나 사리를 분별하시오!”
“두 분, 지금 감정싸움으로 번진 것 같습니다. 우선 진정부터 하는 게 어떻습니까.”
두 교수의 격렬한 대화에 스톨레 교수가 끼어들었다.
차분한 음색이라 과열되는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식혀 주었다.
“이론적으론 기드온 교수님의 말이 옳습니다.”
“말이 통하는군요, 스톨레 교수는. 교육은 자고로 평등해야지 않겠습니까.”
“예. 그렇지만 폭력을 행한 자와 당한 자를 같이 두는 걸 평등이라 할 수 있을지. 그건 또 다른 폭력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해결…….”
“학생들을 망가트리기 위해 교육이 있는 게 아닙니다.”
“크음.”
헛기침한 기드온이 학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뭔가 말해 보라는 압박이었다.
그의 구겨진 미간을 본 학장이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누구 편도 들지 않을 거라는 회피 전략이었다.
주변의 반응을 훑은 스톨레는 안대 끝을 문질렀다.
‘흠. 가르치는데 열의가 없던 기드온 저자가 시끄러워질 짓을 감수한다, 라.’
뭔가 꿍꿍이가 있다.
그렇다면 뜻대로 되게 둘 순 없었다.
스톨레는 안대를 뒤로 넘기며 산뜻하게 말했다.
“학기가 이제 두 달 남았습니다. 굳이 중간에 반을 바꿔 혼란을 줄 필요가 있을까요?”
“스톨레 교수답지 않는 발언이군요.”
“하하핫. 전 무엇보다 합리적인 걸 좋아하는 인간일 뿐입니다.”
“합리적이라는 건 학생들을 위한 결정을…….”
기드온의 말을 스톨레는 중간에 잘라 버렸다.
“계속 말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으니, 차라리 이건 어떻습니까?”
“……?”
“교수님들께서 조금만 번거로워지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다.”
“번거로워지다니요?”
“C반만, 차등을 둬서 수업을 준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렇게…….”
기드온이 뭐라 지껄이든 스톨레는 학장만 빤히 보았다.
플로이드 에루리안.
플로이드란 이름처럼 회색인 자였다.
‘소란과 분란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학장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무난한 해결법을 찾은 데서 온 반응이었다.
학장은 혹여라도 기드온이 물고 늘어질까 재빨리 입을 놀렸다.
“이 건은 스톨레 교수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군요. C반 수업을 좀 더 신경 써서 짜면 될 듯합니다.”
“학장님!”
“됐습니다. 그만 하세요, 기드온 교수. C반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