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츠스스.
하얀빛이 꺼지면서 익숙한 광경이 젊은 협회원의 눈에 들어왔다.
제국의 수도 ‘라에라트.’
거미줄처럼 수많은 구역이 얽혀 거미의 둥지라 불리는 곳.
이 복잡한 수도의 남쪽에 자리한 ‘기르타브 구.’
이곳을 흔히들 ‘정령사 협회 거리’라고 부른다.
‘후우. 피곤하네.’
젊은 협회원은 시야를 가리는 후드를 슬쩍 위로 들어 올렸다.
포말이 이는 하얀 파도 같은 풍경.
건물 자체가 온통 하얀 데다 빛까지 받으며 물결치니 그럴 수밖에.
특히 하늘과 맞닿아 있는 정령사 협회의 탑이 그랬다.
젊은 협회원은 도로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며 말문을 열었다.
“스승님을 만나야겠다.”
“예. 아무래도 서둘러야겠습니다.”
“우리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 테니.”
협회원 다섯은 이동 마법진 위에 서서 마력을 불어넣었다.
쿠구궁.
어느 정도 마력이 주입되자 진이 새겨진 땅이 쪼개지며 들렸다.
위로, 점점 더 위로.
탑의 3할 지점쯤 왔을 때 공중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탑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일종의 워프 게이트.
삼각뿔 형태의 공중 정원은 탑을 에워싸고 수십 개나 존재했다.
타앗.
첫 번째 정원을 밟은 협회원들은 이후 몇 개의 정원을 더 거쳤다.
그럴 때마다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수고롭게 이어진 15분의 노동 끝.
“휴우. 이런 이동 방식만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협회원들은 탑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실제 이곳이 마지막 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협회장이 있는 곳.
똑똑.
협회의 문양이 새겨진 철문을 젊은 협회원이 두드렸다.
“들어오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젊은 여자를 필두로 나머지 넷이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의 노인.
동공마저 제국에 없는 은회색인 걸 보면 나이로 인한 것은 아닌 듯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색깔인 듯.
협회장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협회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땠지?”
노인의 말은 단도직입적이었고, 주어조차 없었다.
그의 성정이 본디 그렇거니와,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걸 알기에 지체할 까닭이 없었다.
해서 중년 남자가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에루리안에서 눈에 띄는 자들은 1학년의 C반뿐이었습니다.”
“C반?”
“예. 원체 재능이 없어,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이상 등급 변화가 없어야 하나…….”
“등급이 올랐다, 이것이더냐?”
“예.”
“흐음.”
“마아트에 수액이 맺힌 것으로 보아, ‘강제 발현’이었습니다.”
“강제 발현?”
“……예.”
“본디 가주급 정도의 정령사가 자신의 마력 ‘절반’을 버려가며 마력 회로를 뚫는 것이 강제 발현이다. 한데 에루리안에서 강제 발현이라고!?”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남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현재는 열다섯 명뿐이지만 아직 미발현인 나머지도…….”
“그 수가……. 흐음. 기이하군.”
“분명 원인이 있을 테니, 이에 관해 철저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영민한 대꾸에 흡족한지 노인의 찬기가 수그러들었다.
정령사 협회의 역할이란 게 그렇다.
모든 정령사와 정령을 파악함은 물론, 문제가 발생했을 시 그것을 봉합하고 처리하는 것.
이른바 균형과 안정을 지키는 감찰자인 셈이다.
그러니 직분을 잘 이해한 남자의 행동이 기꺼울 수밖에.
노인의 미간이 풀어지자, 남자는 쪼그라든 어깨를 펴며 말을 이어 갔다.
“특히 주목해야 할 이는 둘이었습니다. 레브 아르데슈, 그리고 이안 뷔트시겐.”
“상태는?”
“우선 아르데슈는 페이라조 3성치곤 마력량이 에르그 2성과 흡사했습니다.”
“흐음. 이번에 뷔트시겐으로 이적한 자라지.”
“예.”
수 초?
생각에 잠겼던 노인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하면 이안 뷔트시겐, 그자는?”
“그게…….”
“으응?”
미적거리는 응답이라 노인의 눈썹이 재차 위로 솟구쳤다.
변방의 에루리안으로 보낸 다섯은 정예였다.
그가 직접 가르쳐 키운 수제자들.
하여, 소문 자자한 이안에 대해 자세히 파악해 보라 파견한 것인데…….
옅어졌던 찬기가 진해지자 남자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페이라조 3성은 확실한데……. 그가 가진 마력은 모호했습니다.”
자신 없는 목소리에 노인의 고개가 젊은 여자 쪽으로 향했다.
너도 모르겠냐는 눈빛.
대장 격인 여자는 무덤덤하게 자신이 느낀 바를 그대로 보고했다.
“저도 뷔트시겐 그자의 마력을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틀이든 두 달의 성취든, 마력의 근간은 어차피 바람이었을 터인데.”
“바람이라기엔…… 배열이 복잡했습니다.”
“그뿐이더냐?”
“수상쩍어 면담을 요청했고, 뷔트시겐이 바람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
“그런데 원소의 배열이 하나라고 단정 짓기도…….”
“내 뒤를 이을 자라 칭해지는 네가 파악하지 못했다, 라.”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니다. 본디 타고난 근간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 그게 여신이 이 땅에 내린 축복의 조건이었으니.”
바람은 바람을, 물은 물을…….
설령 바람과 물이 결혼해 아이를 낳아도 변하지 않는다.
무조건 원소는 하나.
이러한 불변의 법칙에서 어긋난 것 같은 자, 라…….
희망인가, 재앙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노인은 이맛살을 한껏 구겼다.
“‘노타티오의 서’를 가져와라. 역대 뷔트시겐 가주의 기록이 적힌 것이라면 전부.”
반드시 확인하고 파악해야만 한다.
이안 뷔트시겐, 미지수가 된 그자에 대해.
* * *
다그닥. 다각.
이안 일행을 태운 검은 마차가 너른 가도를 내달리며 본가로 향했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
하여 충분히 밖을 구경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다.
‘꼭 몇 년 만에 온 것 같네. 고작 두 달인데.’
이안은 회백색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를 보며 감회에 젖었다.
뷔트시겐의 중심 도시, ‘슈바츠.’
초대 황제와 함께 제국을 세운 초대 가주가 정착한 곳.
협곡과 산과 설원뿐인 혹독한 땅에서 뷔트시겐 일족은 터전을 일궜다.
그렇게 천년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의 패자로 군림했고.
‘흐음.’
밖을 보던 이안은 마차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맞은 편에 앉은 두 녀석의 표정이 무척 상반되었다.
레브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얼굴이었고, 올리브는 마냥 신났다.
“이안, 이안. 뷔트시겐의 정수를 느끼고 싶거든 슈바츠를 가 봐야 한다, 라고 그러잖아. 근데 여긴 진짜 뭔가…….”
씁씁하하.
올리브는 이안을 따라 마차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킁킁거렸다.
들뜸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친구 집, 것도 이안의 집에 가게 될 줄이야!
“이게 바로 뷔트시겐의 공기란 건가? 뭔가 산뜻하고…… 푸에취.”
바깥바람을 얼마나 쐤다고.
그 잠깐 사이 코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흡사 맨몸으로 얼음물에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이곳은 사철 봄의 날씨를 유지하는 발리올과 너무나 달랐다.
코끝을 문지르며 올리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랄하게 놀던 강아지가 제풀에 넘어져 놀란 것 같은 모양새.
그걸 본 이안은 마차 안이 울릴 만큼 웃어 젖혔다.
“많이 춥지?”
“어, 어? 아냐. 이 정도는 뭐.”
“아니긴. 뷔트시겐에 처음 오면 다들 적응을 못 해, 이 추위에.”
“솔직히 상상 이상이다. 이 정도일 줄은. 발열석 박힌 마차가 아니었으면 난 슈바츠 초입에서 이미 얼어 죽었을 거야. 으으윽.”
올리브가 오두방정을 떨며 창을 닫았다.
빈틈없이 닫으면서도 신기한 건 어쩔 수 없는지, 녀석의 고개는 여전히 밖을 향해 있었다.
“이젠 알겠다. 왜 사람들이 뷔트시겐을 ‘설랑’이라고 부르는지.”
“하얀 늑대, 환경에 따른 적응인 거지.”
여태 조용히 밖만 보고 있던 레브가 대화에 참여했다.
왠지 모를 희미한 열감이 어린 목소리를 하고서 말이다.
“저기 봐봐, 올리브. 건물이 죄다 뾰족한 첨탑 형태지?”
“응. 군더더기 없는 직선이네.”
“그게 다 눈이 쌓이지 않게 하려고 그런 거야. 바람이 덜 통하게 하려는 것도 있고.”
“책으로만 볼 땐 선뜻 와닿지 않았는데…….”
“이제 확 와닿아?”
“응. 확실히.”
“여기처럼 발리올도 그렇잖아. 건물들이 다 둥글고 화려한 건 봄만 있는 영향이니까.”
“그러게. 뭔가 신기하다. ‘히에로스 제국에는 다섯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라는 말이 뭔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
“각기 특색이 있지만 뷔트시겐의 이런 정취, 참 좋지 않아?”
레브 또한 차분한 평소와 다르게 상당히 들떠 있었다.
현재를 보되 아득한 과거를 보는 눈빛.
녀석의 기색을 계속 살피던 이안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으음. 내가 일곱 살…… 때였나.’
전대 루하흐 가주, 그러니까 레브의 아버지가 뷔트시겐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공식적인 건 아니고 비공식적으로.
그저 벗을 만나기 위한 소소한 외출.
그 나들이에 루하흐 가주는 이안 또래의 막내아들과 함께였었다.
‘그 막내가 레브였지.’
아무래도 어릴 적 흐릿한 추억이 설렘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평소의 과묵함을 버리고 쉼 없이 수다를 떠는 걸 보면.
단내 나도록 주절대는 녀석을 보곤 올리브가 입가를 실룩거렸다.
“푸하핫. 레브 너 뷔트시겐 사람 다 됐다? 이적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어?”
“벌써부터 이렇게 자랑하기 있기, 없기?”
“자랑 아니거든?”
“캬캬캬. 완전 맞거든? 이참에 아예 머리카락도 검은색으로 물들여 버렷!”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왜에? 검은색도 자알 어울리겠다. 오올. 검은 머리카락의 훈남.”
건수를 잡은 올리브가 최선을 다해 깐죽력을 올렸다.
저러다 한 대 맞을라.
예상대로 레브의 손이 번쩍 들렸다.
빰바바밤.
그때 올리브를 구하려는 듯, 흥겨운 연주가 그들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 셋은 일제히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뷔트시겐 가 자체가 가주의 성정을 따라 평소엔 무척이나 조용했다.
연회나 이런 것이 떠들썩하게 열리지도 않고.
“근데 웬 음악 소리가?”
* * *
뷔트시겐 정문 앞에서 멈춘 마차.
그제야 이안은 소리의 근원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광경.
그것이 펼쳐지고 있는 탓에 이안은 차마 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
뿌우우우.
북과 트럼펫, 오보에, 바순 등을 든 관악대라니.
그들은 유난히 베일 듯 반듯하고 깨끗한 정복 차림이었다.
복장만큼 기합이 잔뜩 들어갔기 때문일까.
관악대의 역동적인 연주엔 영혼까지 담겨 있었다.
광적인 동작을 선보이는 그들 뒤.
검은 갑주를 찬 정령 기사단, 그러니까 ‘검은 늑대’들이 각을 잡고 늘어서 있었다.
정확히는 정문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상태.
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아. 왜 저러고 있는지 알겠네.’
이안의 입술 새로 한숨이 폭 새어 나왔다.
한데 입김이 마르기도 전에, 줄의 끝자락에서 총단장이 튀어나왔다.
“금빛 늑대의 자유로운 혼, 뷔트시겐의 정신을 이어 가실 이안 뷔트시겐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지축을 흔들 정도였다.
낯 뜨거운 환대에 이안은 이대로 마차를 돌리고 싶어졌다.
막 그런 충동이 들던 찰나.
그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라는 양, 올리브가 이안의 등을 확 밀어 버렸다.
장난에 동참할 줄 몰랐던 레브까지 합세한 상황.
배신이 이렇게 쉽다.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라지 않던가.
뒤통수를 맞고 떠밀린 이안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페이라조 3성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한목소리로 외친 기사단이 보라색 꽃을 집어 이안에게로 흩뿌렸다.
매우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명령을 받으면 묵묵히 수행하는 자들다웠다.
가시는 걸음걸음 꽃과 함께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는 것도 아니고.
“성취를 이루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도련님!”
제식 훈련 때보다 더 각 잡힌 통일성.
이만으로도 이 상황을 주도한 것이 누군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여간 칼브란.’
이안은 속으로 웅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극성을 간파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도련님의 귀환을 ‘성대히’ 치러야 한다는 명을 받았습니다.”
목청껏 외친 총단장은 누구보다 성실히 꽃을 뿌려댔다.
솥뚜껑 같은 손에 들린 앙증맞은 바구니와 한 움큼씩 날리는 꽃의 비.
그걸 후려 맞은 이안은 아래로 떨어지는 꽃잎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하핫. 총단장까지……. 수고가 많네.”
“아닙니다. 도련님을 위한 일이니 오히려 영광입니다.”
총단장은 중대한 임무를 맡은 양 비장했다.
너무도 진중한 모양새에 뒤에 있던 레브와 올리브가 입을 틀어막았다.
웃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이런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려는 심산인지.
아니면 이안을 수치사 시키려는 건지.
“자, 도련님을 위한 길입니다. 나아가 쟁취하십시오!”
“…….”
충성스러운데 멕이는 것 같은 화법.
칼브란과 똑 닮은 총단장이 보랏빛으로 물들여진 꽃길을 가리켰다.
총단장의 행동은 결국 두 녀석의 웃음보를 자극하고 말았다.
“큭큭큭. 축하합니다, 도련님.”
[성대하구나, 아주 성대해. 푸흘흘.]
놀림거리가 생기자 녹스마저 짓궂게 굴었다.
이 환장할 상황에 정점을 찍으려는 듯.
퍼엉. 퍼어엉.
형형색색의 폭죽이 긴 꼬리를 그리며 오후를 노을로 물들였다.
불꽃 하나하나를 이어 보니 늑대 모양이라.
장인이 얼마나 한 땀, 한 땀 손목을 갈았는지 짐작이 갔다.
그 피와 땀, 눈물이 섞인 폭죽은 이내 또다시 어떤 글자를 만들어 냈다.
‘축! 페이라조 3성 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