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꽃길의 끝.
“도련님, 성취를 이루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사용인 기백이 허리를 굽혔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절제된 동작이었다.
예를 다하는 그들 앞, 의기양양하게 서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칼브란.
그는 몹시 흡족해 보였다.
얼굴 화끈거리게 만드는 환영식이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모양이다.
성공은 무슨.
이런 요란한 축하는 질색이었지만 이안은 말을 삼켰다.
칼브란이 떠들썩하게 군 까닭을 알고 있으니까.
이안이 이룬 성취를 사방팔방 떠벌리고 싶은 것일 터.
그 마음을 아는데 사족을 달아 뭣 하랴.
이안은 눈꼬리를 접으며 칼브란에게 다가갔다.
“내가 유능한 집사의 준비성을 간과했네.”
“과찬이십니다. 도련님을 기쁘게 했다면 이 칼브란, 그것으로 족하지요.”
“덕분에 집에 온 실감도 나고.”
뭘 해도 낯 팔릴 땐 철판을 까는 게 최고의 수인 법.
뻔뻔하게. 이미 뻔뻔하지만, 더 뻔뻔해질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이안은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은근하게 말했다.
“근데 다음부턴 좀 조촐히. 내가 이룰 성취는 이제 시작인데, 매번 이러다간 살림 거덜 나겠다.”
“솔직히 그건 장담 못 하겠습니다.”
“칼브란의 입에서 약한 소리가 나올 때도 있네.”
의외란 이안의 반응에 칼브란이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어쩐지 얄궂은 손길과 음색이었다.
“왜냐면 환영식을 주도한 것은 ‘가주님’이시니까요.”
“아버지?”
놀란 이안은 눈을 홉떴다.
기사단 동원에, 눈이 아플 정도로 흩날리는 꽃에, 화려한 불꽃까지.
이런 식으로 아버지가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이제껏 없었던 일이라 이안은 멍해졌다.
시종 덤덤하던 이안의 반응이 달라지자, 칼브란의 미소가 진해졌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단 표정.
아니, 이 환영식에 관해 알려 줄 이는 따로 있다는 눈빛.
그래서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원체 집무로 바쁘신 분이니 그럴 수 있다 여겼는데.
“크흠. 크흐흠.”
저 멀리, 도열한 사용인들의 뒤쪽에서 헛기침이 들려왔다.
소리가 내포하고 있는 건, ‘나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였다.
가주의 헛기침에 즉각 사용인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인파가 걷히며 시야가 트였다.
“…….”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건, 아버지의 낯에 넘쳐흐르는 뿌듯함이었다.
‘널 위해 준비했다! 맘에 드느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요 표정.
‘……이런 면이 있으실 줄은.’
무례한 말이나 어쩐지 아버지가 귀여워 보였다.
이안이 바라만 보고 있자 가주 쪽에서 먼저 다가왔다.
“……뼈밖에 없던 녀석이 살이 더 빠졌구나.”
“보기엔 이래도 건강하게 잘 지냈습니다. 서신에 쓴 대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아버진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별일 없었다’라고 아버지는 말을 끝맺었다.
그러나 설핏 스민 ‘기다림’이란 글자가 아버지의 낯빛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순간까지도 마음을 삭이는 아버지의 모습.
그를 보고 있자니…….
지금껏 가볍기만 했던 이안의 마음이 희한하게 술렁거렸다.
‘이번에도 지난 생처럼 아버지를 기다리게 했구나.’
살풋 눈가가 떨린 이안은 아버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저번에 에루리안에서 칼브란을 만났을 때, 이미 들었습니다. 주말마다 아버지께서 정문 앞에 나와 계신다고.”
“쯔읏. 쓸데없는 말을 흘렸군.”
“쓸데없긴요. 그러다 몸 상하시면 어쩌려고.”
“크흠. 네가 염려하는 것 같으니 앞으론 자제하마.”
“아니에요. 이젠 제가 주말마다 올게요. 더는 기다리시지…… 않게.”
이안은 목구멍에 돌이 얹힌 듯 메여와서 연거푸 생침을 삼켰다.
기약 없는 기다림.
지난 생에서도 이러했었다.
제국을 떠도는 그를 아버지는 하염없이 기다렸더랬다.
초라한 몰골이 창피해 돌아오지 못하는 그를.
아들의 무사안일을 바라며 홀로 애간장 태웠을 나날들.
지난한 시간은 아버지에게 불면증과 심통을 안겨 주었다.
‘그런 아버지의 상태를 죽을 때쯤에야…… 알게 되었지.’
등신 같은 자격지심이 할퀸 건 자신뿐이 아니었다.
아끼는 이마저 상처를 입혔다.
이안은 과거와 현재를 끌어안듯이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예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그 말과 함께.
“다녀…… 왔어요, 아버지.”
“…….”
그의 속내를 알아챈 듯,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등을 토닥이기만 할 뿐.
발끝까지 시원해지는 이 마력향.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풍기는 여름 냄새에 이안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집에 돌아왔음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끈끈한 부자를 보며 사용인들은 자기 일처럼 흐뭇해했다.
마음결 따라 간드러지게 불어닥친 훈풍.
그 사이사이를 촘촘하게 메우듯.
“크헝헝. 이 칼브란 넘치는 감동에 마음이 너무, 너무…….”
칼브란의 눈물, 콧물이 정원 곳곳으로 쏟아졌다.
패앵. 패애앵.
간혹 콧물을 훔치는 소리는 덤이라.
칼브란의 폭풍 오열 덕분에, 사용인들의 눈에선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감동스러운 상황을 촌극으로 만들어 버린 집사장.
비록 푼수끼가 철철 넘쳤지만. 사용인들은 집사장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 * *
[칼브란이란 그자, 혹 쌍둥이인 게냐?]
이안은 자신의 방에 입성하자마자 엉뚱한 질문을 받았다.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기척을 죽인 녹스의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다.
“쌍둥이?”
의문을 표하며 이안은 창가 쪽 탁자로 향했다.
손때가 많이 묻은 네모난 탁자.
여기에 앉으면 밖이 구석구석 훤히 내다보였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
창가에 다다른 이안은 의자를 발로 툭 밀어 걸터앉았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 밖은 아까보다 한산했다.
“칼브란의 뭐에 꽂혀 그런 말을 하실까, 내 스승님이.”
[성격이 저번에 만났을 때와는 지나치게 달라 하는 말이다.]
“아아.”
[내 정체를 한눈에 파악해 등골을 오싹하게 한 놈은 어디 가고, 오늘은 질긴 눈물보로 섬찟하게 하는 놈만 있으니.]
“칼브란이 좀 그런 구석이 있지.”
[설마 갱년기?]
“원래 그래. 싸울 땐 야찬데, 평소엔 감수성이 넘쳐. 낙엽만 굴러가도 울적한 중년 남성처럼.”
[큿. 확실히 갱년기로군.]
“하하핫. 칼브란이 들으면 질색할 말이네. 잘못하다간, 여기서 밥 한 톨도 구경 못 하게 될걸?”
짓궂은 악담과 속 편한 웃음.
이완되다 못해 흐물흐물한 이안을 녹스는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낯설고 생경하다.
언제나 발톱을 휘두를 준비가 된 야생 동물처럼 날카롭더니.
그런 녀석은 어디 가고 꼭 발톱 빠진 집고양이 모양새였다.
집이라…….
대개가 안온함을 느끼는 공간이긴 하지만 이안에겐 더 특별한 것 같았다.
[좋으냐?]
“어?”
[집에 온 거 말이다.]
“좋지. 예전이랑 다른 귀환이라서.”
예언자 시절, 5년간 제국을 떠돌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혹여 누가 볼 새라 식료품을 실은 마차가 다니는 뒷길을 통해 들어왔었다.
누가 그러라 시킨 것은 아니었다.
단지 패배한 개새끼 꼴, 그것을 보여 주기 싫었을 뿐.
낡고 헤진 후드를 뒤집어쓰고선 웅크린 채 주위를 살피던 과거의 자신.
머릿속이 만든 환상을 이안은 가만히 뒤쫓았다.
똑똑.
일순 그의 상념을 끊듯, 짧고 간결하며 묵직한 울림이 들려왔다.
“들어가도 돼?”
레브의 물음에 이안은 틈을 두지 않고 즉각 답을 했다.
“어. 들어와, 레브.”
“혹시 올리브 여기 있어?”
“올리브?”
“아……, 여기도 없구나.”
“녀석이라면 뷔트시겐 가 이쪽저쪽을 구경하고 있을 텐데?”
“아직도?”
추위에 제일 약한 인간의 빨빨거림은 끝을 몰랐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돌아오면 호들갑 좀 떨겠다.’란 생각을 하며 레브는 이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희한하게도 엉덩이에 의자가 닿자 의식이 쉬이 주변부로 쏠렸다.
이안의 방 전체로.
방은 머무는 이의 성격을 드러내는 공간이라지 않던가.
참 이안다운 곳이었다.
“그건 그렇고. 방이…… 도서관 같네.”
“아, 책이 많지?”
이안의 방은 단출했다.
검은 휘장이 처진 침대, 탁자, 그리고 온갖 서적이 가득한 책장, 그게 전부였다.
눈꼬리를 접은 이안은 무심히 내뱉었다.
“처절한 사투의 기록이지. 마력핵을 얻고 싶었던.”
“……이걸 다 읽은 거야?”
“어. 기본으로 열 번씩은. 어떤 것은 백 번도 넘게 읽었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인 줄 알았는데.”
“천재는 레브 너를 말하는 거고. 난 노력형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되게 재수 없어 보이는 거 알지.”
“재수 없음은, 재능 있는 인간의 숙명 같은 거지. 훗.”
가벼운 공기.
새털 같은 흐름 끝에 레브가 무심히 진심을 토해 냈다.
“이안 넌 본받을 구석이 있어.”
“오오, 뜬금없는 칭찬?”
“……물론 아주 ‘가끔’이지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말할게. 축하해. 페이라조 3성이 된 거.”
“아, 배가 부르다. 요즘 하도 칭찬과 축하를 받았더니.”
이안은 자신의 배를 두어 번 두드렸다.
손바닥과 마찰한 건 분명 배인데, 소리는 엉뚱한 곳에서 났다.
똑, 또옥, 하는 문 두드림.
주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파동이었다.
굳이 상대를 확인하지 않고도 이안은 안으로 들어서는 자를 맞혔다.
“왜 이제 와, 칼브란.”
“도련님께서 이리 격하게 반겨 주실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올 것 그랬습니다.”
눈물을 그친 칼브란은 다시 완벽한 집사장이 되어 있었다.
당장 해야 할 소임이 뭔지도 알았고.
꾸벅.
칼브란은 레브에게 묵례를 했다.
무릇 능력 있는 집사라면 예의를 잊어선 안 된다.
지금은 초대받은 손님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할 때이니.
“아르데슈 도련님.”
칼브란은 정중한 기색을 내보이며 레브에게 말을 건넸다.
“혹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아뇨. 가주와 후계자만 머무는 본관이라 그런지, 이보다 편할 순 없네요.”
“언제든지, 불편하신 일이 생기면 말씀해 주십시오.”
“예. 근데 아마 없을 것 같아요.”
“혹시나, 혹여나 해서 말입니다. 어느 때든 요구할 게 생기면, 솔직히 말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칼브란은 괜찮다고 말하는 레브에게 여러 번 당부했다.
도련님의 첫 친우 아니던가.
집까지 데려와 머물게 한 친우.
기념비적인 일이니 기필코 완벽에 완벽을 가해야 한다.
그래야 더 자주 놀러 올 터.
흥분한 칼브란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레브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다 진짜 도망갈라.
이안은 손을 튕겨 칼브란의 관심을 잡아챘다.
“칼브란, 저놈이 얼마나 솔직한데.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니까 그만 물어도 돼.”
“예. 하나, 도련님의 벗이니 성심을 다해야지 않겠습니까.”
“왜? 도망 못 가게?”
“가더라도 잘해 준 기억 때문에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후훗.”
“오, 우리 집사장님께선 역시 계획이 다 있었군.”
매끈한 언변을 자랑하는 이안.
‘이런 집사는 처음이라는 듯’ 신기하게 바라보는 레브.
둘을 번갈아 보다가 칼브란은 외알 안경을 들어 올렸다.
“흠흠. 본래 이 말씀을 드리러 왔는데, 잠깐 말이 샜습니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면서 새삼스레.”
“커허험. 아까 말씀드렸지만, 도련님을 위한 ‘축하 연회’가 곧 열릴 예정입니다.”
“아, 그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