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40화 (40/214)

제40화

기념할 일이 생길 때만 개방되는 대연회장 ‘레바노르.’

촛불처럼 회장을 가로지르는 샹들리에가 일제히 하늘거렸다.

실제인 양 부조된 벽면의 금빛 조각과 검은색 대리석은 광택이 흘렀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공간은 무척이나 고풍스러웠다.

뷔트시겐 가의 영광을 함께 누렸던 장소이니 아니 그럴까.

‘표정들이 아게라가 열렸을 때와는 사뭇 다르군.’

대연회장의 정중앙에 선 이안은 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만만하다 못해 얼핏 오만해 보이는 기색.

그야말로 후계자다운 자태에 각양각색의 시선이 그림자인 양 붙따랐다.

크게 나누자면 세 무리.

첫째, 1장로파들.

그들에게선 성취를 축하드린단, 단순함만 엿보였다.

둘째, 2장로파들.

그동안 2장로의 주장에 힘을 실으며 후계자 바꾸기에 동조했는데 이젠 어쩌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소수.

그의 행보가 빠르고 놀랍긴 하지만 아직은 지켜봐야 할 일이란 중립적인 입장.

극명하게 갈린 삼파전의 형국이었다.

“두 달 만에 페이라조 3성이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호부 밑에 견자는 없다지 않습니까. 그간 마력핵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 도련님이 어디…….”

“우리 도련님? 언제부터 도련님이 ‘우리’가 됐는지 차암 궁금하구려.”

“커흠. 그럼 우리지 남입니까?”

“알랑방귀를 뀌는 혓바닥이 차암 대단하오이다.”

“알랑방귀라니? 도련님 어릴 적부터 난 이리될 줄 알았소!”

“자자, 싸우지들 마시고. 도련님께서 놀라운 성취를 보인 건 사실 아닙니까. 지금은 일단 맘껏 즐깁시다.”

“그럽시다.”

웅성거림 속에서 점차 한 무리가 연회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바로 1장로파들이었다.

“우리야 요란 떨 게 무에 있겠소. 진즉 1장로님을 따른 것을.”

“그렇긴 합니다. 똥줄이 타는 건 2장로를 따르는 자들이지 않겠습니까.”

“암요. 도련님께서 정식 후계자가 되면 바로 팽 당할 터인데.”

그날이 오늘이라도 된 양 체증이 가신 표정들을 했다.

사사건건 부딪치며 쌓은 앙금이 꽤 되나 보다.

개운하단 웃음소리가 회장을 유쾌하게 떠돌았다.

호의가 넘실거리는 공간.

그 한 편을 응시하던 이안의 눈썹 머리가 아래로 휘었다.

‘흠. 나한테 불리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이 삼파전의 양상을 바꿀 필요는 있었다.

훗날 자신이 뷔트시겐으로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

생각을 굳힌 이안은 어딘가로 눈길을 돌렸다.

목청 큰 자들을 비껴 보고 있는 1장로에게로.

성성한 백발에도 날카롭게 벼린 검을 닮은 노인.

그라면, 이 삼파전의 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로원에서 가장 입김이 센 자니까.

지금 상황에선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인물이었다.

하여 이안은 1장로에게 말을 걸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1장로님.”

이안의 행보에 장내의 모두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굶주린 살쾡이들 같다.

언제든 입장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을 쓱 본 뒤, 이안은 눈가를 휘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늙은이를 가장 먼저 아는 척해 주시다니 광영입니다, 도련님.”

육십 줄의 나이에도 맑은 안광이 이안을 직시해 왔다.

격이 달랐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자신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응시가 길어질수록 뼛속까지 저릿해지는 통각.

명치까지 서늘해졌지만 이안은 되레 반들반들한 웃음을 머금었다.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1장로님이시니 당연한 것을요.”

“그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분에 넘치는 자리를 차고 있을 뿐입니다.”

“그 자리가 어디 나이만으로 얻을 수 있던가요. 1장로님이 장로로 추대될 때, 기존 원로원에서 전원 찬성한 일화를 모르는 이가 없는데.”

“껄껄껄.”

푸근한 웃음이었다.

명백한 ‘호’였으나 그걸 알면서도 이안은 1장로가 어려웠다.

가시를 세우는 2장로보다 더.

‘내가 뷔트시겐의 적자라 선을 지키는 거니까.’

설혹 자질이 한 톨도 없다 쳐도 그저, 가주의 아들이란 이유로.

그랬기에 지난 생에서도 1장로는 끝까지 그에게 예를 다했다.

<회의 때마다 도련님을 말석에 앉히다니 제정신인 겐가. 아무리 후계자가 따로 있기로서니. 츠읏.>

<도련님이 작전을 세울 때마다 번번이. 도련님의 능력 덕분에 여태 전쟁을 버티지 않았나. 한데 무에 그리 고까워 자꾸 따지는 겐가.>

그리고 어느 때든 그의 곁에서 아군이 되어 주었더랬다.

물론 이는 오롯이 가주에 대한 충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가신 된 자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따지고 들면 2장로보다 진심을 얻기 힘든 상대지, 1장로는.’

이런 자에겐 수작보다 차라리 직설적인 게 나았다.

이안은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는 1장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한 뼘 간격으로 거리를 더욱 좁히면서.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저와 1장로님을 주목하고 있군요.”

“눈이 많다는 건 떠들 입도 많다는 게지요.”

“예. 해서 1장로님에게 친근한 척을 해 보려 합니다.”

“호오?”

“이 ‘척’ 하나가 저에게 확신이 없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테니.”

“지나치게 솔직하시구려. 이 노부가 도련님을 내치면 어찌하시려고.”

“아버지를 봐서라도 그리하시지 않을 줄,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안의 언변이나 태도는 능청맞았다.

어지간한 배짱이나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

명료한 검푸른 동공을 직시하다가 1장로는 입을 뗐다.

“그것이면 되겠습니까, 진정?”

“예, ‘그것’이면 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노부를 빌어 억지로 얻어내는 ‘인정’, 그 얄팍한 것이면 된다, 이것입니까?”

“솔직히, 타인의 평가가 저에겐 그리 중요치는 않습니다. 다만…….”

“다만?”

“뷔트시겐의 후계자로 살아가려면 필요합니다.”

“흐음. 남의 힘을 빈 것은 ‘허울’일 뿐이외다. 쉬이 무너질 수 있는.”

“압니다. 하나, 허울이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요. 증명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것.”

“그러니 지금은 허울을 챙기겠다, 이거군요.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예.”

이안과 대화를 나누던 1장로는 오른쪽 눈을 크게 치떴다.

이안의 대담한 면모나 생각의 깊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름 사람을 볼 줄 안다고 여겼거늘.’

육십 줄의 나이까지 도태되지 않은 비결이 뭐겠는가.

바로 혜안이었다.

그런데 이안은 그가 한정 지어 버린 표상을 진즉 넘어선 지 오래였다.

이제껏 자만에 빠져 산 모양이다.

나이 먹고 는 건 주름뿐이지 지혜가 아니었다.

“하하하하핫.”

1장로는 염통에서 끌어 올린 웃음을 시원하게 토해 냈다.

왠지 활력이 돌았다.

재차 오른쪽 눈을 홉뜬 1장로는 어조를 한층 높였다.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이 노부에게 가르침을 준 도련님이라면, 원로원들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수군수군.

가르침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연회장은 또다시 술렁거렸다.

페이라조 3성이 카르디아 3성에게 가르침을 주었다고?

수습되지 않는 어수선한 혼란 속에.

‘관심을 끌었으니 쐐기를 박을 뭔가가 필요한데…….’

이안은 고민했다.

뭐가 좋을까?

머리를 굴리는 와중, 반짝이는 은색 털이 시야를 찔러 왔다.

‘……아!’

이안은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있는 사냥개를 내려다보았다.

[캬아앙.]

그의 눈빛을 받은 사냥개가 1장로의 발치까지 접근했다.

머리통에 빨간 사과를 얹은 채로.

소소한 묘기를 선보인 녀석은 1장로의 발등을 앞발로 눌렀다.

꾹꾹. 꾹꾹꾹.

말랑한 발바닥 공격은 어서 받으란 의사 표시였다.

“저 사냥개 좀 보십시오.”

“1장로님께 저리 살갑게 굴다니 겁이 없군요.”

“저런 암흑 정령은 또 처음 봅니다.”

무척이나 애교스러운 사냥개 때문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1장로마저 입꼬리를 올렸으니 말해 무엇하랴.

삽시간에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말랑함 속에서 1장로는 사냥개가 준 사과를 흔쾌히 받아 들었다.

“허허. 도련님은 가진 것을 정말 잘 활용할 줄 아는구려.”

이안은 말없이 미소만을 내보였다.

가진 것이 몇 개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나를 쥐고 있더라도 백 가지로 활용하면 그뿐.

“활용만 해서 되나요. 무엇이든 최대한의 효율을 내는 게 중요하지요.”

그러니 사냥개의 사과를 1장로에게만 주었으랴.

아버지와 칼브란 그리고 총단장과 몇몇 장로들에게도 건넸다.

가장 싸면서 잘 먹히는 뇌물을.

* * *

연회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대연회장 옆, 소연회장에선 기사단이 케이론 흑맥주를 마시며 우애를 다졌다.

그 중심에는 마흔 후반의 총단장이 있었다.

찰랑.

그가 비장하게 오크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환영식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수고 많았다.”

“총단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흠. 전장과는 결이 다른 고생이었지.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

“건배! 흐흐. 솔직히 지금 기분이 째집니다. 이젠 집사장님이 명하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부단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련님의 환영식을 성대히 치를 예정이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을 되도록 많이 준비해야 하니 모두 생화 채집에 전념하도록.>

칼브란이 뭔가에 꽂혔을 때 나오는, 외알 안경을 추켜 올리는 동작.

저것과 함께 하달된 명령은 아주 단순했다.

어려울 거 없었으나, 그것이 고행의 시작일 줄 누가 알았으랴.

<로지! 그 곰 같은 손으로 지금 꽃잎을 뭉개는 거냐.>

<남아도는 힘은 애인한테 쓰지, 왜 애먼 꽃을 뿌리까지 뽑냐.>

<눈이 옹이구멍이라 아름다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이냐.>

별별 잔소리를 들어 가며 종일 채집만 해야 했다.

시퍼렇게 날 선 검이 녹이 탱탱 슬어 가도록.

한동안은 정원사로 재취직하는 바람에, 열 손가락 전부가 푸르딩딩했다.

곰팡이 슨 치즈처럼.

꽃물 든 손끝을 세게 누르며 부단장이 꿍얼거렸다.

“안 할 수도 없었잖습니까. 가주님께서 이렇게 입꼬리를 올리며 꽃을 따시는데.”

“맞습니다.”

“진짜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도 가주님과 눈이 마주치면……. 크으윽.”

반복 노동에 지쳐 농땡이라도 피울라치면.

<그 꽃은 다섯 번째 꽃잎에 흠집이 있군. 상처 없는 꽃을 고르게.>

‘가주’가 쓰윽 다가와 한 마디하고 꽃을 따러 떠났다.

꽃잎에 난 티끌만 한 흠집?

그냥 들고 있으면 티도 안 나는 수준이었다.

이뿐이랴.

<그게 좌우대칭이 완벽하고 꽃잎의 물결도 예술이군. 그걸로 하게.>

<순도 높은 보라색에 은은한 향, 이게 더 완벽한 꽃 같습니다, 가주님.>

윗사람이 저러는데 아랫것들에게 휴식은 사치였다.

그저 토 나올 때까지 채집에 전념할 수밖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과정을 회상하며 부단장은 몸을 떨었다.

“그뿐입니까. 오늘, 꽃바구니를 일일이 나눠 주신 것도 가주님이셨잖습니까.”

“…….”

후광까지 내뿜으며 좋아하던 가주.

그분을 떠올리니 떠벌리던 입이 슬금슬금 다물어졌다.

일순간 몰아친 침묵.

이것을 깬 건 앳된 기사단의 용감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전 이 짓, 두 번 다시 못 하겠습니다.”

그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술에서 꽃냄새가 난단 말입니다. 손에 밴 냄새가 가시질 않으니 술에서도.”

끄덕끄덕.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똥을 쌀 때도 꽃 냄새가 납니다!”

와하하하!

처절하게 공감하는 웃음소리가 일제히 쏟아졌다.

소연회장이 들썩거릴 만큼이었다.

저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기에 총단장의 말투는 아주 명쾌했다.

“어쨌든 임무를 무사히 해낸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실컷 마셔라.”

총단장의 치하와 맛좋은 요리, 그리고 흑맥주.

세 가지에 취한 기사단은 그간의 고행을 이것들에 담아 흘려보냈다.

부어라 마셔라 하길 얼마간.

얼큰하게 취한 부단장의 의식이 뭔가에 사로잡혀 부유했다.

며칠간 꽃을 따며 지겹게 ‘이안’ 혹은 ‘이안 도련님’을 들어서일까.

평소엔 품지 않았던 의문이 불쑥 치솟았다.

“총단장님, 도련님이 달라졌다 하는데 총단장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흠.”

“사실 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그렇잖습니까. 방에만 틀어박혀 계셨던 분이라 만나 뵌 적이 없으니.”

“확실히 달라진 것이 있긴 하다.”

“그게 뭡니까?”

“눈.”

“눈?”

“예전엔 시체 같은 눈빛이었는데 오늘 마주한 도련님은…….”

총단장이 끝머리를 잘라먹자 다들 궁금증에 상체를 기울였다.

마저 말해 달라는 말 없는 성화.

이에 총단장은 흑맥주로 목을 축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오장육부까지 샅샅이.”

“…….”

“천년은 산 것 같은 고룡과 마주한 것 같았지.”

“그렇다면 이제 도련님이 확실한 후계자가 되시는 겁니까?”

“글쎄. 가주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우리 검은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다.”

총단장은 결연한 눈빛으로 기사단을 훑었다.

반드시 해 줘야 할 말이 있어서였다.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아 어수선한 때일수록 바람 잘 날이 없을 테니까.

“도련님이 뷔트시겐의 적자인 이상, 목숨 바쳐 충성해야 한다는 것.”

“예!”

“그것만이 오직, 우리 검은 늑대의 긍지이며 자긍심이다! 잊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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