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41화 (41/214)

제41화

다음 날.

이안은 어제의 들뜸이 가신 복도를 차분히 걸었다.

들이치는 어슴푸레한 빛.

환한 남색 빛이 어제의 연장선상인 듯, 이안의 정수리를 건드리며 발치까지 쏟아져 내렸다.

“훗. 이 빛마저 나를 맘에 들어하는군.”

“……뭐냐, 그 괴상한 허세는?”

“어제 1장로님이 하는 말 못 들었어? ‘도련님은 사려 깊고 진중하네요.’란 말.”

“헹. 머리카락이나 휘날려대는 네놈 꼬라지가 진중?”

“나야 완전 그 자체지.”

“개뿔. 다들 속고 있는 거다. 코르키를 내세워 사람 홀리는 음흉한 놈인지도 모르고.”

사냥개의 애교를 앞세운 뇌물 작전.

이게 예상보다 잘 통해서 호감을 상당수 얻어냈다.

연회 말미에 중립이었던 자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벌써 유의미한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홀림’도 기술이야. 이거 왜 이래?”

이안은 앞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쓸어넘겼다.

허세 가득한 손길에 녹스의 턱관절이 절로 벌어졌다.

“저거, 저거 1장로 빨을 과하게 받더니 바람이 잔뜩 들었네, 들었어.”

“후훗.”

타박도 꽃 노래로 받는 이안.

도취병 중증 단계에 들어선 환자를 보며 녹스는 혀를 끌끌 찼다.

* * *

달칵.

이안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며 환하게 웃었다.

“어? 먼저 와 계셨네요.”

“어찌 혼자 오는 것이냐?”

“아, 녀석들이 생각보다 공사다망하네요. 올리브는 새벽녘까지 저택을 배회하더니 나가떨어졌고요.”

“그렇다면 아르데슈는?”

“레브는 올리브랑 같이 먹겠다고 지금 수련 중이에요.”

이안은 대꾸를 하며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착석하자, 대기하고 있던 칼브란이 슬쩍 끼어들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도련님.”

“날이 좋아서.”

“마침 오늘의 요리가 도련님의 기분과 찰떡궁합일 것 같습니다. 꼬들한 뿔버섯을 곁들인 크림소스 달팽이 요리에 메인은…….”

칼브란은 아침 식사에 나올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디저트까지 읊은 후 그는 지체하지 않고 작은 종을 흔들었다.

음식을 들이라는 뜻.

얼마 가지 않아 하인이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가는 모양새.

“…….”

하지만 이안은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사선으로 내려 탁자의 왼쪽만 쳐다볼 뿐.

녹스의 오색 동공이 기대감을 품은 채 반짝이는 곳.

그곳으로 칼브란과 가주의 시선 또한 머물렀다.

……아무것도 없었다.

수 초?

찰나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이안은 시선을 아버지에게로 옮겼다.

“아버지, 실은…… 같이 식사를 하고 싶은 이가 있습니다.”

“식사를?”

아버지의 반문에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녹스, 황가의 수호신이며 제국의 수호자.

이 존재는 그가 힘을 갖추기 전까진 숨기는 게 상책이다.

알려지면 많은 위험이 뒤따를 것이 자명하기에.

분란을 피하기 위해선 비밀이 최우선이나, 적어도 아버지와 칼브란에게만큼은 소개하고 싶었다.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녀석이니까.

그래서 집에 오는 동안에도, 와서도 많은 고민을 했었다.

녹스의 존재를 알릴 ‘적당한 때’가 언젤까 하고.

줄곧 시일을 가늠해 봤지만, 특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냥 식사할 때.

맛있는 것을 나누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때.

그때가 가장 적절한 시점이란 판단이 들어 이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예. 제 첫 번째 정령이자 스승님이요.”

“스승?”

“제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그리 부르고 있습니다.”

이안은 모습을 드러내도 된단 눈짓을 녹스에게 보냈다.

그러자마자.

살랑-.

봄볕 같은 바람이, 창문도 열리지 않는 공간에 불어닥쳤다.

따사로움을 타고 강하지 않은 햇볕이 식탁 왼쪽을 비췄다.

그 순간에 맞춰.

화아아악.

투명화를 푼 녹스가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거만함 1할에 허세 9할이 담긴 몸짓.

실로 녹스다운 등장이었다.

“반갑다, 뷔트시겐의 가주여.”

“……위대한 수호자님을 뵙습니다.”

난데없이 녹스를 직면해도 아버지는 흔들림 없이 태연했다.

그저 깊숙이 숙였다가 올라오는 고개로 예를 표할 뿐.

역시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거다.

‘어제 내 옆을 슬쩍 보시더니 그때 확인하셨나 보군.’

단박에 기척을 감지하는 바람에 녹스의 눈이 동그래졌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자신을 매번 알아보는 아버지로 인해 녹스의 입가가 한껏 벌어졌다.

노란 발까지 통통 굴리는 걸 보면 기분이 최고조였다.

“푸흘흘. 날 알아보는군.”

“어찌 모르겠습니까. ‘수호자의 오색 기운은 칠흑이라. 처음이며 끝인 밤은 한없는 무저갱이다.’ 그리 묘사된 기운을요.”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크흠. 잘난 존재감을 지우기가 쉽지 않더군.”

“하여, 감지해내기 어려웠습니다. 수호자님이 작정하고 감추시니.”

“푸흘흘. 겸손이 지나치군.”

“수호자님에 비하겠습니까?”

녹스의 잘난 척에 아버지는 적당한 추임새를 넣었다.

죽이 척척 맞는 둘의 대화가 잠시간 식탁 위를 미끄덩하게 굴러다녔다.

소개를 안 해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영혼의 단짝을 찾은 것인 양 어찌나 상성이 좋은지.

특히 녹스 쪽이 그랬다.

녀석은 입을 열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급기야 탁자 끄트머리에 달랑달랑 매달리기까지 했고.

‘아버지는 괜찮은데, 칼브란이 조용하네.’

이안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서 있는 칼브란을 쳐다보았다.

진즉부터 저를 보고 있었는지 쉽게 눈이 마주쳤다.

‘우리 도련님의 첫 정령.’

그리 말하고 있는 칼브란의 표정은 어쩐지 복잡해 보였다.

기쁜데, 또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느낌?

속내가 시끄러운 것 같더라니…… ‘이내’였다.

이내.

칼브란은 이안의 검푸른 동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입만 벙긋거려 마음을 전했다.

‘감축드립니다, 도련님.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성취를 얻으신 것을.’

솔직히…….

핏덩이 때부터 키운 도련님의 일이라 칼브란은 호들갑을 떨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순간순간의 달콤한 바람, 따스한 햇볕, 도련님의 환한 표정.

이 공간의 모든 것을 온전히 누려야 할 이는 따로 있었으니까.

바로 가주님.

그분의 것이기에, 칼브란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환희를 조용하게 겪어냈다.

그런 칼브란을 거쳐 이안을 본 가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안.”

“예, 아버지.”

“혹여 이 수호자가 ‘그것’과 연관이 있더냐?”

“짐작하신 것이 맞습니다.”

“흐음.”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밀서에 나온 힘. 마력핵 없는 제가 가져야 할 그것. 바로 수호자였습니다.”

이안의 말이 끝나자 가주의 표정이 슬쩍 미묘해졌다.

“……핵을 얻었다 하여 천운이라 여겼건만.”

천운이라기보다…….

가주는 이미 칼브란을 통해 수호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맞닥뜨리고 나니 충격에 빠졌다.

거대한 운명의 한 토막을 엿본 것 같아서.

밀서, 마력핵 없는 아이, 황실이 가져야 할 수호자.

흡사 안배와도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아직은 갈피를 잡지 못한 가주의 귓가로 밝은 음색이 날아들었다.

“지금은 그저, 아버지의 축하를 받고 싶습니다. 다른 복잡한 것들은 제쳐두고.”

이안이 ‘인정’받고 싶은 이는 한 사람뿐이다.

그가 존경하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가시는 길을 뒤따르고 싶은 저에게, 녹스는 단순한 정령이 아니거든요. 희망이지. 꿈만 꾸지 않아도 된단 희망.”

녹스를 보는 이안의 눈빛이 잘게 빛났다.

형용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의 파편에 가주는 이를 사리물었다.

실수했다.

몰아치는 파도에 정작 봐야 할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안이었는데.

마력핵이 없어도 15년을 악착같이 버텨낸 아이.

“이안.”

“예, 아버지.”

“미안하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그리고 고맙구나.”

“…….”

“늘 나를 믿어주는 주는 것도, 상황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네가 있어 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단다. 두렵고, 확신이 없을 때조차.”

“…….”

“네 존재가 늘 나에겐 축복이었으니. 이안 너의 모든 것이 아비의 자부심이란다.”

“…….”

이안은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를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보단 웃고 싶었다.

그러고 싶어 찰나를 스치는 눈꺼풀 속 어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의 격랑이 잠잠해질 때까지.

***

번쩍.

올리브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눈을 떴다.

몸에 닿는 보드라운 침대 시트도 그렇고, 고급스러운 천장도 그렇고.

“여기가 어디…… 아!”

뷔트시겐 본가였다.

낡고 작은, 자신의 집이 아닌.

“맞다. 이안이 사는 곳에 놀러 왔지.”

현실을 직시한 올리브는 웅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시간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다 화들짝 놀랐다.

벌써 날이 환했다.

“아오, 내가 미쳤지! 늦잠을 자다니!”

것도 아침 먹을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다들 게으름뱅이라 여길 것 같아, 올리브는 재게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러곤 고양이 세수만 하고 후다닥 나왔는데…….

“편히 주무셨습니까, 필로스 도련님.”

젊은 하녀가 흐트러진 침대를 정리하며 말을 건네왔다.

그녀의 상냥함과 야무진 손길에 도리어 올리브는 당황했다.

가문이라 해도 사용인이 몇 없는 ‘필로스 가.’

그의 집에서 침대 정리 같은 건 각자의 몫이었다.

늦잠을 자기라도 하면 밥은 굶거나 알아서 차려 먹어야 했고.

“필로스 도련님께서 고기를 좋아한다고 하셔서, 송아지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에 향이 좋은 뿔버섯을 넣은 버섯 크림 스프를 준비…….”

하녀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올리브의 정신은 멍해져 갔다.

정중한 태도가 왜 이다지도 낯선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니까 하녀가 예의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갔다.

“이게 본가의 품위라는 건가?”

올리브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정원을 손질하는 정원사도 보이고, 훈련하러 가는 기사도 보이고.

“다들 상냥하고 절도가 넘치네. 낯설다, 진짜 낯설어.”

“뭐가?”

“그냥 분위기라는 게…… 으아아악!”

얼결에 답하던 올리브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언제 왔는지, 맞은편에 레브가 앉아있었다.

녀석은 이런 공기에 익숙한 듯 에루리안에 있을 때보다 편해 보였다.

이 녀석도 알고 보면 참 희한했다.

“레브 넌 괜찮아?”

“뭐가?”

“그러니까…… 뭐라 말해야 하지? 이 본가의 공기라는 거. 낯설어서 적응이 잘 안 되네.”

“아.”

“넌 안 그래?”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특별할 거 있나.”

“역시 뷔트시겐이 다 됐어. 아주 시원시원 하시구먼.”

“닥쳐.”

레브의 거친 언사에 올리브는 킥킥거렸다.

어느 때든 상황을 무겁지 않게 받아넘기는 성격.

그 때문에 때때로 ‘넌 너무 가벼워.’라는 말을 듣곤 한다.

이렇다 할지라도 아예 생각 자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올리브는 레브와 견해가 달랐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만은 않다, 라고.

“레브, 넌 알지?”

“뭘?”

“우리 필로스 가가 얼마나 한미한지. ‘그런 가문이 있어?’ 이런 소리까지 듣는 거 말이야.”

“네 입버릇이잖아. 평민이나 다름없다고.”

“응. 되게 존재감 없는데, 그런 곳에서조차 위에 서서 명령하고 잰체하는 방계들이 있어. 꼴에 자기들은 본가라는 거지.”

“…….”

“무시하고 때리고. 그래도 그것들이 어찌나 거대하게 보이던지, 반항 한번 못 했다.”

“…….”

“근데 여기 와서 보니…… 정말로 별거 아니었더라. 어쭙잖은 방계들이.”

흐읍.

올리브는 그리 어둡지 않은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찬바람의 냄새는 여기나 발리올이나 똑같았다.

그런데도 다르게 느껴진다면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이 공간을 채우는 ‘사람’ 때문이겠지.

“……본가라는 게, 말이 좀 이상한데…… ‘진짜’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진짜?”

“허세나 거짓으로 몸집을 부풀리지 않는…… 품위 같은 거? 자신의 격에 맞게 행동하는 거? 으음. 설명하긴 어려운데 그런 게 있어.”

“올리브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 같다.”

“오올. C반의 원조 우등생다운 이해력.”

올리브는 엄지를 치켜들곤 장난스럽게 흔들어댔다.

자신이 내뱉은 무거움들이 가벼워지도록 일부러 과장되게.

남들이 가볍다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랴.

무거움에 짓눌려 허덕이는 것보다야 툭툭 털어내고 단순해지면 세상 편해지는 것을.

“야, 올리브. 그 더러운 허리 좀 그만 돌리랬지.”

“캬캬캬. 받아랏!”

올리브는 속엣 것을 이미 털어버린 듯 유쾌하게 움직였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쉼 없이 굼실대는 올리브의 몸짓에 레브가 질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거기에 탄력을 받은 모양이다.

이번엔 올리브가 허리 튕김질을 시전하며 돌진했다.

그런데 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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