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드르륵.
트롤리에 아침 식사를 가져온 하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찰나의 시선 교환.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고개를 숙인 하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는 모양새.
예쁜 누님이 웃으니, 올리브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이번만큼은 부끄러워서 말이다.
올리브는 슬그머니 율동을 멈추곤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천장만 보고 있으려니 방을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올리브는 심호흡으로 방금의 흑역사를 지워냈다.
창피함에 몸부림치기엔 스테이크가 너무 먹음직스러웠으니까.
“여하튼. 이렇게 비교가 되니까 알 것 같다, 레브.”
“또 뭘?”
“이안이 자기 집에 가자고 하면서 나한테 했던 말 있잖아.”
“한계에 관한 거?”
“응. 그 의미가 뭔지 말이야.”
<올리브, 한계는 자신이 본 것만큼에서 정해져. 그러니까 보는 세계가 넓어질수록 한계도 무한해질 거야.>
자신이 본 만큼.
올리브는 이안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여태껏 그가 본 것은 자신의 양 손바닥 정도였다.
그랬었는데, 이안을 만난 순간 손바닥의 열 배만큼 세계가 넓어졌다.
그리고 지금.
“열 배였던 세계가 스무 배쯤으로 넓어졌다.”
“한계도 그만큼 넓어졌고?”
“한계는 아직. 내 능력치가 아직 그 정돈 아냐. 그래도 내 목표가 달라지긴 했어.”
“페이라조 3성 되는 거?”
“그건 예전이고, 지금은 에르그 3성쯤은 돼보고 싶어졌어.”
“이미 한계를 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목표가 달라진 걸 보면.”
“히히. 그런가?”
개구지게 웃은 올리브는 송아지 고기를 입안 가득 집어넣었다.
쫀득한 식감이 정말 좋았다.
너무 맛있어서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요리에만 양껏 집중했다.
사고가 단순하다.
그렇기에 매사 꼬지 않고 잘 털어버리는 것일 터.
해맑은 올리브를 응시하다가 레브의 시선이 옆에 놓인 쪽지로 향했다.
하녀가 주고 간 것.
돌돌 말린 작은 양피지를 집어 든 레브는 내용을 확인했다.
“……밥 먹고 이안 만나러 가자, 올리브. 녀석이 중앙광장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 * *
와글와글.
이안은 중앙광장에 앉아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했다.
과일 상점에서 나는 과실차의 향긋한 냄새.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집시 무리의 자유분방함.
추위에 강한 회색 낙타, 그걸 애지중지하는 카라반 무리의 극성스러움.
얼음을 깎아 조각하거나 색을 입히는 예술가들의 열정.
지극히 일상적인 소란스러움이 이슬에 젖어들 듯 선명하게 밀려들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 여유로운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회귀 이후 여유를 가질만한 틈이 없었다.
아니.
잠시 쉬면 딛고 있는 현실이 악몽이 될 것 같아 뭐든 해야만 했다.
일종의 강박 같은 거였는데…….
‘집에 오니 이런 풍경도 눈에 들어오네.’
희한하게도 쉬면 안 된단 강박이 헐거워졌다.
이안은 느른하게 눈을 감고 정오의 햇살을 만끽했다.
음지에서 나온 쥐며느리처럼 꼼짝 않고 있는데.
“이아아안.”
저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내리꽂혔다.
부스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폴짝대며 뛰어오는 올리브가 보였다.
처진 눈꼬리와 연한 초콜릿 피부.
전체적으로 풍기는 인상이 영락없이 시골 강아지였다.
“이안, 빨리 왔네. 혼자 뭐 하고 있었어?”
“너희들 기다렸지.”
“아, 그렇네. 캬캬캬. 당연한 걸 물었다, 내가.”
올리브가 허리에 손을 얹고선 까마귀 같은 웃음을 토해냈다.
아침에 뭘 잘못 주워 먹었는지 과도하게 쾌활했다.
그래서 이안은 슬쩍 레브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 뭔 일 있냐’는 소리 없는 물음.
그의 눈짓에 레브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니’라고 답했다.
이안은 빨빨거리는 올리브에게 슬쩍 눈길을 두다가, 고갯짓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가자.”
“어딜?”
“공방.”
“공방? 아, 뭐 의뢰하려고?”
“의뢰한 거 찾으러.”
짧게 답한 이안은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공방 거리인 ‘파키오 구’가 나올 때까지.
* * *
【레프라혼 골짜기의 종려나무】
투명한 크리스털에 휘갈겨진 필기체는 수려했다.
공방 주인의 미학적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처럼.
그래선지 간판에 새겨진 문양도 몹시 아름다웠다.
산호 조각을 일일이 이어붙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올리브가 어조를 높였다.
“어? 금빛 늑대다.”
“아, 저거. 슈바츠의 제1 공방이라는 표식이지.”
“오올. 공방이든 대장간이든 최고의 장인에게만 붙여주는 칭호. 멋지다!”
‘제1 공방’의 칭호가 붙는 곳은 제국에서 딱 네 곳뿐이다.
뷔트시겐, 루하흐, 발리올, 살리카, 각 영지에 하나씩.
통틀어 넷.
이는 곧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인즉.
올리브는 제1 공방을 직관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그래서 설렘을 안고 공방 내부로 입성했는데…….
“엥?”
공방엔 거대한 용광로 두 개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휑했다.
잘못 봤나 싶어 올리브는 눈을 마구 비볐다.
“심하다 싶게 아무것도 없네.”
그는 당황스러운데, 정작 이안은 익숙한 양 덤덤했다.
친숙한 풍경이니 그럴 수밖에.
<이것저것 늘어놓는 거? 실력 없는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공방 주인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자칫 거만해 보일 수 있으나, 출중한 솜씨로 인해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체가 장인의 자긍심인 걸로 포장되었으니까.
‘어느 분야든 실력이 곧 능력이지.’
이안은 무심한 낯빛을 하곤 왼쪽 용광로 앞에 섰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은 반지르르함.
윤기가 좔좔 흐르는 지렛대에는 온기가 아예 묻어있지 않았다.
진녹색 가루만 사르르 떨어지고 있을 뿐.
그 가루를 한 움큼 받아 든 이안은 용광로 안으로 그것을 촤악 뿌렸다.
화르르르.
녹색 불꽃이 일자마자 콰아앙.
공방 제일 안쪽의 쪽문이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열렸다.
“어이쿠. 의뢰인 도련님 아니십니까.”
이안에게 괴상한 호칭을 쓰는 건 웬 노인이었다.
붉은 삼각 모자에 코가 뾰족한 얼굴.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공방장의 손에는 조각칼이 들려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채인.
“오랜만일세. 잘 지냈나, 파베르.”
“자아알은 모르겠습니다, 의뢰인 도련님 덕택에. 요구하는 건 많고. 시일은 촉박하게 주시고. 제 피를 아주 바싹바싹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촉박하긴. 자네 실력에 사흘이면 너끈하지 않나.”
“그 입바른 소리 넣어두십시오. 나중에 또 뭐로 부려먹으시려고.”
“하핫. 빤한 내 속셈이 보이는가?”
“……하아아. 됐습니다.”
공방장은 본전도 못 찾는 대화를 끝내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고는 ‘괜한 말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라고 말했다.
“의뢰하신 물건은 완성되었습니다.”
“수고 많았군.”
“지겹도록 듣는 인사치레는 됐으니, 다음부턴 기일이나 넉넉히 주십시오.”
다소 뚱하게 투덜거린 공방장은 왼쪽 용광로로 다가갔다.
용광로 윗면에 파인 홈.
거기에 들고 있던 조각칼을 놓자 용광로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끼릭. 끼리릭.
동시에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울림이 노랫소리처럼 들려왔다.
얼마간 그러다.
스스슷.
푸른 나무 상자 두 개를 용광로가 ‘옛다, 가져가라.’라는 것처럼 퉤 뱉어냈다.
공방장은 그중 오른쪽 상자의 덮개를 열면서 말했다.
“보십시오. 필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으음. 역시 최고의 공방장이 만든 물건답군.”
이안은 의뢰 물품을 세밀하게 살폈다.
원래도 섬세하기로 정평 났지만, 이번 건 유난히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이안의 만족도가 높은 걸 확인한 공방장.
그는 부릅뜬 눈길을 이안 오른쪽에 있는 소년에게로 돌렸다.
“어디 보자. 건틀릿을 쓰실 분은 이분이겠군요. 머리 색이 노란 걸 보니.”
“건틀릿?”
올리브가 눈을 치떴다.
자기 물건일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눈빛.
어리벙벙함에 답을 주듯, 이안은 상자째 올리브에게 건넸다.
“선물.”
“……나한테 주는 거라고?”
“어. 페이라조 2성 된 거 축하한다, 올리브”
“진짜 내……거?”
올리브가 말을 더듬으며 건틀릿으로 손을 뻗었다.
하도 달달 떠는 통에 집어 드는 데만 천만년 걸렸다.
“내 첫…… 건틀릿.”
올리브는 닳도록 건틀릿을 문질러댔다.
물건 주인이 감동할수록 보람이 커지는 건 당연지사라.
흐뭇한 미소를 단 채 공방장은 본격 설명회를 열었다.
“건틀릿은 아메디스트 마광석에 전격이 잘 통하는 이트륨 광석을 섞어 틀을 잡았습니다.”
“…….”
정작 대화 나눠야 할 주인이 멍 하자, 이안이 대신 답했다.
“마력의 전도율은?”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발리올의 특질을 잘 살려 최고로 구성했습지요.”
발리올의 특질은 힘을 숭상한다는 것이다.
해서 그들은 자라는데 필요한 성장에너지조차 근력을 키우는데 쏟아 붓는다.
여타의 정령사와 달리 원소를 직접 쳐서 싸우는 방식 때문.
근력에 마력과 정령을 한데 응축시켜 대지에 폭발시키는 이 방식 때문에, 발리올에게 있어 건틀릿은 필수이다.
성질이 다른 두 힘을 근력에 온전히 녹여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력 전도율이고.
“어흠. 그뿐이 아닙죠.”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은 공방장이 계속 입을 놀렸다.
“여기에 무늬는 발리올의 상징인 거북이를 새겨 넣었습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날개를 형상화한 거고.”
“…….”
“거기다 건틀릿 중앙에 박힌 구슬 다섯 개 보이십니까?”
“이게 정령 보관석인가?
“예. 발리올은 건틀릿에 정령을 보관하니까요. 의뢰인 도련님이 가주가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강도로 만들어 달라 해서…… 후우.”
공방장은 수고를 알아달라는 듯 거한 한숨을 쉬었다.
날숨에 ‘내 눈알을’, 들숨에 ‘내 손목을 갈아 넣었다’란 생색.
세뇌하다시피 거듭된 강조가 이어지길 수 분.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공방장은 은근슬쩍 으스댈 대상을 바꿨다.
다음 설명회는 레브를 위한 거였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팔찌를 만들어 달라, 참 추상적이고 난해한 의뢰다 했더니.”
“…….”
“루하흐 도련님을 위한 거군요. 푸른 장미는 루하흐의 상징이니.”
공방장은 버릇처럼 코끝을 연신 문질렀다.
저렇게 닳도록 만져도 코가 뾰족한 게 신기했다.
살갗이 빨개질 때쯤 코 긁기를 끝낸 공방장이 레브에게 팔찌를 내밀었다.
“이 또한 아메디스트 마광석으로 푸른 장미를 일일이 조각해 하나로 엮었습니다! 살아있는 생화 같은 정교함! 이것을 위해 영혼을 갈아 넣었지요!”
“아.”
“팔찌 중앙의 가장 큰 장미 보이십니까.”
“…….”
“장미의 암술에 박힌 구슬엔 ‘엘로페노 서’를 새겨 넣었습니다.”
“엘로페노의 서를요?”
“빛의 정령한테서만 얻을 수 있는 거지요. 근데 그걸 어떻게 의뢰인 도련님께서 구해오셨는지. 여하튼 이거면 암흑 속성으로 인한 부작용을 단박에 누를 수…….”
어쩌고저쩌고.
침 튀기는 공방장을 피해 레브가 몸을 뒤로 쭈욱 뺐다.
열정이 과했다.
그만큼 물건의 품질이 최상이었음은 말해 뭣하랴.
하염없이 자신의 것을 보기만 하는 두 녀석에게 이안은 다시 한번 말했다.
“축하한다, 자라나는 새싹에서 떡잎이 된 거.”
* * *
공방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안 일행은 메카토르 거리를 지나치며 구경을 겸했다.
‘메카토르 구.’
이색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상업 거리이다.
펄럭.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아이루스 상단 분점’이라고 쓰인 깃발이었다.
헤르세 꽃이 그려진 깃발.
꽃 모양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깃발은 바람을 심하게 타고 있었다.
찢길 것처럼 위태하게.
그 위태함에 어떤 아슬함을 덧대려는 걸까.
짜아악!
손바닥이 살가죽을 난타하는 소리가 찰지게 섞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