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대체 무슨 상황인가 했더니.
스물 후반의 여자가 노인의 뺨을 몇 번이나 후려치고 있었다.
손속에 자비가 없으니 어찌 되겠는가.
주름이 깊게 팬 노인의 뺨이 팅팅 부었고, 결국 땅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옹송그린 노인의 등을 여자가 표독스럽게 밟아댔다.
“이젠 단주도 아닌 주제에!”
“커흑.”
“어디서 ‘전대’ 상단주를 들먹이며 날 협박하고 지랄이야?”
“전대는…… 쿨럭. 아닙니다.”
“뭣?”
“상단주께서 소식이 끊긴 지 이제 두 달째이고, 상인에게 있어 두 달쯤은…….”
“이 할망구가 지금 미쳤나?”
“이왕지사 말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단주님.”
“하!”
“‘물건의 값이 정해진 것은 약속이다. 눈앞의 이문을 남기려 그 약속을 저버리지 마라’, 아이루스 상단의 신조인 걸 모르십니까.”
“신조? 신조오? 그까짓 게 뭔데? 그게 돈을 벌어다 줘, 남이 깔보지 않게 해줘? 어? 돈만 벌면 장땡이지 뭐가 더 필요하다고!”
“그러면 왈패들과 다르지 않은…….”
“신조 따위 없어도 아이루스는 살아. 이 제국에서 아이루스 상단을 통하지 않고 시장이 돌 것 같아?”
“오만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단주님.”
“오만? 우리가 팔면 그게 물건값이 되는 거야! 천금이든! 만금이든!”
“하지만 평민들이 자주 쓰는 물건만은 값을 절대 올리지 말라는…….”
꽈드득!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노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거칠게 흔들어댔다.
팔팔한 젊은이의 억센 손길에 노인이 흰자위를 내보이며 고통스러워했다.
“늙었으면 추하게 굴지 말고 뒈져! 뒈지라고!”
“끄윽.”
“전대 상단주가 아끼는 자라 내치지 말란 지시만 없었어도! 네년을 콱!”
무자비한 폭언과 폭력에 거리가 시끌시끌해졌다.
하지만 대부분 ‘또 시작이다.’란 표정만 지을 뿐, 절대 관여하지 않았다.
“그만하지.”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이안은 앞으로 나섰다.
그가 노인 앞을 가로막자, 레브와 올리브도 이안 옆으로 섰다.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
짜증이 난 여자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어떤 새끼가 뒈질려고 끼어들어!”
“어떤 새끼인지는 알 거 없고.”
“하, 이젠 되먹지도 않은 새끼까지 염병을 떠네?”
흰 눈을 뜬 여자의 째진 외침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저 앞에서 달려왔다.
절도 있는 일정한 보폭.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슈바츠의 질서를 혼란케 하는 자가…….”
누가 불렀는지 신속하게 출동한 일곱의 치안대.
그중 앞에 서서 늠름하게 외치던 치안단장의 눈이 일순간 회동그래졌다.
“도련님!”
치안대는 이안을 보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행동에 놀란 상인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모두 땅에 엎어질 기세라 여자는 당황했다.
“……도련님?”
급변하는 상황 속에 이안은 설렁설렁 손을 내저었다.
“사람이 다쳤는데 예는 무슨. 어서 노인을 치료소로 데려가.”
“명 받듭니다.”
치안대는 숨을 불규칙적으로 헐떡이는 노인을 들것에 실었다.
그러고는 이안에게 재차 묵례한 뒤 빠르게 멀어져갔다.
치안대까지 떠났는데 뭉개고 있어 뭣하랴.
모여있던 상인들은 자칫 불똥이 튈까 봐 재빨리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어느덧 휑해진 공간.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이안 역시 발길을 옮기려 했다.
“처음 뵙네요. 뷔트시겐 도련님은.”
그런데 여태껏 미친년처럼 포악스럽게 굴던 여자가 안면을 보드랍게 바꾸며 다가왔다.
미인계였다.
지가 예쁜 줄 안다.
아무리 예뻐도 미친년은 사양이었다.
하등 쓸모없는 미인계에 이안의 얼굴은 더욱 냉랭해졌다.
“상단 운영을 개판으로 하는 단주라……. 것도 뷔트시겐 영지 내에서.”
“그게 아니라 단주 자리에서 물러난 할망구가 자꾸 트집을…….”
“트집인지 아닌지는 차차 알아보면 될 일.”
“어쩜 이렇게 냉기가 폴폴이실까.”
이안의 냉소에도 여자는 콧소리를 내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이안의 볼 쪽으로 야살스럽게 손을 뻗었다.
타앗.
이안은 눈썹 머리를 내리며 여자의 손을 매정하게 내쳤다.
열다섯의 소년에게 하는 행태를 보니 알만했다.
젊은 나이에 단주 자리를 꿰찬 비결이 무엇인지 말이다.
능력이 다른 쪽으로 출중한 듯했다.
“진짜 개판이군.”
“…….”
“게다가 천박하고.”
여자를 무심히 일별하고 이안은 차게 돌아섰다.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것이 여자가 살기를 쏘아붙이는 모양이다.
뜻대로 되지 않아 성이 난 거겠지.
그건 이쪽도 매한가지라, 이안은 한쪽 입귀를 비틀어 올렸다.
* * *
“…….”
가주는 뷔트시겐 가 종탑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
모든 것이 흐릴 것 같지만 도리어 모든 것들이 선명했다.
뷔트시겐의 저택도.
슈바츠의 시가지부터 좁을 골목 곳곳까지도.
쌍둥이인 양 똑 닮은 설산 무누수와 크라바나스도.
특히 크라바나스.
슈바츠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데도 코앞에 있는 것처럼 냉기가 느껴졌다.
“역시 여기 계셨네요, 아버지.”
느릿한 발소리가 끝나자 곧장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줄 알았다.’라는 단정.
어느덧 말꼬리가 등 뒤까지 닿아서 가주는 반쯤 몸을 틀었다.
“머릿속이 복잡하신가 봐요. 그럴 때마다 여기에 오시잖아요.”
“이곳에선 모든 것이 한눈에 보여 썩 나쁘지 않구나.”
하여 엉클어진 머릿속이 쉽사리 정리된다.
아주 예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막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그때도 그랬다.
상념이 많았다가도, 풍광을 보고 있노라면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근심했었는지.
그때 이후로 간혹 들르다 보니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버렸다.
‘아버지와 온 곳에…… 내가, 아들 녀석과 서게 될 줄은.’
가주는 반보 뒤에 서 있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무미건조한 아이의 얼굴에 한 조각 냉기가 서려 있었다.
자신과 있을 때면 곧잘 웃던 녀석이 저러는 이유를 어찌 모르랴.
“이안, 아이루스 상단과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고, 단주의 만행이 아주 볼만하더군요.”
“상단주가 실종된 후론……. 츠읏.”
“만인의 존경을 받던 그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상단주가 실종된 지 근 두 달.
그 짧은 시간에 아이루스는 왈패들 소굴로 변질되어버렸다.
질이 나쁜 물건을 강매하질 않나.
물건값을 세 배 가까이 올려 폭리를 취하지 않나.
고리대를 놔서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지 않나.
예전의 아이루스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짓들이 자행되고 있었다.
“두 달 새 덩치 큰 괴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거르지 않는 이안의 언사를 들으며 가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이곳에서 골몰하고 있던 것도 상단 문제였다.
이미 예전의 아이루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썩기 시작했는데, 그걸 내버려 두면 환부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기에.
그러기 전에, 빨리 제거해서 전체가 곪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안, 아이루스가 지금 보이는 행태들, 그것의 연유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제국의 금화를 모조리 긁어모으겠다는 것입니다.”
“흐음. 이미 상단은 상당한 금화를 보유하고 있다.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그렇지요.”
오죽하면 ‘1년 치 수익만으로 산 하나는 만들 수 있다.’라는 말이 떠돌 정돌까.
그것도 제국 곳곳에 퍼져 있는 ‘분점’의 수익만으로 말이다.
“한데?”
이안은 아버지의 질문에 담긴 숨은 의도를 쉬이 짐작했다.
맥락을 제대로 짚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뜻.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렇지. 상단주의 실종.”
“예. 그의 실종으로 인해 상단 수익이 줄어들었으니까요. 7할가량이나.”
실종과 수익의 상관관계.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상단주인 필릭스 아이루스에 대해 알아야 한다.
헤르세란 정령을 구한 필릭스 아이루스.
그자로부터 시작해 아이루스 상단은 거상이 되었다.
하지만 부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엔 하나의 맹점이 있었다.
헤르세와의 맹약이 필릭스란 핏줄을 통해서만 이어진다는 것.
고로 핏줄이 끊기면 맹약도 끊긴다.
이 말인즉, 상단주가 없으면 아침 이슬을 구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상단의 수익이 아작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손실을 메꾸려 이 발악을.”
“이는 새 발의 피일 뿐입니다.”
“새 발의 피?”
“그놈들이 얼마 전부터 어린아이들을 납치하고 있으니까요. 인간 경매를 하려고.”
‘인간 경매’라는 말에 표정 변화가 많지 않던 가주의 낯이 찌푸려졌다.
절대 용납해서도, 용납할 수도 없는 짓거리.
“며칠 전에 세작의 보고를 듣고 어찌나 속이 뒤틀리던지. 감히 내 영역 안에서 그딴 짓을!”
“인두겁을 쓰고서는 할 짓이 아니지요. 그런 자들은 절대 용서해선 안 됩니다.”
가주는 저와 뜻이 같은 이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못 본 사이 더 많이 성장해있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통찰이 들어가 있으니까.
전체를 꿰뚫어 보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언사들.
가주는 조금 더 이안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후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질 만한 자질이 있는지 말이다.
‘내 아들이라 하여 편의를 봐줄 순 없으니.’
단기간에 페이라조 3성이 되었다 하나, 그것이 가문 내 입지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입지를 다지기 위해선 공로를 세워야 한다는 뜻.
에루리안에서 이룬 성과와 별개로 가문엔 가문 만의 규율이 존재하기에.
가주는 이것저것 재어 본 후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안.”
“예, 아버지.”
“아이루스 상단 문제를 네가 한 번 해결해보겠느냐?”
“제가 말입니까?”
“모든 전권을 너에게 줄 것이다. 그러니 한 번 해 보거라.”
* * *
저벅저벅.
이안은 지하감옥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지하라 그런지 특유의 냉기가 감돌았다.
을씨년스러운 공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흐음.”
석벽에 일렬로 걸린 횃불이 어둠을 밝히는 복도.
그 끝을 잠시간 보던 이안은 서두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다른 곳은 지하감옥의 끝이었다.
끼이익.
이안은 오른쪽에 있는 철문을 힘껏 열고선 발을 내디뎠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공간.
무심하게 걸린 검은색 촛대만이 일렁이며 그를 반겼다.
이안은 곧장 촛대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뾰족한 끝머리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송알송알 맺힌 핏방울이 검은색 선을 따라 흐른 순간.
콰콰광.
석벽이 갈라지며 또 다른 지하 계단이 나타났다.
가주와 후계자만 아는 비밀 공간.
침묵을 강요하듯 습했으나 이안은 계단을 하나씩 밟아나갔다.
폭이 좁은 계단을 지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렇게 마주한 커다란 석문.
이안은 지체하지 않고 석문을 열어젖혔다.
“때가 됐나 봅니다, 도련님이 오신 걸 보면.”
탁자에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양모 담요를 추슬러 올렸다.
초췌한 신색의 그를 스치며 이안은 방을 훑어보았다.
지하라고 하기엔 후끈후끈했다.
침대며 가구며 욕실까지 잘 갖춰져서 감옥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 봐야 뜻대로 운신할 수 없으니 갇힌 당사자에겐 거기서 거기겠지만.
왠지 초조해 보이는 남자가 억눌린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이제 그분을 구하러 가는 겁니까?”
“그리 서둘지 말게, 대총관.”
“얼마나 됐다고, 아이루스 상단의 대총관이란 직책이 어색합니다.”
‘대총관’이라 불린 중년 남자.
짙은 눈썹을 비롯해 선이 굵은 푸른색 머리.
그는 아이루스 상단주의 오른팔이자 호위무사였다.
4대 가문의 직계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던 자가 감옥에 있다니.
그도 자신의 처지가 우스운지 비식 웃음을 흘렸다.
“하긴. 제가 레드니의 족쇄를 훔치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걸려서 잡힐 줄은 더 몰랐겠지.”
사흘 전.
그러니까 이안의 환영식이 뻑적지근하게 벌어지던 그 날 밤.
대총관은 족쇄를 훔치러 뷔트시겐에 잠입했다.
다들 얼큰하게 취해 있어서 경비에 구멍이 있을 줄 알았는데.
“뷔트시겐 서쪽 담을 넘자마자 도련님을 만날 줄은.”
식겁했다.
달빛도 사라진 깜깜한 곳에 삐뚜름하게 서 있는 그림자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