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그런 식으로 움직여서 어느 세월에 훔치겠나, 대총관.>
<……!!>
거기다 그가 누군지, 목적이 무엇인지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마치 예언자인 양.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곳이었다.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지하인 듯한 이곳.
대총관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이안은 홍차를 우려 그에게 건넸다.
마시란 눈짓에 찻잔을 받아든 대총관은 차를 홀짝였다.
뜨끈한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긴장이 스리슬쩍 풀렸다.
“참 멍청한 생각이었습니다. 고작 연회 하나로 방비가 뚫릴 거라 여기다니.”
“대총관 그대가 그만큼 간절했으니 그리 무모한 짓도 한 게지.”
“……이대로 아이루스를 둘 수 없다는 상단주님의 뜻을 받들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족쇄를…….”
이안은 차가운 손을 덥히는 찻잔을 들고 얼 그레이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얇게 썬 레몬의 향까지 더해져 쌉싸름한 풍미가 제법이었다.
“……예.”
대총관은 뒷말을 아꼈다.
하지만 이안은 그가 삼킨 말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족쇄를 훔치려 한 상단주의 뜻에 관한 것일 터.
‘상단주로선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겠지. 쫓기고 있었으니까.’
상단주의 실종은 실종이 아니었다.
단지 아이루스에 마수를 뻗은 누군가를 피해 도망갔을 뿐.
대총관은 깊은 한숨을 쉬며 속에 든 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후우. 사실 족쇄가 필요했던 건…… 루하흐 가주 때문이었습니다.”
“루하흐 가주?”
“예. 그놈을 막을 최후의 방책이었지요.”
루하흐 가주는 헤르세를 원했다.
욕심을 부린다고 다 제 것이 되던가.
가주가 필릭스이지 않는 이상 헤르세를 손에 쥘 방도는 없었다.
그래서 짜낸 계책.
‘수하로 둬봤자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상단주는 죽이고, 그 딸만 취해 부려 먹자.’
딱 저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그놈의 돈이 뭔지.”
대총관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자칫 혀를 델 수 있는데 그건 염두에 두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나.
데였는지 목구멍을 쓸던 대총관이 뭉툭하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아가씨를 백치로 만들어 꼭두각시로 세우려 하다니.”
“도망친 걸 보면, 그 사실을 상단주가 알아버린 모양이군.”
“예. 그래서 두 달간 꼭꼭 잘 숨어있었는데, 일이 터졌지요.”
“인간 경매 소식을 들었나 보군.”
“모르면 몰랐지, 상단주님께서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올곧은 성정이니 두고 볼 수 없었겠지.”
“그렇습니다. 하여 상단주께선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도망을 친다고 언제까지 루하흐 가주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다르게 옥죄어 오는 포위망.
이러다 잡히면 꼼짝없이 상단주는 죽고, 아가씨는 끌려갈 것이다.
그리되면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실컷 이용만 당할 터.
것도 평생을…….
아이루스가 저지른 악행을 모조리 뒤집어쓴 채로.
비참해질 딸의 생이 눈에 선연하게 그려져서 상단주는 작심을 했다.
‘헤르세와의 맹약을 끊자!’
맹약을 끊는 방법은 간단했다.
헤르세에게 미움만 사면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레드니의 족쇄였다.
정령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마도구.
“하아. 족쇄를 헤르세에게 던져 신의를 저버린 것처럼 꾸미려 하셨습니다.”
“정령의 분노를 사더라도 딸만은 살리고 싶었나 보군.”
“……자식을 살리는데 자신의 목숨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대총관은 빈 찻잔을 돌리며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단주가 내린 결정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족쇄를 훔치려 시도하는 것 외엔.
“그분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는데…….”
“흐음.”
이안은 틈을 뒀다가 스리슬쩍 운을 뗐다.
“그런 각오까지 했다면 차라리, 뷔트시겐 가로 찾아와 도움을 청해볼 것이지.”
“실은 말입니다…….”
대총관이 말끝을 흐렸지만 이안은 재촉하지 않았다.
가진 비밀이 무거울수록 털어놓기 어려운 법.
이럴 때 괜스레 닦달하면 나오던 것도 들어가 버릴 것이다.
조용히 기다려주자, 대총관이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두드렸다.
“이 지경이 됐는데 뭐가 더 무섭겠습니까. 실은 루하흐 가주에게 동맹이 있었습니다.”
“동맹?”
“앙숙처럼 굴어서 다들 감쪽같이 속고 있는데…… 접점 하나 없던 살리카 가주가 일을 돕고 있더군요.”
한번 말문이 터지니 대총관은 쉼 없이 쏟아냈다.
“아니, 처음엔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두 달간 이것저것 따져보니…… 그건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살리카 가주가 루하흐 가주를 교묘히 조종하는 것 같았습니다.”
“흐음.”
“두 가문이 작당했는데 다른 두 가문이라고…….”
“이미 그자들에게 넘어갔나 미심쩍어서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겠군.”
“예. 더군다나 두 가주의 작당이 돈과 직결된다? 그것도 아이루스를 집어삼켜야 할 만큼? 그럼 무엇이 연상되겠습니까.”
“……군자금.”
“예. 저와 상단주님의 생각도 그랬습니다. 반란이라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
“…….”
“사실 황실에 발고할까 고민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증거가 없으면 곤란해지는 건 상단주가 되겠지.”
“맞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막막했는데.”
대총관은 차분한 이안의 모습에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패를 통해 과분한 것을 얻었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 뷔트시겐 도련님을 만나다니. 이런 걸 천운이라고 하지요.”
“천운이란 말은 내가 상단 문제를 해결한 뒤에 듣기로 하지.”
이안의 선한 미소에 대총관은 엄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비취로 만든 그것은 투명해서 안이 훤히 비쳤다.
“이것이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 * *
<신상 무기를 쥐었으면 써먹어 봐야지 않겠어?>
이안은 레브와 올리브를 꼬드겨 밤 나들이를 나갔다.
목적지는 아이루스 상단의 동쪽 창고.
샤삭.
이안은 기민한 몸놀림으로 창고가 훤히 내다보이는 지붕에 올라섰다.
사위가 불빛 하나 없이 깜깜했다.
‘지나치게 조용하군.’
통상적으로 상단의 물품 창고라면 이 시간대가 가장 분주할 수밖에 없다.
물건을 받고 채워 넣고 정리하느라.
한데 분주는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밤의 침묵 속에 잠겨 있을 뿐.
‘저긴 단순한 물품 창고가 아니란 거지.’
눈가를 좁힌 이안은 스산한 창고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눅눅한 악의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에 대응하려는 듯, 날 선 공기가 이안의 주변을 금세 에워쌌다.
함께 온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
레브와 올리브, 그리고 정령 기사단 십여 명.
다들 기합이 바싹 들어가선 창고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루스가 저지른 악행의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차출된 자들답달까.
매서운 기세로 눈알 빠지게 감시하길 수십 여분.
푸근한 낯빛을 한 총단장이 이안 곁으로 바투 붙었다.
“도련님의 첫 임무를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총단장까지 차출된 건 아버지의 뜻이었다.
하나는 인간 경매 같은 짓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안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거였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서도 잘 해내야 하니.
이안은 은근슬쩍 ‘잘 부탁한다.’란 말을 총단장에게 속살거렸다.
인사를 받은 총단장 역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평소의 묵직함을 버리고 가벼운 어조로 응수했다.
가볍게 이어지는 둘의 대화.
그때 불쑥 끼어든 레브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덧댔다.
“후-. 설마 긴장한 거 아니지, 이안. 신상 무기 써먹자고 끌고 온 인간답게 자신감이 있어야지.”
첫 임무에 정작 긴장한 건 저면서 되묻긴.
이안은 피식 웃으며 입매를 당겼다.
“너흴 어떻게 부려 먹을지 궁리는 했어도 긴장은 안 했는데?”
“어련하실까.”
“악당이 등장해야 너희들을 써먹는데, 아직 저쪽은 잠잠하네.”
“곧 움직이겠지. 근데 오늘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레브의 물음대로 날을 정한 건 이안이었다.
오늘이, 납치한 아이들을 수도에 있는 본점으로 옮기는 날이거니와 그리고…….
화르륵.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창고 앞에 횃불이 켜졌다.
하나, 둘, 셋…… 도합 쉰.
간신히 어둑함만 밀어내는 불빛이 앞마당에 줄지었다.
밤을 깨우는 소란에 이안이 하고 있던 생각도 툭 끊겼다.
* * *
또각또각.
양옆으로 선 횃불 무리를 가르며 한 여자가 도도하게 등장했다.
어제 노파를 폭행했던 단주였다.
여자는 상석에 준비된 황금색 의자에 요염하게 앉았다.
다리를 꼬아 허벅지를 드러낸 자세.
그 채로 여자가 발을 까닥거리자 허벅지 안쪽의 뽀얀 살이 감질나게 움직거렸다.
꼴깍.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비소를 날린 여자는 손을 까닥거려 지척에 있는 남자를 불렀다.
남자가 즉각 허리를 굽히자마자였다.
짜아악.
여자는 턱이 돌아갈 정도로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일방적 분풀이였다.
뷔트시겐 도련님인지, 개똥인지 때문에 짜증이 나던 차였으니까.
“병신 같은 눈깔 파 버리기 전에 눈깔 간수 잘하랬지.”
“…….”
“기분 뭣 같으니까 빨리 애들이나 준비해.”
“예.”
남자는 뺨을 쓸던 오른손을 건조하게 들어 올렸다.
그의 신호에, 줄의 맨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꼽추가 손에 든 사슬을 잡아당겼다.
차륵. 차르륵.
기분 나쁜 쇳소리 끝에 달려 나온 건…… 앳된 아이들이었다.
발목에 사슬을 감고 있는 열 살 전후의 소년과 소녀.
여물지 못한 아이들은 공포심에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주저앉을 것 같은 기색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는 코를 틀어막았다.
“어우, 시궁창 냄새. 저것들 꼴이 왜 저래?”
“납치하는 과정에서 겁을 집어먹은 것들이 실수하는 바람에…….”
“좀 씻겨라. 저래서 누가 산다고. 별난 취향의 늙다리들이라도 저 꼴을 보면 다 도망가겠다.”
여자는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였다.
험한 게 주둥이만은 아닌지.
“이것들 너어무 삐쩍 곯았다. 적당히 살집이 있어야 인기가 있지.”
여자는 탁자에 있는 빵을 집어 냅다 바닥에 던졌다.
질척이는 흙과 엉킨 빵은 잔뜩 더러워졌다.
지나가는 개도 안 먹을 그걸 가리키며 여자는 아이들에게 선심 쓰듯 말했다.
“저걸 잡으면 수레에 싣지 않을게. 무슨 말인지 알지?”
‘수레’라는 말에 아이들은 움찔거렸다.
수레.
거기에 실리면 틀림없이 팔려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
정말 무서웠지만, 이상하게도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굼뜨게 미적거리자 여자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X발! 기라고! 안 기어? 빵 잡는 게 그렇게 어려워?”
“사, 살려주세요.”
아이들의 울먹임에 씨근덕대던 여자는 벌떡 일어섰다.
콧김까지 뿜으며 앞쪽으로 돌진하더니, 한 아이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안 팔겠다잖아. 시키는 대로만 하면.”
“흐윽.”
“어차피 팔리면 개처럼 기어야 할 것들이,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여자는 아이의 얼굴을 빵이 있는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것으로 모자라 머리통을 마구 흔들며 짓이겼다.
아이가 버둥거리는데도 그런 것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았다.
“…….”
여자의 패악에 결국, 서로를 부여잡고 있던 아이들이 반응했다.
어쩔 수 없이 쭈뼛쭈뼛 빵으로 손을 뻗은 그 순간.
“깔깔깔.”
여자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토해냈다.
눈살 찌푸려지는 광경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이안은 명령을 내렸다.
평소보다 그의 음색이 분노로 한층 낮은 상태였다.
“살펴둘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 다 죽여. 증인이 될 윗대가리만 빼곤.”
“명 받들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 여잔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고.”
이안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기사단이 상단 창고로 쇄도했다.
분기탱천한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