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정령 기사단이 출격한 즉시.
올리브도 상단 놈들을 응징하기 위해 건틀릿을 정비했다.
화가 많이 난 손길이었다.
납치된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제 동생들이 생각난 모양이다.
‘여전하네.’
올리브는 지난 생에도 그랬다.
앳된 소년병들만 보면 동생에게 하듯 그들을 챙겼었다.
별별 잔소리를 부록으로 달고선 갖은 오지랖을 수시로 부려댔었다.
‘형 노릇을 톡톡히 했었지.’
그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녀석이 뱉은 말의 알맹이만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이안, 나 잘 보고 있어. 이 형아가 다 처리한다.”
“믿습니다, 형님.”
“좋아! 다 죽었어! 할 짓이 없어 어린애들을 납치해?”
올리브는 창고 앞으로 폴짝 뛰어내리며 건틀릿을 찬 오른팔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콰괏.
꿀렁거린 땅이, 날다람쥐가 익막을 펼치듯 인상 더러운 남자를 둘둘 감쌌다.
그 즉시.
“……!!”
흙더미에 휘감긴 남자가 으깬 감자처럼 터져버렸다.
어떤 비명도,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침묵만이 존재했다.
‘대지의 노래.’
이안은 지붕 위에서 올리브의 기술을 유심히 관찰했다.
발리올 최고의 폭사기.
소리 없이 수백 명을 폭사시키기에 침묵의 살인자란 악명을 달고 있는 기술이다.
살벌하기 그지없으나, 이는 발리올의 특질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술이기도 했다.
‘2성에 벌써 저렇게 깔끔히 구현하다니.’
땅 울림만 빼면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올리브는 기사단 틈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공격만 잘했으랴.
“막아! 뷔트시겐 새끼들을 막으라곳!”
상단의 호위들이 기사단에게 퍼붓는 물의 창을 족족 막아냈다.
건틀릿을 통해 정밀하게 구현된 대지의 방패를 활용해서 말이다.
치이이익.
거기다 때로는 기사단 머리 위에 방패를 씌워, 염산 성질을 띤 빗줄기를 막아냈다.
덕분에 기사단의 공격이 조금 더 수월해졌다.
‘다른 기술도 능숙하게 잘 쓰네.’
이안은 한동안 올리브의 움직임만 쫓았다.
재빠르고 신속한 것이 녀석의 정령인 날다람쥐를 쏙 빼닮았다.
날랜 몸놀림에, 이안의 입가에 머금어진 옅은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레브, 보이냐? 올리브 날아다닌다.”
“애들 구한다고 신났네, 아주.”
올리브를 보면서도 이안과 레브는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빠져나갈 미꾸라지를 잡아내야 했으니까.
적들의 동선을 면밀하게 살피던 와중, 둘은 동시에 고개를 틀었다.
끼기긱.
불빛 하나 없는 창고 끄트머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 하나.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그 미친년이었다.
“이안, 저 여자가 안다는 거지? 실종된 상단주가 어딨는지.”
“어. 그래서 빠져나가도록 두려고.”
“며칠 전에 대총관과 헤어지면서 상단주가 은신 장소를 바꿨다던데. 저 여자는 어떻게 아는 거지?”
“확실한 정보통이 주변에 있으니까.”
“하긴. 그렇네. 그자라면 확실히. 그나저나 대단하다. 상단이 털린 마당에 도망이 아니라 상단주를 쫓아 그 딸을 제 상관한테 바칠 생각부터 하다니.”
“그래야 질책을 면할 테니까.”
“그 덕에 우리는 좋은 기회를 얻었고.”
“일단 따라가자, 레브.”
이안은 레브와 함께 여자의 뒤를 은밀하게 밟았다.
상단을 덮치는 날이 ‘오늘’이어야만 하는 이유.
바로 내일, 상단주의 시체가 난자당한 채 크라바나스 초입에 버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리가 났었지.’
샤삭. 샤사삭.
이안은 소싯적 대도가 꿈이었나 싶게 지붕에서 지붕으로 잘만 타 넘었다.
빽빽하던 지붕의 간격이 점차 넓어졌을 무렵.
건물은 없고 나무만 우거진 길목으로 여자가 들어섰다.
슈바츠 초입.
‘역시 크라바나스로 가는군.’
이안은 제법 가까워진 설산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얀 까마귀가 날갯짓하는 것 같은 모양새.
뷔트시겐의 관문이며 자랑 중 하나였던 저 설산은 얼마 안 가 불명예의 상징이 된다.
납치한 아이들을 실어나를 때 사용된 장소라는 게 알려지면서.
‘아버지가 이 일을 해결했을 땐, 이미 명예가 실추된 후였지.’
아버지에게 잊을 수 없는 회한이 된 사건.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우선 상단주부터 구해야지 않겠는가.
이안은 놓칠 듯 말 듯 한 거리를 교묘하게 유지하며 여자를 추적했다.
원체 산세가 험해선지 간격 유지가 쉽지는 않았다.
반면.
여자는 이 설산에 사는 설인마냥 거침없이 나아갔다.
한두 번 와본 솜씨는 아니란 거였다.
날랜 여자의 몸놀림에 레브가 코트 깃을 여미며 속닥거렸다.
“이 크라바나스에 40년은 산, 산지기 같다.”
“그러게. 노련한 사냥꾼들조차 길을 수시로 잃을 만큼 넓고 복잡한 곳인데.”
“그나저나 대체 저 여자, 어디까지 가는 거야?”
“글쎄. 중턱까진 온 것 같은데…….”
때때로 속닥거리며 둘은 크라바나스를 횡단했다.
한동안 쭉 직진하다가 작은 동굴도 여러 개 지나쳤다.
이후 낭떠러지를 위험천만하게 통과해 위로 가는 듯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또 동굴을 지나고…….
거의 한 시간을 더 헤맨 끝에 여자가 몸을 숙여 어딘가로 들어갔다.
건장한 체격이라면 들어가지 못할 작은 구멍.
“여긴가 보다. 들어가자.”
"이안, 들어가면 내가 단주를 맡을게."
이안과 레브는 눈짓을 주고받은 뒤 몸을 구겨 넣었다.
* * *
동굴 안으로 들어간 즉시 마주한 광경.
“…….”
여자는 오만하게 서 있었고, 실종된 상단주는 경악하고 있었다.
은신처에 적이 들이닥쳤으니 그럴 수밖에.
냉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깨칠 것처럼 팽팽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놀란 건지.
날카로운 분위기에 놀란 건지.
“끄으윽.”
상단주의 딸, 그러니까 열 살 남짓한 작은아이가 경련을 일으켰다.
“필릭스 아가씨!”
그러자마자 아이 곁에 있던 중년 남자가 품에서 다급하게 유리병을 꺼냈다.
밑바닥을 드러낸 빨간 액체가 담긴 병.
그 뚜껑을 열고서 남자가 얼른 아이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어서 드십시오, 아가씨. 드시고 정신 차리셔야지요.”
“커. 커흑. 컥.”
아이의 과호흡에 남자의 손이 조급하게 기울어 가던 찰나.
상황을 주시하던 이안이 순간 이동하듯 움직였다.
서걱.
그와 동시에 남자의 오른손이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크아아아아앗!”
사람 손을 잘라버린 것 치곤 평온한 이안.
데구루루 구르는 유리병.
매끄럽게 굴러가던 병은 누군가의 발치에 막혀 멈췄다.
해를 끼치지 않는 물건임에도, 상단주의 발끝이 일순 튀어 올랐다.
“……이리될 운명이었던 건가.”
루하흐 가주의 편인 단주, 그녀와 함께 나타난 뷔트시겐의 적자.
이만으로도 상단주는 상황 파악을 명확하게 끝낼 수 있었다.
아, 뷔트시겐도 두 가주와 한편이구나.
선뜩한 깨달음은 이내 깊은 절망감으로 치환되었다.
“결국, 모두 다 한통속…….”
상단주는 한정 없이 떨리는 손을 뻗어 딸의 손을 움켜쥐었다.
핏줄이 불뚝거릴 만큼의 악력.
그 억셈으로 이안은 상단주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딸을 향한 그의 절절한 애틋함을.
“그리 나쁜 놈 보듯 하지 마십시오. 내 눈먼 칼이라도 아무나 자르진 않으니.”
“……아무나. 도련님껜 가치 없는 자일지 몰라도 제겐 목숨 같은 벗입니다.”
“그렇다면 그대 목숨값 한번 참 싸군요. 저런 자가 목숨과 같다니.”
“20년 지기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입씨름을 더 해봐야 뭐하겠습니까. 이미 눈과 귀가 막혀버린 것을.”
“…….”
“열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증명이 더 확실한 효과가 있을 터.”
이안은 오른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걸음걸음마다 냉기가 짙게 깔렸다.
‘이번엔 또 부총관에게 뭘 하려고.’
절망감, 두려움, 공포심.
끈적한 감정들이 혼재하는 중에도 상단주는 막아야겠단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해서 천근만근인 몸뚱어리를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상단주가 다가오자, 이안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성급함은 상인에게 최악의 덕목이지요. 내가 증명해 보인다 하지 않았습니까.”
단호히 선을 그은 후.
이안은 유리병을 남자, 아니 부총관에게 들이밀었다.
“흡!”
놀란 부총관이 코를 막으며 몸을 한껏 뒤틀었다.
얼결에 잘린 손으로 바닥을 짚다가 새된 비명을 토해냈지만.
“치워! 그거 치우라고!”
“이게 뭐라고 참 유난이네.”
“내 앞에서 당장 치우라고!”
누가 어떤 설명을 하지 않아도 상황이 요상했다.
“어찌 그러나, 부총관. 딸의 치료제를 갖고…….”
“그딴 더러운 걸 나한테…….”
부총관의 격한 반응에 상단주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치료제라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으니까.
“설마 자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상단주님을 모신 기간만 스무 해가 넘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
“평생 충심을 다한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되레 윽박지르는 부총관의 모습에 상단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이 루하흐 가주에게 쫓기는 이 순간까지도 함께 해준 자였다.
그러니 배신을 할 리가.
“그렇지. 자네가 그럴 리 없지. 내가 공연히…….”
어딜!
이안은 흐름을 끊어내듯 상단주에게 강경히 얘기했다.
“아이루스 상단주, 인정에도 눈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삿된 호소에 눈멀면 필히 후회하게 되겠지요.”
“하나 곁에 있는 자를 믿지 못하면 훗날, 더 큰 후회를 남기지 않겠습니까.”
“그게 배신자라도?”
“…….”
상단주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려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이안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상단주, 하나 묻겠습니다. 그대 딸의 상태가 본래부터 저랬습니까.”
“그렇진 않았습니다.”
“하면?”
“보름 전 은신처를 옮기는 도중 다리를 다친 적이 있습니다. 뼈가 부러져 자칫 못 걷게 될 뻔했으나…….”
상단주의 허물어진 시선이 부총관에게 머물렀다.
말꼬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감지한 이안은 밀어붙였다.
“저자가 치료제를 가져왔겠군요.”
“예.”
“치료제를 먹고 다리가 말끔히 나았을 겁니다. 대신 멍해지는 증상이 생겼을 테고. 아마 시간이 갈수록 그 증상은 더욱 심해졌을 테지요.”
“…….”
상단주는 입술을 악다물며 말을 아꼈다.
20년 지기의 배신을 심장이,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눈빛.
대신 마음을 정리해주려고 이안은 코트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충심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을 내게 준 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뷔트시겐의 담을 넘었습니다.”
“이건……? 대총관이…… 살아있습니까?”
“설마 내가 시체를 뒤져 이것을 가져왔겠습니까.”
비취반지를 건네받은 상단주는 옅은 달빛에 반지를 비춰보았다.
φίλος(친우.)
헤르세 꽃잎에 음각된 ‘친우’란 글자.
틀림없이 대총관의 것이었다.
“흠. 그의 것이 맞긴 하나…….”
상단주는 반지를 더 기울여 달빛이 직선으로 통과하도록 했다.
그러자 친우란 글자가 빛 가루를 품은 양 반짝거렸다.
이는 대총관이 살아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만약 그의 목숨이 끊어졌다면 글자가 검게 변색 되었을 테니까.
상단주에게서 의심이 걷히자, 이안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배신자를 이대로 내버려 둘 겁니까?”
“그대로 둘 순 없지요.”
“그럼 내가 제안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이라면?”
“배신자도 처벌하고 그대의 딸도 구할 방도가 있는데…….”
이안은 다음을 맡긴다는 듯 레브를 쳐다보았다.
루하흐의 직계인 녀석을 대동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