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46화 (46/214)

제46화

아이루스 상단주를 구출한 직후.

대회의장에 모인 장로들은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살리카와 루하흐가 생사고락을 함께할 만큼 친밀한지 아셨소들?”

“아는 게 더 이상하지. 두 가주가 앙숙인 것을 제국 내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데.”

“그러니 두 가문이 전쟁을 준비 중인 것도 몰랐던 게 아니오.”

“이리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허어어어.”

“한숨 좀 그만 쉬고 생각을 말해보시오. 앞으로 뷔트시겐이 어찌해야 할지.”

“일단 증거를 모아야지 않겠습니까.”

“이미 증거라면 확보되지 않았소. 아이루스 상단주가 증인이니 말이오.”

“맞소. 그를 내세워 화근의 싹은 초기에 자르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5장로의 말에 한 표 던지겠네. 이대로 뒀다간 뷔트시겐에도 화가 미칠 걸세.”

“자칫 섣불리 들쑤셨다간…….”

두 개로 갈린 의견은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안은 흐뭇해했다.

뷔트시겐의 저력을 재차 확인했으니까.

각자 파벌이 있고 알력 다툼은 있을지언정, 그게 일족을 위한 회의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개인의 이득이 전체의 강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는 것이리라.

‘저들이 있어 전쟁을 8년이나 끌 수 있었지.’

이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1장로님의 고견을 듣고 싶소이다.”

“흠.”

내내 장로들의 얘기를 경청하고만 있던 1장로가 허연 수염을 쓸어내렸다.

생각에 잠긴 손길.

고심하다가, 1장로는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가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가주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장로들에게 깊숙이 관여하는 대신 관찰자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단의 문제를 해결한 이안에 대해 추켜세우지도 않았고.

‘감싸고 돈단 분란을 만들지 않으려는 거군.’

가주의 의중이 그렇다면…….

1장로는 수염 끝을 살살 비비며 이안을 응시했다.

“내가 발언하기에 앞서 도련님의 생각을 먼저 듣고 싶소이다. 혹 의견이 있으십니까?”

“아.”

“이번 사태를 해결한 공이 크지 않습니까. 하니 발언한다 해도 누구 하나 트집 잡지 않을 겝니다.”

“1장로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이안을 주목했다.

“증인으로 거론된 상단주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뜨거운 감자?”

“예. 두 가문의 죄를 입증할 증인임과 동시에 뷔트시겐을 옥죌 족쇄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는 겝니까?”

“상단주 외엔 딱히 어떤 증인도 없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납치된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무슨 증거가 될까.

냉정하게 말해 누군가가 가난에 팔아넘긴 아이들이었다.

물론 납치당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 문제가 없는 이들을 추렸겠지.

이쯤 되면 아이의 부모를 찾아도 부모는 거짓말을 할 것이다.

아이를 버린 자신의 죄를 덮으려.

“그리되면 돈에 눈이 먼 상단주가 악행을 저질렀다며, 저들은 이를 빌미로 역습을 감행할 겁니다.”

“…….”

“뿐이겠습니까. 상단주를 감싼 뷔트시겐까지 싸잡겠지요.”

“그래서 뜨거운 감자란 게로군요. 맛은 있으나 꿀떡 삼킬 수 없으니.”

“예. 솔직히 상단주 외엔 뚜렷한 물증도 없는 상태지 않습니까. 그러니 살리카나 루하흐에 대해 까발리는 것은 뒤로 미뤄야 합니다. 누구도 반박 못 할 증거가 생길 때까지.”

1장로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뒤따라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까닥거렸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아니지.

여기 모인 어떤 이들보다 논리정연했다.

대개가 흡족해하는 가운데, 5장로가 마뜩찮단 심기를 드러냈다.

“너무 무른 처사 아닙니까. 임무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2장로님께서 통탄할 처사입니다.”

불퉁한 5장로를 이안은 빤히 쳐다보았다.

2장로와 함께 다른 아이를 후계자로 내세운 자였다.

즉, 언제든 어느 때든 고깝다고 딴죽을 걸어올 수 있는 상대란 얘기다.

‘내가 어쩌나 보려는 심산인 것 같은데.’

그런 심사를 가진 게 과연 5장로뿐일까.

그를 비롯해 2장로파 전부가 비슷한 양상을 내보이고 있었다.

어떤 대답을 내놓을 거지?

시험하는 것 같은 눈빛에 이안은 한쪽 입귀를 말아 올렸다.

어떤 의도를 가졌건 나쁘지 않았다.

후계자를 정하는 건 가주의 권한이라도, 저들의 인정 없이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 테니까.

기꺼이 시험에 응한 이안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무른 처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뷔트시겐으로선 손해 볼 게 없으니까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헤르세 때문이라도 지속적으로 위협받을 상단주의 호위를 뷔트시겐이 맡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상단의 본점부터 분점까지 호위를 깔게 되면,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게 될 겁니다.”

“오호?”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1장로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1장로님께선 짐작하신 듯싶군요. 제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호위를 명분 삼아 그들을 ‘세작화’한다, 라.”

“예. 세작 한 명을 키우기 위해선 엄청난 공이 들어간다는 걸 아실 겁니다.”

“알다마다요.”

“공을 들여도 잠입에 실패해 본전도 못 찾는데, 이리되면 무혈입성이지 않습니까.”

“허허. 그들을 육성하는 비용이 줄면, 내실을 다지는데 쓸 수 있다는 게군요.”

“맞습니다. 거기다 그들이 보내올 정보의 양을 생각하면 뭐.”

“제국에 퍼진 에루리안 상단의 수만큼일 터.”

1장로는 허연 수염을 쓸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기실, 무식한 2장로는 가주의 조건이 힘뿐이라고 여기지만 과연 그럴까.

가주란 건 일족을 과거에서 현재로, 또한 후대로 잇는 자이다.

곧 힘보다 지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인즉.

하여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를 가주로 추대하고 싶었다.

‘저번 축하연회 때도 그렇고 제법이군, 제법이야.’

이안은 머리와 힘을 모두 갖춘 자였다.

그가 원하는 조건에 알맞게 부합하는 인물.

재차 ‘껄껄껄’ 웃은 1장로는 흐뭇해하는 가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주께선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시겠소.”

“하하핫. 잘난 아들을 둔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가주님과 1장로님의 말 대로입니다. 도련님 같은 분이 뷔트시겐의 후계자라니, 일족의 홍복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맞소. 일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소. ‘우리 도련님’의 자질을 진즉에 알아봤다고.”

“허허. 먼저 알아본 건 날세. 2장로가 트집을 잡을 때도 도련님 편을 드는 걸 자네도 보지 않았나?”

“보지는 못했네만 내가 한 말은 기억하네. 책을 많이 읽어 영민하신 분이니 마력핵이 없어도 자질이 충분하다고 했지, 아마?”

서로 앞다퉈 이안의 얼굴에 금칠했다.

호의를 내보이는데, 그렇지 않았던 과거가 무슨 상관이랴.

금칠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설령 낯부끄러워지는 금칠이라도 말이다.

설핏 웃은 이안은 ‘더한 공치사도 환영’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이런 화기애애한 금칠 따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콰아앙.

거친 파열음과 함께 누군가가 대회의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

“2장로님!”

5장로가 비명에 가깝게 불러 젖혔다.

누가 보면 2장로가 5년 만에 집으로 귀환할 줄 알 거다.

저렇게 꼬리 치며 격하게 반기는 걸 보면.

심히 반색하는 5장로 무리를 일별한 채 2장로는 어딘가로 직진했다.

회의장 왼편, 이안이 있는 곳으로.

냉랭한 기세로 돌진한 2장로의 희번덕임에도 이안은 굴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인가 봅니다.”

“제가 좀 늦었소이다. 가주께서 나를 어찌나 신임하시는지 장. 기. 임무만 주어서 말이외다.”

“그게 다 아버지의 신임이 두터우니 그런 게지요.”

“신임? 신임을 받는 건 나인데, 일을 도모하는 건 1장로와 하더이다.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합니까, 아이루스 상단의 일을 깔끔하게 해결하신 도련님께선.”

단조로운 어투임에도 2장로의 말에는 가시가 그득했다.

이안과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 가주가 장기 임무를 보낸 것을 그가 모를까.

알기에, 괜스레 삐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데 내가 뺑이치는 사이 너희들은 붙어먹었더라?’

요런 눈빛에도 이안의 둥그런 눈매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미소 천사였다.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이번에도 이안은 유들유들하게 입을 놀렸다.

“그나저나 2장로님, 제게 투정하러 오신 겁니까. 임무 기간이 길다고.”

“하, 투정이라니요. 새파란 애송이에게 무슨.”

“하하핫.”

“어찌 웃으시는 게요.”

“2장로님 말을 들으니 제가 성공한 것 같아서 그럽니다.”

“성공?”

“예전엔 반푼이라 불렸는데 애송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허허. 도련님은 말입니다. 참으로 혓바닥이 깁니다.”

칭찬 같은 욕이었다.

지그시 보는 2장로의 눈길이 한겨울의 바람만큼 시렸다.

혓바닥을 잘라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그걸 위해 수련이라도 하는 모양입니다. 잔머리 굴리는 수련을.”

“잔머리만 잘 굴러가선 살아남을 수 있나요. 내 앞에서 사자가 제 뼈를 발라버릴까 말까 재고 있는데.”

“먹잇감밖에 못 된다는 건, 능력이 ‘겨우’ 그 정도라는 거겠지요.”

“아니지요. 이미 재고 있는 시점에선 누가 ‘포식자’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흥.”

2장로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더 입씨름해봐야.”

애송이와 힘겨루기나 하러 온 게 아니라는 듯 타앙-.

칼자루부터 검신과 칼날 끝까지 새까만 검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테, 텔로스?!”

5장로 무리가 경악하든 말든.

“내가 장로라 무척 바쁘외다. 단지 두 달 전, 내기의 값을 치르러 왔을 뿐.”

2장로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안을 직시했다.

<내 ‘텔로스’를 보상으로 내놓겠소이다. 도련님께서 괄목할만한 성취를 이뤄낸다면.>

솔직히 이안은 꽤 놀랐다.

가문의 기물이라 쉬이 넘기지 않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내가 안 줄줄 알았소이까.”

“솔직히 말할까요, 입바른 소리를 할까요.”

“듣지 않아도 알 만하외다. 이제 보니 나만 도련님을 밉본 게 아니라, 도련님도 그런 것 같소이다.”

“이제 아셨습니까.”

“크흠. 설혹 달갑지 않다 해도 약속한 걸 없는 셈 치지는 않습니다.”

2장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안에게 텔로스를 떠안겼다.

그런 뒤 미련한 톨 없다는 양 쌩하니 뒤돌아섰다.

‘나는 이것을 주는 것 외에 너한테 관심 없다.’

어깃장 부리는 모양새가 흡사 관심 있는 애를 두고 튕기는 일곱 살짜리 같달까.

그러면서도 2장로는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 두고 보겠소이다. 혓바닥만 긴 인간이 될지, 텔로스에 걸맞은 자가 될지.”

할 말을 마치고는 가주에게만 묵례한 뒤 곧장 떠나버렸다.

바람까지 휘감은 발놀림은 시각으로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재빨랐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다.

2장로가 귀여워서 피식 웃는 이안에게 다른 장로들이 득달같이 모여들었다.

“도련님, 텔로스를 한 번만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마음껏.”

이안이 허락하자 다들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텔로스를 살폈다.

“오오. 밤을 닮은 이 검신.”

“황실에서 중히 여기던 아티팩트라더니 품격이 남다릅니다.”

“하여 2장로님께서 본인 외엔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검이지 않습니까.”

“나는 이걸 정말로 도련님께 줄 줄은 몰랐소이다. 아직 페이라조인 분에게.”

“페이라조? 페이라조인 게 대체 무슨 문제요!”

“의외라는 거지요. 왜 난데없이 발끈하고 그러시오? 바람피우다 걸린 인사 마냥.”

“내가 언제.”

“자자. 싸우지들 마시오. 도련님을 축하해줘야 할 이 좋은 날.”

“커흠. 도련님, 감축드립니다.”

“기물을 얻으신 것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헌헌한 도련님과 텔로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본디부터 도련님이 주인이었던 것인 양.”

2장로가 출몰하며 끊겼던 금칠은 텔로스로 인해 다시금 탄력을 받았다.

그리하여 몸을 배배 꼬게 되는 낯부끄러운 금칠이 2차전을 맞이했다.

아침나절 질리도록.

***

금칠을 받았으면 그만한 값을 해야 하는 법.

이안은 대회의장에서 지하 감옥으로 행차 장소를 바꿨다.

톡톡.

감옥에 도착한 즉시, 그는 다리를 꼰 채로 턱을 괴고선 작은 수정구를 두드렸다.

그러다 널브러진 젊은 여자를 찬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을 납치한 주동자이자 아이루스 상단의 단주였던 자.

“…….”

여자는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 탓인지 인중과 입가에 콧물이 줄줄 흘러도 닦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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